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궁수의 스트리밍 시즌3 141화
47. 대진(1)
게임사에서 제공한 전세 버스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각 나라의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우르르 올라타기 시작했다.
딱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국적이 마구 섞였다.
아마 주최 측의 실수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제 공지로 모두 통역 어플을 깔아둘 것을 권고했던 걸 보면 주최 측은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던 거다.
그러니 상현은 팡어와 몇몇 한국 선수들을 제외하면 전부 외국인인 버스에 올라타게 됐어도, 별로 당황하진 않았다.
“아. 아가씨 오셨네. 여기 앉아.”
팡어는 애초에 제시가 오자 자리를 비켜주는 여유까지 보여줬다.
“와. 감사~”
그렇다. 제시는 또 한국인 버스에 기어코 올라탔던 것이다.
“또 보네?”
푸훕.
팡어가 뒤에서 대놓고 비웃었으나, 제시는 개의치 않고 우연이라는 듯 씩 웃었다.
“운이 좋아. 난.”
“운이 정말 좋은진 오늘 대진표 봐야 하지 않겠어?”
건너편 자리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목소리로는 분간이 안 갔다.
아무래도 번역기가 내는 음성이랑 섞였기 때문이다.
단, 얼굴로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상현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까닥였다.
“둘이 친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는데.”
길게 기른 곱슬머리는 신화에 나오는 존재를 연상케 했으며, 그 밑의 녹색 눈은 시선을 맞추기 힘들 정도로 빛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피에르였다.
로마의 플레이어 중 하나다.
아니, 플레이어 중 하나라고 말하기엔 그의 존재감이 너무나 뛰어난, 로마의 에이스였다.
현실에서 보니 몸이 조금 더 큰 느낌이다. 아님 그사이 운동을 했나?
‘뭐야. 저 자식.’
상현은 괜히 자기 몸을 내려보며, 식단을 바꿔볼까 고민했다.
제시가 그를 아는지 한마디 했다.
“사탄들의 버스에 루시퍼의 등장이라?”
“뭐? 대체 뭔 소리야?”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명대사야.”
상현은 깜짝 놀랐다.
그가 꼬마이던 시절에나 방영했던 드라마를 제시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명대사의 의미가 오역됐나? 내가 본 한국 드라마는 그렇지 않았는데.”
“네가 본 건 뭔데?”
둘이 갑자기 희한한 주제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와아앗? 명작이 막내 아들? 트럭에 치이는 게 꿈이야?”
“그러는 넌 네가 재벌 3세랑 결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보지?”
“못 할 건 뭔데?!”
와중에 상현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송 켤걸.’
뼛속까지 스트리머로 절여진 건지, 외국인 둘이 한국 드라마 얘기를 하며 토론하는 장면을 찍었다면 대체 조회수가 얼마나 나왔을지 계산해 버렸다.
그러나 방송을 켜기 전에 이미 이야기는 끝났다.
“하…… 됐어. 어차피 너한테 말 건 게 아니니까.
피에르는 애초에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냥 상현과 이야깃거리를 가져보기 위해 아는 얘기를 꺼낸 것뿐.
그가 흥미 있는 쪽은 상현이다.
“재밌었다. 저번 게임. 나 기억하지?”
그는 상현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
“그래.”
상현이 손을 맞잡으며 받아주자, 그는 좀 더 말을 걸어본다.
“나 사실 너에 대해서 조금 알아봤어.”
“어?”
상현에겐 좀 의외의 말이었다.
피에르는 우승 후보인 베테랑 플레이어고, 상현은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니까.
‘더군다나 난 결승까지 가는 게 아니면 만날 일도 없는데.’
뭣보다 피에르 입장에서 상현은 굳이 알아볼 필요가 없는 플레이어다.
상현 스스로야 조선이 우승까지 가는 게 목표라고 믿고 있다지만, 냉정하게 보면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란 건 상현도 아는데.
굳이 자신을 알아봤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다.
“양궁 선수 출신? 맞지?”
퓨.
피에르가 손짓으로 활을 당기며 흉내 냈다.
“아. 맞아.”
“멋진데.”
이에 옆에 있던 제시가 깜짝 놀라버렸다.
“야, 양궁 선수 출신이라고?!”
“……?”
제시는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피에르가 비웃음을 띄우며 조롱했다.
“그것도 몰랐던 거야? 옆에 붙어 앉기나 하고.”
제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흘려 버렸다.
“과거 같은 건 모르고 사랑해야 진짜 사랑이야~”
“사랑?”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아니. 번역 오류. 번역 오류.”
제시는 눈알을 굴리며 괜히 부채질을 해댔다.
“아하하. 덥네.”
상현은 방송 켜지 않길 잘했다는 쪽으로 다시 생각을 고쳤다.
* * *
치이이익.
버스가 멈춘 곳은 거대한 경기장 앞이었다.
선수들이 순차적으로 내리면서 자연스레 피에르, 제시와도 헤어지게 됐는데.
피에르는 좀 재수 없는 구석이 있는 친구지만, 어찌 됐든 말을 섞어보니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어떤 인간이든 다 그렇듯이 말이다.
“아마 본선에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이후에 디너 파티가 있어.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디너 파티 있는 건 아는데.”
“내가 팀플레이가 뭔지 알려줄게.”
찡긋.
눈 인사를 보내며 사라지는 피에르.
그 나름의 유머 감각인 것 같은데, 역시 상현 기준에선 조금 재수 없는 녀석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제시가 피에르의 팀플레이에 대해 수위 높은 험담을 뱉었는데.
“…….”
상현은 그냥 번역 오류라고 생각하고, 못 들은 것으로 했다.
“또 봐~”
제시는 간단한 인사를 남긴 채 자기 진영으로 사라졌다.
여기서부턴 각 나라들끼리 따로 뭉쳐서 들어가야 했으니.
상현은 두리번거리며 한국팀의 위치를 찾았다.
“여기입니다! 한국~!”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전부 하얀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등짝에 쓰인 ‘KOREA’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두근─
상현은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쿠키와 싱크 탱크 팀, 그리고 눈에 익은 몇몇 플레이어들.
한 40명 정도의 인원이 모였다.
“자…… 다 모였나?”
1차 입국 인원은 이게 전부였다.
“우리 숫자가 아무래도 좀 적지?”
희철이 조금 무안한 듯 쓰게 웃는다.
그의 말대로 한국의 1차 입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굉장히 적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프로 리그가 활성화되어 있는 나라들보단 선수들이 시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갈까?”
희철이 앞장서는 순간, 치승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 다 온 거 맞나요? 그분은 오늘 안 오세요?”
그분?
아몬드를 포함한 다른 플레이어들은 의아한 듯 두리번거렸다.
지휘부만 아는 뭔가가 있는 건지.
“아. 스케줄이 좀 달라. 늦는다고 했어. 아무래도…… 좀 불편하니까 말이야. 바름이가 저녁에 모시고 올 거다.”
“아. 네.”
이로써 의문도 해결된 건지, 한국팀은 경기장 안으로 출발했다.
* * *
시빌 엠파이어가 해외에서 인기가 꽤 좋은 게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상현은 솔직히 완전히 실감하진 못했었다.
아니,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이런 광경을 눈앞에서 직접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안단 말인가.
“……와.”
각 진영당 201개의 캡슐.
몇만 명이 동원 가능한 관람석.
필드 위가 게임 속인 거처럼 보이게 하는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
현대 기술력의 정수를 모아놓은 것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어떻게 이보다 시빌엠이라는 게임의 위용을 더 잘 느낄 수 있을까?
아마 한국에서만 플레이해선 절대 알 수 없으리라.
“……지린다.”
“캬.”
“오, 오졌다.”
싱크 탱크의 일원들도 죄다 본선은 처음이기 때문에 혀를 내두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야. 야. 너무 두리번거리지 마라. 응? 얕잡아 보인다.”
팡어가 그들을 툭툭 치며 한소리 한다. 웃긴 건 그러면서 본인도 누구보다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거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미 본선에 한 번 왔었던 희철 역시 주변을 한바퀴 천천히 돌아본다.
아마 다른 이들이 돌아보는 것과는 다른 의미일 것 같다고, 상현은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둘러본 희철은 이내 알 수 없는 웃음을 띠며 어딘가를 가리킨다.
“어. 저쪽이네.”
한국팀의 자리였다.
한국팀 모두는 그 자리로 가서 앉아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을 내려봤다.
잠시 기다리니, MC가 나타나 인사를 건넸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우우웅……!
그는 홀로그램을 통해 거인처럼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떠돌이 용병 여러분! 오늘 드디어! 본선에서의 대진 추첨이 있겠습니다!”
그 뒤로 대진에 나올 32개국의 국기가 홀로그램 스크린에 떠올랐다.
“오오오…….”
주변에서 감탄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홀로그램으로 구현한 필드 때문이다.
“와. 꼭 필드에 진짜 선수들이 있는 거 같은데?”
“올다이브 기술력에 대항해서 만든 라이브 기술이래.”
필드 위에 떠 있는 국기 밑엔 그 나라의 총 지휘관 캐릭터들이 서 있었다.
로마의 안토와 조선의 쿠키 등, 얼굴을 아는 선수는 얼굴이 얼추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마치 진짜 거기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정도면 오프라인으로 티켓 살 만하네.”
“그쵸. 다행이죠. 올다이브 시스템 나오고 말이 많았잖아요. 온라인이 더 재밌는 거 아니냐고.”
수군대는 군중들의 목소리가 잠시 사그라들자, MC는 다시 진행을 시작한다.
“자! 대진 추첨은 간단합니다! 사다리 게임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모든 32명의 총지휘관 캐릭터들이 칼을 번쩍 빼 들었다.
스릉!
“쿠키 형 칼 든 거 봐.”
“푸훕.”
쿠키가 칼을 든 모습에 싱크 탱크 일원들이 재잘거린다.
“캬. 일본 놈들 이런 건 기똥차게 만드네.”
팡어가 옆에서 언젠 사온 건지 과자를 까먹으며 감탄했다.
“그러게요.”
상현도 과자를 조금 뺏어 먹으며 끄덕였다.
캐릭터로 사다리를 타게 하는 게 굉장히 일본스러운 느낌이고, 재밌다.
“단! 동시에 모든 캐릭터가 출발하는 사다리 게임! 각 나라의 총 지휘관들이 칼과 방패를 들고 마주치는 상대를 썰어 넘기면! 그 자리로 가고! 지면 돌아갑니다!”
와아아아아.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대충 캐릭터들이 칼을 들었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진짜 이렇게 한다니.
“아! 물론 이건 그냥 운이니까! 이걸로 총지휘관을 구박하지 말아주십시오!”
와하하하.
떠들썩한 웃음이 한 번 관중석을 지나간 후.
“자!”
진행자의 구호에 맞춰, 게임이 시작됐다.
“시작!”
수많은 총지휘관 캐릭터들이 마구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혹시라도 실제 전투력이 적용됐다는 전제하에- 안토와는 가장 멀리 떨어진 터라 조선 입장에선 뭔가 마음이 안정됐다.
“으하하하! 쿠키 형 달리는 거 봐라. 너무 똑같은데!?”
“아니, 형. 신체 데이터 줬어요?”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는데.”
푸하하하!
선수들은 쿠키의 달리는 모습을 보며 웃기 바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총지휘관이 이렇게 죽어라 달리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아아아! 첫 번째 싸움이 일어납니다!”
사다리를 따라 걷다 마주친 두 지휘관.
페르시아와 덴마크.
제시와 몇몇 덴마크 플레이어들이 벌떡 일어났다.
사실 이겨도 져도 어차피 운이지만, 괜히 응원하게 되는 게 사람이다.
“이겨라아!”
“죽여어어!”
챙! 채앵!
다소 작위적인 칼싸움 사운드와 함께 덴마크 지휘관과 페르시아 지휘관의 싸움이 시작됐다.
“와아아아아!”
연이어 다른 곳에서도 싸움이 마구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선 지휘관, 쿠키의 상대는…….
“!”
일본 지휘관이었다.
기다란 일본도와 조선의 환도가 맞붙었다.
“와. 하필.”
“아니, 뭐 이런 별것도 아닌 거에서 사람 일어나게 만들어!?”
팡어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벌떡 일어나 목청이 터져라 응원했다.
다른 멤버들도 신나서 일어나 응원했다. 상현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챙! 채앵!
잠시의 작위적인 사운드가 터져 나온 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조선 쪽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쿠키가 일본 지휘관을 이겨서 쫓아낸 것이다.
“한일전은 이겨야지이이이!”
팡어는 신이 나서 팔을 마구 흔들었다.
누가 보면 진짜 이기기라도 한 줄 알 것 같았다.
“허억…… 헉…… 와씨. 이게 뭐라고 흥분되네.”
“그러게.”
한일전(?)에서 기운을 너무 뺀 플레이어들은 이어지는 전투에선 그다지 큰 응원을 보내지 못했다.
그런 탓인지 쿠키는 한 번 사다리에서 물러나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몇 번의 전투 끝에, 슬슬 총지휘관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자! 총지휘관들의 사투가! 끝났습니다!”
이윽고, 조선의 첫 번째 상대가 나왔다.
관중석 쪽의 제시와 아몬드의 눈이 마주쳤다.
[조선 vs 바이킹]
상대는 바이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