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흉내자들 (1)
안 감독은 서재에 앉아 있었다. 아니, 일어났다.
······다시 앉았다.
이어지는 심호흡.
스피커폰으로 바꿔둔 핸드폰 너머의 침묵이 안 감독에겐 너무나 길었다.
그만큼 이 작품이 안 감독에게 간절해져 있었다.
하람에서 이걸 받아올 때까지만 해도 이럴 줄 상상도 못 했지.
그는 자신이 이 작품에 이렇게 푹 빠지게 된 이유를 당장 수십 가지 델 수 있었다.
하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이 작품의 첫 시작을 함께하고 싶어서.’
그것도 자신이 가장 자신 있고, 또 잘했던···.
청춘을 불태웠던···.
연극 연출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이제 영화 감독이 된 그였지만, 그럼에도 연극은 여전히 그에게 가장 능수능란한 도구였으니까.
그렇게 간절해진 덕분에, 하선경 대표의 놀란 침묵이 퍽 곤욕스럽다.
내심 캐스팅으로 오랫동안 괴롭힌 신승찬에게 미안해진다. 거울치료랄까.
그때 하선경 대표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감독님이요?
“네, 제가 연극 감독도 겸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속으로 살짝 조급해 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연극 연출가를 소개해달라기에 최고의 연극 감독을 추천했으니까.
바로 자신. ‘연극’이란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니까.
—지금 영화 준비 중이시잖아요?
“연극도 보기보다 준비 기간이 꽤 됩니다. 촬영하는 동안 차근차근 준비해서 지금 하고 있는 영화가 개봉하면, 그때쯤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할 수 있겠죠. 영화 두 편도 그렇게 하는 세상에, 연극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준비해둔 대답을 척척 내밀자 하선경 대표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감독이 지금 진심이구나?
그걸 확인한 하선경 대표가 몇 배는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 감독님이 연극과 영화 연출을 모두 맡아주신다면 저희에게 너무 좋은 일이죠. 연극 연출의 정점이셨잖아요. 게다가 시작부터 영화적 연출도 고려하면서 제작할 수 있을 테니 영화화도 훨씬 수월할 거고요.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시원시원한 하선경 대표의 목소리에 안 감독의 시선이 내려갔다.
어느새 그의 손에 들린 대본.
이 작품의 이름에 눈길이 향했다.
[흉내자들]
확실히 독특한 제목이다.
‘흉내자’가 대체 뭘까. 그런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이어지는 부제는 더욱 인상적이다.
[타인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사람들]
내용은 또 어떤가.
그리고 예상도 못 했던.
아니, 어쩌면 예상하기 싫었던 그 결말은···!
어우, 이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다.
작가를 만나서!
“이 작가님, 대체 누굽니까?”
—작가요? 아, 작가님······ 그, 왜요?
하선경 대표의 말은 듣던 중 황당했다.
왜냐니. 이제 작품을 연출할 감독인데?
그의 황당함을 읽었는지 하선경 대표가 얼른 수습한다.
—그게··· 작가님이 부끄러움이 많으세요.
그래, 그럴 줄 알았다. 필명 어쩌고 할 때부터.
안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작가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걸.
저렇게 내성적인데 어떻게 저런 기깔나는 대사를 쓰는지 모르겠는 독특한 존재들.
“연락처 주시면 제가 한 번 연락드리고 찾아가 보겠습니다. 대본 관련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아요.”
—그쵸. 대본 얘기··· 하셔야죠. 그러면 저희도 한번 작가님께 연락드리고, 감독님과 통화나 문자 가능하실지 여쭤볼게요.
“아, 직접 만나는 게 아니라요?”
—아, 작가님이 지금 멀리 계셔서······.
이에 안 감독이 문제 없다는 듯 으쓱거렸다.
신승찬의 캐스팅을 확정 지으며 영화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타이밍이라 빠듯하긴 했지만.
이런 작품의 작가라면 기어코 하루 시간을 내서 어디든 갈 생각이었다.
“작가님 댁이 지방인가 봅니다. 근데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갈게요. 부산이더라도 갑···.”
—미국이라서요.
아, 그건 좀······.
#
“······그렇게 됐어요.”
왼쪽부터 김주철, 임현태, 김성운.
세 사람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건 셋 중 유일하게 들뜬 얼굴인 김주철이었다.
“안 감독님이면 그때 그분 아녜요? 신승찬 배우랑 미팅했던.”
“맞아.”
김성운의 대답에 김주철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근데 그분 영화 촬영 하시는 중인데, 연극 연출도 가능한 거예요?”
“연극이란 게 애초에 라이브 개념이라 리허설까지 완벽하게 하려면 은근 준비 기간이 길거든. 그래서 살짝 엇갈리게 스케줄 잡으면 못할 건 아닌가 봐. 요즘은 영화도 그렇게 찍으니까. 대표적으로 크리스 감독이 그런 식으로 몇 년 전부터 쉴 새 없이 만들잖아. 배우들이야 주연만 아니면 동시에 두, 세 영화씩 찍기도 하고. 근데 정작 내가 신기한 건······.”
매니저 꿈나무에게 성실하게 답해준 김성운이 팔짱을 끼며 날 본다.
“쟤가 대체 언제 글을 썼냐는 거야. 그것도 바로 제작이 가능할 퀄리티의 글을.”
“하하, 틈틈이?”
내 대답에 현태 형이 억울해하며 물었다.
“아니, 이 정도면 굳이 굳이 숨어서 쓴 거 아냐?”
“뭐, 굳이 나 글 쓰고 있어요, 보여주진 않았지.”
“왜!”
“카메라에 담길까 봐.”
“젠장, 찍었어야 했는데! 이 음흉한 자식!”
“찍는 사람이? 찍히는 사람이?”
내가 어처구니 없어하며 되묻자, 아쉬움으로 점칠 돼 있던 현태 형의 표정이 붕 떴다.
“아, 그러네. 보통은 찍는 쪽이 음흉한 거지······.”
옆에서 김성운이 혀를 찼다.
“넌 논리로 승결이 이기려면 안 된다니까.”
“그러면요?”
“무지성. 생떼.”
“아! 오케이, 접수.”
속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라는 거 안 밝히고 필명으로 활동할 거라, 형 카메라엔 안 찍히는 게 맞아. 형이 나 외국어 공부하는 거 다 찍어서 G.A라는 해괴한 별명이 생긴 거잖아.”
“에이, 그게 언어 때문만은 아니지. 연기를 못하지 그랬어. 그럼 주목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그게 무슨 말이야, 배우한테.”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현태 형이 뿌듯해하며 김성운을 바라본다. 무지성, 생떼. 이렇게 하면 되는 거냐며.
김성운은 또 거기다 끄덕여주고 있다.
“그래, 잘하네.”
이 사람들이······.
그때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김주철이 말했다.
“형, 나중에 감독도 하시는 거 아녜요? 진짜 멋있겠다······.”
“그렇게 성공한 배우가 국내엔 한 명도 없지 않나?”
현태 형이 되물었고, 김주철이 헤죽 웃었다.
“그럼 승결이 형이 유일하겠네요?”
“얘가 조직생활을 해서 그런지 사회생활을 잘해.”
“···그거 칭찬 맞죠?”
질려하는 현태 형과 칭찬을 갈구하는 김주철.
그리고 작품에 대해 비로소 진지하게 묻는 김성운.
“안정상 감독이 흉내자들 준비하는 동안 넌 ‘당죽막2’ 찍을 텐데 감독이랑 소통은 어떻게 하고?”
“아마도 화상 통화를 하게 될 것 같아요. 최대한 나라는 걸 노출하고 싶지 않았는데, 원활한 소통을 위해선 감독과는 얼굴 보고 이야길 나눠야겠더라고요.”
“하긴··· 어차피 지금 ‘당죽막2’ 준비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네가 정체를 숨기지 않더라도 그게 최선이긴 하겠네.”
주억거리던 김성운이 대본을 만지작거리며 덧붙여 물었다.
“그런데 굳이 왜 숨기려는 거야? 이 작품이 네가 쓴 거란 걸.”
“내 새끼가 나라는 이름에 가려져서 제대로 기 못 펴는 건 싫어서, 랄까요.”
슬쩍 한이연 감독을 따라 하며 말했다.
“아··· 확 이해되네. 그렇겠다. 네가 어떤 옷 입었는지만으로도 기사가 수십 개씩 나는데, 네가 쓴 작품이라고 하면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분해하고 헤집겠지.”
“작품을 표현할 도구로 연극을 선택한 것도 비슷한 이유예요. 윤 감독이 어떻게 ‘범죄인도자’라는 좋은 작품을 망치게 되는지 다 봤잖아요.”
“그랬지. 소문 들어보니 윤 감독 지금 끈 떨어진 연이라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더라. 솔직히 영화 망했을 땐 사이다였는데, 이제 보니 좀 불쌍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얼마간 더 내 방에서 떠들다가, 나만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잘 다녀와! 승결 없는 승결 방 잘 쓸게.”
이렇게 객들의 배웅을 받으며······.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라운지로 향했다.
불과 며칠 전에 봤던 크리스 감독이 라운지에 앉아 식사 중이었다.
“회의는 잘 마쳤나?”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며 그가 물었다.
“네. 그나저나, 점심을 이 시간에 드시는 거예요?”
“나도 회의하느라 늦어졌어. 자네도 뭐 먹겠나?”
“괜찮아요. 아침을 조금 늦게 먹어서. 그나저나, 축하드려요.”
“음?”
“흥행수익 역대 순위권 안에 들어가신 거.”
“아아.”
크리스 감독이 와인잔에 담긴 물을 들이켜며 피식 웃었다.
사실 저 정도의 반응으로 퉁 쳐질 만큼 사소한 일이 아닌데 말이지.
미국은 인구도 많고 자본주의의 나라인 만큼 우리나라의 ‘천만 영화’ 같은 기준보다는 영화 수익으로 순위 매기길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 감독은 본인의 최고기록은 진즉에 넘어섰으며.
이제는 역대 수익 기록에도 들어갔다.
13억 달러.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이 상상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벌어들인 것이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다들 후속작 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난리야. 유니버셜에서도 작업실로 우르르 찾아왔더라고.”
아주 귀찮다는 듯 말하던 그가 손을 뻗어 가방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내가 받아들자, 다시 포크로 고기를 푹 찍어 입에 넣는다.
“그래서 그걸 보여줬지.”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
대본에 적힌 글자를 보자마자 내가 놀라 물었다.
“벌써 끝나신 거예요?”
그가 후속작을 계획한 지 고작 계절 하나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시놉도 아니고 대본이. 심지어 완성본이 턱하고 내 앞에 놓여진 것이다.
그 과정을 지켜봐 온 나로서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배경 설정이 1편을 통해 어느 정도 잡혀있다 보니 훨씬 수월하더군. 반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제약은 많아졌지. 내가 이 설정을 왜 이렇게 짰었지? 그런 부분들도 보이고. 그것들을 교묘하게 맞추느라 오히려 시간이 오래 걸린 거야. 자네와 이야기하며 스토리는 거의 다 완성되어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생각보다 빠르게 2편 촬영에 들어가게 생겼다.
얼른 크리스 감독과 얘기했던 장면들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던 나로서는 쾌재를 부를 일이지.
그래서 설렜다. 표지를 넘기기 전까진, 분명 그랬었다.
“······제 대본에만 이렇게 인쇄하신 거죠?”
“음? 다 똑같지 무슨 소리야. 특별하길 바라는 건가?”
“아뇨. 그럴 리가요. 특별하지 않길 바라니까 여쭤보는 거죠. 지금······ 이게 이미 너무 특별하잖아요. 진짜 다른 대본도 다 이거랑 똑같아요? 유니버셜 직원들이 본 것도?”
“똑같아. 말했잖아. 이렇게 안 하면 나 이거 못 찍는다고. 함께 만든 걸 어떻게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그건 내 신념에 맞지 않아.”
[각본: 크리스 디벗, 백승결]
······이건 내 성향에 맞지 않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