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파코스 (1)
‘지금까지 어떤 오디션도 중요하지 않은 적없었어.’
내 머릿속에서 양기전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직접 들은 말은 아니었다. 안 감독에게 전해 들었지. 그가 저런 이야길 극단 단원에게 했다는 걸.
그리고 나는······.
속절없이 부끄러워졌다.
그건 어린 나의 선택과는 확연히 반대되는 행보였으니까.
수많은 변명이 떠올랐으나, 무색했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 있다.
누군가는 노력과 재능을 운운하겠지만.
천추라는 연극을 본 나로서는 솔직히 그것을 인정하기 힘들다.
그의 연기는 과거에도 훌륭했지만, 현재는 내가 기억하는 그보다 더욱 섬세해졌고, 부드러웠으며, 동시에 단단했다.
조금 과감하지 못하다는 아쉬운 점이 보이긴 하지만, 그건 연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겪어온 경험의 문제겠지.
그러니 이건······.
아마도 그런 걸 거다.
‘운이라는 이름의 농간.’
끼익—.
고철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날씨 좋은 LA의 햇살이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다.
뒤이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스태프가 이 트레일러를 개조해 만든 대기실로 들어와 내 상태를 확인했다.
거울 속 나는 장발이었다.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나 있으며, 얼굴의 절반 정도를 화상이 뒤덮고 있다.
수 시간의 분장은 나의 외형을 파코스로 바꾸고 있었다.
언제쯤 끝나냐는 스태프의 물음에 특수분장팀이 눈알을 굴리다가 답했다.
“20분··· 네, 그 정도면 마무리 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감독님께 말씀 드릴게요.”
스태프가 나가고, 분장팀의 손이 바빠진다.
찌익— 툭— 슥슥—
내 얼굴을 간지럽히는 섬세한 터치와 소음 속에서 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제 외형 이외의 남은 것들도 파코스로 변할 차례였다.
그리고 난 오늘도, 그에게서 나를 발견하겠지.
#
오랜만에 촬영장에 온 조감독, 코리 황이었다.
해외 로케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아 여러 가지 허가를 받고, 테스트 촬영까지 마치고서 귀국한 지 이제 고작 두 시간.
그럼에도 그는 곧장 촬영장으로 달려왔다.
크리스 감독이 불러서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냉혈한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악명 높은 감독이라지만 이런 부분은 철저했다.
‘심지어 요즘은 냉혈한이라 부르기도 민망하지. 이 영화 시작한 이후로 눈에 띄게 유해지셨어. 백승결 효과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코리 황이 세트장으로 들어선다.
장시간 비행에 피곤할 법도 했지만. 아니, 사실 피곤했지만 그럼에도 지켜보고 싶었다.
파코스가 주인공인 영화를.
그 영화의 첫 장면을.
······일단, 왔으니 보고부터.
“오로라 시간대를 맞추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도착하자마자 크리스 감독에게 자신이 보고 온 것들을 풀어놓는 그였다.
“그래도 그림은 끝내주겠더라고요. 드론에 담아온 절경들 보시면 놀라실 거예요. 끝도 없이 펼쳐진 눈 덮인 평야······.”
그의 말처럼, 이번 영화의 배경은 사막만이 아니었다.
핵전쟁 이후 지구가 그야말로 박살이 나며 미국 동부는 사막이 되었지만, 그중 일부 캐니언 B56 구역(—캐나다)와 인접한 지역은 오히려 온도가 낮아져 북극과도 같은 상태가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영화 속에서의 설정.
미국 땅에서 오로라를 관찰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기에 촬영지는 아이슬란드로 대체되었다.
CG가 대부분인 영화에서 꼭 로케가 필요하냐는 의견도 더러 있었지만.
‘그 씬만큼은 CG를 최소화 해야 돼.’
크리스 감독의 결심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결국, 그가 강경하게 밀어붙여 로케가 결정되었다.
할리우드 역대 흥행 8위를 거머쥔 감독에겐 그럴 힘이 차고 넘쳤다. 그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 될 만했고.
“개봉을 미루더라도 꼭 제대로 찍어야 하는 씬이야. 극 중 파코스의 가장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될 테니까.”
코리 황이 주억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촬영 준비가 한창인 그린스크린 위.
폐허가 된 도시의 일부가 거대한 세트로 세워져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정 반대잖아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이번엔 크리스 감독이 끄덕이며 세트장을 비추는 필드모니터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파코스가 1편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가 어느 정도로 냉혈한이 되었는지, 그걸 관객들에게 각인시키는 장면이니까.”
그래, 그런 오프닝이었다.
1편이라는 든든한 형이자, 부담스러운 비교대상이 있는 이 영화의 첫인상을 결정하게 될.
주인공이 된 파코스에게 어떤 카리스마가 있는지 확인하게 될.
일종의 선전포고.
이윽고, 그 첫인상을 좌지우지할 청년이 트레일러에서 나와 세트장 위에 올라선다.
이제는 주인공이 된 백승결.
파코스였다.
황야의 무법자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무대 위에 선 그는 마치 몇 시간 전에도 이 촬영을 했던 것처럼, 무려 8개월 만의 촬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능숙하게 몰입을 이어간다.
“미치겠군.”
크리스 감독이 감탄한다.
1편 촬영 내내 그가 가장 많이 했던 말 중에 하나였지.
그게 속편 촬영과 함께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마 이 영화의 촬영이 모두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코리 황은 예상했다.
놀랍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봤자 반년 조금 넘게 지나지 않았는데. 분장도 옷도 소품까지도 다 그때 그대로 똑같은데······.”
그가 헛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왜 전혀 다른 사람 같죠?”
사실 납득하기 어려웠다.
극중 시간의 흐름도 고작 3년이기에 분장은 크게 달라진게 없었다. 끽해야 시간에 따른 흉터의 변화 정도?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이 똑같은데, 백승결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정확히는 다른 파코스.
“그게 우리가 바란 모습이잖아. 1편과는 전혀 다른 파코스.”
“그랬죠. 근데 지금은······ 백승결이 연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냥 저렇게 서 있는데, 어떻게 저런 분위기가 나느냔 말이죠, 제 말은.”
“그야 연기를 시작했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네 전제부터가 틀렸다고 말하는 크리스 감독이었다.
“이미 파코스니까.”
이어서 크리스 감독이 얼른 무전기를 들었다.
마치 촬영하기 매우 어려운 장면을 발견한 사진작가처럼, 그는 조급함마저 서린 눈으로 말했다.
—촬영 시작합시다.
얼른 저 다음을 확인하고 싶으니까.
그런 뒷말이 들려오는 듯한 눈빛으로 세트장을 바라보는 크리스 감독.
오디오 감독과 조명 감독, 그리고 카메라 감독에게까지 촬영 준비 끝났다는 사인이 되돌아오자, 그가 다시 무전기를 움켜쥐었다.
그가 신호를 주었고.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스태프와 세트장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치된 조명들과 마이크, 그 사이를 누비는 카메라.
이어서 취이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바람이 분사되었다.
그 모든 것들이 동시에 이뤄지며, 모니터에 담기는 장면은 굉장했다.
하지만 막상 프레임 밖은 헤엄치는 백조의 다리처럼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그럼에도 몰입이 깨지긴커녕 더욱 견고해진 백승결이 그린스크린 한가운데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본다.
이제는 구도심이 되어버린.
아니 도심이라는 말도 의미가 없어져 버린 뉴욕.
완전히 폭사된 맨해튼이었다.
권총 대신 길쭉한 라이플을 손에 쥔 그가 망가진 도시 속에서 일단의 무리를 발견한다.
건물 잔해를 뒤지며 무언가를 찾는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었다.
“찾은 것 같군.”
서늘한 목소리를 흘리며, 파코스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서서히 무너질 준비를 하는 지반처럼.
슬며시 머리 위로 드리우는 먹구름처럼.
마치, 그렇게 다가오는 재앙처럼.
#
무장한 군인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파코스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을 한곳에 모았다. 언제든 총구를 들이밀 수 있는 위치에.
그리고 벌벌 떠는 중년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곳에서 건물 잔해를 뒤지던 이들의 책임자였다.
총알을 모두 소진한 라이플은 옆에 내려놓고, 허리 춤에서 권총을 꺼내어 겨눈다.
⌜사, 살려주세요······.⌟
그의 간절한 부탁에 파코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자세를 낮춘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럴 수 있게 만들어줘.⌟
너의 대답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것을 내비치며 파코스가 묻는다.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네, 네! 말씀하세요! 무엇을 알려드릴까요···.⌟
당장 머리를 열어 뇌라도 꺼내 보여줄 것처럼 조아리는 책임자.
파코스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너희 고용주가 누구지?⌟
그러자 책임자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의 얼굴엔 두려움 말고도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알고···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파코스의 고개가 기울었다. 총구와 함께.
⌜몰라.⌟
다만 어떤 부류가 이 망해버린 도시를 방문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찾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곳에 사람을 보내어 무언가를 찾았다.
누가 보면 이곳에 엄청난 것이라도 묻혀있는 것마냥.
⌜근데······.⌟
간지러운지 화상 부위로 손을 가져가며 파코스가 물었다.
⌜넌 날 알고 있는 것 같네?⌟
⌜예?⌟
약탈과 살인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무장한 이들이 함께였던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책임자의 반응만큼은 확실히 이상했다.
⌜두 번 묻지 않을 거야.⌟
서늘하게 말하자 그가 머리를 그대로 처박는다.
⌜예, 예! 압니다. 알 수밖에요. 요즘 윗분들이 두려워하는 그분 아니십니까. 테메우스 C13(—미국 동부의 지역 코드) 구역의 재앙.⌟
재앙···?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심으로 웃은 건 꽤나 오랜만이라고 느끼는 그였다.
그도 그럴 게, 그건 자신에게 붙여질 만한 단어가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는 재앙을 부르는 존재를 알고 있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단지 그렇게 점지 되어 사고를 유발하는 저주받은 존재.
그렇기에 주변 사람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던······.
‘랜시.’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그래서 자신이 죽이려 했던.
그러나 끝내 재앙에게도, 자신에게도 죽지 않고 사랑하는 이와 선택하여 죽은.
운명에 저항했던 재앙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재앙도 알고 있지.’
세상을 사막으로 만들고, 전 인류에 고통을 안겨주고서도, 책임은 커녕 그 상황을 이용하며 새로운 정부를 자처하는 진짜 재앙과도 같은 놈들.
자신을 ‘재앙’이라 부르는 저자의 배후에 그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누가 누굴 감히······.⌟
허연 이를 드러내며 이리처럼 으르렁거리던 파코스가 물었다.
⌜이 폐허 속에서, 뭘 가져가려고 했던 거지?⌟
⌜······.⌟
침묵에.
철컥—.
⌜······아끼던 그릇이요!⌟
총은 아주 좋은 대화 수단이지.
⌜그뿐?⌟
⌜그리고 혹시나 남았을 꼬냑들이랑, 골프채, 그 외에 몇 가지 더······.⌟
물론 대화라기엔, 책임자의 대답은 개소리에 가까웠지만.
저 상자에 담긴 게, 고작 그런 것들이라고?
⌜그것들을 가져가려고······.⌟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가 뱉어졌다.
동시에 파코스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쥐죽은 모여 있는 인부들 뒤로 보이는 막대한 양의 장비들.
그 중 굴삭기가 세 대나 있다는 건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것들을 동원했다고?⌟
파코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계속 이어져 섬뜩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 모습은 확실히.
······재앙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