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화 – 증명(1)
다음 날.
티그리스는 출근 준비를 했다. 복장은 제국 대학의 규정대로 검술 교관임을
증명하는 남색 제복과 교관 패를 가슴에 부착했다.
그 모습은 리니아가 사진기를 가져와야 하는 것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 정도로
태가 났다.
리니아는 작은 선물상자를 티그리스에게 건넸다.
“오라버니 이거 받으세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선물이에요. 왠지 이게 필요하실 것 같아서.”
티그리스는 선물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엔 매끈한 은 촉으로 된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요란스럽지도 않고 깔끔한 것이 티그리스의 마음에 딱 들었다.
“고맙구나. 잘 쓰겠다.”
“헤헤···.”
리니아는 티그리스가 은근히 좋아하자 기분이 좋았다. 다음번에도 용돈을 모
아서 선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학교를 통해 연락하거라. 내가 곧바로 달려올
테니.”
“네. 알겠습니다. 오라버니.”
티그리스는 제국 대학에 도착했다.
대학 내부는 한산했다. 1월은 학생들이 방학을 맞이한 시즌이기도 하고 내부
시설 정비를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았다.
종종 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느긋하게 오가는 모습만 보였다.
티그리스는 교관들의 집무실이 있는 교사동으로 향했다. 그중 검술 교관 집무
실과 회의실이 있는 3층으로 올랐다.
3층에 올라오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티그리스를 반기고 있었다.
“7시 50분···. 전보단 나은 것 같군요.”
반기다는 표현보단 벼르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티그리스의 직속
선배인 베드리안이 까탈스러운 안경을 치켜들며 말했다.
“본래 출근 시간은 8시지만 20분에서 10분 정도 일찍 출근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티그리스의 질문에 베드리안은 조금 당황했다.
“···그야 학생들을 가르칠 준비도 하고 아침 회의도 준비해야죠.”
“학생들 수업이 8시 반에 시작되기 때문에 8시에 출근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
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10분 더 일찍 올 필요가 있습니까?”
“···좀 재수 없다는 이야기는 듣긴 들었는데 여기에선 그렇게 뻣뻣하게 굴면
피곤해질 겁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드리안은 할 말이 없었다. 베드리안도 8시 정각에 칼같이
맞춰 출근하니까. 그런데 평소보다 20분 일찍 출근한 이유는 티그리스를 초장
부터 잡고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티그리스는 젊은 피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데다가 고리를 4개를 만들었다. 희
대의 천재라고 칭송받다 보니 콧대도 높아져 자기 말을 잘 안 들을 것으로 생
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초면부터 기 싸움을 하려고 하는군.’
베드리안은 눈썹을 찌푸렸다.
“다~ 제가 겪어보고 하는 말이니 제 말에 귀찮게 토를 달지 마세요. 피곤하게
교관 생활하고 싶지 않으면 사수인 제 말을 그냥 따르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티그리스는 과거의 베드리안을 떠올렸다.
권위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교관으로서 열정이 없
는 편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이었다.
평민 출신에다가 재능의 한계를 일찍부터 알고 있기에 제국 대학과 종신 계약
을 바로 맺을 정도로 결단력도 있고 보는 눈도 있는 인물이었다.
-···미···미친!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거 어떻게 하지?
-야···! 아무나 의무관 좀 불러봐 어서!
그러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하면 쉽게 무너지는 인물이었다.
제국 대학 내에서 결투 시 심각한 상해를 입히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티그리스가 모리타의 오른팔 힘줄을 잘라버렸을 때 베드리안은 당황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티그리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티그리스가 홀로 정해진 교육 커리큘
럼에 따르지 않고 홀로 수련해도 가만히 두었다.
평소 성격 같았으면 바로 결투를 신청해서 눌러버렸겠지만 이제 변하기로 했
으니 그런 강압적인 수는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자신이 베드리안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면 되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의외로 순순하게 나오는 티그리스의 말에 굳은 표정이 풀렸다.
‘진작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티그리스는 이어서 말했다.
“규정상 본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학과장님 앞에서 모의 강의를 해야 하는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잘 알고 있네요. 그런데요?”
“제 모의 강의에 베드리안 교관이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리안은 작게 썩소를 지었다.
“뭐, 말만 하세요. 다 도와드릴 테니까요. 어차피 사수로서 강의 계획서를 짜
는 일과 지원금을 사용하는 방법도 다 알려줘야 하니까요.”
“그런 내용이 아니라 모의 강의에 베드리안 교관이 직접 참여해주셨으면 좋겠
습니다. 제 지도받는 입장으로 말입니다.”
“···그 말은 혹시 제가 학생 역할을 하라는 뜻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베드리안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신분과 돈으로도 억누를 수 없다 보니 실력으로 승부해보겠다는 것이었다. 하
지만 검을 잘 다루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 도도한 도련님 콧대를 확 눌러버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좋습니다. 그런 거라면 제가 도와드리죠.”
베드리안의 썩소가 더욱 짙어졌다.
* * *
베드리안은 사수로서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티그리스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라, 나중에 안 가르쳐줘서 몰랐다는 말을 꺼
내지도 못하게 성심성의껏 알려주었다.
“다 이해했죠?”
티그리스는 베드리안이 넘겨준 학교 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기시네.’
베드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검술은 몰라도 이런 행정적인 부분을 티그리스가
제대로 이해했을 리가 없었다. 이런 건 해봐야 아는 거니까.
“학교에서 각 강의마다 지원되는 운영비는 한 학기에 10골드입니다. 그 이상
쓰지도 못할뿐더러 만약 그 이상을 쓰면 전부 토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
다. 잘못하면 징계 심의가 들어갈 수 있으니 꼼꼼히 확인해야 합니다.”
“예.”
티그리스는 교관 일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금전 관리, 공문서 작성, 물자
관리 등의 행정 일을 해본 경험이 있다.
있다 못해 풍부할 정도다.
베오울프가 저주에 걸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을 때, 티그리스는 대리로
행정 일들을 직접 처리했다.
티그리스는 노르베르드 가문의 후계자니까.
거기에 가세가 기울면서 월급을 주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자 가신들이 하나둘
씩 떠났고, 얼마 남지 않은 인원들로 가문을 이끌어가야만 했었다.
그 때문에 티그리스가 직접 공문서를 작성하는 실무자 역할도 했고, 금전과
물자 관리는 티그리스가 거의 도맡아서 했다.
물론 제국 대학과 노르베르드 가문의 행정 시스템이 다르긴 했지만, 물자와
금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노하우가 있었다.
“그럼 수고하시고··· 아, 맞다. 학기가 시작되면 굉장히 바빠질 테니 교관 보
조를 빨리 구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재학생 중에 한 사람을 뽑는 것이 규정
이고 지원금은 월 10실버니까 평민 출신 중에서 구하는 게 좋을 겁니다.”
할 말이 끝났는지 베드리안은 티그리스의 집무실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럼 고생하세요.”
베드리안은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진짜 고생 좀 할 거다.”
강의 계획서를 짜는 법을 알려주긴 했지만, 네이션 학과장님에게 100% 까일
것이다.
자금을 어떻게 운용할 것이고, 어느 연무장에서 수업을 진행할 것이며, 강의
는 목표가 무엇이고, 주차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계획을 짜는 일
은 정말로 머리털 빠지게 힘든 일이었다.
베드리안도 처음 제국 대학에 들어와서 강의를 개설하려 했을 때, 거의 2달
동안 집무실에 처박혔다.
티그리스의 강의 계획서 제출까지 남은 시간은 1달 조금 넘게 남았다. 티그리
스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한 달 안에 강의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예상컨대 강의 계획서도 제출하지 못하고, 베드리안의 보조 교관으로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그땐, 아주 쥐잡듯이 굴려주겠어.’
* * *
그러나 베드리안의 예상은 무참히 깨졌다.
네이션 학과장은 티그리스의 강의 계획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곤 입을 열었다.
“모의 강의는 다음 주에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다.”
정확히 3주.
3주 만에 티그리스는 강의 계획서를 제출했다. 강의 계획서를 보신 네이션 학
과장님은 그 바로 다음 주에 강의 계획서를 통과시켰다.
“베드리안이 잘 가르친 모양이군. 심도 깊고 자세한데다가 오탈자나 비문도
없고 깔끔해. 지출 계획서도 문제없고.”
“아···. 네···.”
할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티그리스는 자신에게 단 한 번을 보여주지 않고
바로 학과장님에게 제출했다.
본래 사수에게 한 번 검토를 받고 학과장님에게 제출하는 것이 맞았지만 티그
리스는 그러지 않았다.
‘이 새끼가···.’
만약 조금의 실수라도 있었다면 네이션 학과장님이 저 녀석뿐만이 아니라 자
신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분명히 티그리스는 그걸 알고서도 자신에게 강의 계획서를 보여주지 않았다.
베드리안은 이를 갈며 티그리스의 강의 계획서를 훑었다.
‘그래 얼마나 잘 썼나 보자.’
강의 제목은 <내려치기의 이해와 파훼>였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한 학기 내내 학생들에게 내려치기 하나만 가르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베드리안은 계속 강의 계획서를 읽어 내려갔다.
<각 주차 별 교육 계획>
1주차 내려치기의 이해
2주차 횡 베기로 파훼하기
3주차 횡 베기로 파훼하기
4주차 올려치기로 파훼하기
5주차 올려치기로 파훼하기
···
각 주차 별 어떤 것을 가르칠 것이고 왜 가르칠 것이며 어디에서 어떻게 가르
칠 것인지 주차 별 목표는 무엇인지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문제는 하나였다.
‘내가 지금 이걸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나?’
문장에 쓸모없는 미사여구가 많거나 중구난방이라서 읽기 힘든 것이 아니었
다. 이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건 강의 계획서 수준의 글이 아니라 거의 논문 수준··· 아니, 비급을 보는
듯한 난이도였다.
베드리안이 두세 번 반복해서 읽어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을 정도로
어려웠다.
하지만 인정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겨우 19살이 이 정도의 심득을 갖고 있다
고? 베드리안의 나이는 36살이다. 거의 나이 차가 두 배 가까이 되는데 19살
의 심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베드리안은 주변을 살펴봤다. 다른 검술 교관들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글
을 읽고 있었다. 그들 중에 첫 번째 장을 넘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 한 교관이 입을 열었다.
“베드리안 교관.”
“···네.”
“이걸 자네가 정말 검토해준 것이 맞나?”
교관들의 눈이 베드리안에게 향했다. 베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연스레
눈이 향한 곳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아 있는 티그리스였다.
티그리스의 눈과 베드리안의 눈이 마주쳤다.
거짓말은···
“···아닙니다. 검토를 못 했습니다.”
나올 수가 없었다. 이 강의 계획서에 관해 조금만 물어봐도 들통날 것이 분명
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강의 계획서를 작성하는 법만 좀 알려준 것뿐입니다.”
그러나 아주 티끌만큼 남은 자존심 때문에 모든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마치 검토를 봐줬다가 포기한 것마냥···
아니, 조금이라도 티그리스에게 관심을 가져준 것마냥···
진실 속에 추악한 진실을 숨기고 말았다.
네이션 학과장을 비롯한 다른 교관들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으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네.”
부끄럽다.
티그리스보다 못하다는 사실이.
자신이 티그리스의 심득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천재라고만 생각했었지 이 정도 격차가 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베드
리안의 검술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베드리안은 티그리스를 다시 흘금 봤다. 티그리스는 다 꿰뚫어 보는 듯한 눈
빛으로 베드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베드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네가 잘난 것은 인정하마. 하지만···!’
그나마 남은 자존심에서 발아한 작은 질투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 강의를 과연 누가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교관들은 모두 베드리안의 말을 인정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내용임은 확실하지만 이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지 잘 모
르겠습니다. 교관에겐 문제가 없겠지만 학생들이 이 내용을 과연 이해를 할
수 있을지···.”
베드리안은 검의 길을 20년간 걸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데,
검을 많으면 10년 적으면 3년 배운 학생들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회의 내내 묵묵히 있던 티그리스가 입을 열었다.
“내일 있을 모의 강의 때 보여드리겠습니다.”
티그리스는 30장 분량의 강의 계획서를 들었다.
“글로 읽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습니다. 1주차와 2주차
강의를 준비해서 일정 수준의 학생들이라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습
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학생들이라면 어느 정도 수준을 말하는 거지?”
“10대에 고리를 하나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티그리스의 말에 교관들은 침음을 삼켰다.
티그리스의 말은 제국 대학 검술 학과에 모든 학생들은 이 수준 높은 교육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국 대학 검술 학과 입학 기본 조건이 고리 1개 이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
이었다.
“정말로 가능한가?”
“내일 증명하겠습니다.”
티그리스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것이 제일 효과적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24. 증명(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