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3화 (3/251)

#003화 - 베오울프

“변경백 님께서 조찬을 갖자고 하셨습니다.”

레니는 새벽에 티그리스에게 칭찬받은 일 때문인지 자신감이 늘어 말을 떨지

않았다. 칭찬 한 번해주면 금방 회복되는 야생초 같은 녀석이었다.

“좋다.”

“그럼 혼자 드시는 줄··· 네?”

레니는 당황했다. 평소에 티그리스는 가족들과 식사를 잘 하지 않았다. 가족

들과 식사를 하느라 검술 훈련할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조찬을 갖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아, 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잠시 후 레니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엔 잔뜩 긴장

한 리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리니아는 옷에 주름이 없는지 화장이 잘 되었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갑자기

오라버니가 식사를 같이 한다는 말에 부랴부랴 준비했던 것이었다.

티그리스는 리니아의 맞은 편에 앉았다. 티그리스는 리니아의 얼굴을 뚫어져

라 쳐다봤다.

리니아는 당황했다. 혹시 어디 잘못된 구석이 있는 걸까? 거울을 너무나도 보

고 싶었다.

리니아가 반짝이는 나이프로라도 얼굴을 확인해야 하나 깊게 고민하고 있을

때, 티그리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리니아는 예뻤군.’

예쁘다는 말보단 소중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티그리스는 지금

까지 리니아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리니아를 제대로 눈에 담으려

고 했을 땐, 이미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으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쳐다볼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귀하게 여겨졌다.

“음···나이프가 예쁘네···?”

리니아가 티그리스의 눈치를 보면서 나이프를 들어 올리기 직전 아버지와 어

머니가 오셨다.

티그리스는 아버지에게 시선을 옮겼다.

베오울프 드 노르베르드 변경백.

티그리스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하나였다. 고리 6개인 6성 기사이

자 노르베르드 가문의 황금기를 연 훌륭한 변경백이었다. 할아버지 대부터 시

작한 현재의 노르베르드 방벽을 완성시키고, 광산 사업을 부흥시켜 지금의 위

세 높은 노르베르드 가문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아버지의 호화로운 이력보다 건강한 현재의 모습이 너무나

도 감격스러웠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기사로서 명예롭게 전장에서 돌아가

신 것이 아닌, 저주에 걸려 고통받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구나 티그리스.”

“네. 아버지. 어머니.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 그렇겠군. 거의 보름 동안

보지 못했으니.”

본가에 있어도 티그리스는 오로지 검술 훈련에만 집중한 터라 가족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매일같이 노력하는 아들이 아버지로서 대견하면서도 조금 섭섭

했다.

“그나저나···. 티그리스 뭔가 많이 달라진 듯하구나.”

티그리스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오러의 기운이 조금 달랐다. 보름 전

에 봤을 때보다 더욱 정제되어 있었다.

“고리를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정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 그리고 리니아도 크게 놀랐다. 티그리스가 고리 두

개를 만든 것은 18살 무렵이었다. 그런데 불과 1년만에 고리를 하나 더 만들

다니. 고리 세 개는 웬만한 기사들이 평생을 갈고 닦아야 오를 수 있는 경지

였으니, 가히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이거 가문에 경사가 났군. 저녁에 거하게 만찬이라도 열어야겠어. 세바스찬

준비할 수 있겠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바스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초를 먹고 자란 벨프 산 소가 있으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티그리스가 소고기를 곧잘 먹었지. 그럼 그걸로 준비하게.”

티그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무슨 소리냐. 오늘은 네 경사이기도 하지만 가문의 경사이기도 하다. 그러니

너는 오늘 만찬에 반드시 참석하도록 해라.”

“만찬에 불참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소고기가 아닌 오늘은 멧돼지 고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뭐? 멧돼지?”

원래 티그리스는 야만적으로 자란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 손을 거치지

않은 동물은 아무것이나 주워 먹고 살았을 것이기에 별로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란 미신 때문이었다. 물론 멍청한 소리였다.

로타가 곡식을 병들게 만들어, 대전쟁 내내 지독한 흉년에 빠졌었다. 그때 티

그리스는 먹을 것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먹었다. 기초 대사량이 워낙 많아 제

대로 먹지 못하면 일반 병사들보다 빠르게 아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땐 똥을 퍼먹은 돼지든 사람 시체를 먹은 늑대든 가릴 것 없이 모두 먹었다.

“갈리아 산 멧돼지를 통으로 구워 먹으면 맛있을 것입니다. 사용인들과 가신

들도 다같이 즐길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허···. 네가 멧돼지 고기를? 고리 세 개가 되면서 뭔가 깨달음을 얻은 모양

이구나. 확실히 고리가 세 개가 된 이후부터는 세상이 다르게 보이긴 하지.”

티그리스가 갈리아 산 멧돼지를 굳이 고른 이유는 아버지 베오울프 때문이었

다. 베오울프가 걸렸던 포만의 저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저주였다. 음식을

억지로 먹으려 하면 위에 가득 찬 검은 젤 때문에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외과적인 수술도 해봤지만 검은 젤은 저주로 인한 현상이었기에 계속 불어났

고 결국 2년 동안 저주와 싸우시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베오울프는 메마른 입술을 열며 말했었다.

-막 영주가 되었을 때, 기사들과 오크들을 몰아내고 먹었던 멧돼지 고기가 생

각이 나는구나. 하산하기엔 너무 늦은 밤이라 어쩔 수 없이 야영을 해야만 했

었지. 그런데 모닥불 화력이 약해서 익는데 하루 종일 걸려 새벽이 되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호른 그 녀석이 고기를 제대로 돌리지 않아서 어느

부분은 타고 어느 부분은 생고기나 다름이 없었지. ···그런데 맛은 기가 막혔

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날 먹었던 멧돼지 고기가 그립구나.

아버지의 이야기는 티그리스의 평생의 한이 되었다. 그렇기에 티그리스는 아

버지에게 꼭 멧돼지를 대접해드리고 싶었다.

“흠···. 그런데 멧돼지 고기가 지금 있으려나 모르겠구나. 사냥을 해야할 것

같은데.”

“오늘 아침에 제가 갈리아 산을 올라 멧돼지를 잡아 오겠습니다.”

“네가 직접? 그렇게 멧돼지가 먹고 싶더냐?”

티그리스는 끓어오르려는 감정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 아침 일정은 미뤄두고 오랜만에 아들과 사냥을 나가야겠군. 일정

에 문제는 없겠지?”

세바스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로써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생겨서 기분이 좋구나. 오늘 내

가 멧돼지를 사냥하는 법을 알려주마.”

너무 잘난 아들을 두는 것에 단점이 있다면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가르쳐줄 것

이 적다는 것이었다. 베오울프는 오늘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멧돼지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게 되어 굉장히 기뻤다.

티그리스는 부러운 눈치로 티그리스와 베오울프를 엿보는 리니아를 보며 말했다.

“리니아. 너도 따라오겠느냐?”

“네?! 저도 말씀이십니까?”

베오울프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리니아 너도 배워두는 편이 좋겠구나. 오전에 시간이 남느냐?”

“그것이···.”

리니아는 티그리스를 흘금 보며 말했다.

“티그리스 오라버니가 고리를 세 개나 만드셨으니, 저는 검술에 정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리니아는 현재 나이는 16살로 이제야 고리를 하나 만들었다. 15살에 고리 하

나를 만들고 18의 나이에 고리 두 개를 만든 티그리스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

지만, 리니아도 천재에 속했다. 보통 고리를 하나 만드는 시점은 18살에서 20

살로 재능 없는 이는 25살에서 27살에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리니아는 스스로 티그리스와 비교했기 때문에 천재라고 전혀 생각하

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오후에 검을 봐주겠다.”

“네?! 제 검을요?”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말에 리니아는 몸을 떨었다.

저번에 티그리스가 검을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어려운 말을 쭉 늘어놓고 리니

아를 몰아붙였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 때문에 악몽을

꾸곤 했다.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는···.”

“오전 내내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내가 한 번 봐주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같이 하자꾸나.”

가만히 있던 어머니도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같이 가렴 리니아. 이런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니까.”

“···으.”

리니아는 오늘 아침에 멧돼지를 잡는 것보다 오후에 티그리스에게 검술을 배

운다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오전에라도 검을 단련해놔야 오라버니께 좋은 모

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티그리스는 리니아가 곤란해하자 입을 열었다.

“리니아. 네가 부담스럽다면 안 와도 좋다. 사냥은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테

니까.”

리니아는 눈을 꽉 감고 말했다.

“네···. 죄송합니다.”

지금은 어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검술 훈련을 하고 싶었다. 또 부족하다는 소

리를 들으면 오늘 밤 악몽을 꿀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럼 어서 식사를 하지. 음식이 식겠구나.”

세바스찬이 손짓을 하자 사용인들이 음식을 내어놓았다.

리니아는 음식 대부분을 남기고 말았다.

* * *

갈리아 산에서 멧돼지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 갈리아 산에 자

리 잡은 오크와 오우거는 잡식성이라 멧돼지를 곧잘 사냥해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오울프가 오크와 오우거를 몰아내고 갈리아 산 깊숙한 곳에 전초기

지를 세운 이후로 갈리아 산은 굉장히 안전해졌다. 그 때문인지 멧돼지와 노

루 등 산짐승들이 급격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간혹 민가에 내려와 난동을 부리는 일이 생길 정도였다.

그 덕에 티그리스와 베오울프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멧돼지 두 마리를 금방

잡을 수 있었다.

“검술에 조예가 깊다고 생각했지만 궁술에도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티그리스가 잡은 멧돼지의 옆구리엔 화살이 깊숙하게 박혀있었다. 멧돼지는

티그리스의 화살을 급소에 맞고 세 걸음을 걷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아버지에 비하면 많이 부족합니다.”

“허허. 아비인 내가 너보다 못하면 되겠느냐?”

베오울프의 화살은 멧돼지의 오른쪽 눈을 정확하게 꿰뚫고 뇌를 헤집었다. 그

리고 티그리스는 멧돼지를 20m 근방에서 쏘아 맞췄지만 베오울프는 무려 100m

가 넘는 거리에서 오른쪽 눈을 맞췄다.

‘아버지가 활을 잘 다루신다는 걸 이제야 알다니···. 불효자가 따로 없구나.’

활뿐만이 아니라 멧돼지 똥과 노루 똥을 구분할 줄 알고 멧돼지가 어디로 이

동했었는지 추적하는 실력 또한 일품이었다. 변경백이 아니라 노련한 사냥꾼

이라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사실을 과거를 돌아온 후에야 알게 되

니 기쁘면서도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멧돼지를 들고 갈리아 산맥을 내려오자 거대한 장벽이 보였다. 장벽의 높이는

무려 15m이고 길이는 20km에 달했다. 장벽의 정문으론 철도 레일들이 깔려있

었는데, 철도 레일 위로 광부들이 캔 구리를 비롯한 각종 광물들이 실린 광차

들이 영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 광물들이 현재의 노르베르드의 황금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옛날에는 흉악한 몬스터의 위협을 받으며 갈리아 산맥에 있는 갱도에 들

어가 광물을 캤어야 했다. 하지만 베오울프의 전초기지와 장벽 덕분에 안전하

게 광물을 캘 수 있었다. 안정적으로 광물 수급이 가능해지자 상권이 급속도

로 발달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앗! 변경백 님!”

“고생이 많군.”

기사나 병사할 것 없이 사람들은 베오울프와 티그리스가 지나가자 고개를 숙

여 인사했다. 모두 베오울프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하고 있었다. 곡식 하나 자

라기 힘든 추운 노르베르드에서 저들이 따뜻한 감자 수프를 먹을 수 있는 것

은 베오울프의 훌륭한 치세 덕분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베오울프가 오자 수레를 끌고 왔다.

성인 남자 네 명은 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수레 위로 튼실한 멧돼지 두 마

리가 올라가자 가득 찼다.

“끙차!”

사용인들은 힘겹게 수레를 밀었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 이 토실토실한 녀석을

먹을 생각에 입이 귀까지 걸려있었다.

사용인들의 열심히 수레를 미는 사이, 베오울프의 곁으로 검은 늑대 기사단장

호른이 다가왔다.

“변경백님. 순찰 도실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티그리스. 나는 기사단과 점심을 함께할 테니 세

바스찬에게 점심은 따로 할 필요가 없다고 전해주겠느냐?”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늘 아침은 네 덕분에 꽤 즐거웠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함께 하자꾸나.”

베오울프는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장벽 위로 향했다.

베오울프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장벽 순찰을 했는데, 포만의 저주가 걸린 후

에도 무려 1년 동안 빠지지 않고 장벽 순찰을 하셨다.

자신의 몸보다 영주민과 병사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참된 군주이기 때문

이었다.

티그리스는 오직 자신만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를 떠올렸다.

-···장벽을 확실히 높게 짓긴 했군. 오크들이 넘보지 못하겠어.

베오울프가 더 이상 장벽을 오르지 못할 정도로 병약해졌을 때, 장벽 위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베오울프는 계단을 마치 산책하듯이 가볍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괜시리 콧잔등이 매워졌다.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은 편이 결코 아

니었지만 아무리 티그리스라도 기쁨의 눈물을 참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

이었다.

그리고 기쁨이 차오를수록 살의는 더더욱 증폭되었다.

‘로타의 입을 빨리 죽여야겠군.’

베오울프의 몸에 ‘포만의 저주’를 건 자는 로타의 권속 중 하나인 ‘로타의

입’ 레비스라는 놈이었다. 레비스는 베오울프를 죽일 수 없자 저주를 걸고 도

주했다. 대다수의 저주가 그렇듯 저주를 건 저주술사가 죽거나 직접 풀어야만

저주가 풀린다. 그러나 레비스는 베오울프가 죽을 때까지 작정하고 숨어다녔

기에 티그리스는 끝내 저주를 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버지는 건강하고 레비스를 어떻게 하면 찾아낼 수 있는지 안다. 티그리스는

다른 놈들보다 놈을 먼저 쳐죽이기로 결심했다.

티그리스는 아버지가 장벽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보다가 본가로 돌아

갔다.

* * *

오후가 되자 티그리스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훙! 훙!

연무장은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리니아가 검술을 훈련하고

있는 것이었다.

멀리서 리니아의 검술을 보고 있던 티그리스의 눈이 좁아졌다.

‘힘이 부족하군. 아니 힘이 빠진 건가?’

리니아는 땀으로 푹 젖었다. 티그리스가 검을 봐주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점심

도 거르고 검만 계속 휘두른 탓이었다.

“아!”

리니아는 손아귀의 힘도 풀리고 땀 때문에 손이 미끌려 검을 놓치고 말았다.

리니아는 입술을 씹으며 검을 주우러 갔다. 그때 티그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헙···.”

리니아의 동공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본 걸까? 설

마 검을 놓친 걸 본 걸까? 머리가 멍해졌다.

리니아가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몸이 얼어붙자 티그리스가 다가왔다. 리

니아는 검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티그리스의 무서운 눈빛만 쳐다봤다.

티그리스는 리니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아귀엔 굳은살이 가득했지만 방금

전에 검을 놓치면서 쓸린 탓에 작은 상처가 있었다.

리니아는 재빨리 손을 뺐다.

“아···. 그것이··· 손에 땀이···”

“다시 손을 주거라.”

리니아는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지금 화가 난 상태였다. 저번에

리니아의 검술을 보고 ‘쓰레기’라고 말했을 때의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 도망

가고 싶었다.

하지만 리니아는 티그리스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결국 손을 내밀었다.

티그리스는 상처 난 손을 보더니 옆에서 검술 시중을 들고 있던 사용인에게

말했다.

“카렌. 뭐 하느냐. 붕대를 가져오거라.”

카렌은 구급상자에서 붕대와 연고를 재빨리 들고 왔다. 카렌이 직접 리니아의

손에 연고를 발라주려고 하자 티그리스가 연고를 빼앗듯 가져왔다. 그리고 직

접 연고를 리니아의 손에 발라주었다. 차가운 연고가 상처에 스며들었다.

리니아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리가 멍해졌다.

“검사에게 있어서 손은 생명이나 다름이 없다. 전쟁터가 아닌 이상 손을 다치

면 바로 치료부터 해야 한다.”

“···아. 아, 네.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붕대를 꼼꼼하게 감아주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동여매

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느슨하지도 않았다.

“오늘 말고 내일 아침에 검을 봐주겠다. 지금 당장 검을 놓고 푹 쉬어라. 그

리고 연고에 포션 성분이 들어 있는 것이니 저녁엔 붕대를 갈아주거라. 붕대

천이 살에 엉겨 붙을 수 있으니까.”

저번에는 쏘아붙이는 말투에 머리가 멍해졌는데, 지금은 모닥불처럼 따뜻한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실 나 혼나고 있는 게 아닐까?’

티그리스가 말을 돌려서 혼을 내는 것이고 리니아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지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리니아가 알고 있던 티그리스와 지금의 티

그리스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럼 나는 이만 가겠다. 푹 쉬도록.”

저 담백한 말투는 티그리스의 것이 맞는데, 걱정과 따뜻함이 담긴 눈빛은 티

그리스의 것이 아니었다.

리니아는 티그리스의 갑작스런 변화가 좋으면서도 공포심이 몰려왔다.

“···카렌.”

“···네. 리니아 님.”

“티그리스 오라버니가 맞겠지?”

카렌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맞으실 겁니다.”

카렌도 확신할 수 없었다.

4. 자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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