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
한국인에게 ‘할리우드’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유명 감독이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할리우드는 하버드라고.
대관절 영화계와 대학교를 비교하는 게 이상할 법도 하지만, 이를 들은 모든 한국인들은 단번에 이해했다.
1등.
전 세계 최고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영화계를 가장 선두에서 이끄는 그곳.
언덕 위에 글자들도, 배우의 이름과 함께 손바닥, 발바닥이 찍힌 황금 보도블록도, 유니버셜 스튜디오도.
모두 그 다음의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할리우드 진출’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한때는 그 소식이 대중들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할리우드를 하버드와 비교했지만, 그건 한국의 뛰어난 인재가 하버드에 입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였다.
무려 할리우드라니!
모두가 기대했다.
전 세계 최고의 배우들이 모여 최고의 영화를 만드는 그곳에서 우리의 배우도 빛을 발하길.
전 세계가 인정하는 스타가 되길.
하지만, 그 기대는 번번이 무너졌다.
뻔한 캐릭터, 짧은 등장, 그리고 허무한 퇴장.
그 짧은 세 박자에 들어가지 않는 배우가 없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 영화의 발전에 힘써야지, 우리가 미국 영화계인 할리우드 진출을 고대할 필요가 있나?’
맞는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건.
할리우드는 단순히 미국 영화계,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신포도가 건포도가 될 때까지 시간이 흘렀고······.
백승결이 진출했다.
멀티온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해외에서도 이름을 알리고, 심지어 칸 영화제에서 영화인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이기에.
몇몇 사람들은 또다시 기대했다.
하지만 백승결의 인터뷰로 인해.
‘역시······.’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개봉 보름 전.
홍보팀장이 할리우드에 있는 백승결과 김성운에게 연락을 했다.
비중에 대한 이슈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니 어떻게 대응을 할지 회의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오해가 조금 생긴 것 같네요.
가볍게 웃는 백승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제작사 측에서 내용과 역할에 관련된 이야긴 최대한 자제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그래서 그 나름대로 거짓말이 아닌 선에서 추상적인 답변을 내놓았던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하긴, 원하는 걸 다 했다는 대답이 어떻게 보면 비중이 높다로 생각할 수도 있는 건데. 지금까지의 선례들이 워낙 안 좋다 보니 자연스레 다들 안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나 보네.”
홍보팀장이 현재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하며 덧붙였다.
“뭐, 사람들 반응도 충분히 이해가 가긴 해. 할리우드에 한국 배우가 나온다고 해서 들떴던 게 대체 몇 번이야. 근데 막상 뚜껑 열어보면 존재감이 아예 없거나, 아니면 존재자 자체를 일찍 지워버리잖아. 화상실 밈이 나온 것도 그것 때문이고. 화장실 다녀왔더니 이미 등장하고 퇴장까지 했다고 하니 환장하지.”
이 와중에 뒤에서 직원들이 소변이었을지, 대변이었을지 떠들고 있다.
엄연히 두 상황에 소모되는 시간이 다르다면서···.
“거, 니들 화장실 시간 알고 싶지 않거든?”
뒤를 돌아보며 한소리 한 뒤 다시 화상 통화 중인 화면을 보았다.
백승결과 김성운이 쿡쿡대고 웃는다. 그 뒤에 덩치 큰 김주철은 얼굴이 짤려 어깨가 들썩이는 것만 보였다.
—이거에 대해 해명이 필요할까요?
이어지는 백승결의 물음에 홍보팀장이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갤 저었다.
“얘길 들어보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 개봉하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니까.”
홍보팀장인 그녀도 솔직히 반신반의했었다.
백승결의 정확한 비중은 그녀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오늘 전체적인 얘길 들어보니 이건 오히려 개봉 후가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화장실이 아니라 주차를 다시 하고 와도 여전히 백승결이 나오고 있을 테니.
“그나저나, 한국에 오는 게 미뤄졌다면서?”
—네. 아마 개봉 직후가 될 것 같아요.
“의외네. 보통 할리우드 영화들은 개봉 전에 돌던데.”
할리우드는 아까 말했듯 미국 영화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상 전세계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 보니 팬 서비스도 세계적이다.
개봉을 앞둔 모든 나라를 돌며 홍보 활동을 하고, 마지막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개봉에 맞춰 홍보를 이어나간다.
그런데 이번엔 개봉 직후,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3일의 시간을 보낸다는 게 의외였다.
—일부러 그렇게 잡아달라고 부탁했어요. 모든 사람들에게 영화가 공개된 후, 그 반응을 직접 보고 싶어서요.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거지?”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며 백승결이 여유롭게 웃었다.
홍보팀장은 내심 감탄했다.
무려 할리우드에 진출해서까지 저렇게 자신만만하다니.
“뭐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아. 개봉을 하고 나서 가면 괜히 비중에 대해 묻는 사람들도 없을 테니까.”
—맞아요. 그리고 그것도 그거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과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요. 영화가 끝난 직후··· 그때만 느껴지는 에너지가 있잖아요.”
“그렇지. 영화가 끝난 직······잠시만. 직후?”
홍보팀장이 말꼬릴 올리자 백승결이 끄덕였다.
—생각하시는 게 맞아요. 무대인사를 하게 될 것 같아요. 크리스와 세이디, 데이브 세 사람과 함께.
잠시 벙찐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그녀.
그 뒤에서 직원들도 동그란 눈으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홍보팀장이 잔뜩 들뜬 표정으로 김성운을 보았다.
“할리우드 배우들의 무대인사라니······ 김 팀장님!”
—저 아녜요. 승결이가 해냈어요.
“어, 어떻게? 할리우드 배우들 무대인사는 배급사도 쩔쩔매는데?”
—다음 작품에도 출연하기로 했어요. 시놉만 봤는데 확 끌리더라고요. 물론 언제 촬영에 들어갈진 몰라요. 연달아 세 편을 만들었으니 이젠 조금 쉬시겠대요.
백승결이 말했고, 홍보팀장의 고개가 기운다.
—······그것까지? 대체 넌 뭘 줬는데?
이번엔 백승결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게 제가 준 건데요.”
#
직원들에게 ‘홍보팀 에이스 백승결’이라는 소릴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홍보팀은 어이없어하면서도 들뜬 반응이었다. 자랑스럽다며 응원하는 이도 있었다.
이유는 이러했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물이 올랐다고 평가받는 크리스 감독.
그의 차기작에 출연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노력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출연을 해주는 대신 무대인사를 받았다니.
받고, 받았는데 그게 왜 거래냐는 듯한······.
거래의 조건이 성립이 안 된다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네가 여기서 어떻게 촬영했는지 못 봤으니까, 얼마나 대단했는지 모를 수밖에.”
김성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멋쩍은 표정으로 끄덕거렸다.
“슬슬 내려가자. 컨벤션 센터가 멀진 않은데, 까딱하면 러시아워에 걸려. 그러면 진짜 헬기 불러야 된다. 서울 교통체증은 양반이야.”
김성운의 말에 현태 형은 카메라를 정리했고, 김주철은 내가 입을 의상을 챙겼다.
그리고 곧장 호텔 방을 빠져나와 LA 도로 위에 몸을 실었다.
우리 영화의 프리미엄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반응을 얻게 될까?’
그래, 전세계를 돌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것부터 확인할 차례였다.
나의 환향이.
그냥환향인지, 금의환향인지.
#
LA 컨벤션 센터.
둥그런 커튼월 창에 핑크빛 노을이 번지는 저녁.
그곳에서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의 시사회가 열렸다.
배우부터 평론가, 기자는 물론이고, 요즘 영화 시장에서 꽤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뮤튜버들도 다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뮤튜버는 아무래도 가장 구독자가 많은 맥거핀 채널의 맥 딕킨슨이었다.
그는 2천만 명에 달하는 구독자를 가진 뮤튜버로 예고편 분석과 배우들과의 인터뷰, 그리고 영화 리뷰가 주 콘텐츠인 인물.
자연스레 그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거는 배우들도 몇몇 있었다.
“맥.”
“어, 찰리.”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찰리 톰린슨에 맥이 반갑게 인사했다.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우리가 인터뷰한 게 아마 8개월 전쯤이었죠?”
“벌써 그렇게나 됐나요? 칸 영화제가······ 시간 정말 빠르네요.”
찰리의 헛웃음에 맥도 입꼬릴 올리며 대뜸 물었다.
“오늘 보시게 될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바로 이렇게 인터뷰 하시는 거예요?”
“아, 그렇게 보였겠군요. 근데 아녜요. 봐요, 녹음기도 없는걸요.”
마치 총기가 없는 걸 확인시켜주는 스파이처럼, 맥이 재킷을 들추며 웃었다.
“제가 원래 이렇게 영화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영화 관련 콘텐츠로 뮤튜브를 시작했던 거고요. 물론 리뷰에 짤막하게 일화로 들어갈 수는 있겠죠.”
싱긋거리는 맥을 보며 찰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뭐······ 좋은 제작진과 배우들이죠. 크리스 감독님. 데이브, 세이디······.”
그러다 말끝을 흐리자 맥이 질문을 이어나갔다.
“백승결 배우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누구요? 아, 그 배우··· 이름은 들어봤는데, 사실 그 배우에 대해선 전혀 몰라요. 출연작을 본 적이 없어서. 관심이 없다기보단, 아시잖아요? 워낙 차기작 준비로 바쁘고······. 잘은 모르지만 좋은 배우겠죠. 배우가 꼭 비중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잠자코 듣던 맥이 갸우뚱했다.
의아했다. 뭔가 인과가 안 맞는다.
“비중이 적은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전혀 모르는 배우라고 하셨는데.”
심지어 그건 백승결의 한국 인터뷰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아니, 내용도 아니지. 팬들의 반응이었다. 그걸 할리우드 배우가 알고 있다면······ 그건 전혀 모르는 게 아니지 않나?
“아······ 제 말은, 원래 그렇잖아요? 조연이니까. 주연보다는 상대적으로··· 무슨 말인지 아시죠?”
어째선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찰리.
그가 동료 배우들을 보더니 즐거운 대화였다며 그들과 함께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
맥은 그런 찰리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홀에 자리 잡은 커다란 스크린.
그리고 크리스 감독의 신작을 보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
자리에 착석한 맥은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시사회 시간이 임박하자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꿔놓고 메모장을 켜 지금 떠오르는 것들을 두서없이 써 내려갔다.
이렇게 불쑥불쑥 떠오르는 것들이 리뷰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니까.
그렇게 또 한동안 핸드폰을 두드리다가 다시 품 안에 넣는 맥.
그가 자신이 했던 예고편 분석을 떠올리며 표정에 기대감을 떠올렸다.
‘내가 만든 영상과 얼마나 맞을까?’
자신은 백승결이 맡은 파코스란 캐릭터가 극 중 이야기에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될 거라 예측했다.
하지만 항간엔 비중 관련해서 이슈가 있는 듯했다.
백승결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에 한국 팬들이 실망하고 있다는 소식을 댓글을 통해 알게 되었지.
그래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봤는데, 이상했다.
‘난 오히려 반대로 느껴지던데······.’
배우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걸 모두 보여줬다면.
그리고 그게 변명이 아니라면.
‘사실 비중이 엄청 크다는 소리 아닌가?’
물론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배우가 그런 인터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뭐, 이제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
맥이 자세를 고쳐앉으며 시사회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이윽고······.
아이맥스 비율의 거대한 스크린에.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