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흉내자들 (2)
안 감독은 이른 아침부터 대학로 방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대학로를 아주 조금 지나쳐, 젊음의 열기가 남아 있지 않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도시. 여느 서울의 골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 길 끝에서 안 감독이 걸음을 멈췄다.
지하에 극장이 있는 5층짜리 낡은 건물.
확실히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낡은 것을 힙하다고 포장하는 시대이지만, 이건 그걸 넘어섰다.
“리모델링을 하면 좋을 텐데···.”
하긴, 이 건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 동네가 재개발이 되어야 예전과 같은 활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
이 생각은 건물 5층에 있는 극단 사무실에 올라서며 더 확고해졌다.
[가내수공업]
연극을 만드는 게 아니라 바느질이나 풀질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간판을 지나 사무실로 들어서니.
대학로가 한눈에 보이는 전경이······.
없다. 없어졌다.
대학로 유동인구가 한눈에 보이던 시야가 새로 지어진 건물들로 완전히 가려졌다.
마치 ‘여기까지가 대학로다. 너흰 못 들어간다.’ 라고 수문장마냥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뿐인가, 여기까지 오면서도 느꼈지만 사람이 너무 없다.
술집이 모여있는 곳엔 이른 오후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이쪽은 전멸이다.
······안 감독이 할 말을 잃고 창문을 바라보는데.
이윽고 구석구석에서 하나둘 기어 나오는 극단의 주춧돌... 아니, 고인물들.
“오셨어요, 감독님!”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커피 드릴까요? 오랜만에 제가 탄 믹스 커피 어떠세요.”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에 반가워하며 인사하면서도 안 감독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요즘 연극 보는 사람이 많이 없냐. 오는데 텅텅 비었더라.”
“뭐···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해요.”
“그게 무슨 다 좋은데 안 좋은 소리냐.”
얼른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믹스 커피 봉지를 세 개 뜯은 단원이 종이컵에 두 개 반 쏟아 넣으며 쓰게 웃었다.
“빈부격차가 건물에만 있는 게 아니란 거죠. 잘생긴 남자 배우들이 우르르 나오는 연극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뮤튜버 누가 나오는 공연도 매진이고. 근데 정극이나 마술 쪽은······ 그나마 예전부터 유명한 몇몇 공연들을 빼고는 살아남은 게 없죠. 그래서 오리지널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없고요.”
“이번에 너희가 했던 거 오리지널 작품 아니었어?”
“천추요? 맞아요. 그래서 후회 중입니다. 제목 따라 갔죠. 천추의 한입니다.”
“왜, 평가 좋더만.”
“평가만 좋으면 뭘 합니까. 평가 좋다고 관객이 많아지는 것도 아닌데.”
“흐음.”
침음성을 삼킨 안 감독이 양손 가득 들고 온 초밥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쓴 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듯했던 단원들이 방긋 웃으며 모여들었다.
“뭐 이런 걸 다. 저흰 드릴 게 없어서 이 커피라도···.”
“야, 이거 오랜만에 먹으니 죽이네.”
“자양강장제도 이거 못 따라옵니다?”
빙그레 웃은 단원이 젓가락을 똑 하고 떨어트리며 군침을 삼킨다.
“예전엔 이렇게 칙칙 굽는 것들이 돈 있어야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날 거 먹는 게 더 어려워요.”
“얘가 지난번에 소개팅에서 썸녀랑 오마카세를 다녀온 거예요. 그러더니 연애에 눈을 뜬 게 아니라 초밥에 눈을 떠서 요즘 아주 환장합니다.”
그렇게 단원들의 근황을 들으며 웃던 안 감독이 포장을 뜯으며 말했다.
“여기 잘해. 많이 사 왔으니까 실컷 먹어. 먹으면서 작품 얘기나 좀 하자. 다 읽어봤지?”
“뉍.”
“다 읽어봤죠.”
“······어땠어?”
안 감독이 툭 던지듯 물었고, 이어지는 반응은 심드렁한 표정들이었다.
별로였나? 그건 아니다.
막상 그들 입에서 나온 대답은······.
“미쳤어요. 너무 재밌어.”
“보다 울었습니다.”
“얘 진짜 울었어요.”
“넌 아닌 것처럼 말한다?”
극찬이었으니까.
이에 안 감독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결말은 괜찮았어?”
“아, 결말! 그거 할 말 많죠. 작가 진짜 너무한 거 아녜요? PTSD 오졌어요.”
“근데, 그래서 더 좋았어요. 오히려 위로를 받았죠. 트럭에 제대로 치였는데, 오히려 디스크가 나은 느낌이랄까.”
“이 마조히스트들···.”
혀를 찬 안 감독이 덧붙여 묻는다.
“근데 표정들은 왜 그래.”
“너무 좋아서요. 최근에 작업했던 천추도 좋았는데, 그것보다 더 좋아서.”
“그래서 천추보다 더 망하려나 걱정 중이에요. 평가랑 흥행은 다르잖아요. 이걸 관객들이 좋아할까 싶어요. 이젠 정말 모르겠어요. 뭘 좋아할지···.”
“그냥 우릴 안 좋아하는 걸지도···.”
급격히 침울해지는 단원들을 보며 안 감독이 피식 웃었다.
“자학하지 말고, 제대로 얘기 해봐.”
“말했던 것처럼 너무 좋아요. 너무 좋은데 뭐랄까. 우리한테만 좋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왜? 너무 너희 얘기 같아?”
“맞아요. 그거예요. 아니, 사실 우리 얘기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우리 얘기잖아요. 정확히는··· 배우들의 이야기.”
“그래서 더 괜찮지 않아? 내가 우리 얘길 좀 해줄 테니 들어 봐. 이런 느낌이지.”
툭 말한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덧붙였다.
“그런데도 안 듣는다? 상관없어. 너흰 망할 걱정 안 해도 돼.”
“왜요?”
“이거 하람에서 제작할 거거든.”
“···!”
바쁘게 놀리던 젓가락마저 멈췄다.
두 사람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안 감독을 바라본다.
“갑자기 하람이 여기서 왜 나와? 미쳤다. 하람이 연극도 제작해요? 영화 쪽은 투자 많이 한다고 듣긴 했는데······.”
“거기 대표가 작품 보는 안목 좋기로 유명하잖아. 그래서 영화 쪽 투자는 예전부터 했었는데, 최근엔 제작 쪽도 관심을 두는 것 같더라고. 어디서 이런 기깔나는 작가를 구했는지.”
“거기 극단 출신 배우들이 은근 많잖아요. 김상억 선배님도 극단은 달라도 대학로 출신이시고, 또 이태관 선배님도 극단 출신······ 그래서 도와주는 건가?”
“도와주긴 뭘 도와줘. 너넨 그 마인드부터가 문제야. 연극이 하고 싶어요! 이 난리 치면서 강백호 따라 하더니, 연극판에 남겠다던 패기 다 어디 갔어?”
한마디 쏘아붙인 안 감독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아무튼. 할 거지?”
“···하람인데 안 하면 병신이죠?”
안 감독이 끄덕였다.
“상병신이지.”
“으아, 진짜 사람 죽으란 법 없구나. 천추 망하고 진짜 어떡하나 했는데. 이렇게 또 기회가 오다니.”
“제대로 해보자. 편견을 깨보자고. 연극판에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은 나올 수 없다는 편견도······.”
감복하는 단원들을 지켜보던 안 감독.
그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연극 작품은 영화화로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도.”
“네! 저희 진짜 열심히 한 번······네?”
“영화화···요? 그게 무슨 얘기예요?”
“뭐야, 뭐야. 나 설레?”
모난 돌처럼 팍 튀어 오르는 반응에 안 감독이 킬킬거린다.
“이거 영화화 확정됐어.”
안 감독의 대답을 기다리던 모두가 벙찐 얼굴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아니, 이상했다. 확정이라니. 어떻게 확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연극이······ 제작도 안 됐는데요?”
하다못해 성적이라도 보고, 그러고 나서 제작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그런 표정들을 보며 안 감독이 일반적이지 않은 이 상황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알게 뭐람. 하람이랑 굿픽처스··· 그리고 내가 움직였는데.”
#
할리우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미 역대 흥행수익 9위에 랭크 되었던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이 막판 스퍼트를 받아 8위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13억 5천만 달러)과 7위인 어벤저스2(14억 500만 달러)마저 재치고, 6위인 분노의 질주7(15억 1600만)의 아성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이 시리즈 학살자라는 별명까지 붙였을까.
이쯤 되니 모두의 화두는 자연스레 하나의 꼭지점으로 모여들었다.
번개 모양 흉터 재끼고, 쫄쫄이 영웅 동호회 보내고, 머머리 브라더스와 양카들마저 위협하는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이 과연 후속작이 나올까.
대부분은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1편만한 2편 없다는 공식은 깨어진 지 오래였지만,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의 문제는 그런 단순한 게 아니었다.
이야기가 너무 맺어졌다는 것.
그러니 후속작을 만들게 된다면 억지스러운 전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게 대중들의 결론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신중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2편의 제작을 고민하냐고? 아니다. 2편의 제작은 이미 확정되었다.
심지어 영화사의 전폭적인 지지로 1편의 2배에 가까운 제작비를 받게 되었지.
크리스 감독의 상상력이 돈에 비례해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소식을 어떻게 알릴 것인지.
그걸 고민해야 했다.
그냥 촬영을 시작하면 자연스레 퍼질 소문에 기댈 것인가.
아니면 기사로 발표할 것인가.
혹은 다소 부정적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줄 어떤 이벤트를 준비해야 할까.
나는 솔직히 세 번째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내 의견을 말했다.
그 이벤트의 주인공이 내가 될 거란 생각은 못 하고······.
‘작품의 미래는 봐도, 내 상황은 정말 한 치 앞을 못 보는구만.’
그렇게 나의 아늑한 호텔방에서.
‘후속작 발표’라는 거대한 연극의 주인공이 되어 무대 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세이디 쪽에서 연락은 안 왔어?”
김성운의 물음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끄덕였다.
“네. ‘배넌 쇼’ 촬영 들어간다고 전화 온 뒤로는 아직 아무 연락도 없네요.”
“하하, 왜 내가 떨리냐.”
“사실 저도 떨려요. 폭탄을 떨어트리기 직전이잖아요.”
“그치. 역사적인 순간이잖아. 소문만 무성한 당죽막의 후속작을 발표하는!”
김성운 뿐만 아니라 현태 형과 김주철도 상기된 표정으로 내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세이디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다.
[세이디 지금 배넌 쇼에서 인사 마쳤어요. 이제 전화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문자를 보자마자 핸드폰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이어지다가.
달칵.
세이디가 전화를 받았다.
이제, 연극을 시작할 차례였다.
#
—뭐, 세이디야 소개가 필요없는 최고의 배우죠. 그것보다 제가 궁금한 건··· 아니, 여기 방청객들뿐만 아니라 이 방송을 보실 모든 시청자분들이 궁금한 건. 세이디가 과연 차기작으로 어떤 작품을 선택할 것이냐는······.
배넌 쇼의 호스트, 배넌 테일러.
그가 인사를 마친 세이디에게 첫 질문을 건네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세이디에게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순간 방청객의 집중이 다시 세이디에게로 쏠리고.
배넌이 모른 척 물었다.
“아니, 핸드폰을 가지고 쇼에 올라온 거예요?”
“죄송해요. 중요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세이디. 우리 쇼도 중요해요. 게다가 지금 제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알아요. 아는데, 이건 그만큼 중요한 연락이라서요. 받아도 될까요?”
이에 배넌도 제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얼른 받으라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세이디가 전화를 받으며 곧바로 스피커폰을 켰다.
방청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
—세이디.
“어, 승결.”
배너가 의자에서 튀어 오르듯 들썩거리며 놀란다.
“백승결? 왓더···!”
그의 반응은 연기였지만, 방청객들은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갑자기 쇼가 시작되었는데 전화가 오질 않나, 그걸 받았더니 백승결이라니.
—대본 받아봤어?
“아니 아직. 근데 나 아직 무슨 소린지 이해 못 하겠어. 어떻게 내가 등장한다는 거야? 난······ 죽었잖아.”
두 사람은 배넌이나 방청객이 없는 것마냥 스피커폰으로 떠들고 있었다.
심지어 그 내용은 경악을 금치 못할 것들이었다.
—그랬지. 그런데 대본엔 네 이름이 있어.
“무슨 멀티버스야?”
—당연히 아니지. 회상씬이야.
“잠깐, 잠깐. 근데 나 지금 티비 쇼야.”
—뭐···!?
화들짝 놀라는 백승결에 배넌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가 세이디의 핸드폰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가, 가만가만. 이게 대체 무슨 얘기죠?”
—누구······.
“안녕하세요. 저 배넌이에요! 배넌 쇼의 배넌.”
—어······ 망했네요. 제가 실수했어요. 듣는 사람이 있을 줄 모르고······.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요! 대본이라뇨! 죽었는데 회상씬이라뇨!”
—제가 크리스 감독님한테 죽었다는 소리죠.
“푸하핫!”
껄껄거리는 배넌에게 백승결이 목소릴 낮추며 말했다.
—에라, 모르겠네요. 이건 꼭 호스트님만 아셔야 해요.
배넌이 눈썹을 으쓱거리며 방청객 쪽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검지로 쉿 하는 제스처를 하며 씩 웃었다.
“물론이죠.”
방청객들이 그 모습에 박장대소를 했지만, 백승결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저 말만 꿋꿋이 해냈다.
—제가 대본을 하나 받았어요. 그리고 여기 제목이······ 좀 특이하네요.
배넌이 입을 쩍 벌리더니,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망했다는 듯 이마를 짚는 세이디와 기대감에 휩싸인 방청객들.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
백승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청석에서 폭발적인 환호가 밀려 내려왔다.
제대로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