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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7화 (7/251)

#007화 – 샤를로트, 샬롯

면접일인 11월 1일은 금방 다가왔다.

그동안 티그리스는 펜트하우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명상을 하

거나 검을 수련했다. 얼마나 소식이 없었는지, 베이튼이 티그리스가 살아있는

지 직접 찾아올 정도였다.

티그리스는 단출하게 검과 검을 가릴 코트 하나를 입고 나왔다.

“레니. 너는 이곳에서 청소를 하고 쉬고 있거라.”

“제가 시중을···.”

“제국 대학 내에선 관계인을 제외한 인물이 출입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집

안 정리를 하고 네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나 맛보고 있거라.”

티그리스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말했다.

“냉장고에 초콜릿 케이크가 남아 있다면 벌을 내릴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레니는 티그리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후다닥 달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 두

조각이 매끈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흐흐흐···. 초콜릿 케이크! 너희들은 다 죽었따아아!”

레니가 초콜릿 케이크들과 더블 데이트를 하고 있을 무렵 티그리스는 제국 대

학에 도착했다. 티그리스가 검은 마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 해

졌다.

-잡지 모델인가?

-몇 학년이지? 내가 가서 말이나 좀 걸어볼까?

-바보야! 딱 봐도 고위 귀족잖아. 잘못 말 걸었다간 목 날아가!

티그리스 특유의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에 말을 걸어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티그리스는 경비원 앞에 섰다.

“무슨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검술 교관 면접이 있어 왔네.”

“1차 서류심사 결과 통보서와 가문 증명 패를 보여주십시오.”

티그리스는 얼마 전에 받았던 1차 서류 심사 통보서와 가문패를 보여줬다.

노르베르드 가문의 상징인 늑대패와 문서를 보더니 경비원은 고개를 끄덕였

다. 사전에 티그리스가 19살이란 걸 통보받았기에 불필요한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확인했습니다. 면접 장소는 데미올라 연무장입니다. 데미올라 연무장은···”

“알고 있으니 설명하지 않아도 되네.”

“아, 네.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문서와 늑대패를 돌려받곤 입구로 들어갔다.

11월 달은 학생들이 다니고 있을 때라 곳곳에서 학생들이 보였다. 마법사들은

감색 로브를 입고 있었고, 기사들은 경장을 입고 검이나 창 등의 무기를 들고

다녔다.

학생들은 티그리스가 지나갈 때마다 모두 쳐다봤다. 코트 안에 검을 들고 다

니는 것으로 보아 검사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코트는 모험가의 상징이다. 제국 대학은 모험가를 가르치지 않고 오직

마법사와 검사 그리고 행정관만을 교육하기 때문에 모험가가 올 일이 없었다.

그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티그리스가 모험가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젊고 귀티

가 났다.

-쟤 봐. 너무 잘생기지 않았냐? 누구지?

-딱 봐도 우리랑 또래 같긴 한데 분위기가 암만 봐도 이상하지?

-말을 걸어볼까? 몇 학년이냐고?

-야. 그냥 학교 손님이면 어쩌려고 그래.

-그런가?

남자들은 티그리스가 지나갈 때 침을 퉤 뱉었다.

-저 기생 오래비처럼 생긴 놈은 누군데 저렇게 코트에 검을 넣고 다니냐? 쟤

기사 맞아?

-글쎄 처음 보는데? 신입생인가?

-신입생은 지랄. 지금 11월이야.

-야. 가서 말 걸어봐.

그때 한 여인이 티그리스의 앞에 섰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과 티그리스

의 검은 머리칼이 대비되었다.

여인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티그리스를 쏘아봤다.

“티그리스? 네가 왜 여기에 있는거지?”

티그리스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샤를로트 디 프리하르덴.

티그리스에게 ‘프리하르덴의 여름’을 건네준 프리하르덴 백작의 하나뿐인 외

동딸이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벽안을 똑바로 마주하자 그녀의 최후가 갑자기 떠올랐다.

온갖 무기에 꽂혀 피투성이가 된 가녀린 몸에 반짝이는 벽안은 퇴색되어 빛을

잃었다.

-나 눈이 안 보여서···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어···?

-네가 영웅이라면 꼭 지켜내···. 이겨내···. 그 사람들을 지켜줘.

-약속할 수 있지?

숨이 다하는 날까지 노인과 아이와 병자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놓지 않았던

기사.

샬롯이 살아 있었다.

“···오랜만이군. 샬롯.”

“뭐···? 샬롯?”

샤를로트는 티그리스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훙!

티그리스는 뒷걸음질 치는 것으로 샤를로트의 주먹을 피했다. 뒤늦게 날아온

권풍에 티그리스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친한 척 이름 줄여 말하지 마! 새끼야!”

티그리스는 감정이 격해져서 실수로 전장에서 불렀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샤를로트는 찰랑이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뭐, 마침 잘 됐어.”

샤를로트는 장갑을 빼서 티그리스의 가슴에 던졌다. 장갑은 미끄러지듯 티그

리스의 가슴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샤를로트 디 프리하르덴은 명예를 되찾기 위한 결투를 신청한다.”

“···왜지?”

“허! 왜냐고?”

샤를로트는 어이가 없는지 눈썹이 삐죽댔다.

“작년 슈베어트 때 기억 안 나? 네가 내 검술을 보고 춤을 추는 것 같다고 모

욕했잖아!”

티그리스는 샤를로트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만약 로타와 아르펨이라는 인류

공통의 적이 없었다면 영원히 눈도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그게 작년 검술 가문들의 모임 ‘슈베어트’에서 샤를로트를 이기고 난 후부터

였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샤를로트는 작년 노르베르드 가문에서 열렸던 슈베어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

었다.

불세출의 천재 티그리스가 18살의 나이에 고리 2개를 만들었다는 소식에 슈베

어트를 노르베르드로 잡았다.

그날 저녁 슈베어트의 꽃이라 불리는 검술 시연자리.

샤를로트는 자신이 갈고 닦은 검술을 선보였고 화려하게 끝을 마쳤다. 사방에

서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샤를로트는 기분 좋게 자리로 복귀했다.

그때, 티그리스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그렇게 검을 휘두를 거면 춤을 추는 게 낫겠군. 껍데기만 번지르르하

지 알맹이는 텅 비었어.

티그리스는 혼잣말이라 생각했겠지만 샤를로트는 분명히 들었다. 아니 분명

들으라고 한 소리였을 것이다. 그날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결과는 샤를로트의 처참한 패배.

20살이었던 자신보다 2살이나 적었던 티그리스에게 결국 지고 말았다.

샤를로트는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티그리스에게 소리쳤다.

“당장 장갑 주워!”

작년 슈베어트 때와는 다를 것이다. 샤를로트는 티그리스를 꺾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잠도 줄여가며 검술을 단련했다. 아직 고리 개수를 늘리지 못했

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검술 실력은 고리 개수가 아니라 흘린 땀방울의 무게

만큼 성장하는 것이니까.

티그리스는 장갑이 아닌 샤를로트의 타오르는 벽안을 보며 말했다.

“···우선 할 말이 있다.”

“결투를 피하려고 개수작 부릴 거면 당장 입 닫는 게 좋을 거야.”

“널 모욕한 일에 대해 사과하지.”

“···뭐?”

샤를로트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네가 뭐···? 사과?”

“그렇다.”

“그···그런 식으로 결투를 빠져나가려고? 내가 분명히···”

“결투를 피하려는 것은 아니다. 명예를 되찾기 위한 결투는 받아들이는 게 맞

다.”

이미 장갑을 던진 순간부터 결투는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티그리스가

샤를로트의 결투를 피하는 경우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물론이고 가문

도 욕을 먹을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 귀족적인 티그리스에게 결투를 피한다

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장갑을 집었다. 그리고 장갑에 묻은 먼

지를 털어냈다.

“그러나 네 실력이 모자란 것은 사실이다.”

“···내 실력이 모자르다고? 네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날 너를 이겼으니 답은 나온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아니야!”

샤를로트는 순간 저 녀석이 달라졌나 생각했던 자신을 증오했다. 저 녀석은

여전히 오만하고 인성이 파탄난 개 같은 새끼였다.

“오늘 내가 너를 이기면 넌 내게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할 거야.”

티그리스는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면접 시간까지 30분 남았다.

결투를 끝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좋다. 지금 당장도 가능하겠나?”

“당연하지!”

근처에 사람도 많았고, 결투를 치를 공터도 마침 있었다. 저들이 오늘의 결투

를 증명해줄 참관인이 될 것이다.

샤를로트는 한 사람을 지목했다.

“에이든! 네가 입회인을 서.”

붉은 머리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상관은 없는데, 결투의 종결 기준은 어떻게 할 거지? 학교 안에서 생사

결은 안되는 거 알지?”

“슈베어트와 똑같은 기준으로 갈 거야. 동의하지?”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슈베어트의 결투 기준은 간단했다. 결투 상대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히는 것

도, 목숨을 끊는 것도 안 된다. 대신 패배를 인정하거나 기절 또는 입회인이

보기에 명백히 패배했다고 보는 경우엔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

둘은 평평한 공터에 마주보고 섰다. 갑자기 일어난 결투였지만 사람들은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샤를로트와 티그리스의 결투였다.

샤를로트 드 프리하르덴.

현 2학년 검술학과 톱이자 A클래스에 고리 2개인 기사.

같은 학년은 물론이고 3학년과 4학년 중에서도 샤를로트를 이길 수 있는 학생

이 없다고 평가되는 기사였다. 거기에 매 학기마다 봉사활동을 갈 만큼 인품

도 좋다고 소문이 났다. 그렇기에 그녀가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학생

들의 입장에선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럼 티그리스는 누구냐? 아직 19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리 3개를 만든 검술

의 천재였다. 인품은 샤를로트와 정반대다. 노르베르드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아 얼굴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싸가지없고 오만하다는 소문이 돌

았다.

거기에 티그리스가 샤를로트에게 모욕을 줬다는 것은 세간에 잘 알려진 사실

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모두 한 마음 한뜻으로 한 사람에게 소리쳤다.

“샤를로트 아주 그냥 뭉개버려!”

“샤를로트 꼭 이겨야 해!”

“샬롯 힘내!”

입회인인 에이든이 손을 들자 관중들의 목소리가 단번에 잦아들었다. 명예로

운 결투의 시작 전 입회인이 반드시 해야할 네 가지 문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기는 각자 가지고 있는 검만 사용한다. 동의하나?”

““동의한다.””

“둘은 원만한 대화로 해결할 생각이 있는가?”

““없다.””

“결투는 생사결이 아닌 생결로 진행한다. 또한 상대의 신체에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히는 경우 불명예를 떠안게 될 것이다. 동의하나?”

““동의한다.””

“마지막으로 결투의 종결 후 각자 패자에게 원하는 바를 말하라.”

샤를로트는 오른뺨에 짓눌린 축축한 잔디를 떠올렸다. 등에 닿은 흙이 묻은

발과 목에 닿은 서슬퍼런 칼날의 감촉을 기억했다.

-넌 나를 평생 이길 수 없다.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오만한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그날의 모욕을 무릎을 꿇고 사죄해라. 무릎과 이마 그리고 두 손바닥이 땅에

닿는 최고의 예법으로!”

티그리스는 뜨거운 피의 온도를 떠올렸다. 살갗이 걸레짝이 되고 몸에 성한

구석이 없었지만 결코 단 한 마리의 몬스터를 보내지 않았던 그녀의 굳은 의

지를 떠올렸다.

“내가 제국 대학의 검술 교관직을 다할 때까지 내게 성실히 검을 배워라.”

샤를로트는 물론이고 모든 학생들이 귀를 의심했다.

“뭐? 네가 검술교관?”

“그래. 오늘 내가 제국 대학에 온 이유는 검술 교관 면접 때문이다.”

“하···! 어이가 없어! 아무리 3개 고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이제 막 얻은 거잖

아. 그런데 우리를 가르쳐?”

“그건 학교에서 판단할 일이다. 네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

샤를로트는 검을 부서져라 잡았다.

“학생에게도 지는 검술 교관이 무슨 소용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벌써부터 승부가 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 너는 고리 개수와 검술 실력이 동일하다고 생각해?”

“세 개까지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네 개부턴 확연히 달라지지.”

샤를로트는 헛웃음을 쳤다.

“마치 네가 네 개라도 된 것처럼 말하네?”

“말이 길군. 결투는 결과로 얘기하는 거다.”

“하! 웬일로 맞는 말을 하네.”

샤를로트가 에이든을 쳐다보자 에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로트와 티그리

스는 검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샤를로트와 티그리스 모두 중단세를 잡았다.

‘절대 지지 않겠어.’

샤를로트는 그날의 굴욕을 두 번이나 당할 생각은 없었다. 복수를 위해 밤을

지새웠던 1년 5개월은 고통 그 자체였다. 오늘은 그 고통스런 시간에 보답을

받는 날이었다.

에이든은 둘이 완전히 준비된 것을 확인하곤 손을 내렸다.

“시작!”

쩌어어어엉!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검을 부딪혔다.

힘대 힘.

샤를로트는 오러 고리가 과부하 될 정도로 강하게 티그리스를 몰아붙였다. 하

지만 티그리스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힘으론 이길 수 없어.’

태어났을 때부터 샤를로트는 여자였고 티그리스는 남자로 태어났다. 어쩔 수

없는 체급 차가 존재했다. 게다가 티그리스는 고리가 세 개다보니 근력 싸움

으론 티그리스를 이길 수 없었다.

샤를로트와 티그리스는 검을 서로 밀어내고 뒤로 살짝 물러났다가 다시 부딪

혔다. 이번엔 힘이 아닌 기술이 들어갔다.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와 검이 부딪히자마자 힘의 방향을 바꿔 위로 강하게 올

려 쳤다. 티그리스의 몸통이 비자 샤를로트는 어깨로 티그리스의 옆구리를 노

렸다. 피하지 못한다면 갈비뼈가 부서질 정도로 강력했다.

‘다른 사람이랑 결투를 제대로 해보지 않은 풋내기가 이런 변칙적인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리가 없지.’

그러나 티그리스는 그 변칙적인 공격을 아주 쉽게 옆으로 도는 것만으로 피해

냈다. 어마어마한 반응속도였다. 오히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샤를로트가

위험해졌다.

‘젠장!’

샤를로트는 다리를 걸어오는 티그리스의 반격에 다리를 박찼다. 샤를로트의

몸이 공중에 뜨자 회전력을 주어 티그리스의 몸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동작이 너무 크다.”

티그리스의 말에 샤를로트는 아차했다.

하지만 이미 몸은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티그리스는 발을 피함과 동시에 샤를로트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아채고 품에

안은 채로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쿵!

“컥!”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순간 시야가 암전됐다. 뒤이어 목에 닿는 차갑고도 서

늘한 감촉.

티그리스는 샤를로트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내가 이겼다.”

검을 잡은 오른손은 티그리스의 왼손에 제압당해 있었고, 몸은 티그리스가 단

단히 고정했으며 역수로 쥔 검이 샤를로트의 목에 닿아있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변칙적인 움직임은 좋았으나 변칙을 변칙으로 이겨내려고 한 것은 악수였다.

너는 그때 다리에 오러를 고정시켜 내 공격을 방어했어야 했다.”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말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패배했다는 굴욕

감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티그리스는 샤를로트에게 지금 조언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

닫곤, 그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새 손수건을 꺼내 샤를로트에게 건넸다.

“꺼져 이 개새끼야!”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손수건을 쳐냈다. 샤를로트는 이를 뿌득 갈며 몸을 일

으켰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떨어졌지만 빠르게 닦아냈

다. 녀석에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꼴에 선생 짓을 하겠다고 가르치려고 들어? 네가 벌써부터 검술 교관이라도

된 것 같아?! 아직 검술 교관이 되지도 않았고···! 그리고 겨우 이제 이번 한

번··· 아니 두 번 이겼다고 해서···”

“샤를로트.”

티그리스의 낮은 목소리가 샤를로트의 머리를 잠잠하게 울렸다. 티그리스가

목소리에 마력을 담았기 때문이었다. 불타오르던 분노가 순식간에 진화되었다.

티그리스는 샤를로트가 진정되자 입을 열었다.

“패배에 승복해라. 샤를로트.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다.”

샤를로트는 주변에 가득한 눈동자들을 봤다. 모두 샤를로트를 향해 혼란스러

워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슈베어트에서 티그리스에게 졌을

때, 사람들이 보낸 눈빛과 똑같은 종류였다.

이 결투가 연극이라면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티그리스는 악역.

샤를로트는 선역.

동화처럼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을 이겨내면 박수갈채를 보내야 하지만, 악당

이 이겨버렸다. 관객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샤를로트는 마치 공연 중에 실수를 한 초짜 배우처럼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샤를로트 드 프리하르덴.”

티그리스의 엄중한 목소리에 샤를로트는 정신을 차렸다.

“너와 나는 귀족이다. 귀족이라면 귀족답게 품위를 지켜라. 넌 21살짜리 소녀

가 아니다. 너는 누구보다 고귀하게 태어나 만민의 우상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

티그리스의 눈동자는 승자의 것이 아니었다. 승리에 도취하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저 귀족적이었다.

“패배했다고 해서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패배를 승복하지 않을 때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티그리스는 품에서 마지막 손수건을 꺼내 샤를로트에게 건넸다.

결투의 승자가 손수건을 건네는 행위는 ‘지난 날의 일은 모두 잊고 화해하

자.’라는 귀족식 예법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샤를로트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귀족적이고 고고한 척하는 티그리스가 너무나

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복잡했던 머리가 정리되었다.

샤를로트는 티그리스의 손수건을 낚아채듯 받았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

고 뺨에 묻은 흙을 닦아냈다.

팽-!

그리고 코까지 풀어 티그리스에게 건넸다.

“내가 졌다.”

쓰라린 패배에도 야생초처럼 빠르게 회복한 그녀의 강인한 눈빛에 티그리스는

만족했다.

“그럼 나중에 연락하지.”

티그리스가 그냥 뒤돌아서 가자 샤를로트가 외쳤다.

“야! 손수건 가져가! 야!”

“승자가 패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뭐?! 이 새···! 야! 야!”

티그리스는 녀석의 도발에 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곧 면접 시간이었다.

8. 모리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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