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 토너먼트(1)
티그리스는 고리를 4개 만들었고, 제인은 배가 터지도록 레니의 요리를 즐겼다.
더 이상 안개의 숲에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 안개의 숲을 빠져나오기로 했다.
안개의 숲을 빠져나오는 것은 들어가는 것보다 갑절은 쉬웠다.
“여기야! 여기로 쭉 가면 돼!”
제인은 앞서서 티그리스와 레니를 안내했다. 굳이 영기 나침반을 쓸 필요도
없이 그냥 무작정 걷기만 하면 되었기에 무척이나 편했다.
그리고 종종 출몰하는 악령들도 제인이 알아서 처리했다.
“훠이! 저리 안 꺼져? 아주 그냥 팍 씨!”
애초에 부적 때문에 티그리스와 레니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었지만, 살
아있는 사람의 숨소리에 홀린 잡귀나 악령들이 얼굴만 내밀어도 제인이 내쫓
아주었다.
티그리스는 안개의 숲에 회귀 전을 포함해 총 4번 들어왔음에도, 이렇게 마음
편하게 악령의 숲을 돌아다닌 적은 처음이었다.
한 4시간 정도 걸었을까? 저 멀리 푸른 등불이 하나가 보였다. 포그 우드의
길 잃은 여행자들을 안내하는 푸른 등대의 불꽃이었다.
그 푸른 등대의 불꽃을 보자 제인은 눈썹을 찌푸렸다.
“나 저 불꽃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저 불꽃은 악령만 내쫓는 불꽃이 아니었나?”
“그래서 내가 악령이란 거야?”
“이유는 잘 모르겠다는 거군. 그럼 되었다.”
별로 궁금한 것도 아니었기에 티그리스는 호기심을 털어냈다. 제인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자 기분이 팍 상했다.
“내가 모르는 게 이상해 보여? 170년 전에는 저런 푸른 불꽃이 없었으니까 당
연히 모르지.”
“누가 뭐라고 했나?”
“으으···! 크앙!”
제인은 티그리스에게 달려들었지만 티그리스의 몸을 통과할 뿐이었다. 그 이
후로도 티그리스에게 주먹질을 날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제인은 레니에게
날아와 투정을 부렸다.
“레니. 티그리스가 나 괴롭혀.”
“그것보다 티그리스 님이라니까요. 왜 자꾸 반말을 하시는 거예요.”
“170살 정도 먹으면 반말해도 되는 거 아니야? 원래대로라면 나는 티그리스의
증조할머니나 고조할머니뻘이라고.”
“그렇게 오래 사셨어요?”
“그래. 그러니까 나 대신에 티그리스한테 뭐라고 좀 해봐.”
“···할머니 말도 안 듣는데 제가 뭘 어떻게 해드릴 수 있겠어요.”
“너 지금 나한테 할머니라고 부른 거니?! 이이이!”
제인은 레니의 귀여운 볼살을 망가뜨렸다. 레니는 간지럽다는 듯이 몸을 부르
르 떨었다.
제인은 레니에게만 아무런 제약없이 접촉이 가능했다. 다른 물건이나 사람과
접촉하려면 영력을 소모해야 한다고 했다.
한을 품은 170년 된 혼령이었기 때문에 영력이 부족하진 않았지만 제인은 쓸
모없는 일에는 사용하는 편이 아니었다.
푸른 등대와 가까워지자 제인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이거 뭔가 기분이 점점 나빠지네. 뭔가 내가 해충이 된 것 같은 기분이야.”
레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뭔가 ‘인간들에게 필요 없는 존재이니 썩 꺼져라!’ 이런 소리를 들은 것처럼
기분이 나빠. 난 그냥 나로서 존재할 뿐인데, 왜 인간의 필요 유무에 따라 내
가치가 달라지는 건데. 쯧!”
제인은 레니의 가방에 쏙 들어갔다. 그 가방엔 레니의 무쇠팬이 들어가 있었다.
무쇠팬이 진동했다.
-나 여기에 있을 테니까 웬만하면 저 푸른 불꽃이 사라지고 나서 나 불러.
“알았어요.”
티그리스와 레니는 푸른 등대 앞에 섰다. 푸른 등대 앞에는 하품을 하는 경비
들이 있었다. 사실 경비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경계 태세가 허술했다.
푸른 불꽃만 있으면 악령들이 올 일이 없었기 때문에 군기가 빠진 것이었다.
“음···. 5일 전에 들어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셨네요. 생환을 축하합니다. 하아
암. 들어가세요.”
경비들은 티그리스와 레니의 신분패를 확인하고 대충 일지에 적은 뒤 나른하
게 등을 기대고 섰다.
‘군의 기강이 많이 해이해졌군.’
푸른 불꽃이 굉장한 주술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너무 푸른 불꽃만 믿은 나
머지 경비들은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군기도 바닥을 기었다.
경비들이 이런 모습이었으니 로타가 안개의 숲에서 키메라 연구를 손쉽게 진
행했을 것이다.
로타는 안개의 숲에서 악령을 베이스로 한 키메라 연구에 돌입했는데, 푸른
불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키메라들을 만들어 포그 우드를 단숨에 점령해버
렸다.
포그 우드의 멸망은 7년 후의 일이었으니 다소 먼 이야기다. 하지만 안개의
숲에서 개발한 악령 키메라들로 인해 황국의 남부가 통째로 넘어간 만큼 대책
은 필요해 보였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다.’
물론 안개의 숲의 대책을 논의하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당장 내년에 일어날
빅토리에 대학살 사건을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열 아홉의 나이에 고리를 무려 4개나 만들긴 했지만 아직도 불안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밤 여우에게 연락이 온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레비스를 죽
여야 한다. 최소 조건인 4개의 고리가 완성이 되었지만 무장이 부족했다.
‘그러니 토너먼트 우승을 반드시 해야한다.’
3등 보고에 잠들어 있는 ‘묵철검’정도가 있어야 레비스를 벨 수 있었다.
그리고 안전장치로 해주가 가능한 유물을 얻어 두는 것도 좋았다.
할 것이 산더미이지만 지금 티그리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 모자란 육신을 더욱 질기고 단단해지도록 담금질을 하는 것이었다.
“포그 우드에서 방을 잡고 수련을 하겠다.”
포그 우드는 마나가 가득하다 보니 수련하기에 굉장히 적합한 장소였다. 시간
도 열흘 정도 남았으니 이곳에서 수련하면 될 것 같았다.
무쇠팬이 거세게 진동했다.
-안돼애애애! 나 저 불꽃들 정말 싫다구!
제인은 푸른 불꽃이 가득한 포그 우드가 너무나도 싫었지만, 티그리스가 내린
결정을 결국 꺾지 못했다.
* * *
11월 20일.
티그리스와 레니는 수도 빅토리에에 도착했다. 4번 출입구로 향하자 베이튼이
대기하고 있었다.
“무탈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별일은 없었나?”
“리니아 공녀님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리니아가 편지를?”
“네 그렇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티그리스는 편지를 받았다.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오라버니에게]
편지 봉투 외곽에는 리니아의 손글씨가 적혀있었다. 내부에도 손글씨로 하나
하나 적은 모양이었다.
‘굳이 전보가 있는데 왜?’
밀서도 아니고 굳이 편지를 보내는 이유를 티그리스는 알지 못했다.
“이것 외엔 다른 건 없나?”
“토너먼트 예선전 상대가 정해졌습니다. 톰 스미스라고 용병 출신으로 고리 2
개인 검사입니다.”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고리 2개짜리인 용병이니 딱히 준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것보다 중요
한 것은 결승전이나 4강에서 만날 경쟁자들이 중요했다.
베이튼은 눈치 좋게 티그리스가 원하는 정보를 전달했다.
“그 외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고리가 4개인 용병이 출전했다고 합니다.”
“고리가 4개인 용병?”
용병 출신 중에 고리가 4개인 사람은 드물다. 고리 3개에서 4개로 넘어가려면
오러 운용술에 재능이 있어야 하는데, 단순히 재능만 있다고 해서 될 것이 아
니라 오러를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 지 배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용병들은 기사들과 달리 오러 운용술과 같은 고급 기술을 남에게 전수를 잘
해주지 않았기에, 고리가 4개인 20대 용병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때, 불현듯이 한 사내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이름이 무엇이지?”
“고든 데이커라고 합니다.”
티그리스가 예상했던 인물이었다.
고든 데이커.
현 블랙 마이스터인 베르강 폰 아인볼프의 수제자.
젊은 피 토너먼트에서 1등을 하고 난 후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베르강이 직접
수제자로 맞이했다는 전설적인 천재였다.
그러나 4년 뒤 블랙 마이스터 암살사건 때 같이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고든이 이번 토너먼트 이후에 베르강의 수제자가 되는 것이었나?’
토너먼트 본선에 진출했던 사람은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으니, 이번에 베르강
의 눈에 들어오고 수제자가 되는 듯했다.
‘그럼 처음으로 검을 맞대보겠군.’
평소에 잠잠했던 심장이 유난히 크게 뛰기 시작했다.
티그리스는 자신이 살짝 흥분했다는 것에 놀랐다. 티그리스는 단 한 번도 고
든과 검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검을 나눠볼 새도 없이 고든이 죽어버렸으니까.
‘내게 아직 호승심이 남아 있었던가?’
블랙 마이스터가 선택한 천재와 검을 나눠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흥분
이 되었다.
고든은 과연 무슨 검술을 쓸 것인가? 용병이니 투박한 검술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만큼 배려심 없는 무자비한 검술을 펼칠 것인가?
마법사는 호기심을 참기가 어렵듯이 기사는 호승심을 참기 어려웠다.
“일단 펜트하우스로 향하지.”
“네.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마차 위에 올라탔다.
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손에 잡힌 리니아의 편지를 읽기로 했다.
마차에 비치되어 있는 페이퍼 나이프로 깔끔하게 봉투를 자르고 내용물을 확
인했다.
[티그리스 오라버니를 못 뵌 지 2주 정도가 되어가네요. 이 편지가 도착할 때
쯤이면 3주 정도가 흘렀겠죠? 시간이 정말 빠른 것 같아요. 노르베르드는 눈
이 내리기 시작해서 길을 걷기가 굉장히 힘든데 수도는 조금 나을지 모르겠네
요. 수도는 그래도 조금 따뜻하겠죠?]
편지에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그냥 노르베르드에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눈을
맞으며 검을 수련했다는 내용, 영지 안에 고양이들 새끼가 태어났는데 사용인
들이 돌아가면서 봐주고 있다는 내용 등 별 중요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리니아의 정감 있는 글씨체에 티그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짓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시간이 정말 되신다면 꼭 편지를 보내주시면 좋겠어요. 그 동
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리니아 올림.]
‘편지라···.’
굳이 말로 하면 알아서 사용인들이 전보를 보내줄 것인데 이렇게 편지를 보내
는 이유를 잘 모른다.
그러나 리니아가 꼭 편지를 보내달라고 하니 귀찮지만 해줄 법 하다. 어차피
전보를 보낼 때 사용인에게 해당 내용을 적어서 줘야 하니까.
티그리스는 펜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서재에 들어가 만년필을 들고 딱
한 문장을 썼다.
[고리를 하나 더 만들었다.]
티그리스의 글씨체는 너무나 정갈했다.
전보용 타자기에서 뽑은 것 마냥.
* * *
예선전 일자는 금방 다가왔다.
티그리스는 수도 내에서 가장 큰 검투장에 들어섰다.
검투장이라고 해서 과거처럼 피가 솟구치는 그런 야만적인 검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화려한 검투를 선보였다.
사전에 검투사들끼리 합을 미리 맞춰놓고 화려한 검투를 나누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스포츠로 변모했다. 세상이 그만큼 평화에 찌들기 시작했
다는 뜻이었다.
티그리스는 늑대패를 경기 스태프에게 보여주자 스태프는 일정을 확인하곤 서
류를 내밀었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티그리스 공자님. 이곳에 사인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
겠습니까?”
서류엔 이번 토너먼트 참가 시에 주의해야 할 점들이 들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면 무조건 탈락이라는 것이나, 경기 중에 다
치면 최하급 포션은 제공해주지만 그 이후의 모든 치료비용은 개인이 내야 한
다는 점, 참가 비용은 10실버이고 본선에 진출하면 10실버는 다시 되돌려준다
는 점 등 여러 가지 내용이 적혀있었다.
티그리스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라 바로 사인을 했다.
“그럼 저 스태프를 따라가 주시겠습니까? 전용 대기실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일반 개인용 대기실이 아니라 VIP 대기실에 들어왔다.
VIP대기실은 일반 귀족이라고 해서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티그리스처
럼 고위 귀족인 경우에만 배정받을 수 있었다.
이런 전용 대기실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평민 때문이었다.
평민들이 대기실에서조차 편히 쉬지 못하고 컨디션 조절을 하지 못할까봐 고
위 귀족 자제들과 분리하는 것이었다.
VIP 대기실이라고 하나 일반 개인용 대기실보다 조금 고급스러운 정도였다.
티그리스는 그럭저럭 만족했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VIP 대기실에 만족하지 못
한 귀족들이 대다수였다.
-이게 내 대기실이라고?! 이따위 싸구려 의자에 나보고 앉으라는 것이냐?!
-자! 내가 돈을 내어줄 터이니 당장 이 의자를 바꿔서 사오거라. 당장!
‘···방음은 잘 안 되는군.’
티그리스는 매트 위에 앉아 명상했다. 집중을 하니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님. 경기 시작 10분 전입니다.”
티그리스는 눈을 떴다. 그리고 매트 옆에 놓여있던 검을 들고 나왔다.
스태프는 공손하게 티그리스를 경기장까지 안내했다. 경기장으로 나오자 검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했다.
챙-! 챙-!
거대한 경기장은 총 8섹터로 나뉘어 예선전을 치루고 있었다. 4년에 한 번 열
리는 토너먼트다보니 지원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저들은 모두 각자만의 목표가 있었다.
용병들은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기사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
제국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자신의 실력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누구는 황제 폐하의 용안을 직접 보고 싶어서.
누구는 돈.
누구는 황금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어서.
저마다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검을 나누고 있었지만, 이기고자 하는 열정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이 경기장을 후끈 달아올랐다.
티그리스는 제일 중앙에 위치한 경기장에 입성했다. 경기장에는 붉은 머리를
한 용병이 서 있었다.
티그리스의 상대인 톰 스미스였다.
티그리스는 이상하게도 그 사내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분명히 어디에선가
본 얼굴이었다.
“이거 첫 예선부터 나리를 만나게 되다니 영 재수가 없군요. 고리가 3개 시라
면서요?”
티그리스는 사내의 유들유들한 말투를 듣자마자 한 사내가 떠올랐다.
-나리. 나리는 죽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리는 죽을 자격이 없습
니다. 죽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아 다 죽여버리셔야 합니다.
무너져 가는 노르베르드 장벽 위에 굳건히 서서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검을
휘두르던 붉은 머리의 용병의 모습이 티그리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티그리스가 만나본 수많은 용병들 중에서 그 붉은 용병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처절한 투지 때문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잃자 왼손으로 검을 바꿔 들었
고, 왼손마저 잃자 입에 칼을 물고 오크의 목을 썰었다.
-나리···! 칼···! 칼을 주십시오! 칼을 입에 물려주십시오!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일어나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는 오크 하나
라도 더 죽이고 가겠다는 악귀 같은 눈빛으로 티그리스를 노려봤다.
기사도 아니고 돈에 이끌려 다니는 용병이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노르베르드
장벽을 사수하려 했는지 아직까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티그리스는 톰에게 빚을 졌다는 것이다. 톰을 포
함한 94명의 용병들이 없었다면 노르베르드를 탈출하던 100만명의 시민들이
학살을 당했을 것이다.
‘하늘이 내게 이런 기회도 주시는군.’
티그리스는 그 이름 모를 용병의 이름이 톰이었다는 것과 톰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티그리스도 모르게 미소가 작게 지어질 만큼.
티그리스는 톰의 눈을 봤다. 티그리스가 고리 3개짜리 검사라고 소문이 났다
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투지를 잃지 않았다.
“자넨 왜 검을 든 거지?”
“뭐 별거 있겠습니까? 먹고 살려고 하는 거죠.”
“그렇다면 왜 이 토너먼트에 나온 것이지?”
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용병이 왜 여기에 나왔겠습니까? 몸값 올리려고 나온 거죠. 물론 저는 제 몸
값뿐만이 아니라 용병단을 홍보하려고 나온 거긴 합니다만···. 나리를 초장부
터 만나버렸으니 10실버만 날려버렸네요.”
톰은 검을 빼 들었다.
“잡담은 그만하고 후딱 싸우죠. 나리. 저를 얕보시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훅
간 기사들만 해도 제 손가락하고 발가락 그리고 가운데 것을 다 합쳐도 모자
랍니다요.”
“전쟁을 많이 치러본 모양이군.”
“칼밥만 8년입니다. 나리가 장난감 칼을 휘두르고 다닐 때 전 진짜 전쟁터를
구르고 다녔습니다. 그러니 방심은 금물입니다. 나리.”
티그리스는 검을 빼 들었다.
“그러도록 하지.”
“···거참 재미없는 나리가 걸려버렸네요.”
톰은 도발에 걸려 들어오지 않는 티그리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티그리스는 톰의 독특한 준비 자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검을 위로 치켜든 모양새와 발 위치를 보아하니 데이튼 남작 가문의 바람잡
이 검술을 익힌 모양이군.”
톰은 뜨끔했다.
“···아닌데요. 나리.”
“그 독특한 자세는 바람잡이 제1식 바람 질주를 사용하기 위한 준비 자세란
걸 알고 있네.”
“데이튼 가문은 그리 유명한 가문도 아니고 7년 전에 멸문했는데 그걸 아신다
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자네는 7년 전에 멸문한 가문의 검술을 익힐 수 있었던 거지?”
톰은 티그리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거참 아니라니까요. 나리. 이건 제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검술입니다.”
“전쟁 용병이 어떻게 검술 가문의 검술을 익힐 수 있는지 나는 아네. 그러니
내겐 숨길 필요는 없지.”
“···허 참.”
전쟁 용병이 검술 가문의 검술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멸문한 가문의 비급을 몰래 훔쳐서 익히는 것이었다. 멸문한 가문에겐 비급을
지킬 가헌(家憲)의 기사가 없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그러나 용병이 기사의 멸문한 가문의 검술을 몰래 익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른 기사들과 귀족들의 미움을 살 수 있었기에 대놓고 밝힐 수 없었다.
그나마 톰은 잘 알려지지 않은 변방의 남작 가문의 검술을 훔쳐 쓰는 것이라
서 대놓고 써도 귀족들은 잘 몰랐다.
티그리스는 톰과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검을 머리 위로 치켜세우고 검끝은 상대방의 심장을 노리고 세우며 당장이라
도 앞으로 튀어 나갈 듯이 왼발을 앞으로 굽혔다.
톰은 티그리스의 자세가 자신보다 더 완벽하다는 것에 놀랐다.
티그리스는 악귀처럼 오크를 베고 다니며 화려한 불꽃처럼 사그라들었던 톰을
기억하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바람잡이 검술이 얼마나 훌륭한 지 시험해보도록 하지.”
“···거참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러면서도 톰은 티그리스의 정석 교본과도 같은 자세를 보면서 자신의 자세
를 교정했다.
왼발에 더 힘이 실리면서 앞으로 튕겨져 나갈 듯이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했듯이 둘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서로를 향해 격돌했다.
15. 토너먼트(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