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궁수의 스트리밍 시즌1 226화
77. 임시방편(2)
새로운 캡슐은 확실히 구형 캡슐과는 착용감이 많이 달랐다.
어차피 캡슐의 착용감 따위, 풀다이브 하고 나면 거기서 거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훨씬 매끄럽잖아.’
보급형 라인의 싸구려 중고 캡슐과 프리미엄 브랜드의 최상위 라인 새 제품을 비교하는 거라서일까?
‘이렇게 차이가 커?’
움직이는 내내 아몬드는 깜짝 놀랐다.
그간 중고 캡슐에서 어떻게 게임을 했던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간 원래 이랬던 거라고 생각했던 미세한 버벅임 같은 건, 사실 원래 이런 게 아니었다.
퍼억!
퍽!
허수아비를 때리는 그의 주먹은 매끄러운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고, 타격감도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타격감이 좋아진 게 게임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큼 세심하게 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세팅만 잘해놓으면 원하는 대로 느낌을 연출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상현은 이어서 그가 예전에 진행했던 훈련 프로그램을 실행해 봤는데.
[새로운 기록!]
[새로운 기록!]
.
.
.
[새로운 기록!]
모든 기록이 다 조금씩 올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사람은 그대로고 캡슐만 바뀌었으니 말이다.
[훈련 프로그램 데이터를 통해 최적화를 다시 진행합니다.]
이 캡슐은 심지어 최적화도 알아서 진행해 준다.
예전에 최적화를 안 하고 게임을 플레이해서 꽤나 손해를 봤던 기억이 있다.
‘와.’
세상 좋아졌네.
아니, 캡슐 좋아졌네……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다.
‘예전 캡슐이랑 한 2~3년밖에 차이 안 나는데.’
상현이 사용하던 캡슐의 제작 연도와 이 캡슐의 제작 연도가 무슨 7~8년씩 차이 나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능은 확연하게 차이가 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현이 느끼기에도 이 정도다.
예민한 엔지니어들은 에스턴을 쓰다가 다이버즈를 쓰면 경기를 일으킬 거다.
다이버즈에겐 미안하지만, 너무나 압도적인 퀄리티 차이였다.
‘이래서 노바라는 걸 만들려 하는 거구나.’
그는 다이버즈의 대표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왜 필요한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 * *
슈웅.
늘 유압기 소리가 났던 예전 캡슐과는 다르게, SF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소리와 함께 열리는 캡슐 뚜껑. 그 뒤에서 상현이 말끔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주혁도 그렇게 느끼는지 한마디 붙였다.
“오. 야. 확실히 땀이 안 나는데? 근데 그렇다고 무리하면 안 돼.”
주혁이 원리에 대해 설명해 줬다.
“이 플라톤이라는 모델은 신체 컨디션에 조율이 특화됐거든. 그러니까, 네가 열이 올라서 땀이 많이 나는 상황이면, 환기와 냉방을 거기에 최적화해서 엄청 올려주는 식이야. 애초에 땀이 안 나는 게 아니라고. 원인 제거가 아니라, 대처 능력이 엄청난 거야.”
상현은 대충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구나. 이래서 임시 방편이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거 마사지 기능도 있다던데. 캡슐 게임하면서 마사지도 받을 수 있어. 대박 아니냐?”
“오…….”
가끔 너무 오래 게임하면 담이 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건 확실히 좋은 기능이다.
“그렇네. 좋네.”
상현은 대답하면서 물끄러미 다시 캡슐을 바라봤다.
멋들어지게 생긴 디자인이다.
영국 제품이라고 했는지, 독일 제품이라고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튼 유럽이었던 것 같은데.
‘근데 노바가 저거보다 좋을 수가 있으려나.’
새로 제작되고 있는 맞춤형 캡슐이 과연 저것보다 좋을 수 있을까?
그의 머리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때 가 보면 알겠지.’
쓸데없이 지금부터 고민하진 말자.
어찌 됐든 결승 전에는 제조가 된다니까. 그때 가면 알 수 있을 거다.
상현의 손가락이 스케줄 표를 스르륵 미끄러진다.
그 손가락은 리그전 마지막 날에 멈췄다. 고단백과의 경기가 있다.
‘3일 남았다.’
가장 어려운 상대이니만큼 매번 남은 날짜를 체크하게 된다.
‘일단 오늘은…….’
그의 손가락은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갔다.
바로 오늘 있는 경기가 적혀 있는 칸.
[레드카펫츠 VS 벌룬스타즈]
* * *
떠들썩한 경기장 분위기와 함께 중계진들이 운을 뗀다.
“오늘. 아주 흥미로운 매치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와. 그렇죠! 난트전 최강 원딜러들의 대결입니다.”
최강 원딜러들의 대결.
중계진은 오늘 경기를 이렇게 표현하기로 했다.
“어떻게 될까요? 아몬드 선수 스크림 때는 어지간하면 홍차 선수를 피해서 미드로 갔거든요?”
“예. 처음 미드 픽이 스크림에서 나온 것도 레드카펫츠와의 경기 였을 겁니다.”
“홍차 선수 스크림 때는 심지어 자기의 주캐를 고르지도 않았었죠?”
“정확히는 아몬드의 픽을 뺏어가느라 고를 수가 없었어요. 근데도 상당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죠. 이번에는 고르지 않을까요?”
“타코가 열어줄지가 의문입니다.”
“아몬드 선수도 굳이 홍차를 상대하러 바텀에 가기보단 얼마 전에 혼령사 픽이 또 엄청 이슈였잖습니까? 그냥 미드 가서 토마토 선수를 제물로 바쳐서 사념체로 도배해도 될 거예요.”
“예. 그렇죠. 혼령사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그게 심지어 상점픽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절대 실전에서 보고 싶지 않을 겁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밴픽 진행됩니다! 밴픽 보시죠!”
연습 경기에서 벌룬스타즈는 아몬드를 미드로 보내서 상대의 약점을 파고 드는 전략으로 승리를 거둔 적이 있다.
이번에도 그렇게 전술을 짜면 분명 쉽게 갈 터였다. 그러나 너무 쉬운 방법은, 상대편도 알고 있다.
[밴 - 레드카펫츠]
#1. 악의 혼령사 - 멜리
첫 번째 밴 카드가 등장했다.
중계진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걸 진짜 밴하나요?”
채팅창에서도 비슷한 반응이다.
-상점픽 밴 ㅋㅋㅋㅋ
-여윽시 홍차 누님. 화끈하다니까!?
-???: 머리는 뜨겁게! 심장은 뜨겁게! (실제로 한 말)
-기~냥 무지성으로 마음에 안드는 거 밴 때려 버리기~~~
현장의 관중들이 웅성거리는 것은 덤이다.
-뭐야. 진짜야?
-멜리를 벌써?
-아씨 저거 보러 왔는데…….
밴에 대해 별로 반응이 좋진 않았다.
얼마 전 커뮤니티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상점픽 혼령사. 그걸 현장에서 보기 위해 굳이 티켓을 구매하고 들어온 관중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아. 진짜 밴해버릴 줄은 몰랐네요.”
“저희가 장난 삼아 밴 카드가 새로 등장했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이걸 빠른 판단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허허.”
“저번 경기의 데이터로 미뤄봐선, 일단은 빠르고 과감한 판단이라고 해주는 게 맞겠습니다.”
중계진들이 홍차의 선택을 포장하자, 야유가 터져 나왔다.
-우우우우우……!
-밴 풀어!
-아니, 이거 보려고 왔는데 뭔 개소리야!
중계진들은 일순간 당황했으나.
홍차는 관중들에 대고 당당하게 중지를 치켜올려 줬다.
척!
관중들은 더 큰 야유로 보답했으나, 홍차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이어서 미드 밴을 하나 더 했다.
[밴 - 레드카펫츠]
#1. 악의 혼령사 - 멜리
#2. 폭풍 닌자 - 하루키
-왘ㅋㅋㅋㅋ
-미드 가지 말라는 거네
-홍차 언니 너무 멋있어!
-홍차 박력……!
-이러니까 그린티가 맨날 기가 죽어 있지 ㅋㅋㅋㅋㅋㅋㅋ
-팩트) 홍차는 그냥 남친 그린티 몰래 바텀에서 아몬드 얼굴을 구경할 전술을 짜온 것뿐이다.
-이러면 아몬드 바텀 무조건 가겠네. 레몬 행복사 ㅋㅋㅋ
주 포지션인 원딜이 아니라, 서브 포지션인 미드를 중심으로 밴이 들어가고 있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분석관도 그 점을 언급했다.
“진짜 특이한 현상이군요. 메인이 아니라 서브 포지션을 밴하고 있습니다. 근데 또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이건 그거 같죠? 나랑 원딜로 한 판 붙자?! 홍차 선수가 자신 있다는 거예요!”
“그럼 혹시 아몬드의 주캐인 레이나 대 홍차 선수의 주캐인 테러리스트 볼 수 있을까요!?”
-오 모스트 대전?
-레이나 밴 안 하면 ㅇㅈ이지
-레이나 풀어주고 진검승부? 역시 홍차 누님……!
-그런 거였어?
시청자들은 멜리를 못 보는 대신 레이나를 볼 수도 있다는 말에 흥분했다.
그러나, 잠시 후.
[밴 - 레드카펫츠]
#1. 악의 혼령사 - 멜리
#2. 폭풍 닌자 - 하루키
#3. 냉혈의 마궁수 - 레이나
“아~~~~”
중계석에서도, 관중석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오는 밴이다.
이에 킹귤이 평했다.
“이럴 수가! 이렇게 야비…… 아니, 똑똑한 밴을 할 수가 있나요!?”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똑똑합니다! 홍차 선수! 너무 똑똑해요!”
킹귤은 말실수를 덮으려고 더 크게 똑똑함을 강조했으나. 굳이 그게 아니어도 관중석의 야유 소리가 너무 컸다.
-우우우우우우우.
“아 지금 관중석에서 거대한 팻말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뭐라 써 있는 거죠?!”
카메라가 순간 관중석으로 돌아간다.
「밴 ㅈ 같이 하네!」
카메라는 다시 휙 고개를 돌렸고, 일순간 중계석에 침묵이 흐른다.
킹귤이 한층 더 높은 텐션으로 외쳤다.
“예! 최고 극찬이 나오는 겁니다! 지금!”
“그렇죠! 게임 세계에서는 저게 극찬이에요! 훈장이 따로 필요 없죠!”
“자. 다음 밴? 벌룬스타즈 뭘 할까요!”
벌룬스타즈는 홍차의 주캐인 테러리스트를 밴했다.
“이건 서로 모스트 밴하는 거죠. 레이나 밴에 대한 복수 같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와. 그나저나 홍차 선수는 아몬드 선수의 미드 밴을 2개 바텀 밴을 1개. 어지간히 의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이스를 견제하는 건 좋은데. 이러면…… 다른 선수들의 주캐가 다 풀리거든요? 이게 감당이 되나요?”
“글쎄요! 이제 픽을 시작하니까 한번 보시죠.”
무난하게 자신의 주캐들이 골라지는 픽이 이어졌다.
주캐가 밴당한 건 아몬드와 홍차뿐이니, 이 둘의 픽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어느덧 아몬드의 차례였다.
쿵──
차분한 은발의 여성이 그의 뒤에 내려앉았다.
[빛의 선율 - 사나]
스크림 때는 몇 번 등장했지만, 난트전 실전에는 처음 나오는 픽.
그렇기에 이번 대회만 지켜본 관중들은 의아해했다.
-사나?
-오…….
-이것도 활 쓰는 화신이긴 하지.
-아몬드 사나 잘하나?
하나 아몬드 연습 경기를 챙겨본 시청자들과 중계석에서의 반응은 달랐다.
“와! 아몬드의 사나? 실전에서는 처음 나오죠?”
“그렇습니다. 레이나는 오히려 나온 적이 있는데, 사나는 처음이에요!”
“아무래도 사나가 게임을 풀어가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가끔 밴이 풀려도 안가져가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서리 궁수가 게임을 주도적으로 하기엔 더 좋거든요.”
“맞습니다. 사나는 힐이 있는 대신 게임 주도권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로밍도 힘들고요.”
사나는 준수한 딜링 성능과 힐 능력까지 갖추고 있지만, 아몬드가 앞 뒤 없이 고를 수 있는 픽은 아니었다.
“예. 사나는 일단 맞으면서 버티고, 그다음 반격하는 픽이지. 소위 선빵 때리는 픽이 아닙니다. 선빵이 릴에선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사나를 쉬이 고르지 못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중계진의 말처럼, 먼저 나서서 게임을 이끌어갈 수가 없다는 것.
게임을 주도적으로 캐리(*Carry, 승리를 주도하는 역할)할 수가 없다는 게 이유다.
앞에 있는 사람을 죽여서 고속도로를 뚫는 레이나나, 초반부터 다른 라인 지원이 용이한 서리 궁수. 아니면 대미지와 사거리가 엄청난 란에 비교하면…….
사나는 다른 화신들을 보조하는 느낌에 가깝다.
“그런데 왜 이번엔 사나일까요?”
“아마 다른 팀원들의 주캐릭터가 풀려서일 겁니다.”
“아~! 그게 있었군요?”
-아! 다른 팀원이 있었군여!
-엌ㅋㅋㅋㅋㅋ 마치 까먹고 있었다는 듯한 리액션 뭔데 ㅋㅋ
-아 그런 놈들도 있었지?
아몬드가 이번에 사나를 고른 이유는 자신을 제외한 벌룬스타즈의 전원이 주 캐릭터를 고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딸기슈터는 독침 버니를, 미호는 서큐버스를, 타코는 망치 전사를 고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레드카펫츠는 ‘홍차+펫’이기 때문에, 벌룬스타즈의 나머지 팀원들 기량이 더 높다.
그러니 이들에게 힐을 지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오히려 더 안정적으로 이길 수 있다.
“아. 시작하기 전에, 아몬드 선수에 대해서 신기한 정보가 하나 추가됐죠?”
“그렇습니다. 캡슐 넘버가 바뀌어서 한번 확인했더니. 새로운 캡슐을 사셨어요!”
“뭡니까?”
“애스턴 사의 플라톤! 심지어 8시리즈로 보입니다.”
그 이름이 나오자, 관중석에서 바로 반응이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플라톤? 오우!
캐스터도 되묻는다.
“와. 그거 엄청 비싼 거 아닌가요?”
“비싸죠. 저도 프로 시절에나 쓰던 거예요.”
“아몬드 선수가 그전에 쓰던 건 뭔가요?
“제가 알기로는 완전 보급형 모델이고 구형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야. 그럼 아몬드 선수, 스크림에서는 홍차 선수를 피해서 미드로 가는 모습이 나왔는데. 이번엔 어떨까요? 캡슐에 따라서 플레이 역량이 확실히 달라지긴 하나요?”
“글쎄요. 하하. 이번에 제대로 알 수 있겠죠?”
“아 ,그런데. 아몬드 선수의 플라톤이 지금 참가한 선수 중에서 가장 비싼 캡슐인가요?”
“아. 그건 아닙니다. 가장 비싼건…… 의외로 풍선껌 님이네요?”
잠깐의 침묵 후.
경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