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최고의 파트너(1)
정예 요원급 적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반응 속도와 정확도를 자랑한다.
심지어 그들의 정확도는 적(플레이어)을 발견한 뒤부터 계속 상승한다.
오랫동안 관찰하면 정확도가 오르는 걸 현실적으로 반영한 셈이다.
그러니 이들과 전투가 길어지면 플레이어는 무한정으로 곤란해진다.
발견 즉시 사살하거나 적어도 한두 방 안에 죽여야 했다.
깍두기의 패착은 처음 쏜 적이 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못 하고 그냥 다음 타깃으로 조준을 돌렸다는 것이다.
다른 타깃 두셋을 처리할 때쯤, 처음 쓰러졌던 적은 이미 일어나서 조준마저 마친 상태가 되어버렸고.
단발에 헤드샷을 당하는 건 어찌 보면 정해진 미래였다.
“…….”
그 정해진 미래에 도달한 깍두기는 어이가 없는 눈으로 까매진 화면을 바라본다.
‘한 판만 더 하면 안 되나.’
좀비 스쿨에서 아몬드에게 복수하려 했을 때, 단칼에 썰려서 웃음거리가 됐었다.
히트맨 점수로 설욕전을 하려 했는데, 이번에도 입구컷을 당하며 웃음거리가 됐다.
똑똑.
밖에선 계속 캡슐을 두들긴다.
“자~ 도전자님~ 나오셔야 합니다~ 도전은 1회만~ 1회만~ 워이워이~ 나와라~ 나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좀 나가라 깍두기야 ㅋㅋ
-받아들여라 네 실력을
“워이~ 나와라~ 나와~ 못하면~ 별수 없는 게임~”
지금은 직원이 무표정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대로 더 붙잡고 있다간 정말 소금이라도 뿌릴 기세다.
치이익.
뚜껑을 열고 깍두기가 두 손을 모은다.
“아. 진짜 한 번만 더 하면 안 될─”
──척.
정말로 하얀 결정 가루를 꺼내 드는 직원을 보며, 깍두기는 결국 캡슐을 나와야 했다.
“나가겠습니다.”
-너 어차피 김장된 건데 소금이 무섭냐! 그냥 한 판 더 해!
-까짓거 김장 한 번 더 당하자 뚜기야
-아 ㅋㅋㅋㅋ 개웃곀ㅋㅋㅋ
-소금이 아니라 탕비실에서 가져온 설탕 아냐? ㅋㅋ
팬들도 아쉬워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너무 허무한 실수로 기회를 날려 버렸으니까.
“다시 줄 서서 도전해 보겠습니다. 아. 이건 정말 너무 아깝잖아요…….”
-아깝?
-아깝다는 말이 뭔 말인지 모르누 ㅋㅋ
-ㅋㅋㅋㅋㅋㅋㅋ아 김장철이라 폼 떨어졌다고~
시청자들의 조리돌림을 무시한 채, 다시 부스 밖으로 나가 줄을 서는 깍두기.
그런데…….
“……?!”
아까보다 훨씬 더 줄이 길어져 있었다.
“이게 대체…….”
대충 봐도 이걸 다 기다렸다간 다른 챌린지를 할 시간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오늘 챌린지 포인트 순위 경쟁에서도 결국 밀리게 된다.
-ㅁㅊ 줄 뭐야
-이야 핫플이네 핫플ㅋㅋㅋ
-애들은 왜 온건뎈ㅋㅋㅋ
-줄 다시 서려면 DM으로 문의주세요 (합장)(합장)
남녀노소 구분 없이 꽉꽉 들어찬 줄을 보며 깍두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고. 그냥 열기가 좀 식음 오겠습니다~”
* * *
누군가는 줄을 보며 고개를 저을 때, 누군가는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하하하하하!”
모든 챌린지 포인트를 털려가면서도 아몬드와의 이 계약을 성사시킨 주인공.
바로 이번 지스타를 맡은 홍보 과장 정민철!
“봤어? 어? 봤어? 이 줄 봤냐고!?”
그는 영혼이 다 빠져나간 직원들을 붙잡고 신나서 마구 떠들어댔다.
그럴 때마다 직원들의 영혼은 더 더 옅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정 과장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곧바로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서, 아몬드 계약서를 찾았다.
“야. 그 아몬드 계약서 뽑아와라. 사본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내용만 확인할 게 있어서.”
그는 직원이 가져온 계약서를 한 장 한 장 훑으며 내용을 확인했다.
“계약 기간 중 홍보물…… 홍보물…….”
보통 광고 모델로 발탁됐다고 하면, 단순히 영상 광고 외에도 모든 홍보물에도 그 얼굴이 들어갈 수 있어야 했다.
광고 모델 계약서에 당연히 적혀 있을 내용.
“…….”
근데 없다.
“뭐, 뭐야.”
아. 이럴 수가.
그러고 보니 전속 모델이 아니라, 영상 광고 모델 계약서다.
그야 당연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영상 광고 하나만으로 계약한 것이다.
“……아. 맞다.”
정 과장은 턱을 긁적이며 생각해 봤다.
“그냥 쓰면 안 되나?”
지금 아몬드 챌린지 포스터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냥 아몬드 이름을 쓰면 어떻게 될까?
갑자기 주혁의 번뜩이는 무테안경이 정 과장의 머리에 스쳐 갔다.
‘어휴. 안 된다. 안 돼.’
뭔가 칼로 베이는 듯한 느낌.
분명 사달이 날 것이다.
법적인 문제를 넘어 회사 이미지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아몬드 덕에 유명해져 놓고 이런 걸로 논란을 만들어?
정 과장 스스로 듣기에도 괘씸하기 짝이 없다.
“하아. 이거 어쩐다.”
정 과장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런 건 타이밍이 생명인데. 언제 이 열기가 고꾸라질지도 모르는데.
“그…… 대표님한테 연락을 해볼까요? 현 상황 설명하시면 추가 지원 해주실 수도 있잖아요.”
처음 아몬드가 들어왔을 때 챌린지 포인트를 걱정했던 박 대리.
그의 제안이었다.
“……그럴까? 그래. 말이라도 해보자. 대표님이 쿨한 스타일이라. 될지도.”
광고 영상 모델 제안을 전속 모델 제안으로 바꾼다.
그러려면 엄청난 비용 상승이 불가피한데, 그 방법이라면 현재 들어오는 물 위에서 노를 젓다 뿐이랴?
항공모함도 띄울 수 있었다.
“근데 아무리 쿨한 성격이셔도…… 대표님인데. 흠…….”
대표의 입장이란 것이있다.
일단 직원들에게 돈을 줘야 하는 입장에서 회사의 자금 문제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데.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돈을 또 땡기자고 하면 당연히 좀 더 확실한 설득력이 필요했다.
일단 현장의 이 열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게 준비하는 게 중요했다.
“박 대리. 여기 현장 사진이랑, 영상 전부 나한테 보내놔. 그리고 지스타 공식 채널에서 인터뷰한 것도 아몬드 언급 나온 거 전부 따버려.
“예. 근데…….”
“난 인터넷상에서 언급이나 조회수 같은 거 따 놓을 테니까.”
“예, 근데…….”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저, 과장님?!”
이제야 그의 말이 들리는 정 과장.
“어? 왜?”
“그거 이미 누가 정리해 놨어요.”
“……뭐?”
박 대리가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는데.
그곳에 뜬 건 다름 아닌 올튜브 영상이었다.
[챌린지? 그건 인싸들만 하는 건데요?]
한 시간 전에 올라온 영상이었다.
틀어보니 지스타 공식 라이브에서 아몬드에게 도전한다고 하는 인터뷰가 전부 편집되어 들어가 있는 건 물론, 현재 히트맨 부스의 상황도 정리되어 있었다.
근데 조금…… 병맛적인 편집이 들어가긴 했다.
이상한 말투의 AI 목소리로 진행된다던가.
[게이머들은 사악한 인싸 견과류의 기록을 깨기 위해 아침부터 개같이 우르르 몰렸지만! 그들은 이 사악한 인싸쉑 아몬드의 잔상조차 밟지 못했어요!]
쉬이이익!
아몬드 사진이 계속 쉭쉭 지나가면서 잔상을 일으키면서 장면이 전환된다든가.
[정예 요원은 인싸만 가능한 걸까요?! 정의의 아싸 너드 게이머들은 사악한 인싸 빌런 아몬드의 잔상조차 쫓지 못하는 걸까요!?]
마지막에 아몬드가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매우 저화질로 삽입되어 있다든가.
[이 사악한 인싸는 아침부터 여유롭게 커피만 마시고! 초미녀들과 즐겁게 인사하면서도! 아싸들을 물리치는 기염을 토했어요! 역시 챌린지는 인싸들만 하는 걸까요오오오!?]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끝나는 영상.
정 과장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묻는다.
“이거 공식 채널 맞냐?”
“아니죠. 막상 아몬드 쪽이 찍은 영상은 하나도 안 나오잖아요. 그리고 아몬드 채널은 이렇게 싼마이 편집은 잘 안 해요.”
“그럼 뭐 하는 놈이야?”
“그냥 팬인가 봐요. 가끔 아몬드 팬 영상 만드는.”
[마카롱]
채널 이름은 마카롱.
영상 목록을 보니 이런 게 있다.
[인기 업로드]
[도내 최고 초미녀가 어쩌다가 인간이 아닌 견과류에 반해버렸습니다만?!]
[178.9만]
시빌 엠파이어를 하던 시절 제시와의 첫 만남을 그린(?) 영상물이었다.
정 과장은 별생각 없이 그 영상을 클릭해 버린 후, 홀린 듯이 다 봐버린다.
“제, 제시 짱…….”
그리고,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본심.
“……예?”
갸웃거리는 박 대리의 고개에 정 과장은 얼굴을 붉힌다.
민망함에 곧바로 일을 지시하는 모습.
“크, 크흠…… 암튼! 영상 자료는 아까 그걸로 설득되겠네. 지스타 오피셜 클립이 들어가 있는 거니까. 내가 대표님 연락드리고 올게. 너흰 바로 들어갈 준비해.”
“예!”
정 과장은 잠시 휴대 전화를 가지고 나간다.
* * *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과장의 말대로 대표는 쿨한 성격이었다.
「뭐?! 주, 줄을 서!? 우리 부스에!? 당장 뭐라도 진행해! 돈 쏴줄 테니까!」
사실 딱히 영상 자료도 필요하지 않았던 거 같다. 그간 여러 가지 수작 게임을 만들었지만 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처음인 터라.
극도로 흥분하신 상태다.
드디어 다른 게임 회사들이 만져보는 그 천문학적인 액수가 자신에게도 펼쳐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건 정 과장도 마찬가지다. 이런 스타트업에서 그래도 영업 파트로 처음부터 굴러준 사람이기에.
회사와 명운을 같이하는 건 대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걸 주체못한 정 과장은 회의실로 달려가며 허공에 어퍼컷을 날린다.
“예쓰!”
훙!
“예쓰!”
훙!
“예아아앗쓰!”
훙훙!
혼자 허공에 포권식 콤보를 넣어준 뒤.
“후.”
한결 가라앉은 상태로 회의실로 들어와 바로 아몬드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상현 앞에 선 인상 좋은 청년이 미소를 띄웠다.
“아, 아몬드 님. 혹시 생각은 해보셨나요?”
다분히 영업적인 미소이지만, 그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인상이 좋은 청년이었다.
이 사람은 나비 엔터의…… 누구더라? 상현은 방금 소개한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만큼 이쪽을 가는 건 관심 밖이었다.
“아. 아뇨. 딱히 생각을 더 해보진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바빴거든요.”
저쪽이 그 분위기를 읽지 못할 리가 없는데도, 계속 엉겨 붙으려 한다.
“아, 그러시구나. 그럴 만도 하죠. 최근 성장세가 탑3 안에 드시는 스트리머시거든요. 하하. 저희는 그런 데이터도 관리해서요.”
“아…….”
“그래서인지 실례지만 이번 이슈에 대해서도 의도치 않게 조금 알게 됐습니다. 사실 저희는 아몬드 님을 늘 눈여겨보고 있으니까요.”
하하! 웃으며 머리를 매만지는 청년.
“이슈요?”
“예. 이번에 챌린지 포인트 관련 논란이요. 저희 측이었다면 좀 더 부드럽게 해결할 수 있었다고 자신합니다. 아니, 오해받을 만한 여지가 애초에 없었을 겁니다. 위기 관리에 노하우가 상당하거든요.”
……라고 말하면서 앞자리에 자연스레 착석하는 청년.
이놈들은 영입해 오면 무슨 인센티브라도 크게 받는 걸까?
지나치게 열정적이다. 물론 샐러리맨이 열정적으로 하는 건 좋게 봐줄 일이지만, 의욕만 앞서는 혈기왕성 사춘기 남자애가 고백하는 것 같달까…….
‘일단 대충 대답하고 보내자.’
상현은 이 사람을 어떻게 부드럽게 떼어낼까 고민했다.
“그 이슈가 결국은 잘 풀리고 있다는 건 압니다만. 그런 리스크는 애초에 짊어지지 않는 게 좋거든요.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닌데, 언제고 리스크가 터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까요.”
상현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응수했다.
“전 결과주의자라. 결과가 좋으니 됐다고 생각합니다.”
“아, 예. 하지만 그 결과로 온 리턴에 비해선 리스크가 컸다는 게 저희의 판단이었습니다. 결과를 한 번만 낼 것도 아니니까요.”
“리턴…… 광고 모델 정도면 만족스러운데요.”
“광고 모델보단 전속 모델 정도는 되어야 아몬드 님의 이미지 손상 리스크에 상응한다 볼 수 있죠.”
“전속 모델……?”
“아예 그 게임을 대표하는 모델이요. 페이도 완전히 다르죠.”
전속 모델이 뭔진 상현도 안다.
그냥 어이가 없어서 말한 거다.
전속 모델은 그냥 연예인도 아니고 탑급 연예인이나 하는 거다.
“아~ 물론! 그냥 저희의 판단입니다. 저희는 스트리머님들의 의견이 최우선입니다만, 이런 데이터를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 차이가 있죠. 하하.”
이자의 말에 틀린 건 딱히 없었다.
듣고 있자니 얼추 다 맞는 말. 반박하긴 힘들다.
특히나 상현이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그래도 뭔가 마음에 안 들어.’
반박할 건덕지라고는 그냥 너 마음에 안 들어! 라고 외치는 거 말고 몇 가지 옵션이 남지 않았을 이 시점.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낯선 번호로 전화가 온다.
본래 낯선 번호는 안 받는데, 상현은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피했다.
“급한 전화라서요.”
“아, 예. 물론입니다. 혹시 커피 더 가져다드릴까요?”
그의 친절함에 상현은 웃으며 고개만 끄덕이고는 전화를 귀에 댔다.
“여보세요.”
-아. 유상현 씨…… 그러니까 아몬드 님 맞으시죠? 여기 히트맨 홍보부의 정민철 과장입니다.
“아, 네.”
-매니저님이 지금 전화를 안 받으시는데 너무 급한 일이라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조금 길게 통화 가능하실까요?
“예. 길~게 말해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전속 모델 제안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그에 상현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자식, 아까 전속 모델이 어쩌구 하지 않았던가?
천재 궁수의 스트리밍 시즌3 5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