136화 할리우드 (3)
“미친놈들. 잘했다고 칭찬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갑자기 또 백승결을 불러오라는 거야?”
투자자들과의 미팅이 끝나자마자 두통약부터 찾은 윤 감독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탄식했다.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들은 직원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이제 어떡하죠?”
직원의 목소리에서 근심이 뚝뚝 떨어졌다.
그를 바라보던 윤 감독이 푹 한숨을 내쉬며 으쓱거린다.
“뭘 어떡해. 백승결 데려오라잖아.”
“올리가··· 없지 않나요?”
그딴 취급을 받았는데.
라는 말이 귓가에 아른거리는 건 착각일까.
현실을 다시 직시한 윤 감독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안 오면 안 돼! 저 변덕쟁이 새끼들 투자금을 늘리긴커녕 이제 와 딴소리하면서 오히려 줄일지도 모른다고!”
그의 머릿속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그래야 우리도 투자를 더 하든 말든 결정을 하지. 회사에서도 윤 감독한테 이렇게 투자하는 거에 불만의 목소리가 은근 들려와요.’
이 소리가 투자를 원한다면 백승결을 다시 데려와라. 아니면 네 자리도 위태로워질 수 있어.
···라고 들리는 게 결코 피해망상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이미 콘티까지 다 나온 마당에 투자 상황에 변동이 생기는 건······.
‘진짜 뭐 되는 길이지.’
미치겠다.
제작자가 별로라고 해서 공들인 영상을 삭제하다 못해 하드까지 불에 태워버렸는데.
뒤늦게 ‘그게 더 좋았던 거 같은데···.’라며 원상복구하란다.
마지막에 그렇게 꼽을 줬는데 어떻게 데려올 수 있을까.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진 윤 감독이 한참 끝에 힘없이 말했다.
“전화해 봐야지···.”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 납작 엎드리자. 빌자.
어차피 한 번 쪽팔렸던 거, 두 번은 못 팔리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는 걸일 없을 줄 알았던 하람의 김성운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 윤 감독이 하하 웃으며 반응했다.
“아, 예 팀장님.”
—윤 감독님이 어쩐 일로?
“이번에 잘 해결되신 거 축하드린다고 얘기하려고 전화드렸죠. 백 배우님한테도 정말 다행이라고, 멀리서나마 응원했다고 얘길 좀······.”
—바꿔드릴게요.
“예?”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벙찐 윤 감독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백승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감독님.
윤 감독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김성운보단 이쪽이 더 만만했다. 게다가 부모 빚까지 굳이 다 갚은 걸 보면······.
‘호구.’
문득 그 단어가 떠오른 윤 감독이 새로운 희망을 느끼며 사람 좋은 척 웃었다.
“하하하, 백 배우님. 안 그래도 꼭 한 번 통화를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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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어처구니 없어하는 김성운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피식 웃으며 핸드폰 너머, 윤 감독의 말을 경청했다.
—저희가 오해를 좀 했었나 봅니다. 아시잖아요. 투자자들이 겁이 엄청 많은 거. 전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는데, 아주 가차 없더라고요.
“······.”
축하한다며 전화를 한 양반이 어째선지 변명을 하고 있다.
아무런 대답 않고 계속 듣고만 있자, 민망하게 웃던 윤 감독이 슬쩍 물어왔다.
—혹시 차기작은 어떻게··· 정해졌나요?
“할리우드 쪽하고 아직 얘기 중이에요. 감독님이 조언해주신 대로.”
할리우드 쪽은 상대적으로 국내 논란에 덜 예민하지 않겠냐며 비꼬던 그의 말을 돌려주자 윤 감독이 당황한다.
—아······ 그, 그때 내가 헛소리를 했네요. 하하. 예전부터 느낀 건데, 내가 이런 쪽으로 참 감이 안 좋아요.
“그런가요?”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배우들한테 작품 추천 잘 안 하려고 그럽니다, 하하하······. 그러면 배우님.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저희 작품 마음에 들어 했었으니까··· 다시 한번 저희랑도 이야길 이어가 보는 게 어떠세요?
“‘범죄인도자’··· 작품 마음에 들었죠. 작품 좋죠.”
—하하, 그렇죠. 제가 이 각본 구하느라 엄청 고생을···.
“작품은 좋았는데, 이렇게 되어서 아쉽네요.”
툭 내뱉은 말.
어느 정도 답변이 담겨 있는 거절에 잠시 끊겼던 윤 감독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져 이어진다.
—지난번 미팅 때 기분이 상했다면 만나 뵙고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제가 이번 작품을 꼭 성공시켜야 해서 너무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요.
“네. 꼭 성공하셨으면 좋겠네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가 같이 성공시키면······.
“글쎄요. 제가 언제 또 잡음이 터질지도 모르잖아요. 그때 가서 또 왜 오셨어요? 이러시면 팀장님이 아니라 저라도 못 참지 않겠어요?”
—어···어···.
“그러니, 각자 정한 길로 열심히 달려보죠.”
단호하게 내뱉고서 전화를 끊으려다가 다시 윤 감독을 불렀다.
“아, 감독님.”
—네, 네.
“제가 감이 좋습니다.”
당신과는 다르게 말이지.
—네? 그게 무슨······.
“그동안 성공한 작품들은 하나같이 전부 감이 좋았거든요.”
여태까진 내 분을 푼다기보단, 지난 미팅 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로 내게 미안해했던 김성운에 대한 복수 정도였는데.
이건 좀 화가 난다. 혀끝이 썼다.
“이 작품도 그랬는데······.”
좋은 작품 하나가 빛을 잃어버린 느낌이라.
윤 감독이 그, 그러면! 이라며 뭔가를 말하려길래 칼같이 잘라냈다.
“근데, 지금은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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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고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마지막에 윤 감독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더는 작품이 끌리지 않았다.
분명 대본만으로는 마음에 들었는데.
들다 못해 하고 싶었는데.
감독을 보니 그 마음이 싹 달아난다.
그동안은 어땠냐고?
돌이켜보면 난 운이 좋아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PD, 감독들만 만나왔다.
즉, 내가 그동안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이 대본만이 아니었던 거지.
연출가의 전작을 통해서, 혹은 내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계속 나는 작품의 미래를 평가했다.
그리고 그 평가는 꽤 정확했지.
‘이번에도 그럴 거고.’
범죄인도자는 분명 좋은 작품··· 아니, 대본이지만.
투자자들에게 휘둘리는 윤 감독이 대본이라고 소신 있게 연출할까?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작품이 끌리지 않았다.
스스로의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시선을 돌렸다.
김성운이 십 년 묵은 체증이 날아간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잘했어.”
“그래도 감독인데, 너무 세게 나갔어요?”
“전장 같은 이 바닥에 그런 게 어딨어. 만약에 네가 약한 모습 보였으면 내가 전화 뺏어서 난리 쳤을 거야.”
으르렁거리는 김성운을 보며 내가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미팅룸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현태 형과 김주철이 오디션을 위한 카메라 세팅 중이었다.
오늘 나의 전장은 여기였다.
자리에 앉아 오디션을 기다리는데 김성운이 내심 걱정스러웠는지 덧붙인다.
“할리우드 쪽에선 어떻게 반응할지 감이 안 오네.”
“이번 일 때문에요?”
“응. 뭐, 그래도 어느 정도 다 해결됐고, 수습 중이니까. 그렇게 말하면 별문젠 없겠지. 만약에 크리스 감독이 언급하면 이렇게 얘기해.”
그러나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
혹은 윤 감독이 예언했던 것처럼.
—자, 오랜만입니다. 시간 없으니 대본 리딩부터 시작하죠.
크리스 감독은 나한테 있었던 이슈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차갑고, 딱딱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미팅을 시작한다.
—다음 페이지도 한 번 보죠.
—이건 대본에 없는 건데, 만약에 당신이 맡은 캐릭터가 술집에 혼자 술을 마시러 들어갔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러면···.
—혹시 괜찮다면 카메라에서 좀 멀찍이 서서 연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이런 제스처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런 그의 날카로움도 유일하게 무뎌지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작품에 이야기할 때.
목소리 톤이 한층 올라가고, 말이 빨라진다.
눈은 초롱초롱하고 의욕이 화면을 뚫고 전해진다.
방금 전 통화했던 윤 감독과는 전혀 다른 에너지.
그리고 오디션이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온다.
—좋네요. 오늘도 오디션에 성실히 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미건조한 칭찬.
“감사합니다.”
그쪽에서 나를 판단하는 오디션이었지만.
나도 그를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이 감독에겐 아직까지 문제점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를 보면 더더욱 끌린다.
다만······.
아무래도 이 작품은 불안한 점이 많았다.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제작비 빵빵한 대작이지만, 그런 건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었다.
문제는 내가 대본을 전부 보지 못했다는 것.
그야말로 일일드라마와 같은 쪽대본이다.
초반부 내용과 나의 등장, 그리고 약간의 상황이 전부인.
느낌상 4분의 1도 안 되는 양 같았다.
물론 그 1에 해당하는 내용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내용이 개판을 쳐도 괜찮을 만큼은 아니지.
장르를 불문하고 초반부야 셰익스피어처럼 쓸 수 있는 작가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겠어.
초반부만으론 영화의 완성도를 엿볼 수 없다. 성패는 더더욱.
그러니 이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망설여질 수밖에······.
답답함에 대본을 더 볼 순 없는지 물어보려는데, 때마침 크리스 감독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길 좀 해보죠.
“···?”
—다음 오디션은 LA에서 볼 수 있을까요?
#
며칠 후.
스케줄 조율을 마치고서, 미국으로 출국할 날짜가 잡혔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돌아오는 비행기 티켓이 없었다.
오디션이 7차까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5차 오디션이 끝났으니 미국에서 6차.
결과가 좋다면 앞으로 마지막인 7차까지 보게 될 터였다.
그러니 아예 미국에 체류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일도 많았으니 푹 쉬면서 바빠서 하지 못했던 해외 일정을 소화하기로 한 것이다.
중간 중간 해외 팬들을 만날 자리도 마련할 예정이라고.
‘드디어 나머지 대본을 모두 볼 수 있게 되는 건가?’
살짝 들떴다. 그리고 약간의 후련함과 안도도 있었다.
하람이 움직여 상황이 빠르게 정리되고 있지만, 내 마음이 추슬러지는 것은 아직이었다.
일이 벌어졌을 땐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마무리되고 난 직후엔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러다 심해지면 공황장애가 오는 거구나 싶을 정도였다.
지금은 다시 괜찮아졌지만, 어쨌든.
그래서 이렇게 미국에 잠시 나가 있는 상황이 꽤 반가웠다.
일이 생겼던 곳에서 잠시 떨어져 작품 준비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슬슬 짐도 싸야겠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일들이 많은 감정을 만들었다.
그렇게 쌓인 감정이 산더미 같았다.
‘이걸 모두 어떻게 연소시킬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사실 고민이랄 게 없었다.
격투가는 링 위에 올라서고.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연주자는 연주를 한다.
그리고 배우는······.
연기(演技).
나는 지금 그게 하고 싶다.
지금 쌓인 이 감정들을 연료 삼아.
모두 연기로 소화해내고 싶었다.
‘얼른······.’
물이 부족하면 목에 갈증이 생기는 것처럼.
내 영혼에도 갈증이 돋아나는 것 같다.
내가 좀 전에 ‘짧은 시간’이라고 했었나?
아니다. 너무 오래 쉬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