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63화 (163/167)

163화 흉내자들 (6)

감독이라고 하면 현장에서 엉덩이에 딱 맞는 캠핑의자에 앉아 메가폰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도 적지 않다.

특히나 현재 ‘이태원 찻집’을 찍으면서 연극 프로젝트에 영화화까지 계획되어 있는 안 감독의 필드는 더욱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오셨어요!”

“어, 곧 가실거야.”

잠깐 사무실에 들른 안 감독이 손을 흔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후, 지난밤에 준비한 자료들을 한가득 챙겨 나서는 그.

직원들이 샌드위치 하나를 건네며 그런 그를 배웅했다.

“이거 저희 먹으면서 하나 더 사놨어요. 가면서 드세요.”

“고맙다. 잘 먹을게.”

“대학로로 가시는 거죠?”

“응. 콘티 주고 얘기 좀 하다가 오려고.”

“작가님이 다 확인하면 가신다더니, 벌써 확인하신 거예요?”

“어. 그걸 이틀만에 다 봤더라.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안 될텐데, 잠을 안 자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갸웃거리는 안 감독에 ,직원들의 궁금증은 점점 더 커져갔다.

“대체 뭐하시는 분인데요. 글만 쓰시는 게 아닌 거예요?”

“전업은 아니신 거죠? 아르바이트 막 두 세개씩 뛰면서 쓰시는 거예요?”

“차라리 그게 더 쉽겠다 싶은데······.”

“그 정도라고요?”

작가의 정체를 ‘은퇴한 무명 중년 배우’ 쯤으로 예상했던 막내 직원이 갸우뚱하자 안 감독이 킬킬 웃었다.

뭐 하나 맞은 게 없었다. 은퇴는 커녕 할리우드 스타에, 중년이 아니라 청년이지.

“넌 진짜, 나중에라도 알게되면 이불킥 할 거다.”

“엥. 왜요? 제 예상이 틀려서요? 아니면 아니지 뭐 이불킥까지야.”

“아무튼 배우는 아닌가보네.”

“직업은 그렇다쳐도 어떤 분인지 너무 궁금한데······.”

헛다리 뒤로 또 헛다리를 짚는 직원들을 보며 안감독이 헛수고 말라는 듯 말했다.

“너네 어차피 몰라.”

“왜요? 일반인이라?”

아니, 상상도 못할 거라.

#

퇴근길 도로를 피하려고 급하게 움직였는데, 요즘 서울의 러시아워는 오후를 통틀어 부르는 말인가보다.

한참동안 도로 위에서 성격급한 사람들과 미러전을 한 뒤에야 안 감독은 낡은 건물을 오를 수 있었다.

“여기 왔다갔다 하다가 성격 다 버리겠네. 어후.”

“그러게 대중교통으로 오시라니까요?”

“이 무거운 걸 들고?”

“···종이가 두껍긴 하네요.”

“그만큼 너희들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겠지?”

극단, 가내수공업 사무실에 도착한 안 감독이 툴툴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전과는 사뭇다른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흡사 좀비들이 생활하는 던전을 방불케하던 이곳에 생기가 돈달까.

이제야 좀 사무실이라 불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 일단 이것부터 좀 봐주세요. 무대 관련해서 저희가 작업한 건데······.”

단원들이 안본사이 작업한 것들을 가져와 풀어놓았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안 감독도 기분이 묘해졌다. 연극판에서 함께 구르던 그 때로 돌아온 것 같아서.

“야 이거 잘 했다. 몇몇 소품은 스크린으로 옮길 때도 사용할 수 있겠는데?”

“저희가 돈만 있으면 브로드웨이 뺨칩니다. 괜히 극단 이름이 가내수공업인 게 아니라구요.”

단원들의 너스레에 안 감독이 풀풀 웃는다.

이에 따라 웃던 단원들 중 한 명이 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캐스팅을 이제 슬슬 시작해야할 것 같은데. 작가님하고는 얘기 해보셨어요?”

“응, 해봤어. 오늘 그것도 얘기하긴 해야 돼.”

“뭐라셔요?”

“역시 스타성 있는 연극 배우들을 원하시겠죠?”

“하람이 제작하는데 당연히 그렇겠지.”

이어지는 추측들에 안 감독이 콧잔등을 긁으며 가져온 종이 뭉치를 뒤적거린다.

“흐음······뭐라고 해야 돼. 원하는 배우들이 있는 것 같긴 하더라.”

“역시······.”

모두가 씁쓸해하면서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이 업계가 원래 그러니까. 자본이 들어왔으면 그게 당연하니까.

“아, 여깄네.”

안 감독이 종이 뭉치 속에서 낱장으로 된 프린트물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근데, 꼭 그 배우들이어야 하는 건 아니래. 그 배우들이 하겠다고 할지도 모르는 거고, 가장 중요한 건 나나 연출부도 만족하는 배우들이니까. 오디션만 한 번 고려해달라고 하시더라고, 작가님이.”

“어떤 배우들인데요?”

“이름들 보면 너네도 익숙할 걸.”

“성지환? 이태준? 한여량?”

고민도 없이 몇 개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현 연극계에서 섭외 1순위인, 하나같이 연극계에서 유명한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는 안 감독의 머리는 멈출줄을 몰랐다.

“아니······ 이 중에 한 명도 없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연극계에선 흥행 공식과도 같은 배우들이 모두 지나가자, 더는 떠오르는 이름이 없는 단원들이 대놓고 물었다.

“그럼 대체 누굴 원하시는데요?”

그 사이,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인 안 감독이 턱을 두개 만들며 종이를 내려다본다.

“일단 주연 중 한 명은 양기전 배우.”

툭 던진 말에, 순간 단원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입에선 일본인의 그것과 비슷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에에에에? 기전이 형이요? 주연으로요?”

안 감독이 다시 한번 끄덕이자, 단원들이 들썩거렸다.

“그 형은······ 너무 좋죠!”

“천추에서 그 형 연기 너무 좋았거든요.”

“저희도 사실 그 형 추천하고 싶었는데. 물론 주인공으로는 생각 못했지만, 작가님 보는 눈 있으시······.”

기분 좋게 목소리를 높이던 단원이 순간 멈친했다.

그리고 나머지 단원들을 보며 말꼬릴 내렸다.

“정말 보는 눈이 있는걸까······우리랑 기전이 형··· 이미 망한 조합이잖아······.”

“그 망한 조합이 좋았던 것 같은데. 작가님은.”

“···?”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들에 안 감독이 말했다.

“천추를 보셨대. 그게 너무 좋았고.”

“······저희 작품을 보셨다고요?”

“어, 언제요?”

“모르지. 언제 한국에 오셨었는지는.”

뭐, 아마도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개봉 직후 한국 방문했을 때겠지만.

안 감독이 으쓱거리자, 순진하게 그 말을 믿고서 혀를 내두르는 직원들.

“와, 너무 신기하다.”

“그때 기전이 형을 되게 좋게 보셨다보다.”

“그럼 다른 주연들은 또 누구누구 있어요?”

종이로 모여드는 시선에 안 감독이 호명을 이어갔다.

그럴 수록 단원들의 표정이 점점 더 이상해진다.

양기전을 주인공역에 원한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그 뒤로 불리는 이름들은 더 이상했다.

“가만가만, 현재 연극 배우로 활동하지 않는 분들도 있는데요?”

“맞아. 독립영화판부터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까지 다양하지.”

“아니,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야 연락이라도 되지만, 다른 분들은 . 아예 찾는 것부터가 난관이겠는데······.”

배우 생활을 접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말할 수 있겠나.

단원의 걱정에 안 감독이 웃었다.

“그건 우리가 걱정 안 해도 돼. 작가님이 찾으실 거래. 주변에 사람 찾는 거 잘하는 사람이 둘 이나 있다네.”

한명은 20년 전 방송에 잠깐 얼굴 비친 일반인도 찾는다는 근황마라톤 피디에.

한명은 지인들이 탐정 사무소를 운영한다나.

물론 이걸 말해줄 순 없기에 속으로 혼자 킬킬거리는 안 감독.

이쯤되니 단원들은 안그래도 궁금했던 작가의 정체에 더욱 의문을 품게 되었다.

“대체 뭐하는 분이세요?”

#

“수고하셨습니다!”

연극 ‘천추’의 무대를 마치고 내려와 대기실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난사하는 양기전.

누가보면 무척 성공적인 무대였나보다 하겠지만, 오늘도 두 타임 합쳐서 좌석의 절반도 못 채운 게 현실이었다.

“배고프지? 나도 안 되겠다. 요 앞에 냉동삼겹살집 생겼던데, 오늘 가자.”

“형님, 그때 형수님 몸 안 좋으시다던 건 어떻게 됐어요? 아우, 다행이다.”

“막내야, 너 오늘 여자친구 만난다며. 이걸로 고기는 못 썰겠지만, 면치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그냥 주는 거 아냐. 오늘 너 진짜 잘했어.”

“아, 오늘 망했다고 내일도 망하나? 다들 어깨 피자 쫌.”

그런 와중에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침울한 분위기를 살리는 양기전이었다.

그때 컨트롤룸에서 나온 가내수공업 극단의 단장, 김진태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형. 형부터 좀 펴요. 형 라운드 숄더 장난 아냐.”

“야, 이거 연기야 임마. 생활 연기.”

“뭔 노트르담의 곱추 찍을 예정이에요? 그리고 5년째 그 자세면 그건 연기가 아니라 그냥 형인 거죠.”

낄낄 웃은 김진태가 살짝 목소릴 낮추며 말했다.

“형,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 들어오세요.”

“뭐야, 무섭게 왜 그래.”

“아, 빨리요.”

손짓하는 김진태를 따라 컨트롤룸으로 들어간 양기전.

그에게 김진태가 말했다.

“형, 오디션 하나 보실래요?”

“좋지.”

고민도 없이 바로 넘어온 대답에 김진태가 이마를 짚었다.

“아니, 어떤 작품인지를 먼저 물어보셔야죠.”

“어떤 작품인데?”

“배우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이걸 하람에서 제작을 하거든요.”

“오, 나 하람에 이태관 선배랑 김상억 선배랑 친한데?”

“친분 잘 들었고요. 지금 이거 스케일이 커요. 어쩌면 정말 큰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근데 그런 연극의 주연 중 한 자리를 형이 맡았으면 좋겠다고 작가님이 콕 집어서 언급하셨대요.”

“그것 참 감사하네. 작가님이 누구신데?”

“몰라요.”

“···?”

“감독님만 알아요. 뭐, 그게 조건이었다나. 아무튼, 오디션 보실 거죠? 이거 잘 되면 더 감사할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더 감사한 일?”

하람에서 제작하는 스케일 큰 연극.

거기서 주연 배역을 따내는 것보다 더 감사한 일이 뭐냐는 듯한 양기전의 질문에.

김진태가 불과 어제 안 감독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대체 작가님의 정체가 뭐냐고 묻자, 씩 웃어보인 안 감독이 덧붙여 말했지.

‘그건 말 못하지만, 더 놀랄만한 얘긴 남았지.’

‘또 뭔데요?’

‘작가님이 하람 대표님, 굿픽처스 대표님이랑 아예 담판을 냈대. 그래서 나랑도 이걸로 두 시간 정도를 얘기했는데, 결국 나도 따르기로 했어.’

‘······그래서 그게 뭔데요. 무섭다 이제.’

꿀꺽, 침을 삼키며 물어보자 안 감독이 갑자기 다른 얘길 시작했다.

‘이번 연극 배우 캐스팅 정말 신중하게 해야돼.’

‘에이, 그거야 당연하죠. 근데 무슨 얘길 나누셨는데요.’

‘그날 영화팀도 같이 와서 같이 심사할 거야.’

‘아니, 감독님이 뭘 따르기로 했는지 얘기하시다가 갑자기 왜 다른 얘길······음? 뭐라고요? 영화팀이 왜요?’

의아하게 바라보자 안 감독이 씩 웃었다.

‘걔네도 오디션 봐야지. 영화화를 해야하니까.’

‘그니까 그걸 왜 연극 배우들 오디션에서······.’

순간 무언가 떠올랐고, 입을 닫았다.

이상하지만, 말도 안 되지만.

지금 ‘흉내자들’이라는 프로젝트는 그런 일들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리고 설마했는데.

‘캐스팅은 한 번 뿐이야. 연극 배우 그대로 영화에 옮긴다.’

역시나였다.

‘그,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게 만들었더라고. 작가님이.’

듣도보도 못한 일을 계획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

하람과 굿픽처스라는 업계에서도 인정 받는 굵직한 회사들을 휘감고.

안정상이라는 연극계의 거목이자 영화계의 다크호스마저 쩔쩔 매게 만드는 작가.

“대체 누구길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온 김진태가 중얼거리자, 양기전이 되물었다.

“응?”

“아, 아녜요. 아무튼 그날 오디션 진짜 중요하거든요. 이게 아직 말할 수는 없는데, 암튼 그 배역, 진짜! 진짜! 중요해요.”

주인공 자리를 꿰차는 순간, 영화 스크린까지 다이렉트일테니까.

그것이 양기전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김진태는 더욱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그의 노파심을 보다듬듯, 양기전이 알겠다며 김진태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걱정마.”

특유의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가 평소보다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어떤 오디션도 중요하지 않은 적없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