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궁수의 스트리밍 시즌3 131화
44. 넘겨(1)
그 시각, 쿠키의 집.
떠들썩했던 소파 주변이 조용해진다.
아니, 떠들썩했던 적도 있는 소파 주변이라 해야 옳겠다.
사실 조용해진 지는 좀 됐으니까.
‘거 참 분위기가 뭐하네.’
팝콘, 옥수한은 괜히 머리를 긁적거리며 뭔 말이라도 해볼까 고민해 보지만 그만둔다. 그 역시 프로 경험이 있던 터라 잘 알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카운트되지 않는 경기라고 하더라도 패배하면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아마 패배한 방식이 문제일 거다.
‘신나게 맞았으니 뭐…….’
해설들이 열심히 역전의 가능성을 붙들고 늘어지며 포장해 주긴 했으나, 아는 사람 눈엔 보였다.
시빌엠을 그리 잘 알진 못하는 수한의 눈에도 방금 경기가 꽤나 일방적이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스크림도 이런 식으로 지면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데.
본 경기를 이렇게 졌으니 오죽하겠나?
꽤나 참담한 분위기다.
수한은 그저 자신이 시킨 피자 조각만 입에 우겨넣으며 이 시간이 지나길 바랄 뿐이다.
누군가 침묵을 깨주길 기다리면서.
“음.”
그런데 그게 이 사람일 줄은 몰랐다.
“잠시 같이 정리해 볼까요?”
최사랑이었다.
그녀는 노트를 무릎에 얹고는 휠체어를 움직여서 테이블로 향했다.
“아. 네. 그래야죠.”
“아…… 네, 네!”
싱크 탱크의 일원들은 무슨 자다가 깬 사람들처럼 그녀의 말에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옮겼다.
아마 혼이 나가서 방금 말을 꺼낸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래도 새로 참여한 사랑이 전략 회의에 이렇게 적극적이라는 건 고무적이었다. 비록 비상용 후보이긴 해도, 그녀 역시 만약 출전한다면 총지휘관이다. 싱크 탱크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수도 있는 위치다.
“우선 어디서부터 스노우볼이 시작됐는지. 얘기해 볼게요.”
사랑은 이미 할 말이 다 정해져 있었는지, 노트를 딱히 보지도 않은 채로 여러 지점들을 짚어냈다.
그녀가 물꼬를 트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오가며, 점점 테이블 주변이 활기를 띠었다.
무심히 틀어놓은 티비의 중계 소리보다 이젠 그들의 목소리가 훨씬 더 컸다.
[아~ 이로써 국가 대항전의 예선이 모두 마무리됐습니다.]
[예. 조선은 비록 마지막 경기를 패했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고 봐야겠죠?]
[그렇죠! 성과 수준이 아니라 기적이라고!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분들도 계세요!]
그들은 그렇게, 국가 대항전 예선의 중계가 끝나가는 것도 모르는 채 토론에 열중하며 그날 하루를 보냈다.
* * *
대부분의 큰 대회들이 그렇듯이 예선이 끝나면 본선까지 시간이 꽤 여유롭게 주어지는 편이다.
조선 팀의 입장에선 다행이었다.
비록 예선 마지막 경기가 쓴 맛의 패배였다지만, 그때의 기억을 잊을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 셈이니까.
거기에 더해 여론 역시 조선이 마지막에 로마에게 진 것을 탓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정말 미쳐서 이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로마전을 없던 일 취급했다.
특히 릴프로에 들어가 보면 그런 경향이 강했는데.
빅) 응~ 또 썰어봐~ 진출하면 그만이야~~
로마에게 졌지만 어쨌든 본선에 진출했으니 그게 그거라는 마인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ㄹㅇ
-어쩔 본선~
-에스파냐 프랑크 밟고 본선갔음 유사 8강으로 쳐줘야지ㅋㅋ
└ㅋㅋㅋㅋㅋㄹㅇㅋㅋ
-아! 모르겠고 주모! 막걸리 사발에 국뽕 말아!
└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들도 전부 일단 즐기는 분위기였다.
빅) ???: 야. 로마. 네가 이겼다고?
로마를 자신 있게 호명하는 이런 게시물에 들어가 보면 대부분이 이런 내용이었다.
==== ====
(사진)
ㅆㅂ 그래서 네가 뭘 어쩔건데?
우린 이미 국뽕 다 느꼈는데.
네가 이제 인터뷰 말고 할 수 있는게 뭔데?
====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
-치승이 잼민 펀치 짤 미쳤누 ㅋㅋㅋㅋ
-ㄹㅇ 로마가 뭘 어쩔거냐고~ 결승에나 가야 만날텐데~ ㅋㅋㅋㅋ
└그렇네 ㅋㅋㅋ 로마 하나 재낀거나 마찬가지네
└ㅁㅊ 정신승리 ㅋㅋ
-김치승 주먹 든 짤 미쳤네 ㅋㅋㅋㅋ
-개찰떡ㅋㅋㅋㅋㅋ
이미 예선에서 즐길 거 다 즐겼고, 이제 로마를 만날 일조차 없다는 것.
이 사실만으로도 응원하는 게이머들은 즐거운 것이다.
그야 이번 시즌 로마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이니까.
[국뽕이 마약이긴 하네 ㅁㅊ 다 돌았어 ㅋㅋ]
[이렇게 단합이 잘되는 새끼들이었음?]
[왜 분탕충 없냐? 릴프로 일 안하냐?]
흔치 않게 단합된 모습을 보이는 릴프로에 낯설어하는 사람들.
실제로 이들이 과장하여 표현하는 게 아니라, 릴프로 같은 커뮤니티가 단합된다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반대 의견을 표하려는 자들이 항상 도사리는 곳이 여기니까.
그러니 국가란 이름 아래에서 행해지는 스포츠의 힘이란 꽤나 대단한 셈이다.
빅) 아몬드 = 코리안 에스코바르
아몬드를 언급하는 이 빅 게시물을 보면 그 힘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 ====
양궁 선수였던 것부터 시작해서, 조선으로 본선 진출까지 함 ㅋㅋㅋ
ㅅㅂ 걍 국뽕 제조기임.
==== ====
-ㅁㅊ ㅋㅋㅋㅋㅋ
-뭔 말인가 했네 ㅁㅊ ㅋㅋㅋ
-정보)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번 마약상이다
└찐
└정보) 뽕은 히로뽕의 준말로 메스암페타민이라는 마약이다.
└찐2
-앜ㅋㅋㅋㅋ ㅇㅈ
-8강 넘게 가면 에스코바르 넘을듯 ㅋㅋㅋ
국가 간 이름을 건 대결에서 이긴다는 건. 마약이라는 강력하고 사악한 물질에 빗댈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들이 모두 단합된 것일 터다.
릴프로가 이미 이 지경이면 사실 엠불의 상태는 더 심했다.
거긴 안 그래도 국가 대항전 팀에 호의적이니까.
그들은 애초에 로마 경기 따위는 진행된 적이 없었던 걸로 취급하고 있다.
[그나저나 로마랑은 왜 2차전 안함? 그냥 부전승?]
[로마랑 2차전 언제하는지 아는 사람?]
[오사카 가는 날 언제임?]
[본선 비행기 예약한 사람 있냐?]
이 세계에선 로마 2차전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본선 진출 확정만 존재했다.
-여, 여기가 넛츠 펑크 세계인가 뭔가 하는 거기냐?
└릴프로는 가짜광기네 ㄹㅇ ㅋㅋㅋ
└여기선 아반떼 N이 아반떼 넛츠라던데. 트루?
└└ㅁㅊㅋㅋㅋㅋㅋ
-대체 얼마나 세계를 비틀어버린거냐고! 아몬드!
-게이트는 그래서 언제 열림?
이렇게 모두는 즐거운 기억만을 기억한 채로 살아갔고, 이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 * *
띠링.
[아몬드 님이 스트리밍을 시작했습니다!]
근래 며칠간 상현은 밀려 있던 게임 광고를 몇 건 진행했다.
-광고여도 좋아 ㅠㅠ
-요즘 갠방 자주키니까 넘 좋다
-맨날 광고만해주세여
상황상 광고 위주로 진행됐지만, 그간 상현의 개인 방송이 장시간 켜진 적이 없다 보니 시청자들은 좋아라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아 역시 일감이 늘어났다.
광고를 찍으면 올튜브에 올려야 하니까. 자연스레 그녀의 일이 생기는 것이다.
특히 광고는 문제 되는 일 없게끔 확실하게 만들어야 해서, 편집자가 할 일이 일반 영상보단 조금 더 많았다.
보통 일반 영상 2~3개 올릴 노력으로 광고 하나가 올라간다.
지아는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엉망진창으로 보내고 있느니, 차라리 일이 들어오는 게 반갑다.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계속 그놈에 관련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것이다.
국가 대항전과 가짜 국대로 일이 뜸해졌을 때.
그녀는 자신의 수익이 생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보다, 일로 머리를 채울 수 없다는 게 괴로웠다.
[주혁: 차라리 장 피디님이랑 같이 일해보는 건 어때? 일손이 좀 필요하다는데. 너도 페이 나눠받고. 경험도 쌓고.]
주혁에게 이런 제안이 오기도 했다. 그 역시 지아의 상태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지아는 수락할 수가 없었다.
[지아: 아냐. 그분들은 그분들끼리 잘하시는데. 이 기회에 조금 쉬지 뭐.]
장 피디는 지아의 눈으로 봐도 분명 실력자다. 이런 관찰 다큐 영상을 매주 뽑아낸다는 건 어마어마한 집념과 센스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지아가 방송 하나 가지고 편집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난이도다.
그러니 장 피디랑 같이 일한다는 건 분명 그녀 역시 영상 기획자로서 영광인 일이다.
문제는 그의 회사다.
장 피디와 일한다는 건 결국 그의 회사와 일하게 된다는 것이고, 사실상 회사라는 조직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쟤야? 과장이랑?」
「……근데, 넌 계약직이잖아?」
「지아 씨. 지금 어차피 나갈 사람이라고, 이따구로 구는 거야?」
「어휴. 이 과장님은 왜 저런 애랑?」
지아에게 그때의 기억은 칙칙한 검정색 물감이다.
이렇게 하면 좋게 보일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 다른 색을 그 기억 위에 덧칠하고 덧칠해 봤지만.
그럴수록 시커메질 뿐이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비참해질 뿐이다.
지아는 그 거미줄로 다시 뛰어들 자신은 없었다.
‘연주라도 소개시켜 줄까…….’
그래도 장 피디가 일손이 필요하다는데. 그냥 비워두긴 아깝다.
그나마 그 회사에서 마지막까지 얘기하고 지낸 동료 하나.
그게 허연주다. 예전에 일을 도와줬던 친구.
‘아니면 연주랑 같이 들어가……?’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친구라기엔, 아마 그녀도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뭉친 거겠지.
‘아마 날 좋아하진 않아.’
어쨌든, 지금은 일이 들어왔으니 다행이다.
그녀는 예전 기억은 털어버리고, 다시 맹렬히 일에 집중했다.
“간만에 광고 영상이니 제대로 뽑아 먹자!”
그녀는 답지 않게 괜히 큰 소리를 내며 팔을 걷어붙였다.
* * *
저번 지스타로 인해서 상현은 정말 많은 종류의 광고를 계약했다.
그중 대부분은 당연히 게임 광고다.
지스타가 게임 박람회이니까.
그런데 게임 광고라고 해서 꼭 방송 켜고 게임 하는 종류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스타에서 참 여러 일이 벌어졌었지만,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한 게임만은 특별한 광고가 진행됐다.
“어! 여깁니다! 아몬드 님! 매니저님! 이야─”
반갑습니다를 연신 외치며 달려오는 한 사람.
그는 주혁과 상현의 손을 연달아 마주 잡으며 물었다.
“저 기억하시죠?”
“예? 무슨 소리세요. 정 과장님~”
이번 광고를 만들어낸 주역이나 다름 없는 히트맨 시뮬레이터 홍보부의 정민철 과장.
주혁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하하. 요즘 하도 바쁜 세상이잖습니까? 저처럼 흔하게 생긴 놈은 금세 잊혀지죠. 매번 확인해야죠.”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주는 농담이었던 모양이다.
“그거 주시죠. 안내하겠습니다.”
정 과장은 앞장서며 촬영 스튜디오로 안내했다.
가는 길에 주혁과 앞으로 대충 일어날 일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정 과장 입장에선 좀 의아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근데 이거 최강 기획에서 찍는 거 맞죠?”
“……예?”
최강 기획이 업계에선 유명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선 이름도 잘 모른다.
광고를 넣는 기업이나 광고를 받는 연예인 등, 소수에게만 노출되는 기업이니까.
그 이름을 대뜸 확인하듯 물으니 정 과장이 놀란 것이다.
“아, 최강 기획. 예. 그렇습니다. 한번 같이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 예. 뭐 우연히…….”
“이야! 스트리머신데. 최강 기획 광고를 이미 하나? 이제 두 개!? 이야……!”
“별거 아닙니다.”
“별거 맞죠! 저희 대표님도 큰 맘 먹고 계약한 건데요. 아마 기깔나게 나올 겁니다.”
“그렇겠죠. 업계 탑인데. 그런 데는 사람…… 아무나 안 쓰잖아요?”
주혁이 씩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으나.
“아무렴요. 물론이죠. 들어가시죠.”
정 과장은 그저 해맑게 둘을 안내했다.
그야 당연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정 과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