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예선 개막(1)
그렇다.
어차피 상현과 주혁 둘만의 계약이며, 둘이 해나가야 할 일인데.
남들의 평가가 그 계약에 끼어들 여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둘이 최고의 합이라는 걸 둘이 알고 있다면.
나머지는 고려할 게 아니다. 두려워할 게 아니다.
그걸로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 우린 최고의 파트너인 것이다.
주혁은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딱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냥 머릿속 생각이 정리된 것일 뿐인데.
그저 이 녀석과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이전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진 자신을 느꼈다. 답답하던 구속구를 죄다 벗어던진 느낌이다.
주혁은 혹여나 표정을 들킬까 고개를 숙인다.
다행히 상현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던 터라 이쪽을 보고 있진 않았다.
툭.
그가 맥주잔을 내려놓고는 손을 내민다.
“여튼 잘 부탁한다. 앞으로도.”
“그래.”
주혁은 표정을 정리하고 손을 맞잡는다.
마치 다시 계약하는 것처럼 둘은 악수를 나눴다.
씨익 웃는 와중, 주혁은 갑자기 궁금해진 게 있어서 물었다.
“근데 넌 데이팅 앱 평점 몇 나오냐?”
“…….”
이 자식 데이팅 앱 평점에 맞춰서 사는 인생은 별로라느니 어쩌니 해놓고 본인은 만점인 거 아냐?!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인데.
“크흠. 그런 거 안 해.”
그런 거 안 한단다.
“아니, 테스트도 안 해봤어?”
“안 해봤지. 그냥 들어만 봤어, 광고 때문에.”
“……진짜?”
“여기 맥주 두 잔 더 주세요!”
* * *
이날 이후, 아몬드의 지스타는 끝났다.
히트맨과 전속 계약을 맺은 것을 마지막으로 아몬드에게 있어선 지스타 관련 업무는 이제 없었다.
여기서 주혁의 지스타 역시도 끝인 셈이지만.
그의 안에선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
비 온 뒤 땅이 굳고, 알지 못했던 씨앗이 그 안에서 싹을 틔웠다.
이게 대체 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나.
이 식물이 다 자란다면 이름을 희망이라고 붙일 거라, 주혁은 생각했다.
“어. 그 영상 오늘 안에 올라가면 될 거 같고…….”
이 희한한 것이 안에서 자라난 이후. 그는 일에 훨씬 더 잘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내가 보조 편집자는 미팅하고 올게. 영상 찍어서. 지아 넌 시간 잘 쪼개고 있어. 영상 쏟아져야 하니까.”
잡념이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전 직장이나 동료들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언젠가 닿을 수 있을 저 빛을 향해.
“아. 정 과장님. 잘 지내셨죠? 저희가 심사숙고하느라 연락이 늦었습니다. 오늘 바로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그는 히트맨 전속 모델에 대한 계약을 진행하려 한다. 이른 아침이지만,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상현도 어느샌가 그의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예. 예.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어플 켜주시면 됩니다.
정 과장은 잔뜩 신이 난 듯한 분위기였다. 전화 너머 주혁마저 그 기분에 감화될 정도로 흥이 많은 사람 같았다.
“자. 여기.”
주혁이 어플 기능을 상현에게 토스해 준다.
“오키.”
상현도 고개를 박고 계약서 내용을 다시 확인한다.
물론 대충 눈알만 굴리는 것이다.
그는 뭔가를 열심히 읽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그저 이러고 있으면 주혁이 검사한다는 걸 알고 있을 따름.
“예. 지금 검토하고 사인합니다.”
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 상현이 사인을 하고, 주혁도 사인을 한다.
거기에 정 과장의 도장이 찍힌다.
원격이지만 모두의 스크린에 동시에 찍혔다.
“예~ 계좌번호 같습니다. 아이, 뭘요. 저희가 감사하죠.”
띠링.
엄청난 속도로 계약금이 통장으로 꽂혔다. 액수를 손가락으로 새어본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씨익.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금액이었다.
“잘 들어왔습니다. 감사합…… 예?”
주혁은 이만 통화를 끊으려 했는데. 정 과장은 다급히 뭔 말을 꺼냈다.
“아. 광고 촬영이요?”
주혁이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
“시안 보내주시면 되긴 하는데…… 이렇게 되면 좀 스케일이 큰 거 아닌가요?”
스케일이 크고 말고는 사실 광고 모델인 상현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나.
이젠 히트맨도 전혀 남이라도 보기 무방한 한배를 탄 사람들이니.
주혁도 걱정이 됐다.
“아. 투자가 들어왔어요? 대표님 능력자시네. 알겠습니다. 근데 이런 광고면 기획사는…….”
그새 어디서 큰 투자가 들어온 모양이다. 아무래도 히트맨 게임의 가능성을 본 것일까?
“아니, 이제 다음 달부터 정 차장님이시라구요? 으하하. 축하드립니다.”
심지어 계약 진행한 정 과장은 고속 승진.
“그…… 이렇게 큰 광고면 광고 기획사는 어디로 하신 건가요? 메이킹이 쉽지 않을 텐데…… 아. 최강 기획. 최강 기획 좋죠. 큰 곳이랑 하시네요. 진짜 축하드립니다.”
그 이후 잠시 잡스러운 얘기를 한 후 전화를 끊은 주혁.
툭.
“뭐야? 광고 바뀌었어? 그냥 게임 하는 거 찍는 거였잖아.”
“어. 바뀌었다. 세트장까지 마련해서 찍는 걸로.”
“오…….”
“우리야 시간당 단가도 있으니까. 크게 상관없어. 오히려 돈 더 받게 됐지.”
“그치.”
뭔가가 술술 잘 풀린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터다.
‘걸리는 거라면 이건데.’
이런 와중에도 모든 게 다 매끄럽게 맨질맨질한 것은 아니더라.
톡. 톡.
메모하던 주혁의 펜이 한 글자를 친다.
‘최강 기획…….’
이번에 함께 광고를 기획한다는 회사다.
아성의 계열사이기도 해서 주혁과 상현에게도 연이 있는 곳이지만.
‘그 자식이 있는 곳이네.’
지아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지아의 바로 전 연인이 이곳에서 일한다고.
뭐, 여기가 국내 최고 티어 광고사이기도 하니까. 이런 사사로운 것으로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었다.
‘난 편한 편이구나.’
주혁은 새삼스레 예전에 헤어졌던 연인을 떠올린다.
그녀는 지금 미국에 있다. 미국으로 가면서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다.
그전엔 결혼까지도 얘기했었는데.
어느샌가 완전한 남.
인간관계라는 게 신기했다.
끊임없이 좋을 것 같다가도, 무너져내리는가 하면.
위태로운 듯해도 계속 이어져가는 것들도 있다.
처음엔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었던 유상현과 이런 관계가 된 것도.
돌아보면 신기하며 씁쓸한 현상이다.
“나. 방송 켠다.”
상현이 뒤로 휙 지나가며 말한다.
“아. 응. 그래라.”
주혁도 자연스럽게 채팅 관리를 위한 노트북을 켜두고.
상현이 캡슐이 아닌, 책상 앞에 앉았다.
타다다닥.
두 사람이 키보드를 치는 소리 위로 깊은 겨울 햇살이 내리쬐었다.
혹여 나중에 모든 게 변하더라도, 이 순간의 기억만은 영원할 것이라.
그것만으로도 앞으로의 겨울을 나는데 충분히 따뜻하겠지.
주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됐다! 됐어! 바로 걸어! 바로 띄워!”
정 과장이 우다다다 부스 안을 달리면서 고래고래 외쳤다.
“옙!”
직원들이 포스터를 펼쳐서 밖에 세우고, 스크린 광고 화면을 죄다 바꾸기 시작했다.
아몬드의 얼굴이 삽입된 광고였으며 곳곳에 ‘아몬드 챌린지’라는 거대한 글자가 떠다녔다.
또한 부스 근처에 가져다 놓은 깃발엔 ‘극한의 매운맛! 아몬드 챌린지!’라고도 쓰여 있었다.
과장이 그리던 마케팅 포인트들이 전부 다 들어간 것이다.
“하아. 시간 딱 맞췄네.”
“그러게요.”
“이제 곧 오픈이지?”
“네. 몰려올 거예요.”
“좋았다. 제대로 노 저었으.”
과장의 말대로였다. 이어서 오늘의 지스타 오픈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흔히 파도처럼 몰려온다는 말을 쓰는데, 정말로 그 말이 그대로 구현된 모습이었다.
직원들이 밖으로 나가, 그 파도 위에서 노를 젓기 시작한다.
“아! 아, 아! 아아~ 아몬드 챌린지~!”
“맵습니다. 정말 매워요~ 하지만 맛있게 맵습니다. 눈물~ 콧물~ 다 뽑습니다~”
요즘 인기와 관심이라는 게 워낙에 짧고 굵게 오는 추세였으니. 어제만큼 사람이 안 올 법도 했는데.
“오. 저거 그거구나?”
“아몬드 챌린지?”
“이야. 노 제대로 젓네.”
아몬드 챌린지라는 단어는 다시 한번 게이머들의 도전 욕구에 불을 지폈다.
여전히 얻을 수 있는 챌린지 포인트는 하나도 없었지만, 단순히 실력에 대한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개중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와서 이렇게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니, 포인트 없다구요? 그럼 얻는 게 뭔데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홍보하는데 막상 챌린지 포인트가 없단다.
“아~ 고객님~ 여기 밑에 적혀 있구요~”
직원이 가리키는 곳은 포스터의 하단 구석. 아주 작디작은 글씨로 ‘*챌린지 포인트 소진으로 얻을 수 없음’이라고 적혀 있긴 했다.
“챌린지 포인트는 얻지 못하셨지만, 분명 우리의 가슴 안에! 마음 안에! 더 소중한 게 남게 되었을 거라고 저희는 확신합니다~!”
해맑게 두 손을 흔드는 직원.
“……아, 예.”
이렇게 그들은 챌린지 포인트 하나 내주지 않고, 성황리에 장사를 이어나갔다.
* * *
한참 히트맨의 부스가 뜨거울 시점.
띠링.
[아몬드 님이 스트리밍을 시작하셨습니다!]
[지스타 후일담 및 중대 발표]
별다른 예고 없이 갑자기 켜진 아몬드의 방송.
[현재 시청자 1.8만]
방송을 켜자마자 2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트하~”
그가 인사를 건넨 곳은 캡슐 안쪽이 아닌, 그의 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간만의 소통 방송이다.
-아하
-와 얼마만의 소통 방송이여
-이 구도 간만이네 ㅋㅋㅋ
-중대 발표 ㄷㄷ
-중대 발표? 재입대하시나요?
시청자들이 반갑게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물론 후원도 빠지지 않았다.
[루비소드 님이 1만 원 후원했습니다.]
[아몬드님! 지스타 끝?]
“아. 루비소드 님. 만 원 후원 감사합니다. 네, 지스타 일정은 끝났고. 이제 다시 집입니다.”
띠링.
소통 방송이 오랜만이라 루비소드가 신난 모양이다.
[루비소드 님이 2만 원 후원했습니다.]
[지스타에 아몬드님 얼굴 엄청 많아요!]
또 후원이다.
“제 얼굴이요?”
[루비소드 님이 3만 원 후원했습니다.]
[트스게 확인!]
“확인이요? 죄송합니다. 보겠습니다.”
-ㅁㅊㅋㅋㅋㅋ
-다음은 4만 원인가? ㅎ
-역시 킬각 미쳤네 ㅋㅋㅋ
-후원유도 ㅋㅋㅋㅋㅋ
트리비 스트리머 게시판.
줄여서 트스게다.
각 스트리머들이 자신과 팬들만의 게시판처럼 쓸 수 있는 공간이다.
“트스게. 그러고 보니 안 본 지 좀 됐네요. 이거 같은데…….”
들어가 보니 루비소드가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글을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지스타 현장이었는데, 수많은 아몬드들이 둥둥 떠다녔다.
-ㅅㅂㅋㅋㅋㅋㅋ
-와 아몬드 디스토피아다 ㄷㄷ
-“아”포칼립스 ㅋㅋㅋ
-인간 세계가 멸망한거냐 결국?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다. 이제 견과류의 시대다
-결국 견과류들이 이긴 세계군요.
전속 계약을 맺은 게 거의 몇 시간 전인데.
엄청난 속도였다.
[가지볶음 님이 5천 원 후원했습니다.]
[내 동생 얼굴도 마음대로 못 쓰는 게 법인데. 이거 괜찮은 겁니까?]
-동생 얼굴은 못 쓰는데 돈은 쓰는 새끼……
-캬 법잘알
-가지 묶음 아니라서 비추~
-그러네 너무한 거 아닌가??
“아, 제가 히트맨 전속 모델이 돼서 초상권은 상관없습니다.”
-띠용!?
-ㄹㅇ??
-헐 대박
-캬
-와 ㅊㅊㅊ
[루비소드 님이 10만 원이나 후원했습니다.]
[헐 모델 축하해요! 근데 중대 발표는 무엇?]
“아. 감사합니다. 루비 님. 중대 발표…….”
제목에 중대 발표라 써놓고 막상 전혀 언급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까먹고 있었누 ㅋㅋㅋ
-제목 호두가 대신 써줌?
-견과류쉑 ㅋㅋㅋ 루비 없음 방송 어케함 ㅋㅋㅋㅋ
[현재 시청자 4.7만]
어느새 수다 떠는 방송에 5만 명이 육박하게 보고 있는데 말이다.
지스타 이후로 체급이 커진 건가. 아님 그냥 중대 발표 어그로인가.
알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중대 발표는 해야 한다.
“까먹은 게 아니라,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크흠.
그는 헛기침을 괜시리 몇 번 하더니, 책상 밑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
-뭐임?
-?
물음표의 향연 끝에 등장한 물건은 레이나의 활, 데미안이었다.
“제 데미안이 너무 영롱해서 중대 발표로 긴급히 소개해 드리려 했습니다.”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활. 분명 영롱한 자태는 맞았다.
-에라이 ㅋㅋㅋㅋ
-데협들 죽어요오오옷
-데협…… 깍!
-“깍”당해버리네
-실화임?ㅋㅋㅋ
-다음부턴 ‘소대발표’라고 하세요……
시청자 수가 순간 우르르 빠져나간 듯 보였다.
“……농담입니다.”
아몬드는 씩 웃으며 다시 활을 내려놨다.
“사실 이게 중대 발표는 아닙니다.”
-재입대하시나요?
-혹시 볼 점유율 발언으로 월드컵 국가대표로 출전하게 됐나요?!
-아 제발 미호랑 사귄다고 하지마. 나 그럼 진짜 못참아!
별의별 추측이 다 나오는 가운데.
아몬드가 뜸들이는 것을 멈추고, 스크린에 뭔갈 띄웠다.
[시빌엠 국가 대항전 방송 계획]
“두둥. 중대 발표~”
-두둥 ㅇㅈㄹㅋㅋ
-커여웤ㅋㅋ
-끼부리네 이자식
-아 국대전!
-방송이 좀 다르게 되나?
“곧 시빌 엠파이어 국가 대항전 예선이 시작되는데요. 이때부턴 방송 구조가 조금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천재 궁수의 스트리밍 시즌3 5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