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22화 (22/251)

#022화 – 레인로버

마테오는 입을 열었다.

“샐러맨더의 검은 총 두 가지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불의 검’으로

검신에 불을 붙여 베어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태워버릴 수 있습니다. 악

령과 같은 영체도 태울 수 있죠.”

무언가를 태운다는 것은 대대로 ‘정화’를 뜻했다. 부정한 것을 태우고 없애는

힘으로 흑마법사나 악령을 부리는 악령술사를 상대로 괜찮은 능력이었다.

그러나 티그리스가 원하는 능력은 아니었다.

로타의 입 레비스를 죽이려면 부정한 것을 태우는 불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레비스는 저주술사다.

저주는 주술에서 파생된 것으로 술사의 몸을 매개로 하여 세상의 인과를 비틀

어버리는 기술이었다.

티그리스가 특히 경계하는 저주는 ‘부식의 저주’였다. 모든 금속을 부식시키

는 부식의 저주가 걸리면 평범한 강철은 5초도 되지 않아 바스러져 버린다.

불의 검의 효과로 다소 저항은 할 수 있겠지만, 결국 부식의 저주로 검을 못

쓰게 될지 몰랐다.

“두 번째 능력은 뭐지?”

“하나는 ‘도마뱀의 꼬리’라는 능력입니다. 검이 잘려 나가거나 부서지면 자동

으로 수복되는 힘입니다.”

검이 수복된다는 말에 티그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검이 얼마나 빨리 수복되지?”

“지금 시험해보시겠습니까?”

“시험도 가능하나?”

“예. 가능합니다.”

마테오는 단검 쪽으로 향하더니 검신 한 가운데가 길게 뚫린 단검을 하나 가

져왔다.

‘브레이커’라는 이름의 검으로 검신이나 창날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

어진 아티팩트였다.

“잠시 검을 주시겠습니까?”

티그리스는 순순히 마테오에게 검을 넘겼다. 마테오는 브레이커의 깊게 파인

홈에 샐러맨더의 검을 통과시키더니 그대로 비틀었다.

뚝!

검신이 그대로 부러졌다. 그와 동시에 검신이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마테오는 반절로 잘린 샐러맨더의 검을 건네주며 말했다.

“원래대로 복구하고 싶으시다면 그냥 복구하고 싶다고 생각하시면 바로 복구

될 겁니다.”

티그리스는 검을 잡고 복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애매하게 잘려 나간 검신이 순식간에 자라났다. 완전히 자라나는 데

0.5초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검신이 아니라 폼멜이 잘려 나가거나 손잡이가 잘려 나가는 경우는 어떻지?”

“검의 형태가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라도 한다면 어느 부위든 다시 복구

됩니다.”

부식의 저주가 걸리면 검은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한다.

하지만 저주가 걸린 부분을 걷어내고 새롭게 검신을 만들어 낸다면 굳이 검을

버릴 필요도 없었고, 녹슬어 균형이 망가진 검으로 레비스와 싸울 필요도 없

었다.

티그리스는 다른 검은 확인해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하지.”

* * *

황궁 내에선 검을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마테오에게 검을 넘겼다.

“샐러맨더의 검은 황궁 밖을 나가시면 제가 직접 건네드리겠습니다.”

“알겠네.”

그렇게 보고 밖을 나오자 티그리스는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웨이브 진 핑크 골드빛 긴 머리칼에 황금처럼 반짝이는 금안.

아름다운 보석처럼 스스로 고아함과 귀품을 빛내는 여인.

황녀 레인로버 데 루체트였다.

티그리스는 곧바로 황도의 예법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위대하신 황금의 일족을 뵙습니다.”

뒤에 있던 마테오와 기사들도 일제히 예법에 맞춰 예를 표했다.

“위대하신 황금의 일족을 뵙습니다.”

레인로버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돼요. 전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레인로버는 딱딱한 황궁의 예법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소환 마법사가 대개 그렇듯 다정하고 친화력이 좋다 보니 고압적이고 위계적

인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예를 풀지 않았다.

“예와 법도가 없다면 황국의 근간이 무너집니다. 명을 거둬주십시오.”

“정말로 괜찮아요. 우리 사이가 굉장히 멀어 보이잖아요?”

“군신 관계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까우면 정에 이끌려

직언을 할 수 없고 멀어지면 충언을 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레인로버의 입술이 삐죽였다.

심통이 난 것이다.

“티그리스는 생각보다 딱딱하신 분이었네요~?”

“예와 법도를 알고 지키는 것일 뿐입니다.”

레인로버는 문득 이 딱딱한 사내를 골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이만 예를 풀고 일어나세요.”

티그리스는 그제야 일어났다.

레인로버는 예고 없이 티그리스의 앞에 코 닿을 거리만큼 성큼 다가갔다.

레인로버의 몸에서 나오는 달콤한 장미 향이 티그리스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

녀의 백옥같은 피부와 귀여운 솜털이 보였으며, 그녀의 금안이 노을이 반사된

호수처럼 아름답게 빛이 났다.

평범한 사내라면 그녀의 부담스럽도록 고아한 외모에 가슴이 절로 뛰며 얼굴

이 달아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동안 티그리스의 흑안을 부담스럽게 쳐다봤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자 레인로

버가 입을 열었다.

“왜 이러냐고 안 물으시나요? 티그리스?”

“궁금하지 않습니다.”

“제가 안 궁금한가요? 남들은 다 궁금해하던데?”

“전 예외에 속합니다. 전하.”

레인로버는 눈썹을 찌푸렸다.

마치 황실의 늙은 환관이나 고지식한 관리들 같았다.

얼굴만 보면 여자를 100명쯤은 후리고 다니게 생길 정도로 잘 생겼는데, 말투

나 행동거지는 왜 이렇게 딱딱한 걸까?

그때 티그리스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레

인로버에게 건넸다.

“···이건 뭐죠?”

티그리스가 황녀의 귓가에 다가왔다.

레인로버는 순간 당황해 몸이 얼어붙었다. 자기가 다가갈 땐 괜찮았지만, 역

으로 티그리스가 다가오니 너무 당혹스러웠다.

이어서 티그리스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오른쪽 뺨에 잉크가 묻었습니다. 이것으로 닦으시지요.”

“······!!!”

황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거···거울!”

황녀의 뒤에 있던 궁녀가 재빨리 거울을 넘겼다. 황녀는 오른쪽 뺨을 자세히

살폈다. 그녀의 백옥같은 피부에 아주 좁쌀처럼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마법을 얼른 캐스팅했다.

“클린즈.”

단숨에 잉크만 닦아내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클린즈 마법을 잘못 사용하

면 화장도 한 번에 지워지는데, 레인로버는 다급하게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잉크 자국만 날려버렸다.

레인로버는 궁녀에게 거울을 넘기고 티그리스를 흘겨보며 말했다.

“···눈이 참 좋으시네요.”

“방금처럼 가까이 다가오시지 않으셨다면 저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니 궁녀들

을 너무 나무라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레인로버는 입술을 삐쭉였다.

“하! 그럴 생각도 없었거든요? 그나저나 고지식한 성격과 다르게 자상하시네

요? 궁녀들 걱정도 다 해주시고?”

분명 회귀 전의 티그리스였다면 분명히 나서서 궁녀들을 다그쳤을 것이다. 그

러나 지금의 티그리스는 하지 않았다.

황녀는 자기 사람들을 굉장히 아꼈다. 사소한 실수는 눈감아주고 큰 실수를

저질러도 크게 혼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회귀 전 이런 착하고 다정한 여인에게조차 티그리스는 혐오를 받았다.

-티그리스! 아랫사람한테 그렇게 모질게 굴 필요가 있어요? 당신을 믿고 따르

는 시종들이잖아요!

-완벽한 건 좋은데, 남에게 강요하지 마. 나나 내 사람들이나 당신의 기사와

시종 그리고 모두에게!

-···지독한 새끼. 너 같은 새끼가 노르베르드의 후계자라는 것이 이 황국의

불운이야.

티그리스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진정한 지도자란 엄하기만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뭐야. 갑자기 왜 진지해져요. 사람 민망하게. 아, 원래부터 진지했나?”

레인로버는 헛기침을 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했다.

“큼! 뭐, 제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당신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온 거예

요.”

레인로버는 궁녀들이 들고 있는 티 세트를 흘금 보며 말했다.

“그러니 혹시 시간 되면 차 한잔하죠? 티그리스.”

* * *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근처 테라스에 단둘이 앉았다.

그녀는 궁녀를 시키지 않고 손수 차를 타기 시작했다. 티그리스가 타려고 하

자 레인로버는 손을 저었다.

“최근에 제국 대학에서 다도를 배웠거든요? 괜찮은지 당신이 좀 봐줘요.”

티그리스는 사실 그건 핑계고 다른 사람에게 차를 타 주는 것 자체를 즐긴다

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마셔봐요. 괜찮나요?”

티그리스는 차를 맛봤다.

티그리스는 회귀 전을 통틀어 레인로버의 차 맛을 본 적이 없었다. 회귀 전에

는 티그리스를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차를 직접 끓여주지 않았다.

“훌륭합니다.”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니죠?”

“전 필요 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레인로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나를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긴가~?”

“구태여 거짓을 고할 필요가 없이 훌륭한 맛이기 때문입니다.”

“참 정 없는 양반이야.”

레인로버는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아져 어깨가 으쓱였다. 레인로버는

차를 마시곤 눈을 감았다.

“음~ 티그리스 말대로 맛이 좋은 것 같네요. 내가 끓여서 그런가?”

레인로버의 자화자찬에도 티그리스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차를 맛볼 뿐이

었다.

“이거 참 벽 보고 얘기하는 것 같네. 당신 집에서도 그렇게 뻣뻣하게 굴어요?”

“사람마다 편한 옷이 다르듯이 제겐 이 모습이 편할 뿐입니다.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뭐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네요.”

레인로버는 이제 포기하기로 했다. 티그리스에게 반말을 듣는 것은 아마 평생

불가능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렇게 당신을 부른 것은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 거예요.”

“하문하십시오.”

“당신 어떻게 고리가 4개인 거예요?”

“안개의 숲에서 영약을 찾아 복용했기 때문입니다.”

별빛을 머금은 얼음 정수는 레인로버도 알고 있었다.

제인이라는 수호령이 몸담고 있는 천고의 영약. 많은 모험가가 제인에게 찾아

가 영약을 달라고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고,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지만, 깊이

를 알 수 없는 샘 밑으로 들어가 버려 찾을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럼 설마 제인을 죽이고···.”

“아닙니다. 제인은 지금 살아있습니다.”

티그리스는 영약을 얻게 된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모험기를 잠자기 전 동화를 듣는 어린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그래서 지금 제인은 레니라는 아이의 수호령이 돼서 펜트하우스에 있다는 거

군요?”

“네. 그렇습니다.”

“저 한 번 구경 가도 돼요? 저 혼령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께서 오신다면 무한한 영광일 것 같습니다.”

“정말이죠?! 약속한 거예요.”

레인로버는 다음 날 놀이공원에 가기로 약속한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래도 천재라고 듣긴 했는데 당신도 대단한 것 같네요. 그 천고의 영약을

남김없이 소화한 것도 대단한데 열아홉의 나이에 고리가 네 개라니···. 게다

가 토너먼트에선 우승까지 하시고···.”

레인로버는 장난기 어린 말투로 말했다.

“이거 가만 보니까 일등 신랑감이네요! 우리 결혼할까요?”

“불가능합니다.”

빈말에 티그리스를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 농담을 한 것이지만 너무나도 단호

하게 안 된다고 말하자, 레인로버는 상처받았다.

“···뭐예요. 왜 안되는데요?”

티그리스는 간단히 답했다.

“저와 레인로버 황녀님은 6촌 관계입니다. 법도 상 황족은 6촌 이내의 귀족과

결혼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는 혈연 결혼을 통해 권력이 한곳으로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법이었다.

용의 시대를 주름잡았던 ‘팍스 황국’이 황실의 위세를 업은 외가(外家)들의

권력 집중과 부패로 인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팍스 황국의 뒤를 이은 루체트 황국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혈연 결혼을 법으

로 막았다.

레인로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참 괜찮은 신랑감 하나 찾기 이렇게 힘들어서야···.”

결혼 적령기인 레인로버가 약혼을 못 하는 이유도 문어발같이 복잡한 귀족 사

회에서 혈연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레인로버도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면 약혼할 생각도 없었다.

“혹시 좋은 사람 있으면 저 소개해줘요. 이러다 혼자서 평생 늙어 죽을 것 같

아요.”

“예. 알겠습니다. 전하.”

“아니면 내가 법을 싹 고쳐버리든가 해야지.”

레인로버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제국 대학의 검술 교관으로 온다면서요. 어떻게 했길래 바

스티얀 학교장님이 바로 통과시켜준 거죠?”

“비밀입니다.”

“뭐야. 왜 비밀인데요.”

“그것도 비밀입니다.”

“···황녀로서 명령을 내려도 안 알려주실 건가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명을 내리시면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레인로버는 거석처럼 무뚝뚝한 티그리스에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하···. 이 사람 진짜 나 꼰대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네. 됐네요. 그렇게

까지 궁금한 건 아니거든요.”

사실 궁금하지만 이런 식으로 듣는 것은 레인로버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지금은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때가 되면 모두 고하겠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뭐 대충 예상은 가요. 당신이 토너먼트에

서 보여준 그 검술은 베르강도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순수하

게 검술만으로 봤을 때, 당신이 검술 교관을 안 하면 누가 할까 생각이 들기

도 하고요.”

레인로버는 식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당신은 저한테 궁금한 건 없어요?”

“없습니다.”

레인로버는 알 수 없는 서러움이 폭발했다.

“너무 단호한데요? 저 상처 입을 것 같아요. 황녀한테 관심이 너무 없는 거

아녜요? 여자로서 자존심도 상하네요.”

“대신 조언을 드릴 것은 있습니다.”

레인로버는 눈을 반짝였다.

“조언이요?”

“제가 소환 마법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진 못하지만, 황녀님이 소환 마법에 재

능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은 그렇긴 하지만 그런 소리는 듣긴 하죠.”

그냥 재능이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레인로버는 소환 마법의 천재였다.

그런 그녀에게 조언할 것은 하나였다. 계약을 맺기 좋은 소환수를 추천하는 것.

티그리스는 마침 레인로버에게 맞는 소환수를 알고 있었다.

“황녀님이시라면 고디바 사막에 종종 출몰하는 고대의 영혼들과 계약을 맺으

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대의 영혼이요? 그건 뭐죠?”

소환수로 삼을 수 있는 몬스터들을 죄다 꿰고 있는 레인로버로선 고대의 영혼

이란 몬스터는 처음 들어봤다.

“고디바 사막의 방랑 상인들에게 내려오는 전설입니다. 만월이 뜨는 밤 고디

바 사막을 불모지로 만들었던 화염룡 ‘타이케스’를 사냥했던 용 사냥꾼들의

영혼이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건 그냥 전설이잖아요. 게다가 전 혼령 술사가 아니라 소환 마법사라고요.

혼령과 계약 맺는 방법은 몰라요.”

“제가 듣기론 영체 몬스터인 고스트와도 계약에 성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맞긴 한데. 고스트는 정말로 지성 낮은 몬스터일 뿐이에요. 혼령들

처럼 한을 갖거나 높은 지성을 갖춘 영혼들이 아니고요.”

“그래도 도전해볼 가치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티그리스는 확신을 담아 얘기했다. 왜냐하면 과거의 레인로버는 고대의 영혼

하나와 계약을 맺어 소환수로 부렸으니까.

고대의 영혼 하나가 오우거 키메라와 그리폰 키메라 수백 마리를 도륙 냈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만약 고대의 영혼 하나가 아니라 둘이

나 셋 이상과 계약을 맺는다면 훗날 있을 대전쟁에서 유용할 것이었다.

“···뭐 티그리스 당신이 깊게 생각하고 한 조언일 테니 생각은 해볼게요.”

레인로버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좀 고맙네요. 절 생각해주시다니. 혹시 저한테 관심이 있다거나 그러

지 않아요?”

“황녀님은 만민의 관심사이실 것입니다.”

“···재미없긴. 아무튼 오늘 대화는 즐거웠어요. 그리고 역시 사람은 직접 만

나봐야 안다는 선조들의 격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티그리스는 검술은 뛰어나지만 오만하고 심성이 못돼먹었다는 소문이 사교계

에서 파다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니 달랐다.

오만하기보단 귀족적이었으며 심성이 못돼먹었다기보단 철학이 확고한 것이었다.

평민과 아랫사람들에게 못되게 군다는 소문도 거짓이었다. 만약 그 소문이 사

실이었다면 용병들에게 자신의 검을 주지 않았을 것이고, 궁녀들을 나무라지

말라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당신은 좀 뻣뻣하긴 하지만 굉장히 좋은 사람이에요. 만약 당신을 모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직접 나서서 혼을 내줄게요.”

“제 명예는 스스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제 말은 제국 대학 내에서 웬만하면 피를 보지 말라는 의

미예요.”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모리타의 양팔을 날려버린 이야기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

“만약 당신을 모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를 부르세요. 제가 중재를 해드릴 테

니까요. 피 안 보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쪽이 좋잖아요?”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나이가 적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무시 당할까 봐 걱정

하는 것이었다.

교관으로서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을 할 때마다 티그리스가 결투로 모두 때려

눕히면 될 일이겠지만 권위와 명예는 되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평판이 깎일

수 있을 테니까.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평판도 깎이고 한 사람이 무조건 상처받는 일을 만들

고 싶지 않았다. 티그리스로선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줄 일인가 싶지만 레인

로버는 너무 착하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다.

티그리스가 한동안 말이 없자 레인로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똑똑똑. 사람 말 안 들려요? 설마 싫은 건가요?”

“아닙니다. 만약 그럴 일이 있다면 중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인로버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거 안 되겠어. 약속을 해야지.”

레인로버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뭐해요. 어서 새끼손가락 안 걸고.”

“그런 건 의미가 없습니다. 증거가 남는 것도 아니고···”

“어허! 말이 기시네! 명령입니다. 티그리스. 어서 새끼손가락을 거세요.”

티그리스는 하는 수 없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레인로버는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웃었다.

“이거 뭔가 중독될 것 같네요. 앞으로 당신한텐 부탁보단 명령을 많이 내려야

겠어.”

“신하에겐 올바르지 않은 명령은 거절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올바르지 않은 명령인가요?”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하고 답을 했다.

“···유치한 명령입니다.”

레인로버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기에 크게 웃어버렸다.

“하하하하하!”

레인로버의 새끼손가락과 티그리스의 새끼손가락이 걸렸다.

“당신의 명예는 제가 지켜줄게요. 그러니 당신은 함부로 피를 보지 마세요.

알겠죠?”

새끼손가락에서 전해져 오는 그녀의 체온은 따뜻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알겠습니다.”

레인로버는 웃음으로 감추고 있었지만,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은 조절하

기 힘들었다.

티그리스의 새끼손가락은 생각보다 거칠고 뜨거웠기에.

23. 증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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