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 토너먼트(2)
톰과 티그리스는 제1식 바람 돌진으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두 물소가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것처럼 거칠었고, 속도의 우열은 범인
의 눈으론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빨랐다.
티그리스와 톰이 서로 격돌하기 직전 톰의 검이 먼저 변화했다.
어깨가 회전하며 마치 범고래가 물개를 사냥하듯 순식간에 위로 쳐올렸다. 제
1식 바람 돌진에서 이어지는 연속기 제2식 물개 사냥이었다.
티그리스는 똑같이 물개 사냥으로 올려 벴다.
텅!
티그리스와 톰의 검이 같은 경로에서 마주치자 톰의 검이 옆으로 튕겨 나갔
다. 반면 티그리스의 검은 톰의 검이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검로를
이탈하지 않았다.
힘의 차이도 아니고 오러의 양의 차이도 아니었다. 그건 오로지 티그리스의
검술이 더 정교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티그리스의 검이 톰의 허리띠를 베고 지나가자 허리띠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일부러 안 베신 겁니까?”
“네 검술을 다 보지 못했으니까.”
톰은 헛웃음을 치며 허리띠를 옆으로 쳐냈다.
“정말로 궁금하네요. 이 검술을 어떻게 익히셨는지.”
티그리스는 과거 톰이 키메라를 베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그 저돌적인 검술과 톰의 투지가 만나 상승작용이 일어나면서 톰은 키메라들
을 피에 굶주린 혈귀처럼 베어나갔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 같진 않네요.”
톰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방금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톰의 투
지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톰의 눈빛은 타올랐다.
티그리스는 톰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돌진.
이번엔 티그리스가 톰의 발목을 노리며 횡으로 검을 그었다. 톰은 잽싸게 위
로 뛰어올라 제5식 물레방아를 시전했다.
몸을 한 바퀴 굴러 상대방의 등을 노리는 검술에 티그리스는 제2식 발목 자르
기에서 제7식 기마 베기로 이어지는 연속기로 막아냈다.
톰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기마 베기는 뒤를 돌아서 아래서 위로 올려 베
는 것으로, 워낙 고난이도 검식이라 톰은 아직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쩡!
톰의 검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가해지며 톰의 회전력이 크게 죽었다.
“칫!”
톰은 바닥에 나동그라지기 전에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
리고 곧바로 다시 돌진했다.
관중들과 대기하고 있던 선수들의 시선이 티그리스와 톰에게 자연스레 향했다.
서로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며 공격을 하는 모습은 마치 투우사와 소를
보는 것 같았다.
서로 번갈아가며 소가 되기도 하고 투우사가 되기도 하며 서로를 향해 돌진하
고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긴 지금 뭘 하는 거야?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엄청나군!
-저게 사람이 가능한 동작인가? 어떻게 저 자세에서 위로 올려칠 수 있지?
-저 검술은 어디 검술이야? 저런 저돌적인 검술은 처음 보는데?
검술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화려함에 이끌렸고, 검술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톰과 티그리스의 놀라운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심판마저 넋을 잃고 톰과 티그리스의 싸움을 지켜볼 정도로 화려한 결투가 이
어지자, 사진 기자들은 연신 사진기를 들고 찍었다.
-젠장. 너무 빨라서 제대로 찍히질 않잖아.
-제발 한 컷만···. 제발 한 컷만 건지자!
사진 기자들이 사진기의 성능에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톰은 아주 죽을 맛이
었다. 하도 티그리스와 검을 부딪혀서 그런지 손이 얼얼하다 못해 뻐근했다.
게다가 옷은 어느새 걸레로도 못 쓸 정도로 넝마가 되었다.
‘이건 내가 졌다.’
톰은 첫 격돌 때부터 패배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바람잡이 검술 이해도는 티
그리스가 훨씬 위였다.
검은 더욱 정교했고 자세도 완벽했으며 초식에서 초식으로 이어지는 연결이
마치 비단처럼 매끄러웠다.
톰은 당장이라도 검을 멈추고 티그리스가 어떻게 이 바람잡이 검술을 익혔는
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티그리스의 검을 더 보고 싶다는 욕망이 그보다
앞서 달렸다.
‘이건 기회야.’
티그리스의 정석에 가까운 검술을 보면서 톰은 자신의 자세를 고쳐나갔다.
글로 익혀서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웠던 동작이 티그리스라는 살아있는 교본을
보자 유연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거기에 티그리스는 아주 잠깐의 소강상태
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손목을 좀 더 바깥으로 뒤틀게.”
“좀 더 자세를 낮춰도 상관없네.”
“방향 전환을 할 때 발목에 오러를 때려 넣기보단 타이밍에 맞게 한순간에 몰
아치게.”
“조금 더 나아졌군. 하지만 힘이 모자르군.”
톰은 확실히 천재는 아니다. 그러나 범재 정도는 되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하나를 아는 수준이었다.
톰은 티그리스의 소중한 조언을 받아들이며 검술을 차근차근히 고쳐나갔다.
결투장은 어느새 배움의 장으로 탈바꿈되었다. 톰은 성실한 학생이 되어 티그
리스의 검을 배워나갔고 티그리스는 성심성의껏 톰에게 바람잡이 검술을 가르
쳐주었다.
톰과 티그리스의 결투가 30분이 넘어갔다. 전쟁을 겪으며 단련된 육체답게 톰
의 체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검은 그렇지 못했다.
쩡!
톰의 검은 마치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하늘로 비산했다. 톰은 허망하
게 손잡이만 남은 검을 쳐다봤다.
“···허.”
톰이 5년 전에 전 재산을 털어 산 검이었다.
철퇴와 직격으로 맞아도 날만 조금 상하는 검이었는데, 아예 산산조각이 나니
어이가 없었다.
그것보다 더 아쉬웠던 것은 티그리스에게 가르침을 더 이상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더 배울 것이 남았는데 검이 깨져버렸으니 너무나 아쉬웠다.
넋놓고 보고 있던 심판이 제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승자.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톰은 제정신을 차리고 티그리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10실버를 잃고 4골드짜리 검을 잃었지만 톰은 그보다 값진 것을 배웠다. 검은
부서지고 돈은 사라지지만 톰의 검술은 톰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남는 것이었
으니까.
티그리스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나도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네.”
“나중에 용병이 필요하시다면 붉은 이리 용병단을 찾아주십시오. 제가 그 어
떤 의뢰든 단 한 번은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나리.”
“검이 없는데 가능하겠나?”
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간 모아놓은 돈이 있어서 검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리젬블 산 강철로 만든 검보단 못하겠지.”
“···뭐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이걸 받게. 노르베르드 산 철로 만든 강철검이네. 자네가 쓰던 검보다 더 나
을 걸세.”
티그리스는 자신의 검을 톰에게 넘겼다.
톰은 손사레를 치며 거절했다.
“제가 어떻게 나리가 쓰던 검을 받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예비용으로 하나 더 있네. 그냥 받아도 되네.”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한낱 용병일 뿐인데···.”
“···용병이라.”
티그리스는 오크들의 시체 무더기 위에 누워있던 톰을 떠올렸다. 그의 두 눈
은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눈을 뜨고 있었고, 입에는 부러진 칼이 물려있었다.
그날의 톰은 용병으로 죽지 않았다.
영웅으로 죽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오직 티그리스만 기억하고 있는 과거. 지금의 톰과
그날의 톰이 다르다는 것을 티그리스는 알고 있다.
그러나 미련이 남았다. 자신의 오만함 때문에 그들이 모두 죽은 것이라고. 영
웅으로 영광스럽고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었으나 영웅으로 죽어버렸노라고.
그러니 사죄하는 것이다. 오직 티그리스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이기적인 사죄.
오만함을 씻어버린 티그리스의 양심이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어쩔 수 없
이 하는 일방적인 사죄였다.
“그저 내 마음이 시키는 것이니. 자넨 그냥 받으면 되네.”
톰은 티그리스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귀족의 사례를 연신 거절하는 것도 무례이니 이젠 받게.”
톰은 티그리스의 검을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히 받았다.
“이 검은 제가 대대로 보관하겠습니다. 나리.”
“검은 사용하라고 있는 걸세. 아끼지 말고 사용하게.”
티그리스는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샤를로트는 티그리스가 젊은 피 토너먼트에 나간다는 소문을 얼마 전에 들었다.
정말 관심이 하나도 없었지만 마침 공강이기도 했고 에이든과 친구들이 하도
같이 구경을 가자고 등을 떠미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관중석 티켓을 구매했다.
샤를로트는 관중석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았다.
‘뭐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고.’
사실 샤를로트는 자신이 진 것은 진 것이지만 완전히 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괜히 쉽게 이겨보겠다고 어깨를 집어넣는 바람에 져 버렸다.
만약 다시 정석적으로 싸운다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티그리스와 다시 결투를 할 예정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고 반년? 아니, 내년 이맘쯤에.
티그리스가 제일 중앙에 위치한 경기장에 올라서자 지미가 샤를로트의 어깨를
툭툭쳤다.
“샬롯. 저기 티그리스다.”
“알고 있어.”
이미 밖에서 나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티그리스의 저 뻔뻔한 얼굴은 멀리
서도 아주 잘 보였다.
‘좋아. 이번 기회에 녀석의 검술을 봐두는 거야. 그리고 파훼법을 머리 속으
로 생각해두는 거지.’
티그리스가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가 고리 2개에 전쟁터에서 오래 구른 베테랑 용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
지만, 자신을 이겼으니 저런 용병 따위에게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
려 지면 분을 참지 못하고 뺨을 날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둘이 격돌했다.
샬롯은 물론이고 친구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둘의 검술은 상상 이상으로 수
준이 높았다.
단순히 공격 일변도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수준 높은 심
리전이 오갔는지 샤를로트의 눈에 보였다.
파훼의 파훼의 파훼.
티그리스는 어떻게 톰이 익히고 있는 정체 모를 검술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같은 검술로 톰의 검술을 파훼했다.
급기야 톰의 검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욱 검이 정교해졌으며 날카로워졌
고 더욱 빨라졌다.
‘가르치고 있어···.’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샤를로트의 눈엔 다 보였다.
30x30m짜리 작은 경기장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오직 선생과 학생만 있을
뿐이었다.
샤를로트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티그리스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톰의 검이 폭발했다.
쩌엉-!
샤를로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너무 허무하게 끝난 결투였지만 여
운이 남았다.
극한의 속도로 서로를 향해 정직하게 직선으로 돌진하는 과정에서 오직 티그
리스의 검은 수십 개의 변화를 일으켰다.
같은 올려 베기라도 방어를 목적으로 하느냐 공격으로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
라 힘이 실린 순간과 타점이 달라졌다.
톰의 검로를 예측하고 검로를 순식간에 수정해 검을 옆으로 쳐내고 옷깃을 베
어내기까지 했다. 티그리스가 옷깃을 노려서 그렇지 만약 목을 노렸다면 톰은
자신이 왜 죽는 것인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었다.
샤를로트가 티그리스의 검을 생각하던 사이 친구들이 저마다의 감상을 늘어놓
기 시작했다.
“···티그리스가 진짜 천재긴 천재인가보다.”
“저 검술 뭔지 알아? 용병들이 개발할 수준의 검술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돌진하는 공격이니까 별거 아닌 검술 아니야? 뒤가 없잖아.”
“하긴 한 번만 막거나 회피하면 대처하긴 쉽겠다.”
‘멍청한 소리. 저건 용병들이 사용할 법한 저급한 검술이 아니야.’
저돌적이고 공격 일변도의 검술이라 부족함이 많은 용병들의 검술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수준 높은 검술이었다. 저건 수십 년간 대대로 개발된 귀족의 검술
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느 가문의 검술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였다.
“샬롯이라면 저 검술은 쉽게 파훼할 수 있겠다.”
“맞아. 안 그래 샬롯?”
“···응?”
샬롯은 친구들의 물음에 잠시 생각했다.
만약 저 공격이 오면 자신은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
옆으로 움직이면 발목 베기가 들어오고 위로 점프하면 검이 위로 치솟는다.
찌르기를 막아볼까?
샤를로트는 머릿속으로 모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모든 결과는 하나로 끝이
났다.
샤를로트의 패배.
샤를로트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받아낼 수 없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샤를로트는 아직 저 검식을 파훼할 수 없었다. 저 공격
일변도의 검술이 무슨 검술인지도 모르며 약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었
다. 샤를로트는 저 검술의 약점을 스스로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굉장히 분
했다.
그렇지만 친구들에게 진다고 말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샤를로트는 고개
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이길 수 있어.”
“봐봐 샤를로트는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
샤를로트는 태연한 척 웃으면서 생각했다.
‘교관님들께 여쭈어봐야겠어.’
오늘 봐둔 검식을 제국 대학 교관들에게 물어보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리고 그 검식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샤를로트의 머리 속은 오직 오늘 티그리스가 보여준 검식으로 가득찼다.
16. 토너먼트(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