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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67화 (167/167)

167화 파코스 (4)

녹슨 문이 열리고, 쿰쿰한 냄새와 함께 반지하 특유의 서늘한 느낌이 피부에 달라붙는다.

양기전은 양말부터 벗었다. 그리고 거실이라고 부를만한 공간의 절반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옆에 밀어둔 좌식테이블까지 끌어당기자 완성된 그만의 작업실.

누우면 침실, 먹을 걸 가져오면 식탁이 되는 이곳에서 그는 매일같이 대본 분석을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연극, 천추의 대본부터 꺼내 들었다.

이미 닳고 닳도록 본 작품이지만, 달달 외우다 못해 잠결에도 읊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무대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또 부족한 부분들이 보인다.

그러면 이렇게 돌아와 읽어보는 거다.

뭐가 문제였는지.

참으로 야속한 재능이 아닐 수 없다.

하루를 연습하면 하루가 더 아쉬워지는 아둔함이라니.

이래서야 거꾸로 가는 무빙워커를 같은 속도로 걷는 것과 다를 바가 없잖나.

‘그래도 걸어야지. 있는 힘껏.’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밀려나 버릴 것을 알기에, 양기전은 얄팍한 허무주의 대신 두툼한 대본을 넘겼다.

눈에 익은 천추의 대본을 한 시간 정도 훑고서, 무대 위에서 아쉬웠던 점들을 몇 가지 정리한 그가 비로소 가방에서 또 다른 대본을 꺼낸다.

얼마 전 제본되어 그의 손에 주어진 ‘흉내자들’의 대본.

확실히 하람이 제작을 하고 안정상 감독이 연출을 맡아서 그런가.

일반적인 연극 오디션 답지 않게 꽤나 본격적이었다.

스탬플러가 아니라 제본을 한 것도 낯설지만, 오디션을 보기도 전에 이렇게 완성된 대본을 주다니.

충분히 연습할 시간과 여건을 줄 테니 최고의 아웃풋을 보여달라는 거다.

‘암튼 그 배역, 진짜! 진짜! 중요해요.’

가내수공업 단장, 김진태의 당부가 아니었더라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걸.

하지만 양기전은 그의 앞에서 그랬듯, 애써 그런 마음을 삼킨다.

자신이 작가의 픽으로 오디션 명단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운은 거기까지.

결국, 극단에서 선별한 대학로의 유명 배우들과 경쟁을 해야 했다.

그게 그리 녹록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다.

‘간절하지 말자. 욕심부리지 말자.’

늘 최선을 다 해왔다.

그렇기에, 이건 특히 중요해! 제대로 해야 해! 이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실수만 늘겠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깨끗하게 잊는다.

거기까지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인 거다.

그렇게.

겨우겨우 삭혔는데······.

“으어······.”

그랬는데, 이건 도저히 못 참겠다.

“너무 좋잖아······.”

이러면 안 되는데.

간절해지면 안 되는데.

욕심부리면 안 되는데.

그러면 세상은 보란 듯이 비웃으며 내팽개칠 텐데.

작품이 좋은 건.

그래서 너무 하고 싶어지는 건.

그저 배우인지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

며칠 후, 극단 가내수공업의 극장.

양기전에겐 천추로 익숙한 그곳이 퍽 낯설었다.

이 허름한 극장에 좀처럼 얼굴 비추는 일이 없던 대학로 흥행 배우들이 무더기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이 작품이 대단하긴 한가보다.

흥행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회사와 연출하는 감독의 이름값이 엄청나니, 망할 작품이더라도 달려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학로에선 무소불위의 티켓파워로 떠받들어지는 그들이지만.

한층 더 넓은 세상, 연예계로 올라서고 싶기는 매한가지인 것.

심지어 하람에는 굉장히 상징적인 인물까지 있었다.

야망이 있는 배우들이 정점이라 생각하고 목표 삼았던 톱배우의 정의를 다시 세운 배우.

한국인도 칸과 할리우드에서 이 정도의 파급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백승결.

‘그래요.’

불과 재작년쯤에 그와 하람 사옥에서 만나 이야기 나눴던 것을 떠올리며, 양기전은 괜스레 입꼬릴 올렸다.

‘그 꼬마 아역 배우가, 이젠 정말 말도 안 되게 대단해졌지.’

그때 낯익은 얼굴 하나가 백스테이지에 들어선다.

20대 배우들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학로 ‘연기파 유명 배우’ 반열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이규진.

그도 양기전을 보곤 아는 체를 해왔다.

“어, 형님.”

“규진아. 이게 얼마 만이냐.”

“그러게요. 형님도 이거 오디션 보러 오신 거예요?”

“엉. 글치.”

“잘됐네요. 여기 앉아서 같이 기다리면 되겠다.”

넉살 좋게 다가와 앉은 그가 천장과 바닥을 천천히 훑으며 말했다.

“이런 극장은 오랜만에 와보네요. 요즘은 다 리모델링하는 추세인데······ 이 작품, 여기서 하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하람이 돈이 없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백승결만해도 얼마를 벌어주겠어.”

저 혼자 묻고 답하며 중얼거리던 이규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아무튼, 어쩌겠어요. 참아야죠. 든든한 매니지먼트에 끗발 좋은 영화 감독님 눈에 들 기회인데.”

어느새 반딱거리는 눈빛.

그는 이미 하람과 계약서를 쓰고 안 감독 영화에 캐스팅된 양 들뜬 얼굴이었다.

“근데 형님은 어떤 역할 들어오셨어요? 오늘 다른 역할도 보는 거였나?”

“하나만 보는 거로 알고 있어. 최태주 역할.”

“아, 그럼······.”

“응. 나도 최태주 역할 봐.”

“오~아~ 그렇구나···하하.”

몹시 의외라는 듯 주억거리는 이규진.

그가 ‘이거 공개 오디션이었나.’라며 중얼거리는데, 직원 한 명이 무대에서 백스테이지로 넘어와 이름을 호명했다.

“양기전 배우님.”

“아, 예.”

양기전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태주라는 역할을 위해 이곳에 모인 배우들의 시선이 따끔거릴 정도로 그에게 쏟아졌다.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무대.

그에겐 주에 몇 번씩 오르는 익숙한 곳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지?’

족히 20명은 되어 보이는 심사위원들.

천추의 관객들도 이만큼이 안 될 때가 많은데, 오디션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오다니.

이건 의외를 넘어서 솔직히 좀 무서울 정도였다.

그때 객석 맨 앞줄, 중앙에 앉아 있던 안 감독이 말했다.

“반갑습니다. 양기전 배우님.”

“아, 예. 안녕하세요.”

“오늘 좀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도 부담스러워 마시고 연습하신 대로 연기 보여주시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프로필을 넘겨보던 안 감독이 덧붙여 물었다.

“‘덩쿨 속 가시’라는 작품에 출연하셨었죠?”

“아, 예.”

갑자기 그 옛날 영화 얘길 왜 꺼내나 싶었지만, 양기전은 그럼에도 반가워하며 끄덕였다.

덩쿨 속 가시는 그에게 꽤나 특별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중이 큰 역할을 맡았던 영화이자, 백승결이라는 미래의 톱배우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저한텐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이었죠.”

“의외네요.”

안 감독의 의아함은 어쩌면 당연했다.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하기엔, ‘덩쿨 속 가시’는 처참히 실패했고.

백승결이라는 천재 아역의 연이은 발연기로 영화 전체가 조롱당했으며.

양기전의 영화 배우로서의 생명을 끊는데 크게 일조를 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양기전도 모르지 않았다.

그가 백번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그 영화의 실패가 저한테 큰 타격을 주긴 했죠. 그치만, 전 촬영 내내 행복했거든요. 영화의 성공과는 상관없이, 이 작품의 최태주 처럼요.”

양기전이 대본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안 감독이 양기전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 역할이었어야 했던 건가?”

“예?”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어요.”

짧게 일축한 안 감독이 프로필을 내려놓았다.

“자, 그러면 이제 연기 한번 볼까요?”

#

—영상 보냈습니다.

화면에 떠오른 안 감독의 말에 내가 끄덕이며 마우스를 달깍거렸다.

“얼른 내려받고 있는데, 꽤 걸리네요. 인터넷은 역시 우리나라가······.”

—그, 한번 노트북 청소를 해보시는 게.

“깨끗한데요? 보세요.”

얼른 노트북을 들고 깨끗한 키보드를 화면에··· 화면에···.

—그··· 일단 카메라도 노트북에 달려 있어서 전 그렇게 하셔도 전혀 안 보이고요. 어우, 어지럽네요. 그리고 제가 말한 건 진짜 청소가 아니라······.

노트북 청소란 게 진짜 물리적인 청소가 아닌 소프트웨어적인 처치라는 것을 듣고 민망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하하······ 제가 기계치라서요.”

—그건 좀 웃기네요. 허점이란 게 있으신 분이었다니.

“이래 봬도 많습니다.”

—꼭 자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요즘 글을 쓰면서 느끼는 중이거든요. 허점도 자랑할만하다는 걸.”

—캐릭터 조형에서 허점은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긴 하죠.

그렇게 잠시 삼천포로 빠졌던 이야기를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어떠셨어요? 배우님 연기는.”

—솔직히 연기를 시작하기 전엔 첫인상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뭐랄까, 사람이 보기와는 달리 좀··· 존재감이 약하달까요. 위축되어 있달까요.

“뭘 느끼신 건진 알 것 같아요.”

양기전은 언뜻 보기엔 김상억과 비슷한 부류로 보인다. 호방한 성격의 풍채 좋은 배우.

하지만 조금만 말을 나눠보면 알 수 있었다. 그에겐 용기가 부족하다는 게.

모든 작품에 최선을 다 해왔다는 그는, 그만큼 닳고 닳아 있었다.

욕심이란 모서리가 깎여나간 것이다.

—근데 연기를 시작하는 순간, 달라지더라고요. 아주 좋았습니다. 위축되어 있는 부분까지도 한 꺼풀 벗겨내면 얼마나 더 좋아질지 궁금해지긴 하는데, 일단은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연극팀이 양기전 배우를 좋게 평가 했어요. 물론 영화팀에선 배우의 이름값 때문에 의견이 팽팽하게 나뉘긴 했지만, 전체적인 표심으로 양기전 배우가 최태주 역으로 낙점되었습니다.

“그쪽은 확실히 어렵군요.”

—그쵸. 아마 규모가 큰 영화였으면 아마 만장일치로 탈락이었을 겁니다. 독립영화 수준의 저예산 영화이다 보니 연기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거죠.

하긴······.

제작자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다른 분들 캐스팅도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 작가님은 캐스팅에 어떤 관여도 하지 않을 생각이세요? 양기전 배우야 연기력이 괜찮았으니 이런 결과가 나왔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압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이미 감독님께 제 작품을 맡겼으니까요. 전 이렇게 중간중간 상황을 공유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학부모가 너무 극성이어도 애한테 문제가 생기는 법이잖아요.”

—오히려 그게 더 부담스러운데요? 내 새끼 잘 부탁한다. 뭐 이런 느낌?

“사실 그거 맞아요.”

은은한 협박(?)을 마치고 한참 동안 웃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 사이 다운로드가 완료된 영상을 틀었다.

‘흉내자들’의 수많은 주연들 중, 가장 비중이 큰 최태주.

그를 연기 하는 여러 배우들을 모두 훑어보았다.

양기전도 그중 하나였다.

애초에 그를 염두에 두고 쓴 배역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연기가 옷에 맞게 변화한 것일까.

혹은 둘 다 일지도.

그는 춤 정장을 입은 듯 훌륭하게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걱정 없겠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내 작품에 대한 생각을 잠시 몰아냈다.

이제는 ‘흉내자들’ 고민에서 잠시 벗어나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 2’에 다시 집중할 차례였다.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영화의 후반부 촬영이 이어진다.

아이슬란드에서 돌아와 LA 스튜디오에서 이어진 촬영은, 매번 스태프들의 감탄과 경악 속에서 끝을 향해 질주했다.

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수고하셨습니다!”

“진짜 고생했어요, 다들!”

“휘이이익—!”

모두가 축포를 터트리는 그 순간이 왔다.

“후에에에에엥······.”

거진 3개월의 시간 동안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춘 아역배우가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손을 뿌리치고 후다닥 달려오더니 내 무릎에 푹 안겼다.

얼른 쫓아온 엄마가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당황스러워한다.

처음이긴 나도 매한가지다.

그동안 어린 애랑 친하게 지낼 일 자체가 없었던 터라 망부석처럼 굳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올리비아, 또 보면 되지.”

“거짓마아아아알···!”

슬쩍 다가온 김성운이 웃으며 말꼬릴 올린다.

“너 생각보다 애들한테 인기가 많다?”

어쨌든, 촬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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