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화 - 토너먼트(5)
고든은 처음부터 귀족들의 서고를 뒤지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부탁하네···. 선조들의 지혜가 불타 사라지는 것을 막아주게.
슈바인 백작가의 가주는 별 볼 일 없는 전쟁 용병인 고든에게 빌었다.
죽음보다 3백년 간 이어져 내려온 슈바인 백작 가문의 모든 기록과 유지가 말
소된다는 것에 지독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고든은 슈바인 백작의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의 목숨보다 종이 쪼가리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인가?
-내가 서고를 막는 동안 가문의 비급과 명부를 챙겨서 달아나 주게. 그리고
훗날 슈바인 백작가를 다시 세우려는 후손이 있다면 그에게 넘겨주게.
고든은 슈바인 백작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5성 기사인 슈바인 백작을 고든이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비급만 가져간 채 도주하면 되니까.
감정이 시킨 일이 아닌 철저한 이성적으로 계산하고 움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고든은 서고에서 비급과 명부를 챙기고 각종 보물들을 안전하게 탈취
했다.
그리고 슈바인 백작이 알려준 비밀 통로로 도주했다.
전쟁이 끝나고 비급을 팔아치우기 위해 펼쳐봤을 때, 그 어떤 보물보다 이 비
급이 값지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리를 만드는 법, 오러 연공술, 슈바인 백작 가문의 보법과 검술까지. 모든
내용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고든은 비급을 읽고 체득했다. 글로 검을 배우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
능하겠지만 고든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슈바인 백작 가문이 3백년동안 수정하고 더한 비급을 익힌 고든은 다음 전쟁
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전쟁에서 생존할 확률이 올라갔고, 몸값은 더욱 비싸졌다.
강해지는 법을 알게 된 고든은 거침이 없었다.
고든은 미친 듯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멸문한 가문의 서고를 뒤져 비
급을 훔쳐 수련했다.
고든은 단순한 13년 차 용병이 아니었다.
도합 천 년이 넘는 귀족 가문들의 비급을 모조리 익힌 살아있는 비급서나 다
름이 없었다.
“흡!”
고든은 슈바인 백작 가문의 ‘유령 걸음’으로 티그리스의 뒤를 점했다. 그리고
사피아 남작 가문의 암기술 ‘그림자 검술’을 펼쳤다.
그림자 검술의 묘리는 빠른 공격에 있었다. 역수로 쥔 장검으로 순식간에 12
번을 베는 ‘그림자 난격’은 티그리스의 눈을 현혹시켰다.
쩌저저정!
그러나 티그리스는 그림자 난격을 모조리 막아내고 반격까지 했다.
고든은 날카롭게 찔러오는 티그리스의 찌르기를 모노하르 가문의 고유 오러
운용술 ‘공파’를 이용해 아래로 튕겨냈다.
티그리스의 검이 땅으로 향하고 몸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고든은 ‘그림자 가르기’로 티그리스의 어깨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티그리스의 어깨를 긋고 뒤로 지나갔다.
하지만 검엔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그 짧은 순간에 몸을 뒤틀어
검을 피한 것이었다.
고든은 비장의 수가 먹히지 않자 입술을 깨물었다.
‘괴물···!’
이 연속기를 아무런 피해 없이 피해내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이 연속기에 목이
날아간 기사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욱신-!
왼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고든은 아래를 슬쩍봤다.
허벅지에 날카로운 상흔이 있었다.
‘그새 반격을···.’
고든 조차 눈치채지 못할 순간과 각도로 티그리스가 반격한 것이었다.
“사피아 가문의 그림자 검술은 속도에 있어서는 최고를 자랑하지만 역수로 검
을 쥐어야 하기 때문에 리치가 짧아지지. 그리고 공격 후엔 잠시 무방비 상태
가 되는 단점이 있고. 듣기만 했지 정말로 본 적은 처음이군.”
티그리스의 말엔 거짓이 없었다. 정말로 티그리스는 고든이 익히고 있는 검술
을 회귀 전에도 본 적이 없었다.
이미 멸문한 가문이기에 오직 고든만이 익히고 있는 검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노르베르드 가문의 서고에 있는 내용입니까?”
“노르베르드 가문은 700년 역사를 자랑하네. 루체트 황국이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으니 현존하는 모든 가문의 검술의 정보는 다 있네.”
티그리스는 순수하게 이 결투가 즐거웠다.
고든은 카멜레온 같았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기사도 이렇게 다채로운 검
술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에 전혀 다른 가문의 검술과 보법을 섞어서 연속기로 사용할 수 있는 수
준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후···.”
고든은 무너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보여주지 않은 가문들의 검술이 남
아 있었다.
그것들을 활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든은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작은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고든은 생각을 집어치웠다. 일단 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고든은 티그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베르강은 이 결투가 진정 젊은이들의 결투가 맞는지 의심이 갔다.
고든은 다채로운 검술을 이용해 티그리스를 몰아붙였고 티그리스는 침착하게
파훼해 갔다.
‘도대체 몇 가지의 검술을 알고 있는 건가?’
고든은 최소 5가지 이상의 검술을 섞어가며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멸문한 가문들의 검술이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현존하는 가문들의 검
술이었다면 가헌의 기사들이 고든을 찾아가 죽였을 것이다.
-저 녀석 설마 귀족의 비급을 훔친 건가?
-맞아. 저건 슈바인 가문의 검술이야.
-도둑놈의 새끼. 이래서 용병들은 안 된다니까. 토너먼트가 끝나면 생사결을
신청해야겠어.
VIP 관중석에 앉아 있던 귀족들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수 백년에 걸쳐서 비급을 발전시켜왔다.
마법이면 마법, 검술이면 검술, 오러 운용술이면 오러 운용술···.
그렇기에 귀족들에게 있어서 가문 비급은 선조의 혼과 얼이 담겨져 있는 살아
있는 역사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멸문한 가문이라고 하지만 평민이 귀족의 비급을 몰래 훔쳐 배우는 것
은 귀족 계급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베르강도 귀족이긴 하지만 고든의 마음을 어느정도 헤아릴 수 있었다.
더욱 강해지고 싶은 욕망.
그건 천재에겐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40대 후반인 베르강도 여전
히 사그라들지 않은 욕구인데, 하물며 피 끓는 젊은이가 어찌 참을 수 있었을까?
거기에 고든의 인생에서 최고의 적수를 만났다.
티그리스는 고든의 모든 검술을 막고 피하는 것도 모자라 반격까지 하고 있었다.
자신이 숨겨둔 모든 수를 쏟아부어도 철저히 파훼하는 티그리스의 모습에 순
수한 동경심과 이기고 싶은 욕망이 들끓어 오르고 있을 것이다.
‘정말로 부럽군.’
베르강은 모든 상황을 다 떠나 지금의 고든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힘이나 순발력이 아닌 순수한 검술 하나만으로
받아줄 수 있는 최고의 스승을 만났다.
‘순수한 검술만으로 따지자면 티그리스가 고든 보다 몇 단계 위에 있다.’
티그리스는 고든의 연속기와 허를 찌르는 공격을 모조리 파훼함과 동시에 반
격을 넣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고든의 검술은 치밀해져 가고 있었다.
두 천재의 싸움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베르강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내가 검에 대해 무지하나 진정 젊은이들의 농익지 않은 결투라고 생각되진
않군. 노련한 기사들의 싸움을 보는 것 같아. 안 그런가? 베르강?”
황제 폐하의 말에 베르강은 고개를 숙였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황제는 검지로 팔걸이를 툭툭치며 잠깐 생각에 빠지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 평민은 멸문한 가문들의 검술을 훔쳐쓰는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맞습니다.”
베르강은 황제의 눈치를 봤다.
황제의 눈빛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베르강은 룩스 여신에게 빌었다.
황제가 저 젊은이의 목을 치라는 명을 내리지 않기를.
그렇게 하면 귀족들의 환심을 사며 정치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겠지만, 저 젊
은 천재의 목숨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아까운 목숨이군.”
베르강은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황제는 정치적인 이득보다 저 천재의 값어치를 높게 샀다.
베르강이 보기에도 고든의 천재성은 가히 수호기사가 되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황제의 혜안에 감복하며 베르강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든이 황금 기사단에 들어온다면 달라질 것입니다.”
“결투의 불문율 때문이군.”
“그렇습니다. 폐하.”
결투에도 정해진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가문의 외동 아들이나 딸에게 결투를 신청하지 않을 것, 결투를 받았던 인물
에게 1달 내로 또 다시 결투를 신청하지 말 것 등
결투는 귀족과 기사들의 전유물이기에 법에는 없지만 불문율처럼 여겨지는 규
칙이 있었다.
그중 황제를 보호하는 황금 기사단이나 철혈 마법 병단에겐 결투를 신청하는
것은 금지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개인의 명예를 드높여 보겠다고 황제를 지키는 기사와 마법사를 죽이거나 다
치게 만든다면, 황제의 신변을 위협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가능하겠지. 그러나 지금으로 봤을 땐 티그리스가 우세해 보
이는데?”
“고든은 4개의 고리를 완성 시킨 자입니다. 그에 반해 티그리스는 고리가 3개
뿐인 검사입니다. 고든이 검기를 뽑아내는 순간 티그리스를 이기는 것은 순식
간일 것입니다.”
“순수한 검술은 티그리스가 위일지 모르나 고리 차이로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건가?”
“네. 그렇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그리스 저 아이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안심이 되는군.”
그때 레인로버가 티그리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저거 검기 아닌가요?”
“아직 티그리스는 고리가 3개뿐···?”
베르강은 눈을 의심했다.
지금까지 고리 3개만을 운용하던 티그리스가 갑자기 4개의 고리를 운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티그리스의 검신에 은빛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고리가 4개···?”
베르강은 경악했다.
* * *
티그리스는 고든과 검을 나누면서 고든의 문제점을 바로 파악했다.
고리가 4개인 것은 확실하지만 검기를 뽑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의 소강상태에 티그리스는 숨을 헐떡이는 고든을 보며 말했다.
“고리 4개를 완성한 지 얼마나 되었지?”
“···후. 한 달 전입니다.”
“그래서 아직 검기를 뽑아내지 못하고 있었군.”
고든은 정곡을 찔리자 헛숨을 들이켰다.
“검기를 뽑아내는 법은 비급에 안 적혀 있던가?”
“적혀 있긴 했습니다만 제가 부족해서인지 몰라도 워낙 난해해서 깨우치지 못
했습니다. 그래도 잠깐 만들어내는 건 가능합니다.”
“그런가?”
티그리스는 고리 네 개를 가동시켰다. 그러자 티그리스의 몸에 은은한 은빛이
돌기 시작하더니 검으로 전염되기 시작했다.
티그리스의 검이 은빛의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하자 고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제 고리를 4개 만드신 겁니까?”
“열흘 전이네.”
“한 달 전에 고리 3개를 완성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안개의 숲에서 좋은 영약을 얻었지.”
“···인생 참 불공평하군요. 실력에 재수까지 좋으시다니.”
“그래서 포기할 건가?”
고든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요.”
고든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훔쳐 배운 비급을 떠올렸다.
검기를 뽑아내는 방법을 슈바인 가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검을 자신의 몸의 일부로 생각해야 한다.>
사피아 가문에선 이렇게 설명한다.
<검을 팔의 연장선이라 생각해야한다.>
모노하르 가문도, 그랑가 가문도, 게르미니아 가문도 모두 하나같이 검을 자
신의 신체 일부로 생각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서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고든은 그래도 아주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고리 4개의 오러를 가열 차게 돌려 모조리 양손에 집중하면 손바닥에 퍼져있
는 마력 회로로 오러들이 빠져나와 검으로 들어갔다.
고든의 검날에 붉은 검기가 일렁이며 피어올랐다.
하지만 티그리스의 것보다 굉장히 약했다.
티그리스는 고든의 검기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검에 오러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검에 마력 회로를 이식한다는 생각으로
밀어 넣게.”
“······!”
티그리스의 조언에 벼락을 맞은 듯이 깨달음을 얻었다.
검을 자신의 몸처럼 생각하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고든은 티그리스의 말대로 마력 회로를 검에 이식한다는 생각으로 오러를 집
어넣었다.
마치 지렁이가 땅을 파고드는 것처럼 고든의 오러가 검 내부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찬란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고리 4개를 모두 운용해야 하는 것은 똑같았지만 좀 전처럼 가열차게 돌릴 필
요 없이 적은 오러만으로도 질 높은 검기를 뽑아낼 수 있었다.
“훌륭하군.”
“···이런 걸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자네의 재능이라면 몇 달 후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었으니 괜찮네.”
고든은 코끝이 매워졌다.
티그리스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자신을 하등한 평민이자, 귀족의 검술을 훔쳐
배운 몰상식한 쓰레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귀족에게 이토록 존중받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이를 보답하는 길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
티그리스는 고든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했고, 고든은 숨기지 않기로 결심했다.
쾅-!
서로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이 티그리스와 고든은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고든은 자신의 비기를 선보이기로 했다.
6개의 가문으로부터 훔쳐 배운 검술을 종합해 만든 고든의 오리지널이었다.
그르릉-!
붉은 불꽃의 검기가 공기를 불태우며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를 냈다.
걸리는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로 달려드는 맹수의 아가리와도 같
았다.
고든은 이 기술을 ‘범의 송곳니’로 명명했다.
티그리스는 그 난폭하고도 찬란한 검술을 비껴내거나 피할 생각이 없었다.
정면 승부로 막을 내릴 생각이었다.
티그리스는 노르베르드 류 제1식 폭포 가르기로 이 젊은 천재의 비기를 맞이
했다.
--!
깔끔한 은빛 실선과 난폭한 붉은 불꽃이 서로를 교차했다.
검이 부딪힌 것은 분명했으나 귀를 찢는 소음은 전혀 없었다.
푹!
절반으로 잘려 나간 검날 하나가 땅에 박혔다.
고든의 검이었다.
고든은 자신의 가슴을 확인했다. 가슴팍에 붙어 있는 붉은 표식이 절반으로
잘려 나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고든의 완패였다.
-와아아아아!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9.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