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극 (3)
하선경 대표는 백승결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고갤 끄덕이고 있었다.
맙소사. 이미 예상도 하고, 심호흡도 하고, 놀랄 준비까지 했지만.
이런 걸 들고 와서 태연하게 끄덕거리는 백승결을 보니 기어이 놀라고 말았다.
금의환향한 것도 모자라 품 안에 보석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원석까지 지니고 돌아왔다니!
“어떠세요?”
뒤이어 감상을 구하는 백승결에게 하선경 대표가 오히려 되물었다.
“어떠냐고···?”
아마 예전이었다면.
그러니까, 한 회사의 대표로 일을 벌리기 전이라면 아마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길 하며 자신이 감탄한 부분들을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작품을 논하기엔 너무 대표라는 자리에 오래 있었다.
그녀는 이제 사업가였다.
그렇기에.
“이건······.”
된다.
이 판단이 먼저 들었고.
그 다음부턴 댐이 열린 듯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일단 제작사는 어디가 좋을까? 백승결이 작가로서는 쌩 신인이니 역시 굿픽처스가 좋겠지.
그러면 감독은? 한이연 감독에게 얘길 해볼까? 오히려 좋아하면서 흔쾌히 받아줄 것 같긴 하지만, 이 작품이 그녀에게 어울릴까? 그건 고민이 필요한······.
이미 누군가 출발 신호를 울린 것처럼, 그녀의 생각은 작품에 대해 되짚을 것도 없이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이건 된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무섭게 사업계획이 구상되어 스노우볼을 굴리고 있었다.
<백승결, 작가데뷔!>
단숨에 커다래진 눈덩이가 어느새 그녀 머릿속에서 큰그림을 완성했을 때.
“영화화 준비하자.”
그녀가 툭 내뱉었다.
백승결이 빙그레 웃었다. 그 말이 그녀가 당장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하선경 대표가 살짝 난감해하며 말했다.
“근데 주인공을 네가 맡긴 좀 힘들겠다. 나이대가 좀 있어서.”
“애초에 이 시나리오에 제 자린 없었어요. 전 참여하지 않으려고요.”
그건 하선경 대표에게도 희소식이었다.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으로 할리우드에서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지금 백승결은 할리우드에서 물이 들어오다 못해 넘쳐났다.
“그리고 이 작품···.”
그녀를 아주 잠시 안심시켰던 백승결이 말을 잇는다.
“연극으로 만들고 싶어요.”
머릿속에서 열심히 굴려 커다란 눈덩이를 만들었는데, 백승결의 한마디에 계획들이 와르르 무너진다.
청천벽력같은 ‘작가의 의도’에 하선경 대표가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왜?”
#
내 첫 작품에 대한 하선경 대표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았다.
그래서 문제였다.
갑자기 앉은 자리에서 영화화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기에 왜냐고 묻는 질문엔 선뜻 대답이 어려웠다.
단순히 어떤 하나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으니까.
최대한 단순화를 시켜보자면······.
이 작품에 여기저기서 큰 자본이 들어오는 게 싫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결국 좋은 대본을 폭사시킨 윤 감독의 사례를 똑똑히 봤으니 더욱 그랬다.
심지어 나는 이 작품을 쓰며 역할마다 머릿속에 그렸던 배우들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조차 내 입감에서 멀어지게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숨기고 싶었다.
백승결이 아닌 작품으로만 주목받고 싶었다.
김성운에겐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빚투 이후로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워지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나를 끊임없이 검열하고 옭아매는 것이···.
결코 좋은 현상 같진 않았다.
그래서 ‘매듭’이라는 과정을 통해 연기를 하고 남은 감정의 부산물들을 모아 글을 써 내려가듯.
그것을 통해 또 다른 나.
작가로서의 나를 만들기로 했다.
더할 나위 없는 직업이었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필명으로 활동할 수도 있으며.
내 생각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도 있으니.
······그런 내 생각을 모두 말하자, 하선경 대표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결국 알겠다며 연극 쪽으로 알아보겠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일이 바빠지겠네.’
이미 할리우드에서의 스케줄이 꽉꽉 들어차 있는 상황.
미국에서 연극 관련 일까지 하선경 대표와 주고받으려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대표실에서 내려왔다.
그럼에도 걱정보단 설렘이 먼저였다. 아니, 거의 전부였다.
‘작가 백승결이라······.’
필명을 뭐로 할까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니 카페테리아에서 파티가 시작되었다.
각양각색의 케이터링이 여기저기에 깔렸고, 평소와 다른 조명까지 켰다.
전 직원들은 물론이고 배우들도 얼굴을 비췄다.
특히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있었다.
이태관 배우와 김상억. 그리고 이준혁.
함께 하람에 들어오게 된 대원군의 주역들과 간단하게 회포를 풀었다.
뒤이어 1팀인 이태관 배우의 소개로
모두가 우리나라 톱배우 자리를 짧게는 십수 년, 길게는 수십 년씩 지키고 있는 1팀 배우들을 만났다.
“영화, 너무 잘 봤네. 솔직히 나조차도 영화 속 비중에 대해 반신반의했었는데, 이건 뭐 논란의 여지가 없겠더군. 그냥 주인공이 세 명인 영화라고 해도 전혀 무방해 보였어.”
“첫 등장씬에선 굉장히 섬뜩해야 하는데, 솔직히 가슴이 벅차오르더라고. 한국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스크린을 잡아먹고 있으니까 말이야. 하핫!”
“다른 할리우드 배우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연기력이었지. 사람들은 자네가 한국에 오는 게 금의환향이라고 하지만, 난 오히려 자네가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가 더욱 기대돼. 현지 반응이 엄청나다지?”
이 정도 금칠은 나쁘지 않았다.
내겐 우상과도 같았던 원로, 중년 배우들의 칭찬이니 오히려 감격이었지.
게다가 결국 그들도 같은 배우.
연기에 대해 이야길 시작하니 끝을 모르고 깊어졌다.
한참 동안 연기에 대해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며 즐거워하는데, 하선경 대표가 나타나 나를 파티의 주인공이라 치켜세웠다.
졸지에 전직원, 모든 배우들 앞에서 박수갈채를 받는 민망한 상황까지 펼쳐졌다.
감사합니다만 몇 번을 한 건지······.
한차례 부담스러운 인사들이 지나가고, 다시 파티를 즐기던 중 익숙한 얼굴에 반색하며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어, 어.”
우선 그 옆에 있는 최영기 실장에게부터 인사를 했다. 연장자이니 당연했다. 내가 아무리 할리우드에서 오래 지내다 왔어도 그 정도는 지킬 줄 안다고.
싱긋 웃어 보이자 그가 퍽 어색하게 인사를 받으며 주춤거린다.
그러더니 옆에 신승찬에게 뭐라 뭐라 말하고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신승찬이 피식 웃으며 다가온다.
“맞아. 도망가는 거야.”
“왜?”
“인지부조화가 왔나 봐. 네가 여전히 너무 싫은데, 대뜸 싫은 티를 내기엔 네가 너무 잘 돼버렸잖아. 예전처럼 대하는 게 맞나? 그건 위험할 것 같은데? 뭐 그런 하남자식 생각을 하다가 도망친 거지.”
“그 짧은 사이에 그런 얘기까지 했어?”
“그건 아니고. 화장실 좀 다녀오겠대. 근데 뭐 뻔하지. 그냥 그러려니 해. 속 좁은 양반이라, 나 잘 되는 거 말곤 다 싫어해.”
씩 웃는 신승찬과 손을 맞잡았다.
“그래도 자기 배우가 최고이길 바라는 게 어디야.”
“그런 생각으로 같이 하고 있긴 해. 그리고 무엇보다······ 은근 컨트롤이 쉬워.”
그런 이야길 나누며 근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래도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나저나, 당죽막 진짜 재밌게 봤다. 보면서 눈을 의심했네. 너 아닌 줄.”
“분장이 좀 세게 들어가긴 했지.”
“그것뿐만 아니라 연기도 결이 완전 다르더만. 뭐라고 해야 하나··· 분명 백승결인데, 그걸 의식적으로 생각 안 하면 어느새 파코스라는 역할에만 몰입하게 된달까. 그 역할 네가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더라. 지금처럼 내용에 집중하기 어려웠을걸?”
그의 말처럼 파코스는 영화에서 ‘긴장감’을 담당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적당한 긴장감은 집중력에 도움이 되지.
결국, 신승찬의 말처럼 파코스는 영화의 몰입을 도와주는 네비게이션과도 같은 역할이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신승찬과 또다시 영화 이야기를 이어갔다.
앞에 앉은 배우만 바뀌었다뿐이지, 우리들의 주제는 줄곧 연기와 작품이었다.
그때 신승찬이 가방에서 대본 하나를 꺼냈다.
순간, 얘도 글을 썼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대본에 적힌 이름을 보니 그런 건 아니었다.
“지금 컨택 중인 작품인데, 한 번 봐줬으면 싶어서.”
“내가?”
“응.”
“왜? 작품에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거야?”
“전혀.”
고개를 내저은 신승찬이 대본을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오히려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하고 싶어서. 좀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한데······ 감독님은 내 연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지 계속 고민하시더라고.”
거기까지 말한 그가 나를 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궁금해. 내 연기가 배역을 소화하기에 부족한 점이 뭔지.”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신승찬이 별안간 이걸 나에게 묻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사뭇 간절해 보이는 그의 눈빛을 보니 자연스레 대본을 받아들게 되었다.
“읽어봐도 돼?”
당연하다는 듯 끄덕거리는 신승찬.
대본을 넘기기 시작한다.
파티에서 대본을 읽고 있는 파티의 주인공(—하선경 대표가 그랬다)라니!
‘나쁘지 않은데?’
한동안 내가 쓴 대본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새로운 대본을 읽으니 머릿속이 환기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쭉 읽었다. 쉼 없이. 한 번에.
이 자리에서 이 정도로 집중하며 읽을 줄은 몰랐는지, 자신의 파트를 설명하려던 신승찬조차도 당황한 눈치였다.
어쨌든······.
“재밌네.”
“그치?”
“네 역할은 ‘신유’고?”
“······.”
“아냐?”
대본을 읽어내려가는 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신승찬이 어느새 커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퍽 놀란 눈치였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감독이면 그 역할에 캐스팅할 것 같아서.”
정말 그래서 넘겨짚었다. 물론 내심 확신이 있긴 했다. 캐릭터 성격부터 대사, 그리고 묘사까지. 딱 ‘신유’가 신승찬이겠구나 싶었거든.
“역시 너한테 물어보길 잘했네. 일단 연기를 좀 보여줘야겠지?”
그가 멋쩍어하며 주변을 살핀다. 건너편에 있는 미팅룸을 보는 것 같길래, 내가 말했다.
“아니, 안 봐도 될 것 같은데.”
“응?”
“안 봐도 알 것 같아. 뭐가 문제인지.”
#
“······그래서 연기에 대해 얘길 좀 나눴어요. 아마, 잘할 거예요.”
이른 아침 도착한 인천국제공항.
어제 신승찬과 무슨 얘길 그렇게 나눴냐는 김성운의 물음에 대략적인 내용을 풀어냈다.
나의 매니저이기도 하지만 신승찬이 속한 팀의 팀장이기도 한 김성운이니 충분히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물론 신승찬이 도와달라고 한 건 뺐다. 그냥 대화를 나누다 보니 연기 얘기가 나왔다고 했지.
“안정상 감독 작품 때문에 골머리 썩는 중이라는 건 들었는데······. 근데, 어제 잠깐 대화한 거로 정말 잘 될까?”
“네. 신승찬은 뛰어난 배우니까. 진짜 천재 같아요.”
“그럼, 그걸 가르쳐준 넌?”
내가 말없이 씩 웃자, 김성운이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입꼬릴 들어 올렸다.
옆에서 현태 형이 슬쩍 묻는다.
“너 연출 쪽엔 관심 없냐?”
“갑자기 그건 왜?”
“작품에 배우가 녹아들게 만드는 거. 그게 연출가들의 일이잖아. 근데, 네가 그것도 잘할 것 같아서. 뮤튜브 찍을 때도 네가 제안하는 장면이나 연출에 내가 몇 번을 놀랐다니까?”
“뭐, 재미는 있을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아직은.”
일을 너무 벌여놨다.
내 글을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는 결심을 하면서, 연출도 맡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러면 연기에 시간을 할애하는데 여러모로 문제가 생겨버린다.
여전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연기였기에, 어쩔 수 없이 포기했지.
‘하선경 대표 말대로 내 작품에 내가 출연하면 해결될 문제긴 하겠다만······.’
이것 역시 아직은이다. 아직은.
‘작가로서의 자유를 누려보고 싶어.’
내가 출연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작품이 주목을 받게 될 터.
심지어 내가 영화도 아니고 연극 무대에 선다?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면 작가가 누구인지 어물쩍 넘어가는 것이 어려워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때까지만해도··· 그렇게 착각했었다.
내가 출연하지 않으면.
영화도 아닌 연극이라면.
소규모 투자라면.
나는 진짜, 내 작품이 주목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