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 토너먼트(3)
티그리스는 그 이후 3번의 예선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톰처럼 30분이 넘어가는 결투는 나오지 않았다. 그냥 일격으로 끝을 내거나
상대가 항복해버렸다.
‘고든의 검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고든 데이커는 용병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제비꽃 용병단 소
속의 용병이자 13년간 전쟁 용병 생활을 했던 인물이었다.
고든의 별명은 나이트 킬러.
전쟁 중에 1대 1로 기사와 싸워서 진 적이 없다 하여 생긴 별칭이었다. 그러
다 보니 고든과 마주한 모든 상대는 싸워도 보지 않고 수건을 던졌다.
고리 4개짜리 용병과 싸웠다가 검이 부서지거나 몸을 다치기라도 한다면 엄청
난 손해이기 때문이었다.
고든의 검술 실력은 본선에 가서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쉬움만 남긴 채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티그리스는 기묘한 일을 맞이
했다.
“어이 거기 머리 제대로 안 박아? 어디서 요령을 부리려고!”
제인이 거실 바닥에 도자기와 컵, 그릇, 슬리퍼 등을 내려놓고 소리치고 있었다.
제인이 티그리스를 보며 말했다.
“왔어?”
표정을 보아하니, 마치 검은 늑대 기사단원들을 굴리는 비장한 호른의 것과
같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 이 빌딩에서 숨어지내고 있던 귀신들을 찾아내서 교육 좀 하고 있었어.”
제인은 다시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어디서 눈깔을 돌려. 아주 그냥 내가 만만해?”
제인이 허공에 발차기를 하자 도자기가 덜덜 떨더니 엎어졌다.
“제자리!”
그러자 도자기가 다시 세워졌다. 뭔진 모르겠지만 정말로 저 물건들에 귀신이
빙의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제인은 스산한 눈빛으로 물건들, 아니 귀신들을 내려다봤다.
“아주 여기서 잘 먹고 잘살았나 봐. 얼굴들이 반질반질하네? 지금까지 백화점
사람들이랑 우리 레니 놀래키면서 잘들 지냈지?”
물건들은 격렬히 좌우로 움직였다.
“또 거짓말하네. 인간들을 놀래키면서 영력을 키웠잖아. 누가 먼저 시작했어.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빌?”
도자기가 벌벌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넌가? 레이아나?”
화분의 꽃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허! 티그리스가 왔다고 교태 부리는 것 봐? 넌 아주···”
“그만.”
티그리스는 이 우스꽝스러운 촌극을 더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것보다 레니는 어디에 있지?”
제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그게.”
제인이 소파를 흘금 봤다. 레니는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하라는 눈치를 주자 제인은 뺨을 긁으며 말했다.
“레니가 귀신을 이렇게 무서워할 줄은 몰라서···. 얘네들이 둥둥 떠다니니까
레니가 그대로 기절해버렸어.”
레니는 아직 귀신에게 면역이 없었다. 제인은 그래도 몇 주간 봐오기도 했고
선한 인상의 수호령이니 그나마 괜찮았다.
그러나 폴터가이스트 현상처럼 갑자기 물건이 움직이는 것은 레니에겐 쥐약이
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그 귀신들은 어떻게 할 거지?”
제인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 아주 그냥 파묻어버릴까? 들어보니까 레니가 혼자 청소할 때도 몰래 물
건을 움직이거나 거울에 들어가서 장난을 쳤다는데, 레니의 수호령으로서 봐
줄 수 없지.”
“빙의된 물건을 부수면 어떻게 되지?”
“뭐, 빙의할 오래된 물건을 찾아 헤매거나 그러겠지? 그런데 이 근처가 다 새
로 지어진 건물에 새 물건들이 가득해서 오래된 물건은 찾기 힘들 거야.”
“그럼 부숴버리는 게 좋겠군.”
티그리스가 검에 손을 올리고 발을 성큼성큼 옮기자 물건들이 사시나무 떨듯
이 떨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비는 것 같았다.
“자···잠깐.”
제인이 다급하게 티그리스를 막았다.
“왜지?”
“이리 와봐.”
제인은 녀석들이 들리지 않게 구석진 곳으로 이동해 소곤소곤 말했다.
“그··· 얘네들이 장난은 쳤어도 성질이 글러 먹은 놈들은 아니야. 그냥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거지. 여기는 안개의 숲처럼 영력이
많은 땅이 아니라서 사람의 관심을 받아야 유지할 수 있거든.”
“그럼 계속 레니를 기절시킬 건가?”
“···그건 아니지만 내가 잘 관리할 수 있어. 그리고 얘네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은데!”
“뭐가 좋지?”
“백화점에 나쁜 마음을 먹고 들어온 사람들이 없나 살펴볼 수 있고, 시설에
문제가 생겼다면 바로 알려줄 수도 있지. 게다가 얘네 잠도 안 자서 24시간
동안 일만 시킬 수 있어.”
“흠···.”
티그리스는 앞으로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을 죽여나갈 것이다. 당연히 도덕
적인 윤리 따위는 지키지 않는 로타와 아르펨은 티그리스를 죽이기 위해 갖가
지 방법을 동원할 것이고, 레니와 이 건물 사람들은 위험에 많이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티그리스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고스트들이 빌딩을 몰래 침입하려는
적들을 미리 발견한다면 위험한 상황을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이튼을 감시할 수도 있고.’
베이튼은 출장 나갈 때를 제외하면 바로 아래층에 있는 ‘더 노르베르드’에서
일한다.
녀석이 이상한 짓거리를 할 때 바로 제인을 통해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나쁘지 않군.’
티그리스는 검 자루 위에 올라가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레니가 다시 기절하지 않게 신경 써서 관리해라.”
“그건 맡겨둬! 문제없게 잘 관리할게. 아! 레니를 깨울까?”
“아니. 지금은 되었다.”
지금 일어나면 또 알아서 움직이는 물건들 때문에 기절할 테니까.
제인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레니 굉장히 아끼는 것 같다? 하긴 레니가 귀엽긴 해. 몇 년만 더 지나서
성숙한 숙녀가 되면···”
“잡담은 그만하고 이것들부터 치워라.”
“넵! 공자님!”
제인은 우스꽝스럽게 경례하더니, 곧바로 일렬종대로 서 있던 귀신들에게 명
령했다.
“자, 다 들었지? 거실 말고 다른 곳에서 우리 찐하게 놀아보자고?”
화분, 도자기, 슬리퍼 등은 공중을 날아서 다른 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둥- 둥-
그 모습이 뭔가 굉장히 힘이 없어 보였다. 티그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니가 당분간 고생을 많이 하겠군.’
* * *
본선 날이 다가왔다.
4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검투장은 시합 시작 2시간 전에 가득
찼다.
토너먼트를 보러 온 것도 있지만 황제 폐하의 용안을 보기 위해 서기도 했다.
관객들 틈 사이를 노닐며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들의 손이 바빠지고, 누가 이
기냐를 놓고 설전을 벌이다가 주먹 다툼이 일어나곤 했다.
그와 반대로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방이 있었다.
오직 VVIP만을 위해 마련된 호화로운 대기실.
황족이나 공작, 후작만을 위해 마련된 최고급 대기실에 한 여인의 한숨 소리
만 메아리쳤다.
“베르강.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현 블랙 마이스터이자 VVIP 대기실 입구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베르강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내가 이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은 이유는?”
“황녀님의 아름다운 미모를 돋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황녀는 만년필을 열심히 놀리며 말했다.
“그럼 당장 내일 제출해야 할 과제를 하면서 화장을 받는 이유는?”
“레인로버 황녀님께서 스케줄을 깜빡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기랄!”
급하게 쓰다가 만년필의 잉크가 손가락에 튀었다.
레인로버는 신경질적으로 펜과 종이를 화장대 위에 던졌다. 그리고 고개를 홱
돌아 베르강을 쳐다봤다.
“그게 아니라 제가 굉장히 바빠서입니다. 베르강. 전 황녀이기도 하지만 소환
마법 동아리의 동아리 장이기도 하고 제국 대학의 학생이기도 하고 소환 마법
사이기도 하다고요. 그리고 매주 망할 과제를 폭탄처럼 던지는 베르트랑 교수
의 수업을 듣는 불쌍한 마법사이기도 하고요.”
“굉장히 바쁘신 것 같습니다.”
“그럼 좀 봐줘야 할 거 아니야! 망할 할아범탱이! 땀 냄새나는 젊은 피 토너
먼트에 꼭 참가하라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난 과제 하기도 바빠 죽겠구먼!”
“황제 폐하를 할아범탱이라고 부르시는 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생각만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하.”
황제는 멀었고 황녀는 가까웠다.
황녀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 베르강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황녀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마법사가 일이 틀어지면 저렇게 난폭하게 변한다
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땐 그냥 가만히 닥치고 있는 것이 나았다.
황녀는 시녀가 가져온 손수건으로 직접 잉크를 닦으며 말했다.
“그래서 베르강은 누가 이번 토너먼트에서 이길 것 같으세요?”
“승부는 언제나 예측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전하.”
“좀 전에 도박권 사러 잠깐 나가는 거 다 봤거든요. 레이첼한테 말하기 전에
어서 말해요.”
“큼!”
베르강은 거울에 반사된 황녀의 녹안을 보며 말했다.
“고든 데이커가 이길 것 같습니다.”
“역시 뻔한가? 용병이 4개 고리를 가졌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니까.”
고리 3개와 4개의 차이는 극명하다. 4개부터 무기에 오러를 담을 수 있다.
무기에 오러를 흘리면 무기의 내구성은 물론이고 절삭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올
라간다.
일반 강철 검과 오러를 두른 무기와 부딪히면 그대로 잘려 나간다.
그렇기에 4개의 고리를 완성한 시점부터 전술 병기 취급을 받으며, 기사단의
등급도 4개의 고리 이상을 가진 기사가 총 몇 명이냐에 따라 등급이 달라졌다.
“고든은 왜 아직 기사 시험을 안 봤을까요?”
“평민이기도 하고 첫 기사 서임을 황제 폐하께 받고 싶은 것도 있을 겁니다.”
“하긴 그래서 이번 토너먼트에 나왔겠죠.”
1등을 하면 소원권을 얻지만, 그 소원권의 사용처는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 황제 폐하의 기사가 되는 것.
토너먼트의 암묵적인 룰이기 때문에 고든은 아마 황제 폐하의 기사가 되길 청
할 것이다.
“하지만 이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변이요?”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라고 19살에 3개의 고리를 완성 시킨 천재가 있습니다.”
황녀는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그 재수 없다던 천재 검사. 티그리스도 이번 토너먼트에 나왔
나요?”
“네. 그렇습니다. 대진표를 보니 결승전에서 고든과 맞붙겠더군요.”
“티그리스가 도중에 탈락할 거라 생각하진 않나요?”
베르강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리가 3개라서 그런가?”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작년에 본 티그리스의 검술 실력은 이미 제국 대학의
학생 수준을 넘었습니다.”
베르강의 말에 황녀는 살짝 놀란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베르강은 검술 실
력 평가에서만큼은 후한 점수를 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르강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궁금해지네요. 그러
면 티그리스가 이기는 것에 걸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경험의 차이가 있습니다. 고든은 16살부터 전쟁 용병으로 참가하여
29살이 될 때까지 쉼 없이 전장을 찾아다녔습니다. 심지어 전쟁이 끊긴 최근
2년 동안은 몬스터 간 전투도 겪어봤죠. 아무리 티그리스가 천재라곤 하지만
13년의 격차는 좁히기 힘들 것입니다.”
황녀는 잉크를 모두 닦아내고 손수건을 시녀에게 건넸다.
“흠~ 그래요?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누가 이길지?”
“무슨 내기를 말씀이십니까?”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베르강은 질색했다.
“저번처럼 수인 족의 밀림에 들어가서 자이언트 터틀을 생포해오라고 하실 겁
니까?”
“자이언트 터틀은 이미 제가 길들였어요. 느긋하게 하품할 때 얼마나 귀여운
데요. 지금 꺼내서 보여드릴까요?”
“지금 꺼내면 이곳이 난장판이 될 겁니다. 제발 삼가십시오.”
황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다른 건 아니고 고디바 사막에 있는 모래 여우가 그렇게 귀엽다던데. 길
들여보고 싶어요!”
“···모래 여우는 굉장히 잡기 힘듭니다. 굉장히 날 센 데다가 그 조그마한 녀
석이 마법까지 부릴 줄 아는 터라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을 뿐이지 못할 건 없는 거잖아요.”
베르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저는 다음 주 주말 내내 노아와 놀아주시는 것으로 하겠
습니다.”
“주말 내내?! 저 곧 기말고사를 앞둔 학생인데요?”
“최근 노아가 자꾸 칭얼거려서 말이죠. 황녀님을 자꾸 보고 싶다고 밤마다 얘
기합니다.”
노아는 베르강의 5살짜리 막내딸이다. 문제는 베르강의 어마어마한 체력을 이
어받아서 그런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아주어도 지치기는커녕 더 놀아달라고
보챌 정도였다.
“최근 노아에게 병정놀이 장난감 세트를 사줬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세상에! 병정놀이 장난감은 선 넘었죠!”
“아주 시간 잘 가실 겁니다. 전 무려 24번이나 마왕이 되었고 10번은 사악한
드래곤이 됐거든요. 아마 황녀님께선 사악한 흑마법사가 되실 겁니다.”
“젠장! 이번 내기에서 반드시 이겨야겠어.”
황녀는 씩 웃는 베르강을 보며 말했다.
“베르강은 그럼 티그리스에게 거시는 거 맞죠?”
“수작 부리지 마십시오. 황녀님. 제가 먼저 고든에게 걸었습니다.”
“나도 고든에게 걸고 싶은데?”
“그럼 먼저 도박권을 사시지 그러셨습니까?”
“이런 제기랄. 다음 주에 또 폭탄 과제를 주면 베르트랑 교수 연구실을 자이
언트 터틀의 화장실로 만들어버리겠어.”
그때 VVIP 실의 문이 열렸다.
“레인로버 황녀님. 곧 토너먼트가 시작됩니다.”
“알겠어. 금방 갈게. 황제 폐하께선 아직 안 오셨나?”
“오늘 아침 회의가 길어지셔서 먼저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레인로버는 얼굴을 구겼다.
“망할 할아범탱이. 이럴 줄 알고 나를 부른 거였네.”
뭐만 하면 대리로 참가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나중에 결승전이 시작될 즈음
에야 얼굴을 보일 것이다.
레인로버는 마음을 차분히 하고 거울을 보며 미소 연습했다.
그래도 황녀는 황녀다.
만민의 우상이자 민초들의 기둥이 되어야 할 황족이다. 왈가닥에 털털한 성격
이 본 모습이긴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행사 자리에선 그에 걸맞은 품위 있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황녀가 누리고 있는 모든 안락함과 사치의 대가니까.
굳은 얼굴 근육이 풀어지자 황녀는 일으켰다.
좀전의 험한 말을 내뱉던 왈가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아한 자
태의 황녀가 서 있었다.
베르강은 따로 여우를 찾을 필요 없이 여기 여우가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가죠. 베르강.”
베르강은 레인로버 황녀를 에스코트하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전하.”
황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티그리스는 검을 들고 경기장으로 나섰다.
상대는 3성 기사이자 28살의 나이에 붉은 장미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도리아 경이었다.
티그리스의 기억에 딱히 없는 인물이었다.
둘은 적절한 거리를 벌리고 섰다.
도리아 경이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3성 기사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너무 일찍 나오신 것 같습니다. 8
년 후에 나오셔도 되었을 것 같은데요?”
도리아는 자신이 이길 것이라 확신했다. 도리아는 전쟁을 많이 겪은 서부 출
신 기사였다.
거기에 도리아는 서부에서 ‘붉은 하이에나’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상대방의
약점을 잘 물어뜯는 것으로 유명했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인다면 도리아는 하이에나처럼 끈질기게 물어뜯을 것이
었다.
“지금까지 운이 꽤 좋으셨던 모양입니다만 여기서 끝입니다.”
도리아는 몸을 낮춰 돌진할 준비를 했다. 티그리스는 검을 뽑지도 않고 가만
히 멈춰 서 있었다.
심판은 손을 들었다.
“동전이 떨어지는 순간 시작하겠습니다. 준비.”
티그리스는 여전히 검을 뽑지도 않았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발도술을 할 셈인가?’
도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발도술은 빠르긴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검로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검집에 검이 들어가 있는 만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무조건 공격이 들어올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만 주의하면 파훼하는 것은 쉬웠다.
‘검이 들어오면 막고 검날을 따라서 들어간 뒤 명치에 몸통 박치기. 넘어지거
나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순간 이어진 찌르기에 바로 끝.’
시뮬레이션이 그려지자 도리아는 오러 고리를 예열하기 시작했다.
팅-!
심판의 동전이 하늘 위로 치솟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퉁!
묵직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튀었다. 도리아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티그리
스 앞에 섰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전혀 미동조차 없었다.
‘설마 이 정도밖에 되지 않은 건가?’
자신의 움직임을 읽지도 못할 정도로 처참한 실력이라니. 고리가 3개라는 것
도 거짓말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낙승이군.’
도리아는 검을 내질렀다.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올려 베는 정직한 공격.
목표는 티그리스의 가슴에 달린 붉은 표식이었다. 저것만 타격하면 승리다.
‘뭐 살짝 다치실 수도 있지만.’
도리아는 검을 좀 더 깊게 집어넣었다.
그러나 도리아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티그리스의 눈동자는 끝까지 도리아의 검을 따라가고 있었다.
훙!
도리아는 검을 올려 쳤다. 하지만 그 무엇도 베는 감각이 없었다. 티그리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피해냈기 때문이었다.
몸이 완전히 열린 도리아. 티그리스의 오른손이 움직였고 도리아의 가슴에 혈
선이 그려졌다.
“커억!”
도리아는 검을 떨어뜨렸다. 티그리스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검집에 집어
넣었다.
“인과응보일세.”
티그리스의 승리였다.
1초도 지나지 않아 끝난 결투 결과에 관객들은 물론이고 심판도 멍을 때렸다.
“스···승자!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17. 토너먼트(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