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살아남았다면(1)
‘이런.’
제시를 따라 4층으로 진입했을 땐.
이미 그녀가 문을 깨버린 후. 좀비들을 죄다 불러대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 한쪽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는데,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인지 주저앉아 버렸다.
무리해서 4층으로 진입하다가 아몬드에게 베인 탓이다.
‘어차피 이미 죽었구나.’
이런 전시에 다리가 잘려 나가면 사실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살 가망도 없으니, 하물며 전투에 복귀할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아몬드는 제시에게 신경을 끄고 좀비들을 향해 돌아섰다.
‘어차피 제시를 죽여도 이기는 거랑 상관이 없어.’
지금 문제는 제시가 아니다.
바로 이들이다.
“크어어어어어어어!”
“캬아아아아아악!”
엄청난 물량의 좀비.
복도가 가득 들어찬 모습.
저들끼리 부딪치다가 피곤죽이 되어 터져 버리는 놈도 있을 정도.
특수 좀비 숫자도 한둘이 아니며, 대충 눈에 보이는 놈들만 다섯은 되어 보인다.
얼마나 많으면 전투 직군 캐릭터가 공포를 느낄까?
[공포]
몸이 확실히 둔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는 위치를 사수했다.
‘쟤네가 들어가면 끝이다.’
저 녀석들이 여길 통과해 계단실로 들어서면 3반은 전멸한다.
여기서 무조건 3반이 이기는 경우의 수는 딱 하나였다.
“내가 이거 막으면, 우리가 이겨.”
아몬드가 이 자리에서 다 막아내는 것.
비록 확률이 낮다고 해도, 걸어볼 수 있는 판이 이것뿐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해볼 때까지 해봐야지.
아몬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히려 좀비들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최대한 계단에서 멀리 떨어져 싸울 셈이다.
터벅. 터벅…….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어떻게든 옮기는 그 순간─
[공포 -> 결의]
아몬드도 알지 못했던 기능이다.
[모든 스탯 상승 +30%]
[모든 상태 이상 면역]
[무기 내구도 저하 면역]
.
.
.
각종 버프들이 생겨나더니.
[남은 시간: 00:59]
1분의 제한 시간이 주어졌다.
* * *
바닥에 주저앉아 입을 작게 벌린 채, 한곳만을 바라보는 눈동자.
멍하니 쳐다본다고 하기엔 그녀의 눈이 심히 반짝였고.
멍하니 쳐다보는 게 아니라 하기엔 홀린듯 계속 한 곳만을 진득이 쳐다본다.
두 눈에 박힌 에메랄드는 진짜 보석이라도 되겠다는 듯, 빛을 내며 오직 한 곳을 바라본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얼굴조차 보이지 않으며, 마주 봐주지도 않는 핏자국 가득한 등.
그 등 너머엔 펼쳐진 지옥도.
“크아아아아아아아!”
“크어어어!”
수많은 좀비들이 저 사람 하나 죽여보겠다고 찢어진 살갗을 너덜거리며 시뻘건 눈을 불태웠다.
절망적이다. 쇼펜하우어도 한 수 접고 갈 정도로 염세적이다.
그럼에도 제시는 확신했다. 화가가 이 풍경을 그린다면 제목은 ‘희망’이 될 것이라고.
* * *
[아몬드! 좀비를 혼자 막는 판단인가요!]
[이게 유일한 수이긴 한데. 이게 될지……!]
‘온다.’
가장 선두에 선 좀비가 아몬드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 이빨 사이로 예리한 날이 들어선다.
사악──!
좀비의 아래턱 윗 부분이 사라졌다.
“크아아아…… 악!?”
좀비는 가속을 못이겨 제 혼자 나자빠져 뒹굴었다.
아몬드는 가볍게 옆으로 비켜서며 충돌을 피했고.
그 다음 뛰어드는 좀비를 베어넘겼다.
──사악!
그 좀비는 몸이 세로로 길게 잘려 나갔다.
펑!
피가 폭죽처럼 터져 나오면서, 역시나 앞으로 쓰러졌다.
[남은 시간: 00:53]
복도로 피 웅덩이가 고였다.
첨벙.
아몬드의 하얀 운동화가 그곳을 밟는다. 그리고, 더 세게!
“끄어어어어어어어!!!”
첨벙!
힘이 실린 칼날이 육중한 몸의 차저를 횡으로 잘라낸다.
푸슈우우웃……!
잘린 단면에서 피가 뿌옇게 피어오른다. 피로 물든 노을이 짙게 깔린다.
[남은 시간: 00:42]
안면에 수없이 튀기는 피.
눈을 찔끔거렸을 뿐 감진 않았다.
여기서 한 번 눈을 감았다간, 영원히 감을 것이다.
속눈썹에 맺힌 검붉은 핏방울이 시야 한 편에 어른거리다 떨어진다.
다시 검을 치켜 든다.
[트, 특수 좀비도 한 방 컷!?!]
촤아아아악!
육중한 녀석이 갈라져 나가떨어진다.
어떤 좀비였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는다.
[지금 모든 베기 공격을 다! 전부 다! 절단 판정을 받아내고 있죠!?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칼날이 처음 살갗의 단면을 파고든 후, 흔들림 없이 뚫고 나가 마지막 단면까지 그어지면 [절단] 판정을 받을 수 있다.
이는 현실성을 추구한 대부분의 게임 엔진이 갖고 있는 판정이다.
시빌 엠파이어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배운 검술을 그대로 쓸 수 있었다.
[또! 쓰러뜨립니다!]
사악!
검로가 빨갛게 칠해졌다.
[또! 또! 연이어!]
사아아악──!
시체가 피바다를 갈라내며 쓰러졌다.
[아니, 이거 위에서 보면! 무슨 리듬 게임 보는 것 같죠!?]
[예! 좀비가 음표군요! 어떻게 한 번을 미스가 안 납니까!!!]
음악만 잘 깔아놓으면 정말 리듬 게임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몬드가 박자를 열심히 쪼개가며 검을 휘두르고, 퍼펙트 판정을 받으면 좀비가 터져 나가는…….
[남은 시간: 00:25]
이젠 아몬드 자신도 어떻게 검을 휘두르는지 알 수가 없는 상태였으니.
어쩌면 정말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건 믹서기예요! 좀비 믹서기가 등장했습니다!]
리듬 게임의 절정처럼,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 검격.
수많은 검로들이 거의 흩뿌려지듯이 복도를 틀어막았다.
촤아아아악!
촤라락!
“크어어……!”
“으어으어으…….”
[남은 시간: 00:12]
해설들의 말대로였다.
좀비들은 베어진다기보단 갈려 나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손 한 번 허우적거리지 못하고 쓰러지는 좀비들이 태반이었으며.
그나마 원거리에서 깐족거리던 ‘캐쳐’가 오래 살았다.
[아, 아몬드! 오히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아!]
[이게 말이…….]
놀랍게도 아몬드는 앞으로 나아간다.
남이 보기엔 사지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니 거리를 벌리는 녀석도 별 수 없었다.
촤아아악!
“케에에엑!”
쓰러졌다.
그 위로 또 시체가 쓰러지고, 또 엎어진 다음 또…….
털썩!
“크어어……!?”
털썩!
수없이 쌓인 시체가 정말 산이라해도 될 정도다.
[남은 시간: 00:06]
시체로 만들어진 바리케이트.
털썩……!
그 위로 또 다른 시체가 올라가고.
그 시체를 밟고 기어올라간 좀비가 또 죽으며 결국 또 틀어막히고.
[남은 시간: 00:03]
좀비들이 저들의 시체에 막히기 시작하더니.
[남은 시간: 00:01]
“크어아으아악!!!”
쿵…… 쿵…….
시체 너머에서 들이박는 소리만 여러 번 울릴 뿐.
[결의 종료]
결의의 효과가 끝났을 때. 좀비들은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하게 됐다.
[마…… 마…… 막은겁니까!?]
[막았어요!?]
[다 죽이면서 막은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막혔습니다아!]
-미쳤다 ㄹㅇ
-ㄷㄷㄷ
-내가 숨 못 쉬어서 죽는 줄
-와 이걸 막아??
-좀비: 아 겜 ㅈ같이 하네!
[미, 미쳤습니다아!! 좀비고의 태산!! 아몬드! 아니! 시──체산!! 아몬드!!!]
[수, 숨을 못 쉬는 줄 알았습니다아! 아몬드으! 이걸 틀어막아 버리네요!]
숨을 짧게 나눠 쉰 건 아몬드도 마찬가지였는지.
[과호흡]
상태 이상 면역이 해제되자마자 과호흡 증상이 시작됐다.
“하아…… 하아…….”
첨벙……!
아몬드의 무릎이 피바다가 된 복도 바닥에 닿았다.
“흐어어…… 어어…….”
이내 거친 숨소리는 숨넘어가는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몬드!”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첨벙. 첨벙.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는 들렸지만, 시야가 흐릿해 잘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다 빨갛다. 바닥도, 옷도, 머리도…… 엥?
머리도?
“여기!”
제시였다. 그녀는 바닥을 기어와 자신의 치맛자락을 찢어 아몬드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머리를 들어 무릎에 기대어줬다.
“천천히.”
과호흡 증상의 가장 기본적인 대처.
호흡으로 날아간 이산화탄소를 다시 들이마시게 해주는 것이다.
“하아…… 하…….”
아몬드 캐릭터의 숨이 점차 고르게 바뀌었다.
물론, 그럼에도 아몬드는 제시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방금 전만 해도 서로 죽이겠다 칼로 후비던 사이 아니던가.
제시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난 어차피 졌잖아? 너라도 챌린지 보상 먹어야지. 이거 죽은 사람한텐 아무것도 안 준대.”
죽으면 아무것도 못 받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 건, 애초에 이 챌린지 시작한 이유가 ‘풍선껌 한 번 이기게 해주자’였기 때문인데.
뭐, 제시가 그 사정을 알 리는 만무했다.
아몬드는 되레 제시의 ‘난 어차피 졌다’는 말에 반응했다.
“근데…… 졌어?”
“그래. 저기 봐.”
제시가 뒤를 가리킨 후. 얼마 안 되어서 3반의 일원들이 조금씩 계단을 올라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소리를 들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3반이 계단실 전투에서 이겼다는 걸.
“뭐야. 결탁이냐? 아몬드?”
반장이 어이없다는 듯 묻는다.
“아…… 음…….”
그야, 적장의 무릎 위에 누워 있는 꼴이니 뭐라 변명할 방도가 없다.
“아니. 저 자식! 우리가 죽을둥 살둥하는 동안 적하고 연애질을 했단 말야!?”
대혁이 급작스레 억울하다는 듯 고함을 지른다.
“아. 걱정 마.”
제시가 깔끔하게 게임을 포기하며 오해를 해소하고 간다.
“나갈거야. 난 과출혈로 이제 끄…….”
털썩.
로그아웃으로 나간건지.
아니면 진짜 죽은 건지 구분이 안 되는 타이밍이었지만.
이로써 3반은 더 이상 적이 남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반장과 대혁을 후려친다.
퍽! 퍼억!
“뭐, 뭔데?”
“아! 뭐야!”
매점 누나였다.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일갈했다.
“결탁이라니. 저건 사랑이야. 이 쪼다들아.”
대혁과 반장은 볼멘소리로 반격했으나.
“사랑? 대체 무슨…… 저 여자가 우릴 다 죽일 뻔했는데? 그건 사랑의 매인가!?”
“음…… 학주새끼가 드는 사랑의 매를 생각해 보면 맞다 죽는 것도 사랑의 매일 수도……. 아, 아니, 이게 아니지! 사랑이면 진짜 찐결탁인거 아니야?!”
어차피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ㅋㅋㅋㅋㅋㅋㅋㄹㅇ
-대갈 (후리기) 현아 ㅋㅋㅋ
-맞아 ㅠ 이 정도면 찐사랑이지ㅠㅠ
-정보) 제갈 현아 말이 그냥 다 맞다
* * *
치이이익.
덴마크 팀의 캡슐 중에서 가장 늦게 열린 캡슐.
그곳에서 빨간 머리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
중계 화면에서 보던 것보단 더 성숙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누구라도 알아볼 정도로 그때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제시. 이제 나왔구나. 대체 왜 문을 못 연 거야?”
“아, 말했잖아. 누가 막았다니까?”
이 자식들은 아직도 문 타령이다.
“게다가 마지막엔 문 열었어. 날 막던 놈이 좀비를 죄다 막아서 그렇지.”
우트가 놀라워한다.
“조, 좀비를 막았다고? 엄청 많은 것 같던데.”
“그래.”
이에 너드킹이 반문했다.
“아니. 그동안 넌 뭐 했어?”
“나?”
제시는 괜히 머리를 만지작대더니, 이렇게 둘러댔다.
“나 다리 잘렸었어.”
“……그래?”
“어우…… 쉣.”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우트. 그는 여전히 아쉬운지 중얼거린다.
“하아. 아깝네. 한 끗 차이였는데.”
“뭔 한 끗 차? 우리 전략 다 들통나 놓고.”
너드킹이 팩트로 일갈했다.
“그 상태로도 이기려 한 게 욕심이지.”
“그나저나 그 머리 쓰는 사람 대체 누구야? 프로게이머인가? 역시 한국인가? 장난 아니던데.”
제시는 둘에게 그만하라는 듯 말한다.
“됐어~ 재밌었음 된 거지.”
둘은 또 금새 인정한다.
“하긴. 재미는 있었다.”
“그건 맞아. 한국 학교 좀비물은 넷플릭스에서나 봤는데.”
어차피 이들이 진짜 이겨야 하는 건 다른 게임이다.
“우린 국가대항전 이기면 되는 거야. 오늘은 즐기고.”
제시는 중계 화면에 뜬 아몬드와 3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본선…… 올라오려나?”
우트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무슨 조크인 줄 알았던 것이다.
“조선? 이 땅에서 말하긴 좀 그렇지만…… 힘들지 않겠어?”
“음. 그렇지?”
제시는 아쉽다는 듯 중계 화면을 바라본다.
천재 궁수의 스트리밍 시즌3 1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