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극 (2)
한국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김성운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회사를 찾았다.
백승결에게 집중하느라 차곡차곡 쌓이고 있던 일들을 모두 해결하고서 홍보팀으로 향한 그는, 회의 테이블에 앉아 할리우드 썰을 기다리는 초롱초롱한 눈빛들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아무튼, 나조차도 촬영날이 기다려질 정도였어. 특히 새로운 배우나 스태프들이 촬영장으로 오는 날. 승결이 연기에 놀랄 거 생각하니 기대되더라. 뮤튜브에서 리액션 컨텐츠가 왜 흥하나 싶었는데, 확실히 이해가 가더라고.”
만담꾼 앞에 모인 마을 사람들처럼 숨죽여 듣고 있던 홍보팀 직원들이 하나둘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영화가 아니라, 이게 영화네요.”
“그러니까요.”
“얼른 이걸로 시나리오 써서 올려 봐. 또 알아? 작품 좋으면 대표님이 제작까지 연결해줄지.”
“오호, 인생 역전의 기회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직원을 보며 김성운이 웃었다.
그때 홍보팀장이 뒤에서 낮게 감탄한다.
“그나저나, 거기서도 승결이의 기억력은 대단하네요. 아트북을 외워버렸다니······.”
“‘눈속임’에서 진기원 역할을 했던 게 도움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 영화사에서 홍보로 쓴다고 하던데요.”
“그래요?”
백승결의 뛰어난 기억력을 마케팅으로 활용하겠다는 소리였다.
홍보팀장이 팔짱을 끼며 고민했다.
안 그래도 치솟는 인기.
이 정도라면 똑똑하다고 비호감으로 찍히진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한 그녀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걸 언제 써먹을까 싶었는데, 지금인 거 같네요. 영화사에서 기억력 관련 보도자료 내면 저희도 바통 이어받죠.”
“뭐로요?”
“승결이가 영어와 폴란드어를 어떻게 공부했는지.”
그동안 꽁꽁 숨겨뒀던 사실을 밝히려는 홍보팀장.
함께 듣고 있던 직원 중 한 명이 혀를 내둘렀다.
“그건 진짜 안 믿을 거 같은데.”
이에 김성운이 답했다.
“현태한테 자료 있을 거야. 그거 엮어서 증거 영상 하나 만들면 될 것 같은데.”
“와, 진짜 나사에 잡혀가는 거 아닌가 몰라.”
“근데 그걸 나사에서 왜 잡아가요? 거긴 우주 연구하는데 아닌가?”
“······외계인일 수도 있으니까?”
이어지는 직원들의 실없는 소리에 피식 웃은 김성운이 홍보팀장을 보며 물었다.
“무대 인사 반응은 좀 어때요?”
“말해 뭐해요. 역대급이예요. 애초에 할리우드 배우들 무대 인사가 흔치는 않으니까.”
“미국 가면 어떤 반응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김성운의 말에 모두가 고갤 주억거렸다.
이어서 시간을 확인하며 묻는 홍보팀장.
“오늘 회사에서 파티 있는 거 들으셨죠? 승결 배우도 오는 거예요?”
“그럼요. 자기 축하 파티인데, 빠질 수 있나요.”
“승결이는 안 피곤해해요?”
“피곤······ 전혀요. 오히려 더 쌩쌩한 거 같아요. 첫날 오자마자 영화관 가서 영화 보고. 어제는 저녁에 혼자 갑자기 연극을 봤대요. 쉬라고 집에 내려줬더니 대학로까지 가서.”
이를 듣고 있던 직원들이 백승결의 체력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진짜 외계인일지도?”
가벼운 이야기들로 잠시 입꼬릴 올리고 있던 홍보팀장이 이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김성운에게 물었다.
“문제는 없죠? 뭐, 그······ 빚투 이후로요.”
그런 일이 한번 터지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아무리 멘탈이 강한 사람일지라도 그건 예외가 없다.
오히려 좋은 결과로 매듭지어졌다고 해도 마찬가지.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과정을 잊지 못하는 게 사람이잖나.
심지어 기억력이 괴물급으로 좋은 백승결이라면 더더욱 걱정되는 그녀였다.
“괜찮은 것 같아요. 아직까진.”
“겉으로만 그래 보이는 걸지도 모르니까 계속 주의해서 봐줘요. 연기자 백승결 말고 다른 백승결을 만드는 것도 도움이 될 텐데······.”
“부캐처럼요?”
“네. 나를 분리 시키는 연습이 대중 앞에서 무방비한 연예인들한텐 도움이 된다고 들었거든요. 연기자로서의 나는 따로 있고, 또 다른 내가 있어서··· 연기자로서의 내가 공격을 받아도 타격이 작아지는 거죠.”
“흠, 연주나 그림 그리는 걸 제대로 해보라고 할까요?”
“본인이 즐겁다면요.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이에 김성운이 신중하게 끄덕거렸다.
“그런 걸 좀 찾아보라고 해야겠네요. 또 다른 백승결······.”
#
홍보팀에서 나온 김성운이 다시 2팀 사무실로 향했다.
도착하니 김주철이 컵에 오렌지 주스를 조심조심 따르고 있었다.
커다란 패트가 무슨 500ml 쯤으로 보이는 광경.
김성운이 웃으며 다가갔다.
“다이어트 중이야? 왜 통째로 들고 마시던 애가 갑자기 컵에······아, 감독님 오셨어?”
단번에 손님이 왔음을 눈치챈 김성운이 미팅룸 쪽을 보았다.
자신과 약속된 손님은 아니었다. 최영기 실장과 신승찬 배우의 손님. 그래도 팀장이라,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다.
“최 실장님은?”
“아직··· 어, 저기 오시네요.”
김주철의 말에 고갤 돌리자 사무실 안으로 최영기 실장과 신승찬이 들어왔다.
두 사람이 김성운에게 인사를 해왔고, 그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았다.
“실장님, 어서 와요. 신승찬 배우도 오랜만이야.”
“네, 팀장님. 아, 오늘 승결이 파티에 오죠?”
“응. 올 거야.”
빙그레 웃으며 끄덕이는 신승찬과는 달리 최영기 실장은 어물쩍 미팅룸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때 김주철이 그에게 인사했다.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아, 예···어···.”
마지 못해 인사를 받은 최 실장이 쭈글거리다 신승찬과 함께 미팅룸으로 들어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성운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역시 피지컬이 좋긴 좋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정 대리님께 들었어요. 저 분이죠? 팀장님께 자꾸 힘겨루기하려고 했었다는 분이.”
그러자 사무실 한구석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정 대리가 덧붙였다.
“팀장님한테만 그랬으면 다행이게. 홍보팀이랑 승결이 씹다가···.”
“승결이 형··· 한테 그랬다고요?”
순간 김주철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그가 험악한 표정으로 미팅룸을 노려본다.
마치, 들어가서 제거 할까요? 이렇게 물어볼 기세.
김성운이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어후, 너 그런 표정으로 최 실장 쳐다보지 마라. 가뜩이나 너한테 쫄았는데, 아주 지리겠다.”
“생각보다 더 나쁜 사람이었네요. 저도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며 자신 없어 하는 김주철에 김성운이 기어이 박장대소를 했다.
“아니, 왜 갑자기 양심적이야.”
“하하···.”
“그리고 너 상대 조직원 말고는 주먹 써본 적도 없다면서.”
“그건 진짜예요. 이상하게 상대 조직 말고는 아무도 절 안 건드리더라구요. 하하.”
“전혀 안 이상한데. 너무 납득 되는데.”
김성운이 고개를 흔들며 다시 미팅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을 긁적이며 고갤 기울인다.
“그나저나 의외네.”
“뭐가요?”
“저기 미팅룸에 있는 원정상 감독. 연극 연출 출신이라서 그런지, 갑자기 확 뜬 배우 잘 안 쓰기로 유명하거든. 특히 젊은 배우는 더더욱. 극단 출신 배우들 많이 캐스팅하고. 근데 그런 사람이 트렌드의 끝판왕인 신승찬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게 의아해서.”
잠시 갸웃거리던 김성운이 이내 나름대로 납득한다.
“뭐, 신승찬 배우가 연기를 잘하긴 하지.”
그러자 정 대리가 끼어들어 말했다.
“근데 벌써 세 번째 미팅이에요. 확신이 안 서나 봐요.”
“그건 들었어. 신승찬 배우가 마음에 들긴 하면서도 또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나 보던데? 뭐, 최 실장이 공유를 잘 안 하니 도울 수가 있어야지······.”
김성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옆에서 벽시계를 확인한 김주철이 얼른 주스를 마저 따르고 미팅룸에 가져다주고 나왔다.
그가 차키를 챙기며 사무실을 나선다.
“그럼, 전 승결이 형 픽업하러 다녀오겠습니다.”
“그려.”
조심히 다녀오라며 손을 흔드는 김성운.
그에게 정 대리가 다가와 물었다.
“승결 배우 벌써 와요? 파티 시작하려면 아직 꽤 남았는데?”
“그전에 대표님 면담.”
“아~. 왜요?”
끄덕거리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질문에, 김성운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게? 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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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방문하는 대표실이었다.
익숙하게 걸어 들어가 대표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자, 그녀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차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싱긋 웃은 그녀가 덧붙여 말한다.
“금의환향 축하해요. 미국과 한국을 포함해서 12개국 1위. 정말 더할 나위 없는 결과로 보여줬네요.”
“저도 이 정도로 잘 될 줄은 몰랐어요.”
“거짓말.”
“흐, 사실 알았어요. 그때 흥분해서 연락도 드렸었지만, 완전한 대본을 받아 읽고서 바로 알았죠. 이 정도로 끌렸던 적은 처음이었거든요.”
호텔 앞 카페에서 완전한 대본을 단숨에 읽고서,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
대본에서 빠져나오기 정말 힘들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그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말하자.
하선경 대표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부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런 대본을 받아본 지가 언젠지.”
그 말에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요즘은 대본 검토 안 하세요?”
“잘 안 하려고 해요. 대본 읽는 거 너무 좋아하는데··· 회사 대표라는 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더라고요. 게다가 천 선배님 매니저였을 때처럼 내가 다 컨트롤 할 수도 없을뿐더러, 또 배우들은 배우들 나름대로 원하는 작품들이 있고.”
한 회사의 대표로서 작품을 판별하는 데만 집중할 수 없는 현실을 얘기하던 그녀가 덧붙여 말한다.
“성공할 작품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배우들이 하고 싶어 하는 작품도 중요하잖아요? 아, 백 배우한텐 그게 그거지?”
하선경 대표의 익살스러운 물음에 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가지고 온 가방에서 대본 하나를 꺼내 들었다.
테이블에 그것을 올리며 내가 넌지시 말했다.
“그럼 이것 좀 가볍게 한번 읽어주세요.”
“뭐예요? 대본?”
“네.”
“누구 대본?”
그 질문엔 대답을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우선, 먼저 읽어주세요. 그리고 말씀드릴게요.”
“이거 왠지 무명작가, 중고신인 작가··· 또 이런 느낌인데? 하고 싶은 작품인데, 힘을 실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비슷하긴 해요.”
“비슷?”
하선경 대표가 갸우뚱하다가 이내, ‘일단 읽어보죠.’라며 대본을 넘겼다.
단숨에 대본에 집중하는 그녀.
‘이거··· 생각보다 더 떨리잖아?’
내 연기를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지금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건 창피함까지 뒤따랐다.
타인을 모방하는 연기와는 달리, 이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은······욕망의 치부책 같아서.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기던 하선경 대표의 손이 멈췄다.
마지막 장이 팔락이며 덮인다.
그리고 그녀가 물었다.
“이···이거. 누구 대본이에요?”
“제 대본입니다.”
“그러니까. 백 배우한테 들어온 건 알겠는데 누구···.”
하선경 대표의 시선이 나를 향해 떠올랐다.
그러다 다시 가라앉아 대본을 본다.
그녀가 다시 묻는다.
“백 배우, 대본?”
“네.”
“그러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로 뒷말을 끌던 그녀의 두 눈이 다시 떠올라 나를 바라본다.
적잖이 놀란 듯, 어느 때보다 커진 두 눈이 파르르 흔들렸다.
“백 배우가 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