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 모리타(1)
티그리스는 면접 시간인 10시 정각에 데미올라 연무장에 도착했다. 그곳엔 티
그리스와 똑같이 1차 서류 심사에 통과한 사람들이 있었다.
티그리스는 안경을 쓴 사내에게 신분패와 1차 서류심사 결과 통보서를 건넸
다. 사내는 잠깐 훑어보더니 티그리스에게 신분패만 건네곤 말했다.
“시간 관념이 아주 철두철미하네. 10시 정각에 오다니.”
당연히 비꼬는 말이었다.
‘보통 면접을 본다면 10분 전에는 도착하는 게 기본 아닌가?’
베드리안은 이래서 어린 귀족 따위를 받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교관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오.”
“···뭐?”
“마치 뭐라도 된 것마냥 내게 반말을 하지 말란 말이오. 밖에서 만나면 말을
높여야 할 사람은 당신이란 걸 잘 모르나 보군.”
베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티그리스의 눈빛은 무덤덤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무서웠다. 숨 쉬듯이 자연스
럽게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압박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교관이 된 후에는 신분 고하가 아니라 직분에 따라 상명하복을 받는다는
걸 아실 텐데요?”
“그럼 그건 내가 교관이 되고 나서 따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베드리안은 말 한마디를 지지 않는 이 녀석이 너무나도 얄미웠다. 당장에 태
도가 불량하니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합격을 시킬지 말지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었다. 모두 학교장님과 학과
장님의 소관이었다. 자신은 일개 검술 교관일 뿐이다.
베드리안은 이를 꽉 깨물며 후보자들이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서 대기하세요.”
티그리스는 베드리안을 스쳐지나가 후보자들이 서 있는 곳에 서 있었다.
옆에 연갈색 머리를 한 사내가 휘파람을 불며 웃었다. 녀석에게서 향수와 술
냄새가 뒤섞인 악취가 났다.
“너 티그리스 맞지? 역시 변경백 후계자라서 그런지 말빨이 좀 되네. 역시 변
경백의 후계자라서 교관직에서 떨어져도 별 타격이 없다는 건가?”
티그리스는 옆에 있는 사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모리타 디 그리프.
그리프 가문의 삼남이자 술독에 빠져 사는 쓰레기.
그래도 검술에 어느정도 조예가 있어 본래라면 티그리스를 가르치는 검술 교
관이 되어야 할 인물이었다.
“입을 다무시오. 술 냄새가 나니.”
“뭐? 술 냄새가 난다고? 그럴 리가···.”
모리타는 입을 가리고 숨을 내뱉어 코로 다시 들이마셨다.
“···코 좋네.”
티그리스는 이후로 모리타가 말을 걸어도 무시했다. 티그리스는 사실 굉장히
참고 있었다. 기회만 된다면 녀석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왜냐하면 모리타 디 그리프는 훗날 인류를 배신하는 ‘질투를 깎아내는 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 * *
모리타는 그리프 자작 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난 그는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뛰어난 반응속도와 반응속도를 받쳐주는 탄력있는 육체였다.
그는 스물 여덟의 나이에 3성 기사까지 무난하게 입성하였지만 7년이 넘는 시
간 동안 4성 기사가 되지 못했다. 고리를 네 개 만드는 일은 단순히 타고난
육체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력과 오러 운용에 재능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모리타는 지금까지 아주 손쉽게 고리를 만들었다. 자신에겐 남들에게 없는 뛰
어난 재능이 있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노력을 하지 않고 얻은 성과는 모래
성처럼 쉽게 무너지는 법이었다.
수년이 지나도 4번째 고리를 만들지 못하자 모리타는 본격적으로 노력을 하려
했다. 그러나 마음과 손 둘 모두에 굳은살이 없던 그는 쉽게 포기했다.
내일 하지 뭐
모레부터 하지 뭐
다음 달에 새해니까 새해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하지 뭐
그는 결국 7년이란 세월 동안 검을 제대로 단련하지 않았다. 그의 평탄한 인
생은 그리프 자작이 죽은 후에 추락했다. 장남 바리온이 그리프 가문을 잇자
모리타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죽거나 떠나라.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작 가문을 계승한 장남 바리온은 가문의 권력이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나마 모리타에게 살아남을 기회를 준
이유는 게으르고 쓸모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유능했던 차남인 ‘제이콥’은
반역죄로 몰려 바리온에게 직접 처형당해 죽었다.
돈도 없고 지지기반도 없던 모리타는 결국 제국 대학에 ‘종신 계약’을 조건으
로 검술 교관이 되길 청했다.
두 그림자가 단상 위로 드리웠다.
둘 다 티그리스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부드러운 흰 수염을 기른 노인
은 바스티얀 학교장이었고, 구릿빛 피부에 붉은 눈을 한 사내는 검술학과 학
과장 네이션이었다.
바스티얀 학교장은 7서클의 대마법사고 네이션은 5성 기사로 둘 다 티그리스
가 인정하는 실력자였다.
바스티얀 학교장이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제국 대학 학교장 바스티얀 폰 로드엘림입니다. 룩스 여신께서
도와주시는 듯 날씨가 굉장히 화창하군요. 여러분들 오시는데 불편한 점은 없
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이곳을 오면서 베아트리스 산책로에 핀
단풍나무에 단풍잎이 예쁘게 물들기 시작하는···”
바스티얀은 처음부터 말이 굉장히 많았다. 단풍잎부터 시작해서 정원에서 까
먹는 도시락 맛이 일품이었고, 이 제국 대학에는 어디가 제일 멋있다는 것까
지···.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는 것처럼 지루했다.
면접자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오직 티그리스만이 굳은
표정으로 바스티얀의 말을 경청하여 듣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이미 시험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원래 바스티얀은 말을 저렇게 오래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물론 대화 자체를
즐기긴 하지만 뼈가 있는 대화를 즐기지, 저렇게 잡다한 말을 좋아하는 스타
일이 아니었다.
“허허. 말이 너무 길었죠? 이제 본격적으로 면접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면접을 시작하겠다는 말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면접자들의 눈빛이
돌아왔다. 바스티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경청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청이라는 말에 티그리스를 제외한 면접자들은 아차 했다.
“아무리 사소한 말이라도 그 속엔 학생들의 걱정거리가 담겨있는 법입니다.
저는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걱정하고 있는 나무를 돌보고 있겠습니다. 제 이
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신 분이라면 곧바로 찾아오실 수 있을 겁니다. 저를 찾
아온 순서대로 면접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럼 네이션 학과장. 면접자들을 부탁
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바스티얀은 텔레포트로 사라졌다.
면접자들은 당황해서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때, 유일하게 티그리스만 표정 변
화가 없었다.
티그리스는 바스티얀의 말을 모두 경청했기 때문이었다.
네이션은 면접자들을 보며 말했다.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겠지만 평가는 30분 전부터 이미 시작했습니다. 바
스티얀 학교장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셨다면 무조건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니 찾아가서 면접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1시 반까지 찾아가지 못한다면 바로
탈락입니다. 각 사람당 5분 간격을 두고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리타가 손을 들고 말했다.
“네이션 학과장님. 이거 좀 심한 거 아닙니까? 어떻게 그 긴 이야기를 모두
기억합니까?”
“그럼 기억나는 게 무엇이 있는지 한번 말해 보시겠습니까? 모리타 씨?”
“어···. 그것이···.”
모리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30분 동안 만담이 이어질 때 동안 모
리타는 어젯밤 만났던 창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이션은 모리타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모리타 씨는 제일 늦을 수도 있겠군요. 그럼 제일 먼저 도착한 노아 씨부터
출발하시죠.”
“아, 네···.”
노아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도통 감을 잡지 못했기 때
문이었다.
‘일단 나무라고 했으니까 나무가 많은 곳으로 가는 게 맞겠지.’
노아는 둘러봤을 때 나무가 제일 많이 보이는 북서쪽 테일 공원으로 향했다.
다음은 모험가 경험이 있는 스미스였다.
스미스는 일단 학교 입구로 되돌아갔다.
‘입구에 있는 지도를 보고 제국 대학 내에서 나무가 어디 어디에 있는지 확인
해봐야겠군. 그쪽을 중심으로 탐색하면 되겠어.’
다음은 면접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고리가 네 개인 트리니티였다.
“전 면접을 포기하겠습니다. 제국 대학은 저를 받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요. 전 무려 4성 기사인데요. 저를 존중하지 않는 곳에서 근무하느니 촌동네
에서 고블린 떼나 막는 편이 낫겠어요.”
트리니티는 씩씩거리며 제국 대학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모리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모리타는 옆을 흘금 봤다.
그러고 보니 티그리스는 학교장의 말을 계속 들었던 것 같았다. 이 녀석을 몰
래 쫓아가면 학교장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리타 씨 출발하세요.”
모리타는 일단 이 연무장 근처를 배회하다가 티그리스를 쫓아가기로 했다.
모리타가 떠나고 5분이 지나자 티그리스의 차례가 되었다.
“티그리스 씨 출발하세요.”
티그리스는 발길을 옮겼다. 모리타는 도둑고양이처럼 티그리스의 뒤를 살금살
금 쫓았다.
‘어?’
티그리스는 대학 후문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저대로 나가면 제국 대학을 벗
어나는 것이었다.
모리타는 쫓아가는 것을 멈추고 티그리스를 지켜봤다. 티그리스는 결국 제국
대학을 벗어났다.
모리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저 녀석도 방금 전에 그 년처럼 포기해버렸군. 하긴 저 녀석이 뭐가
아쉽다고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 검술 교관을 하겠어.’
저 녀석은 변경백의 후계자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
어난 바리온 그 개새끼처럼 이런 검술 교관직에 목을 맬 이유가 하등 없다는
것이었다.
모리타의 추한 질투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도 태어났을 때부터 장자로 태어났으면 이렇게 개고생은 안 해도 되는 건데.’
모리타는 침을 퉤 뱉으며 되돌아갔다.
티그리스는 5분이 지나자 다시 후문으로 되돌아왔다. 티그리스의 손에는 갈색
봉투가 들어 있었다.
경비원들은 티그리스를 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학교에 다시 들어오시려고 하는 겁니까?”
“그렇네.”
“그 갈색 봉투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티그리스는 갈색 봉투를 경비원에게 넘겼다. 경비원은 내용물을 살펴보곤 고
개를 끄덕이며 통과시켰다.
그 안에는 나무 영양제가 들어 있었다.
* * *
티그리스는 시약 연구 동아리실로 향했다. 시약 연구 동아리는 각종 유독 물
질을 자주 사용하는 터라 굉장히 구석에 있었다.
티그리스는 좀전의 모리타처럼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오러 감지 기술로 확
인했다. 시약 연구 동아리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학생들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없었다.
티그리스는 시약 연구 동아리실뒤편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거멓게 죽어가고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하나 있었다. 은행나무는 노란 은행잎도 만들지 못할
만큼 병들어 가고 있었다.
그곳엔 역시 바스티얀이 있었다.
바스티얀은 손수 사다리를 타고 죽은 나뭇가지들을 쳐내고 있었다. 복장도 하
얀 로브가 아니라 정원사가 입는 옷과 모자를 쓰고 있었다.
“역시 자네가 먼저 왔군.”
단상에 서면 모든 것이 다 보인다. 딴짓을 하는 사람, 듣고 있는 척하지만 사
실 딴 생각을 하는 사람 그리고 경청을 하는 사람.
티그리스는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조금 늦었어.”
“영양제를 사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영양제?”
바스티얀은 티그리스가 든 갈색 봉투를 보더니 허허 웃었다.
“마침 나무 영양제가 다 떨어져 가는 중이었는데 고맙군.”
바스티얀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티그리스가 사온 영양제를 보더
니 더욱 밝게 웃었다.
“마침 질소가 많이 들어간 영양제가 필요했는데. 어떻게 알았나?”
“꽃집에 문의했을 뿐입니다. 나무가 거멓게 죽어가고 나뭇가지 끝이 맥없이
툭툭 끊어져 죽어가는데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요.”
“무뚝뚝한 공자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센스가 꽤 있군.”
바스티얀은 봉투에서 영양제를 꺼냈다. 그리고 나무 줄기에 박혀있는 빈 영양
제 통을 빼내고 새것으로 교체했다.
바스티얀은 죽어가는 은행나무를 만지며 말했다.
“이 은행나무는 무려 1,000년을 넘게 살았네. 오래 산다는 드워프들보다 오래
살았지. 이 나무는 이 자리에 서서 제국 대학을 거쳐 간 수많은 인재들을 묵
묵하게 지켜봤을 걸세.”
바스티얀은 티그리스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이 나무는 자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천재들을 가르칠 완성된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바스티얀은 순간 멈칫하다가, 허허 웃었다.
“자네가 검술에 자신감이 많다는 소문을 듣긴 했네만 돌긴 했는데 정말인가
보군. 내가 봤을 땐 자네는 아직 더 배울 것이 많은 것 같은데?”
“검술은 그 누구도 저를 가르칠 자가 없습니다.”
바스티얀의 눈이 가늘어졌다.
“증명할 수 있나? 오만과 자신감의 차이는 증명할 수 있나 없나로 갈리네.”
티그리스는 죽은 은행나무 가지하나를 주워들었다.
“그 누구에게도 지금 본 것을 말씀하시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면 증명
해드리겠습니다.”
호기심이 바스티얀의 입을 간질였다.
마법사가 참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호기심이다. <내세(來世)에 대한 호
기심만 없었다면 모든 마법사들은 대마법사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학교장의 신분이라면 티그리스의 기행을 굳이 볼 이유가 없었지만, 바스티얀
은 학교장이기 전에 마법사였다.
바스티얀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커흠! 그 죽은 은행나무 가지로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조금 궁금하긴 하군.”
“그럼 맹세를 해주십시오.”
“마나의 맹세를 말인가?”
“마나의 맹세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바스티얀 학교장님의 입이 그
누구보다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오늘 본 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
씀하시지 않고 이후로 제 검술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면 제가 왜 완성
된 천재인지를 증명해내겠습니다.”
바스티얀은 티그리스의 굳은 눈을 봤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봐왔다고 생각했
지만 티그리스는 도통 읽을 수 없었다. 오만인가? 아니면 자신감인가? 아니면
이성과 감정을 완벽하게 분리해낼 수 있는 초월의 경지에 이른 자의 눈빛인가.
바스티얀은 밀물처럼 몰려오는 호기심을 멈출 수 없었다.
“맹세하지. 오늘 본 것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겠네.”
티그리스는 바스티얀의 맹세를 듣자마자 썩은 나무토막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바스티얀은 그 느릿한 동작에서 느껴지는 경지의 편린을 느낄 수 있었다. 썩
은 나무토막을 타고 흐르는 농축된 오러와 이해할 수 없는 심득이 바스티얀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티그리스의 손끝을 벗어난 오러는 썩은 나무토막을 타고 흘렀다. 오러는 나무
토막의 끝을 타고 아름다운 은빛 곡선이 그려졌다. 은빛을 머금은 실선의 예
기는 바스티얀조차 오싹할 정도로 날카로워서 무심코 실드를 펼칠 정도였다.
그 아름다운 실선은 맹금류의 발톱처럼 쏜살같이 바위를 파고들었다. 아니,
스며들었다.
바스스-
썩은 나무토막은 먼지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고, 바위는 깔끔하게 두 쪽이 났
다. 바위의 단면은 장인이 세운 검날보다 날카로워서, 손을 대면 베일만큼 날
카로웠다.
티그리스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온몸의 근육이 난동을 부리고 마력 회로는
급격하게 팽창하여 고통스러웠다.
‘역시 아직인가.’
고리 세 개와 지금의 육체로는 자신의 심상이 담긴 검술을 사용하기엔 너무나
도 유약했다. 티그리스는 숨을 고르며 몸을 차분히 진정시켰다.
바스티얀은 명상에 들어간 티그리스를 가만히 두었다. 티그리스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듯이 바스티얀에게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티그리스가 썩은 나무토막에 오러를 흘리는 것도 놀라운데, 그 오러를 세밀하
게 조절하여 검기로 만들어 쏘아냈다.
분명 고리가 3개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단순히 그것 만은 아니야.’
바스티얀은 자신이 수준 높은 검사가 아니라는 것이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
이 없었다. 만약 이 자리에 현 블랙 마이스터인 베르강이 있었다면 티그리스
가 보여준 저 검술의 경지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티그리스가 몸을 완벽하게 진정시키고 눈을 뜨자 바스티얀은 참았던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드래곤인가?”
“드래곤은 이 땅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 되었습니다.”
“아니면 고리의 개수를 숨기고 있나? 어떻게 고리가 세 개인데 그토록 정밀한
검기를 날릴 수 있던거지?”
“바스티얀 님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으시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바스티얀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 내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미안하네.”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는 꼭 물어봐야겠네. 왜 검술 교관이 되려고 하는 건가? 자네의
경지라면 황금 기사단에 들어가는 편이 훨씬 좋을 텐데?”
티그리스는 라칸의 처절한 울부짖음을 떠올렸다.
-좀 더 빨리···! 좀 더 빨리 미안하다고 했다면! 좀 더 빨리 네 잘못을 알았
다면!!!
-네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었다면···. 이 지경까지 안 왔을 텐데···.
티그리스는 입을 열었다.
“황금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보다 교관을 하는 것이 저와 제 가르침을 받을 학
생들 모두에게 득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가···.”
바스티얀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티그리스
가 제국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학생으로 들어오라고 할 셈이었지만···.’
현자이자 대마법사인 바스티얀 마저 이해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자를 누가
감히 가르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좋네. 자네를 교관으로 채용하지.”
“감사합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티그리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저런 불안한 오러의 유동을 보여주
는 사람은 이곳에 하나뿐이었다.
모리타 디 그리프였다.
9. 모리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