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39화 (139/167)

139화 그린스크린 위의 괴물 (1)

크리스 감독이 오늘 오디션에 거는 기대는.

코리 황을 비롯한 직원들 모두가 느낄 정도로 컸다.

화면을 통해 백승결의 연기를 두 번이나 보았지만, 픽셀 단위가 보일 정도로 작고 흐릿한 화상은 스크린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를 터.

그러니 줄곧 궁금했었다.

그 흐릿함마저도 뚫었던 선명한 연기가, 눈앞에 온전히 펼쳐진다면 어떤 느낌일지.

비로소 그걸 확인할 순간이 찾아왔고.

크리스 감독은 백승결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연기가 시작되어 있지만 표정에 큰 변화가 있진 않았다.

그렇기에 섬세했다. 서양에 비해 여백이 있는 이목구비마저도 감정을 담기 위한 여백처럼 보일 정도로.

천천히 변하는 표정.

그리고 대사.

묻어나는 감정의 흐름은 마치 일명 메소드라 불리는 ‘스탠리 스트라스버그’ 같기도, 상황에 맞게 변모하는 ‘메서 테크닉’ 같기도 했다.

물론 그런 방법론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어느새 파코스가 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가 손아귀에 술잔이 있는 것처럼 들어 올렸을 땐.

그 안에 투명한 술잔이 정말 있는 것 같았고.

그가 시계를 바라볼 땐.

째깍 째깍, 초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세이디(랜시 역)를 발견하며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인색했을 땐······.

정말로 위험한 눈빛이었다.

예언이 가져다 준 진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것에 사로잡힌 남자의 눈빛이 넘실댔다.

‘이거,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속겠군······.’

순간, 형광등에 환해져있던 방안이 어둑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이건 미쳤다.

그저 뿌연 화면 너머의 연기를 보다 선명하게 보고 싶었던 크리스 감독에겐, 눈앞에 존재하는 파코스는 놀라움을 넘어 섬뜩함마저 안겨주었다.

머릿속에서 이제 막 일러스트로 옮겨지고 있던 캐릭터가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난 것에 누가 소름끼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건 기대 이상의 성과. 아니, 그것마저 무색해지는 행운이었다.

······매력적인 악역은 영화의 분위기를 좌우한다고 그랬나?

이걸 보라.

실로 그랬다.

#

오디션이 끝나면 흐르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기대, 혹은 걱정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포장지가 벗겨지고 오로지 결과만이 남은.

마치 시험결과는 이미 나왔고 확인만 남았을 때의 은은한 긴장감.

코리 황은 입술을 적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승결이 사무실을 떠났고, 뒤이어 세이디도 나갔다.

스쳐지나가는 그들의 표정만으로 오디션의 결과를 알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그는 크리스 감독의 사무실로 향해 문을 두드렸다.

“마침 부르려고 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가 들은 말이었다.

의문이 번졌다.

다른 배우의 6차 오디션도 준비해야하는 걸까? 아니면 아예 새로운 배우를 찾아야하나? 그건 시간이 촉박할 텐데···.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을 스쳐 보내며 코리 황이 물었다.

“왜요?”

“이 장면 말이야. 여기서 예언자가 한 번 더 등장하는 건 어떨 것 같아?”

보드에 붙은 컨셉 일러스트 중 하나를 가리키는 크리스 감독.

오디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잠시 당황하던 코리 황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함께 고민했다.

“이 씬에선 아무래도······.”

잠시 후, 결국 장면을 약간 수정하기로 한 두 사람.

새로운 영감과 그를 통한 변주에 흡족해하는 크리스 감독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코리 황은 오디션의 결과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자신이 본 그 어느 때보다 크리스 감독의 기분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 봐, 미간이 놀랍게도 펴져 있잖아. 눈썹이 더는 V자로 보이지도 않고.

어처구니없게도 크리스 감독에겐 대단한 변화였다.

‘확실히 마음에 드신 것 같군.’

그걸 알면서도 입은 근질거렸다.

가채점 결과를 안다고 해서 성적표를 뜯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나.

오히려 더욱 후기가 듣고 싶어진 코리 황이 슬쩍 물었다.

“오디션은 어떠셨어요?”

“세이디가 얘기 안 해?”

“나가기 바쁘던데요.”

“자네랑 얘기하는 게 싫었나보군.”

끙.

백인 미녀 톱스타에게 무시 당하는 동양인 스태프라니.

너무 클리셰라 세이디의 평소 성격을 몰랐더라면 납득하고 상처 받았겠지.

그때 크리스 감독이 말을 툭 덧붙였다.

“아니면······ 그만큼 들떴거나.”

그게 진심이었고, 코리 황은 역시나 오디션이 성공적이었음을 확신했다.

심지어 세이디도 꽤나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것 같았다.

어느새 올린 입꼬리처럼 그 배우를 응원하고 있었나보다. 어느새.

“그럼 7차 오디션은 언제로 잡을까요?”

“더 이상 파코스 역에 오디션은 필요 없어.”

“그 말은······.”

“끝이야. 저 친구로 확정할 거거든. 이미 완성된 대본도 줘버렸어. 아니, 뺏긴 건가. 모르겠군.”

대본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그가 대본을 뺏겼다?

황당한 농담에 코리 황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드셨던 겁니까?”

“얼른 다음 연기가 보고 싶을 정도로. 그러니 대본을 안 줄 수가 있어야지. 아, 근데 뺏긴 게 확실한 것 같아. 애초에 그 친구, 대본 말고는 나나 세이디는 커녕 오디션에도 큰 관심이 없어 보였거든.”

그 말인즉, 크리스 감독과 세이디 모튼을 앞에 두고도 백승결이란 배우는 오로지 이야기의 줄거리에만 집중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젠 코리 황의 호기심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대체 어떤 오디션이었길래, 크리스 감독이 저런 반응을 보일까.

“근데 변수가 있어.”

크리스 감독이 갑자기 낭패라는 듯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 친구 액션을 어느 정도하는지 못 물어봤네. 연기에 넋이 나갔었군, 내가. 뭐, 설사 심각한 몸치여도 그 연기를 본 이상 뽑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던 코리 황이 이내 픽 하고 웃었다.

“그건 변수가 안 될 것 같은데요.”

“음? 어째서?”

“그 친구 몸 쓰는 것도 뛰어난 걸로 유명하더라고요.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기를 대역 없이 소화했다더군요. 마치 톰 크루즈처럼요. 물론, 그 정도는 당연히 아니겠지만요.”

그러자 크리스 감독이 아까보다 조금 더 놀란 얼굴로 어깰 으쓱거렸다.

“그건 몰랐군. 그 친구 영화를 제대로 본 건 한 편이 전부라.”

확실히 크리스 감독다웠다.

배우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지금과 연기력이 같지도 않을 전작들을 뒤적거리기보단, 당장 눈앞에 데려와 현재의 배우와 얘길 나누는 것.

그게 그의 스타일이었으니까.

“다들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는 배우더라고요.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놀라는 중이에요.”

“그러면 지금으로선, 문제는······ 그것 정도 일려나.”

“변수 말고, 문제도 있었어요? 그건 또 뭔데요?”

코리 황의 물음에 크리스 감독이 답했다.

“그린스크린.”

“아···.”

이 영화 장르의 특성상 CG가 많이 쓰인다.

그냥 많이 쓰이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배경이 CG일 터.

“그 속에서 연기한 게 광고 촬영 때 딱 한 번이었다고 하더군. 그것마저 무대 장치가 커다랗게 세팅되어 있어서 그 위를 움직이는 연기만 했었다고 하던데.”

이어지는 크리스 감독의 말에 코리 황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장르를 여러 번 연출하면서 무수히 많이 봤지.

녹색 공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연기해야하는지 놓치는 배우들 말이다.

결국 가짜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그린스크린이라는 진짜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연기력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연기파 배우들조차 차라리 눈을 감고 연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며 힘들어하겠나.

“그러면 확실히······ 적응기간이 필요하겠네요.”

#

한편, 자신의 밴으로 돌아온 세이디도 크리스 감독과 비슷한 질문을 받는 중이었다.

질문을 던진 이는 그녀의 매니저였다.

“어땠어?”

그녀의 물음에 세이디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툭 답했다.

아니, 물었다.

“살해위협 받아봤어?”

“응?”

갑작스러우면서 당혹스러운 물음에 매니저는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세이디가 이런 해괴한 질문을 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 번째도 아니지.

이 바닥 톱스타들이 대부분 그렇듯, 세이디도 정상은 아니니까.

“종종?”

그렇기에 매니저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누구한테?”

“아내.”

그럼에도 솔직했다.

“풉. 여기도 할리우드네.”

실소를 머금은 세이디가 고개를 흔들자, 질문은 본인이 던져놓고 어느새 성실하게 답하던 매니저가 고갤 기울였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갑자기 웬 살해위협?”

표정을 보고 심각한 일은 아닐 것이라 판단한 그가 묻는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이전 질문도 다시 끌어왔다.

“아니, 그리고 오디션이 어땠냐니까. 대표님이 벤자민 추천 해봤냐고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와.”

“또 전화 오면 전해. 턱도 없다고.”

“벤자민이?”

“응. 대표님이 아무리 벤자민을 밀어도 이건 안 돼.”

“그 정도였어? 백승결이라는 배우가?”

매니저를 빤히 바라보던 세이디가 단호하게 끄덕였다.

“난 지난 작품에서 이미 벤자민이랑 연기를 같이 해봤잖아. 확실해. 감독 성에 찰 리가 없어.”

그러면서 그녀는 백승결을 떠올렸다.

어느새 시선은 오디션이 있었던 크리스 감독의 사무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런 걸 봤는데, 어떻게 성에 차겠어.”

“정말 대단했나보네, 네가 인정할 정도면. 근데 살해위협은 또 뭐고?”

“내가 받았어. 그 사람은 연기였는데.”

알 수 없는 소릴 하며 웃는 세이디를 보며 황당해하는 것도 잠시.

이내 매니저는 현실적인 고민에 빠졌다.

직장 상사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전할지가 문제였다.

파코스라는 역할의 존재감이 엄청나다는 세이디의 말을 듣고서 소속 배우인 벤자민을 거기에 꽂고 싶어 했는데.

지금 보니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았다.

“흐음, 대표님한테 뭐라고 한담······.”

“곤란하면 나한테 전화하라고 해.”

“저, 정말?”

구원자를 만난 듯한 매니저의 표정에 세이디가 씩 웃어보였다.

“나도 이제부턴 벤자민을 파코스에 넣으려는 대표님 생각에 반대거든. 파코스는······ 그 사람이어야만 해.”

그래야만했다.

자신의 마음에 쏙 든 이 작품이.

자신의 기대만큼. 아니, 그 이상의 완성도로 세상에 나오려면.

애초에 부유한 집안에서 커 돈 욕심이 아닌 연기, 그리고 작품에 대한 욕심으로 배우를 시작한 그녀에게.

목표는 오로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평소 좋아하던 작품들의 감독인 크리스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준비 중인 작품이 있냐고 물었고, 여주인공 자리를 기어코 얻어냈다.

이것도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필모에 크리스 감독의 영화를 넣고 싶었던 것처럼.

이 영화엔 백승결. 그 배우가 파코스 역으로 반드시 참여해줘야 했다.

오늘 오디션을 보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그 연기를 본 이상 다른 파코스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세이디가 은은하게 웃었다.

“내 작품이야. 그건 대표님도 못 건들지.”

매니저는 그 미소가 참··· 아름답게 미친 사람의 그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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