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 영웅
티그리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질문을 이어 나갔다.
“지구? 지구가 어디지?”
“지구를 모른다고? 그러면 어떻게 상태창이랑 시스템을 아는데? 그리고 내 이
름이 김유신이란 것도 어떻게 알았고?”
라칸은 겉보기에도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티그리스는 라칸이 당황할 거
란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설명해주지.”
라칸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좀 전의 의기양양한 표정은 아예 싹 사라지고 식
은땀을 흘렸다.
티그리스는 다른 부가 설명은 다 제치고 짧고 담백하게 설명했다.
“난 10년을 거슬러 왔다.”
“···거슬러 왔다는 것이 그러니까 과거로 회귀했다는 말이야?”
“맞다. 네가 내게 회중시계를 건넸고 그것을 받아들이자마자 10년 전으로 돌
아왔다. 그리고 10년 후의 네가 나를 되돌리면서 네게 김유신과 상태창 그리
고 시스템을 물으면 모든 것을 답해줄 것이라 얘기했다.”
라칸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그건 지구에만 있는 거니까···. 아무튼 넌 회귀자라 이거냐?”
“그 표현이 정확하겠군. 나는 회귀자다.”
“잠시만 그러면··· 포인트 상점!”
라칸은 포인트 상점을 이마를 탁! 쳤다.
<회귀의 회중시계>
남은 개수: 0EA
가격: 1,000,000 포인트
“···미친. 그럼 이게 재고가 없었던 이유가···.”
이상하게도 포인트 상점에 회귀의 회중시계에 재고가 없었다.
지금까진 못 먹는 떡이니 쳐다도 보지 말자며 신경을 껐지만,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쿵!
라칸은 이마를 책상에 박았다.
“미친! 그걸 왜 내가 사용 안 하고 왜 쟤한테 주는데?!”
라칸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회귀까지 했다면 엄청나게 강해
졌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미래의 정보를 토대로 엄청난 부를 쌓
거나.
한 마디로 더욱 주인공다워진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고구마가 있다니···.”
“이제 네가 설명할 차례다. 시스템과 상태창 그리고 김유신에 대해 설명해라.”
라칸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혹시 게임 알아?”
“게임? 체스를 이야기하는 건가?”
“맞아 그런 거! 그러니까 컴퓨터로 하는··· 아니지 이렇게 설명하면 안 되는
데···. 여긴 소설로 설명해야 하나···?”
라칸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계속 설명했다.
티그리스가 배경지식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라칸의 말솜씨가 정말 형편이 없
었기 때문이었다.
티그리스는 라칸이 말한 것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상태창은 근력, 민첩성, 마력량, 보유한 기술 등을 객관적으로 수
치화ㆍ명료화시킨 것을 말하는 건가?”
“···어. 음. 그렇지! 맞아.”
“시스템은 마치 정령처럼 네게 도움을 주는 인공 생명체와 같고, 포인트를 얻
을 수 있는 의뢰를 주는 것을 비롯한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 이해
하면 되겠고.”
“그것도 맞아.”
“그리고 너는 지구라는 행성 안에 있는 한국이란 나라의 사람이었다는 말이군.”
“오···. 이해가 굉장히 빠르네.”
“그리고 이 시스템과 빙의자, 상태창은 한국에서 유행하는 소설 클리셰 중 하
나라는 것이고.”
“클리셰···. 뭐 그런 거라고 보면 되겠지. 작품 설정이니까.”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네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는지 대충 이해했다.”
“···정말? 포인트랑 상점 개념을 이해했다고? 내가 생각해도 좀 엉망으로 알
려준 것 같은데?”
“넌 시스템이라는 인공 생명체에게 의뢰를 받고 그 대가로 포인트를 받는다.
그리고 그 포인트로 각종 기술을 익히거나 포션이나 영약 같은 것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럼 네가 어떻게 그리 빨리 성장할 수 있었는지 답이 나온 게 아닌
가?”
“맞긴 한데···. 너 진짜 천재라고 하더니만 진짜 천재긴 한가 보구나.”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 바람이라는 현상으로 보이지 않는 공기의 유
무를 아는 것처럼, 네가 기이하도록 빠르게 성장하는 걸 봤으니 그저 믿는 것
뿐이다.”
라칸은 티그리스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진 못했지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음. 뭐 그런 건가?”
“그렇다면 네가 최근에 이상 행각을 보이는 것도 포인트를 얻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
“···이상 행각이라고 할 것까지 있나? 아무튼, 네게 대련을 신청했던 것도 포
인트를 얻으려고 했던 거야.”
“그럼 왜 포인트를 얻어서 검술을 배운 거지?”
라칸은 씩 웃으며 말했다.
“남자는 당연히 기사니까!”
티그리스는 말없이 라칸을 쳐다봤다.
장난기 넘치는 미소와 의기양양한 태도 그리고 너무나도 가벼운 생각까지.
너무나도 어린아이 같았다.
티그리스는 너무나도 생각하기도 싫은 의심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 가지 물어보겠다. 네가 빙의할 당시 지구에서의 나이가 몇 살이었지?”
라칸은 살짝 켕기는 게 있는지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게 뭐가 중요한데?”
티그리스는 매서운 눈빛으로 라칸을 노려보았다.
“라칸, 아니 김유신. 넌 나이가 몇 살이었지?”
“···26살.”
쾅-!
티그리스는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시발 깜짝이야!”
“내가 거짓말을 눈치 못 챌 것 같나? 난 네 심장 박동수와 동공의 움직임, 표
정으로 거짓말을 모두 판독할 수 있다. 바른대로 말해라.”
“···내 나이가 뭐가 중요한데! 설명해 봐!”
“네가 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구니 당연히 의심하는 것이다.”
“내가 철이 없다고?”
“그렇다면 네 재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사를 지망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내 재능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 일단 내가 하고 싶은 걸 질러보는 수밖에
없지.”
티그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기사 지망생으로 살아보니 어떤 것 같나? 네게 재능이
있어 보이나?”
라칸은 팔짱을 끼며 눈썹을 찌푸렸다.
“왜? 내가 기사에 재능이 없어 보여?”
“동기들의 검술 실력을 보고도 모르겠나? 아이린만 보더라도 네가 얼마나 부
족한지 알 텐데?”
“그건 아이린이 나보다 오랫동안 검을 휘둘러서 그런 거지. 난 이제 검을 쥔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어. 그런데 봐봐. 난 고리가 벌써 1개야.”
“고리의 개수가 강함의 절대적인 척도라고 생각하나? 게다가 그 고리는 포인
트를 이용해서 구매한 것이지 않나? 피나는 훈련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포인트를 얻다 보면 고리를 7개, 8개는 금방 달겠지. 그러면
누가 나를 막겠어?”
티그리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든 것을 포인트로 해결하려는 편의주의적인
사고방식에 구역질이 났다.
“넌 10년이 지나도 고리를 7개 이상 달지 못했다.”
“···뭐? 그게 말이 돼? 포인트로 해결 못 하는 게 어디에 있어.”
“그건 내가 알 수 없다. 그러나 너는 고리 7개를 달지 못하자 노선을 틀어 마
법을 적극적으로 배웠다. 그것도 6서클에 달했지만 결국 7서클을 달지 못했다.”
라칸은 충격을 먹었는지, 동공이 커지고 심박수가 증가했다.
“거···거짓말. 그럴 리가···. 포인트로 해결 못 하는 게 어디에 있어.”
“지금 설마 네가 읽던 소설 속 주인공이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지!”
그러나 라칸의 수축하는 동공과 심박수 그리고 표정과 불규칙한 오러 파동은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라칸은 지금 거짓말을 했다.
“라칸. 내가 왜 회귀했을 것 같나?”
“어···.”
라칸은 사실 티그리스가 회귀했다고 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저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몰라.”
“아니. 너는 분명히 안다. 네 입으로 말해라.”
라칸은 우물쭈물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세상이 멸망하나···?”
“그래. 네 예상대로 이 세상은 멸망한다. 네가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이 다
죽는다. 시체가 땅을 가리고 강이 피로 물들어 핏빛으로 변한다는 말이다.”
라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묻겠다. 넌 10년이 지나도 소드 마스터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기
사가 될 건가?”
“···아니.”
“그러면 마법사가 될 건가? 넌 마법도 동시에 연마했지만, 대마법사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마법사를 할 건가?”
“···잘 모르겠어.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라칸은 혼란스러웠다. 라칸은 지금까지 무엇이든 도전하면 되는 주인공의 삶
을 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티그리스의 말을 들어보니 그 무엇하나 끝을 보지 못한 어정쩡한 놈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이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도 아니고 곧 멸망하는 세계관이었다.
지금까지 해왔듯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 없었다.
라칸은 마치 대학교 지원서를 앞에 둔 고3 수험생처럼 머리가 복잡했다.
“티그리스 네가 말해줄 수 없어? 내가 무엇을 하면 될지? 넌 미래에서 왔으니
까 내가 뭘 하면 될지 알 거 아니야.”
티그리스의 눈썹이 비틀렸다.
“지금 네 미래를 내가 결정해달라는 건가?”
“이 세상이 멸망한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아···?”
라칸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나침반을 잃어버린 배처럼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라칸.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겠다. 넌 몇 살이지?”
라칸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여기 나이로 치면 15···아니지 16살.”
“역시 그랬군.”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조금 충격적이었다.
티그리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라칸을 봤다.
라칸은 마치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티그리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조언하기 앞서서 넌 학생이고 난 교관이다. 그리고 나이도 더 많지. 무슨 말
인지 알겠나?”
“그래도 우린 한때 친구였는데···.”
“회귀 전에도 우린 친구가 아니었다.”
“···말조심하겠습니다.”
그래도 말귀를 알아들을 줄 알아서 다행이었다.
“우선 너는 마검사였다. 그것도 전장에서 굉장히 쓸모 있는 마검사였다. 그러
나 그건 네가 검을 잘 다뤄서가 아니라, 복잡한 전장 속에서도 정교하고 신속
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제가 마법에 재능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난 네가 대마법사가 될 수 없다고 말했지, 네가 마법에 재능이 없다곤 하지
않았다.”
라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그럼 전 설마 마법엔 재능이 있는 건가요?”
“1서클의 마법이라고 하더라도 적재적소에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면 그건 뛰
어난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검을 휘두르면서 캐스팅을 할 수 있을
정도면 굉장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럼 지금 당장 검은 그만두고 마법을 배워야겠네요?!”
“하지만 마법만으론 부족하다. 넌 결국 대마법사가 되지 못했으니까. 아마 이
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6서클의 마도사는 유용한 자원이긴 하지만 넌 거
기에서 만족해선 안 되겠지.”
상태창과 시스템이라는 사기적인 성장 동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6서클에 그
친다면 직무유기 수준이었다.
“···그럼 뭘 더 배우는 게 좋죠?”
“그건 네가 앞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거기까지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겠네요. 아, 그러면 일단 제국 대학은 그만둬야 하나? 검술에 더
이상 시간을 빼앗길 순 없을 테니까요.”
“성급하다. 제국 대학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나? 황국 내 모
든 아카데미 중에서 최정점에 있는 곳이다. 당연히 마법도 그렇지.”
“···하지만 전 검술학과잖아요. 마법은 전공자만 배울 수 있는 걸로 알고 있
는데요···?”
“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알려줘야 하는군. 네가 어떻게 마검사가 되었다고
생각하나? 넌 복수전공을 했다.”
“아! 그 방법이 있었구나! 어?!”
<신규 퀘스트!>
검술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당신!
마법을 배우기로 결심하셨군요!
마법학부에 속한 그 어떤 학과도 상관이 없으니 복수전공 또는 전과를 해보세요!
보상: 50,000포인트
제한 시간: 1년 3개월.
갑자기 뜬 메시지에 라칸은 눈을 껌벅였다.
“갑자기 퀘스트가 떴어요. 마법학을 복수 전공하거나 전과하라는데요? 무려 5
만 포인트예요!”
“5만 포인트면 많은 편인가?”
“엄청 많은 거죠. 5만 포인트면 오러 고리를 하나 더 추가하고도 남는 포인트
에요.”
오러 고리를 1년 만에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이라면 어마어마한
보상임은 틀림이 없었다.
“넌 전과를 목표로 해라.”
“···그 정도로 제가 검술에 재능이 없나요?”
“차라리 네가 다룰 수 있는 마법 계열을 하나 더 추가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검은 정말로 너와 맞지 않으니까.”
티그리스는 가끔 상상을 하곤 했다.
만약 라칸이 검을 버리고 마법에 더 치중했다면 어땠을까? 원소 계열의 마법
만이 아니라 염력이나 파괴, 조화 등의 계열을 두루 익혔다면···
어쩌면 6서클의 한계를 뛰어넘어 7서클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 라칸과 티그리스는 사이가 너무 좋지 못했기
때문에 조언을 하지도 않았고, 조언했더라도 라칸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팩트 폭력을 당하니 조금 아프긴 하네요. 전과 기준이 뭔지 알 수 있을까
요?”
“1년 안에 최소 36학점을 듣고 평균 3.8학점을 맞아야 한다. 그리고 전공 시
험도 치러야 하지.”
“3.8학점이면··· 거의 다 A를 맞아야 하는 거네요? 그런데 어이가 없는 게 마
법을 배우려면 검술을 잘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이거 전과 기준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애초에 아예 무투학부에서 마법학부로 넘어간다는 것 자체가 전례가 없는 일
이다. 보통 전과라고 하면 한 학부 내에서 이뤄지는 게 보통이다. 검술에서
창술이나 창술에서 권술.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음···. 그렇군요”
라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지.”
“뭘 하러 가는 거지?”
“포인트 얻으러 가요.”
“···포인트? 검술 훈련이 아니라?”
“검술 훈련도 해야죠. 하지만 제가 검술 수련에 시간을 투자해봤자 1년 안에
얼마나 늘겠어요. 일단 쌓아둔 퀘스트를 왕창 끝내서 검술이랑 능력치에 포인
트 투자하는 게 맞죠.”
너무나도 맞는 말에 티그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라칸 수준으론 검을 수련해봤자 의미가 없다. 차라리 그 기이한 힘에 의
지하는 편이 빨리 성장할 수 있을 터였다.
회귀 전의 라칸도 똑같은 방식으로 성장해 학점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의뢰가 남아 있지?”
“음···. 가만있어 봐···. 레미올라 연무장을 팬티차림으로 한 바퀴 돌면 300
포인트고 지나가는 이성에게 고백하면 400포인트고···. 아, 맞다 오늘 일일
퀘스트도 안 했네? 그것도 해야겠다.”
티그리스는 목뒤로 벌레가 기어간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설마 그걸 할 생각은 아니겠지?”
라칸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 해야죠.”
“넌 수치심이 없나? 어떻게 연무장을 팬티차림으로···.”
“나체로도 돌 건데요? 그건 무려 1,000포인트에요.”
“설마 지금 돌 거냐?”
“그건 당연히 아니죠. 그건 새벽에 몰래 돌아야죠. 걸리면 다 뛰지도 못하고
경비들한테 잡혀갈지 모른다고요.”
라칸은 진심으로 할 생각이었다. 티그리스라면 1,000포인트가 아니라 100,000
포인트를 줘도 하지 않을 일을 너무나도 당당하게 했다.
“그리고 퀘스트를 묵혀둘 수 있는 건 10개가 한계라서 얼른 해치워야 해요.
안 그러면 신규 퀘스트가 안 뜬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럼 세상이 멸망하게 놔둬요? 한시가 급한 상황에 느긋하게 있을 순 없잖아
요.”
티그리스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만약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나체로 연무장을 돌아야 한다면 할 것인가?
티그리스는 감히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라칸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지금 100포인트 퀘스트 하러 가볼게요. 아, 혹시 망을 봐줄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저 여자 화장실에서 오줌싸야 하거든요. 그건 100포인트예요.”
티그리스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복잡한 심정에 말을 잃었다.
* * *
라칸은 지나가는 이성에게 고백도 했다가 뺨을 맞기도 했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크게 고함도 쳤다.
티그리스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수치스러웠지만, 라칸은 꿋꿋하게 해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나체로 연무장을 달리는 것인데 하지 못했다. 아직 저
녁 9시라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라칸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팬티차림으로 연무장을 돌았다는 것이
었다.
그땐 진심으로 티그리스는 라칸이 다른 의미로 존경스럽다고 생각했다.
라칸은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오늘 하지 못한 일일 퀘스트란 것을 깨고 있
었다.
“후! 후!”
라칸은 옷을 입고 레미올라 연무장을 돌았다.
하루에 10km를 달리고 팔굽혀 펴기를 100개씩 하는 루틴이라고 하는데, 저것
을 하면 50포인트를 준다고 했다.
티그리스는 말없이 라칸의 행동을 지켜봤다.
‘진심으로 하는 것은 확실한데···.’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라서 이성에게 고백할 때는 한 15분간 망설이다
가 고백했다.
도대체 시스템이란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왜 라칸에게 저따위 퀘스트를 건네
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라칸이 팔굽혀 펴기를 다하고 일어났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더니 허공을
봤다. 이윽고 손을 불끈 쥐며 시원하게 웃었다.
“아자!”
50포인트를 번 모양이다.
티그리스는 라칸에게 물을 건넸다.
“마셔라.”
“아. 고맙습니다.”
라칸은 시원하게 생수를 마시고 얼굴에도 뿌렸다.
주변엔 사람이 없었다. 라칸이 팬티차림으로 돌기 시작할 때, 모두 경악하며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넌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뭐가요?”
“네가 수치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까지 포인트를 얻으려고 하는 것
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부끄러운 것도 참으면 되던데요? 하하하하!”
너무 호탕하게 웃는 탓에 티그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뭐···. 그런 것도 있고 사실 다른 이유도 있어요. 전 정말로 강해지고 싶거
든요.”
라칸은 물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제가 지구에 있을 때는 진짜 별거 아닌 녀석이었거든요? 마치 세상 어디에나
있는 흔한 학생이었어요. 전 그게 싫었어요.”
라칸의 목소리엔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그래서 특별해져 보려고 했는데, 좀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구
석에 처박혀서 소설만 봤었죠. 그런데 트럭에 치여 죽어갈 때 후회가 되더라
고요.”
좀 더 도전해 볼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대볼걸.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고백해 볼걸.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일단 부딪히고 볼걸.
“이렇게 새로운 기회를 얻었는데 다시 후회하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전에 말
씀해주셨다시피 세상이 곧 멸망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만약 제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서 강해지기를 포기한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손가락 빠는 일밖에 없을 거예요. 전 또다시 그런 엑스트라 같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요.”
라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신체 반응을 읽지 않아도 알았다. 티그리스의
기억 속 라칸이 그러했으니까.
“아, 그리고 좀 전에 저보고 소설 속 주인공으로 착각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
셨죠? 그땐 좀 부끄러워서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다시 답할게요.”
라칸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전 소설 속 주인공은 아니지만, 전 소설 속 주인공처럼 되고 싶어요.”
라칸의 동공과 표정 그리고 심장박동수가 말하고 있었다.
라칸은 진심이었다.
라칸의 말은 마치 소년 만화 속 주인공의 대사처럼 치기 어리지만, 어른들의
가슴을 간질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라칸은 고개를 홱홱 돌려보더니 말했다.
“어? 지금 사람이 없네요? 이때 후딱 달려놔야지!”
라칸은 옷을 주섬주섬 벗기 시작했고, 티그리스는 도저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미래의 영웅은 나체로 연무장을 돌았다.
29. 수사(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