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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37화 (137/167)

137화 할리우드 (4)

하람 사옥 근처에 고급 한식집에 도착했다.

안내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미닫이문을 여러 번 지나 안쪽 룸에 들어왔다.

그곳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내가 들어올 때와는 다른, 반대편 미닫이문이 열렸다.

하선경 대표가 빙그레 웃으며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아, 일어나지 말아요. 무슨 어르신 된 기분이야.”

손을 휘적거리며 털털하게 자리에 앉는 그녀.

미국에 가기 전, 밥 한 번 함께 하고 싶다며 만들어진 자리였다.

대표와의 독대. 심지어 식사 자리.

사실 굉장히 불편한 자리일 수도 있겠지만, 아주 어렸을 때 봤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편했다.

이윽고 하선경 대표가 이 집의 히든 메뉴라며 자랑한 삼계탕이 나왔다.

작은 잔에 담긴 약주와 함께.

“술은 마시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네, 맞아요.”

“아 좋네. 좋아요. 천 선배님은 진짜 주당 중의 주당이시거든요. 할리우드 도전했을 때도 거기 등치 이따만한 백인들이랑 양주로 대작해서 다 초토화 시켰어요. 위스키를 소주처럼 마시니 걔들이라고 버틸 재간이 있나.”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거리는 하선경 대표.

과거 천광윤 배우에게 쌓인 게 많은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녀가.

이번엔 잔을 들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술 안 마셔요. 왜 먹는지 모르겠어, 이걸. 쓰고, 몸에 안 좋고. 근데 이거 먹을 때만 이렇게··· 넣어 먹어요.”

그녀의 손에 들린 술잔이 기울었다.

쓰고 몸에 안 좋은 액체가 삼계탕에 섞여 들어갔다.

“이러면 전혀 알콜 맛이 안 나. 그리고 오히려 뭐랄까··· 약재들의 은은한 향까지 배서 좋더라고. 뭔가 더 건강한 느낌도 나고.”

한 수저 떠서 입안에 넣는 하선경 대표.

이에 나도 따라서 잔을 부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이번 일이 백 배우한테 이럴 거예요.”

“······.”

고갤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씩 웃어 보인다.

“그냥 섞여 들어갈 거야. 은은한 향으로, 건강하게.”

그 말에 웃으며 끄덕거렸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대답에 ‘에이~’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눈을 좁히는 하선경 대표.

그래도 좋은 경험까진 아니지 않아? 라는 느낌이길래 표정 변화 없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살짝 놀라며 묻는다.

“진심?”

“네. 언젠가 이런 비슷한 감정을 꺼내 연기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잖아요.”

“결국, 연기 얘기였구나?”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웃는 그녀.

나도 약주를 따라 넣었다.

후룹.

음···그 향이 뭔지 알 것도···.

근데 너무 뜨거운데?

“이러니까 천 선배가 뻑이가지.”

쿨럭.

하선경 대표의 말에 기침을 해대자, 그녀가 숨 넘어가라 웃는다.

나도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웃음을 삼킨 그녀가 비로소 진지한 얘길 풀기 시작한다.

“이제 일 얘기 좀 하죠.”

짧게 끄덕거리자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준비하는 할리우드 작품이 불발되더라도, 다음 작품도 할리우드에서 찾는 게 좋겠어요.”

이미 김성운에게도 비슷한 얘길 들었었다.

아무리 정정 기사가 뜨고, 여론이 변하고, 사과까지 받았다고 하지만.

아직 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자극적인 기사는 포털 사이트를 완전히 덮어 많은 사람들이 보지만, 해명 기사 같은 건 금세 메인에서 밀려나 버리곤 하니까.

“들었어요. 제가 할리우드에 가 있는 동안 하람에서 상황을 마무리할 거라고.”

그러자 하선경 대표가 주억거린다.

“그런 피신의 느낌도 있고, 사실 내 개인적인 욕심도 있어요.”

“개인적인 욕심이요?”

“하람을 만든 이후로 줄곧 도전해왔던, 할리우드 진출. 백 배우라면 그걸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선경 대표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간다.

“지난번에 얘기했듯이 나도 백 배우처럼 감이 좋아요. 그래서 천 선배 매니저가 되면서 아주 날아다녔죠. 천 선배의 미친 연기력에 내 선구안. 무서울 게 없었어요. 해외만 빼고.”

잠시 말을 멈춘 하선경 대표.

그녀가 그때를 추억하는 듯 먼 산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그땐 뭐 OTT 플랫폼 같은 게 없었으니까. 할리우드가 해외 진출의 시작이자 끝이었죠. 그래서 나한테 할리우드는 유일하게 실패한 벽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집착하는 거고. 내 감으로도, 선배의 연기력으로도··· 인종의 벽을 못 넘더라고, 그땐. 성공할 것 같은 영화라는 촉이 오지도 못하게 반쪽짜리 대본만 오고. 설사 촉이 딱 오더라도 거기에 참여하기가 어렵거나 배역이 너무 인종차별적이고.”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뭐, 지금이라고 백인, 흑인들과 완벽히 동일 선상에 있는 건 아니겠지만. 백 배우가 그 가능성을 보여줬잖아요? ‘악의 링’과 ‘악역’. 그리고 ‘48시간의 위로’로. 게다가 백 배우는······ 감과 연기력을 모두 가졌죠. 그것도 우리의 상위호환으로.”

“제가요?”

“천 선배가 칸 영화제 끝나고 와서 이런 얘길 하더라고요. 연기력에서 자신보다 위라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셨는진 모르겠어요. 가장 어려운 연기를 이미 아역 때 했다는데··· 아무튼. 감도 나보다 나은 것 같아요. ‘48시간의 위로’··· 솔직히 난 긴가민가했었거든.”

수저로 삼계탕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비로소 씩 웃는다.

“그래서 기대돼요. 감도 연기력도, 그때의 우리보다 나은 백 배우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생각보다 미국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아예 거기 집 하나 구해줘요?”

“아뇨. 하하.”

손을 휘적거리며 나도 수저를 들었다.

용암처럼 펄펄 끓던 삼계탕이 어느 정도 식어 먹기 딱 좋을 것 같았다.

비로소 맛이 선명하다. 맛있다. 하선경 대표가 말했던 향이 혀끝에 남는다.

“그럼 회사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사이에··· 저도 할리우드에서 보여줄게요.”

“뭘요?”

“논란과 이슈의 연속인, 과거가 썩 유쾌하지 않은 제가···.”

고갤 갸우뚱하는 하선경 대표.

그녀에게 빙그레 웃어 보이며.

“어째서 연기를 계속해야만 하는지.”

나는 금의환향을 약속했다.

#

그로부터 3일 후.

나는 삼계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음식들 앞에 앉아 있다.

빵과 다른 빵. 그리고 또 다른 빵.

거기에 베이컨과 계란후라이···.

고갤 돌리면 통유리 너머로 야자수가 가득했다.

미국이었다.

“이건 이거대로 맛있네.”

한 접시를 뚝딱 비우고서 다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미니 바에서 커피 하나를 내려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어김없이 대본이 올려져 있었다.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텍스트 반, 내 글씨 반으로 빈공간 없이 빽빽한 대본.

그 안의 내용은 간단했다.

쪽대본이니 당연한 소리긴 하지만, 설사 모든 내용이 다 담겨 있다 하더라도 큰 줄기는 이 정도일 것 같다.

한 사람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냥 평범한 남자다.

그런 그의 평범한 삶에 운명처럼 계속 마주치는 사람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죽을 위기에 처한다.

시작은 아주 사소하게.

그리고 점점 사소하지 않게.

그 과정에 주인공은 여자에게 감정이 생긴다.

그게 구원자 콤플렉스인지, 아니면 그냥 여자가 자기 스타일이라서인지 명확히 서술되진 않지만.

주인공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점차 커져가는 위협에 더욱 적극적으로 맞선다.

구하는 것을 넘어 지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내 역할은···.

죽음을 막는 주인공도, 죽을 위기에 처하는 여자는 더더욱 아니다.

[신의 장난이네.]

첫 등장부터 담배를 꼬나물고 그런 대사를 날리는.

여자가 죽지 않으면 이 세상에 더 큰 재앙이 닥칠 거란 걸 우연히 깨닫게 된 남자.

그래서 그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기고 여자를 죽이려는 남자.

그게 내게 제안된 ‘파코스’라는 캐릭터였다.

“캐릭터는 흥미롭고 개성 넘치는데, 배경은 도무지 상상이 안 간단 말이지.”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다.

구하려는 남자, 죽을 위기의 여자, 죽이려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에 배경이 뭐가 중요하냐고.

배경이 이곳 LA라거나 샌프란시스코 뭐 이런데라면 나도 배경을 중요하게 생각 안 했을 거다.

대충 콘크리트 건물 숲 사이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하며 연기 연습을 하면 될 테니까.

근데 배경이 ‘테메우스 C13구역’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겠나.

그게 어디냐고? 나도 모른다.

그래, 이거······.

장르가 SF다.

#

“이 건물 괜찮네.”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의 감독 크리스 디벗.

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컨셉 일러스트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 그려진 건 드넓은 사막. 그 위에 솟은 거대한 탑.

디스토피아적이고, 사이버펑크 느낌의 분위기에 잘 맞아떨어질 것 건물 같았다.

이에 커피를 홀짝거리며 지나던 중국계 미국인.

조감독인 코리 황이 툭 던지듯 말했다.

“거기에 네온까지 들어가면 완전히 그래픽카드처럼 보일 것 같은데요.”

그러자 고갤 돌리는 크리스 감독.

생각 없이 말을 내뱉은 코리 황이 찔끔했다.

“아니, 그게···.”

“그거 괜찮군.”

“네?”

“대사에 들어가면 좋을 것 같은데? 각본가들과 얘길 해봐야겠군.”

다행히 크리스 감독이 이상한 포인트에 꽂힌 덕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코리 황이었다.

그때였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 세이디.”

저 금발 미녀의 이름은 세이디 모튼.

할리우드 톱스타자, 이번 영화에서 무수히 죽을 위기에 처하는 여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였다.

그녀의 등장에 크리스 감독이 의문을 표했다.

“무슨 일이지?”

“그냥, 이쪽 지날 일이 있어서 들렸어요. 들린 김에 캐스팅 상황이나 들을 겸.”

제집인 양 편안하게 사무실을 가로지른 그녀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크리스 감독이 고갤 저었다.

“안타깝게도 아직 네 상대역은 정해지지 않았어.”

“남자주인공이 누군진 관심 없어요.”

“그건 의왼데?”

“후보들 보니까, 다 잘 어울리겠더라고요.”

“그럼?”

되묻는 크리스 감독에 그녀의 눈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잔뜩 쌓여있는 일러스트들.

그중 하나를 집어 든 그녀가 방긋 웃었다.

“전 이 역할이 더 궁금한데요.”

인도풍으로 꾸며진 천막 안.

폐인 같은 몰골의 한 남자가 카페트 위에 앉아 종이 한 장을 받아들고 있었다.

“그게 무슨 장면인 줄 알고?”

“예언가를 만난 파코스. 아녜요? 이 세계에 재앙을 부르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내 고생이 개고생으로 업그레이드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 일러스트가 어떤 장면인지 정확히 파악해냈다.

유일하게 완전한 대본을 받은 그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본 공부를 열심히 했나 보네.”

크리스 감독이 내심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왜 파코스 캐릭터를 누가 맡았는지가 궁금한 거지?”

“그건 감독님이 더 잘 아시지 않아요?”

되려 그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세이디가 덧붙여 말했다.

“매력적인 악역만큼 영화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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