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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31화 (31/251)

#031화 – 수사(3)

라칸은 레비올라 찻집으로 향했다.

찻집에는 티그리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체크했나?”

“예. 여기요.”

티그리스는 꽃병을 돌려 아티팩트를 작동시킨 후에 맨홀 뚜껑 번호와 하수도

지도를 대조해봤다.

티그리스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역시 27, 29, 35번 대하수도에서만 키메라가 나왔군.”

“그럼 이제 문제는 해결된 거죠? 이거 들고 경찰에게 신고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문제가 쉬운 게 아니다.”

베이튼의 말에 따르면 최소 2개 기관의 협조 없이 이런 거대한 실험실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우선 수도국.

수도국은 대하수도를 2년에 한 번씩 점검하게 되어 있다. 그들은 수도국 공무

원들이 27, 29, 35번 대하수도는 접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손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국토부.

대하수도의 건설 허가는 모두 국토부의 허가가 있어야 하고, 건설을 할 때도

감독관이 반드시 1인 이상 참석하게 되어 있다. 필시 키메라 실험실이 있는

부근에서 하수도 공사를 할 때, 뇌물로 감독관의 눈을 가렸을 것이다.

그 외에도 이 상하수도와 관련된 행정 기관과 각종 기업이 마치 거미줄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키메라 실험실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 말은 키메라 실험실의 눈과 귀가 황도 전역에 퍼져있다는 말과 똑같았다.

“이 정보를 섣불리 경찰이나 수도국에 알리는 순간 3개월 뒤에 일어날 황도

대학살 사건을 앞당겨 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하죠?”

“피아 식별이 어려울 땐 확실한 아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맞다.”

“확실한 아군이요?”

그때, 레비올라 찻집에 문이 열리고 로브를 쓴 여인과 건장한 사내 하나가 들

어왔다.

티그리스는 지도를 접고 꽃병을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인식 저해 마법이 풀

리자 여인과 사내는 티그리스를 향해 곧바로 다가왔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예를 표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여인은 꽃병을 돌려 인식 저해 마법과 사운드 블록 마법을 걸었다.

여인은 로브를 벗었다.

로브를 벗자마자 핑크골드빛 머리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라칸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신이 고귀함과 고아함이란 단어로 인간을 만

든다면 딱 이렇게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인로버 황녀님. 이쪽은 라칸입니다. 이번 수사에 도움을 준 제국 대학 학

생입니다.”

“반가워요. 라칸.”

라칸의 입에선 멍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그··· 큼! 어···. 반갑습니다. 라···라칸입니다. 황녀님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황녀는 덜덜 떠는 라칸이 귀여운지 피식 웃었다.

“원래 이런 반응이 정상인데 말이죠. 티그리스.”

“······?”

“아녜요. 됐어요. 우리가 이런 잡담이나 나누자고 모인 건 아니니까요.”

레인로버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연쇄 실종 사건과 하수도의 상관관계에 대해선 베이튼에게 대략 들었어

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안이라 정신이 조금 어질어질하네요.”

설마 사람이 하수도를 통해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을 못 했다.

“이번 연쇄 실종 사건의 범인이 하수도로 이동한 게 확실하나요?”

“예. 그렇습니다.”

티그리스는 하수도 지도를 펼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27번, 29번, 35번 대하수도와 연결된 하수도로 범인이 이동

했습니다. 경찰들의 수사 기록을 대조해본 결과 실종 예상지점 인근에는 반드

시 하수도와 연결된 맨홀이 존재했습니다.”

레인로버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도를 비교해보았다. 정말로 티그리스의 말대로

실종 예상지점과 인근에는 맨홀이 존재했다.

“우연일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또 다른 증거도 있습니다. 모든 맨홀 뚜껑은 시민들이 훔쳐 가지 못하도록

무겁게 설계되어 있고, 거기에 특별히 제작된 고정 마법이 걸려있습니다. 그

런데 확인해본 결과 실종 사건이 발생한 맨홀 뚜껑들은 모두 그 고정 마법이

강제로 풀린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티그리스는 지도에서 27-113번 맨홀을 가리켰다.

“가장 가까운 맨홀만 가보시기만 해도 마법이 풀려있다는 걸 아실 수 있을 겁

니다.”

“수도국 공무원들이 점검했을 가능성은요?”

“만약 수도국 공무원들이 점검했다면 고정 마법을 다시 걸어두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레인로버는 다시 한번 지도와 수사기록을 대조해 확인했다.

솔직히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지만 티그리스에게 인퀴지터의 특별 수사관의

직위를 내린 것도,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보자는 마음으로 내린 것이었다.

그 누구도 티그리스가 이번 사건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레인로버는 옆에 앉아 있던 사내에게 말했다.

“베르강은 어떻게 생각해요?”

라칸은 지금 자신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블랙 마이스터 베르강 폰 아인볼프

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베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 증거일 뿐이라 확실한 건 아니지만, 하수도를 조사하면 물증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27번, 29번, 35번 하수도만 이용한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그렇군요. 혹시 그 이유도 아시나요?”

티그리스는 지도에 임의로 그어진 선을 가리켰다. 과거 공사가 중단된 하수도

였다.

“지도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이렇게 27, 29, 35번 대하수도를 가로지르는

버려진 하수도가 하나 있습니다. 해당 공사를 진행하던 케일 건설이 도산하는

바람에 중단되었고 하수도 지도에서도 사라졌습니다.”

“···만약 이곳이 범인의 은신처로 활용된다면 27, 29, 35번 하수도를 모두 다

닐 수 있군요.”

“예. 그렇습니다. 아마 실종된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정보는 확실한 건가요?”

“과거 국토부 공사 자료를 확인해보시면 더 정확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을 겁

니다.”

“허···.”

레인로버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라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퀘스트 달성!>

키메라를 연구하고 있는 비밀 실험실의 위치를 찾아내 알리기.

20,000포인트 획득!

<현재 남은 포인트: 22,450포인트>

“엉?”

라칸은 갑자기 퀘스트가 해결되었다는 메시지에 당황했다.

“왜 그러죠?”

“아···아닙니다.”

라칸은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여기에 키메라 실험실이 있는 게 100%다!’

최고 보상액인 50,000포인트를 얻지 못했지만, 라칸이 한 일은 그냥 맨홀 뚜

껑에 적힌 번호만 적어온 것이기에 20,000포인트만 얻어도 감지 덕지였다.

<연계 퀘스트!>

키메라 실험실의 위치를 알아내셨군요!

그럼 이제 키메라 실험을 도와주는 악독한 무리들을 찾아내 알리세요!

기여도에 따라 얻을 수 있는 포인트가 증가할 것입니다!

보상: 0포인트~최대 50,000포인트.

거기에 연계 퀘스트까지 떴다. 라칸은 행복사하기 직전이었다.

레인로버는 라칸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진 것에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라칸

의 소문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지라 그러려니 넘겼다.

티그리스는 라칸의 표정이 왜 갑자기 밝아졌는지 대충 감을 잡았다.

‘퀘스트를 깬 모양이군.’

황국에 영향력이 있는 황녀에게 알린 것만으로도 퀘스트를 깬 모양이었다.

‘···잠깐.’

기묘한 생각이 티그리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티그리스는 회귀했기 때문에 키메라 실험실이 지하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라칸은 달랐다. 라칸은 처음부터 하수도를 의심하고 있었다.

경찰도, 인퀴지터도, 심지어 황녀 전하도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은 티그리스가 회귀하지 않았다면 황도 지하도에 비밀 실험실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오직 라칸 뿐이라는 말이었다.

‘설마 황도 대학살 사건이···.’

황도 대학살 사건은 정말 뜬금없이 터졌다. 황도에서 축제가 열리는 것도 아

니었고 유명 인사가 방문하기로 예정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런 이유 없

이 대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키메라들과 실험실 연구원들이 갑자기 미치지 않고서야 안정적으로 신체를 공

급받을 수 있는 실험실을 버릴 이유가 없었다.

그 말은 실험실을 버릴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라칸은 눈을 껌벅이며 티그리스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다.”

라칸에게 괜한 말을 해서 머리를 어지럽게 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제가 생각해봐도 범인이 이 하수도를

통해 이동하고 이곳에 납치한 사람들을 감금해놨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군

요. 혹시 티그리스 교관님은 이 범인의 정체를 혹시 알고 계신가요?”

“아뇨. 모릅니다.”

지금의 정황 증거만으로는 키메라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의심이 가는 것은 있습니다.”

다만 수사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도움을 줄 수는 있었다.

“지금까지 납치된 인물들은 모두 귀족과 기사 그리고 용병들이었습니다. 그들

의 공통점은 모두 오러 고리를 갖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귀족이나 기사라는 특정 계층을 노린 것이 아니라 오러 고리를

가진 사람이 타겟이었다는 말인가요?”

황녀를 포함해 인퀴지터와 경찰들도 지금까진 공화주의 사상에 물든 갱단이

범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황도 지하에 키메라 실험실이 존재

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티그리스는 이들의 고정관념을 깨줄 필요가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전 이 사건이 테러가 아니라 오러 유저의 신체를 노리는 범

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신체를 노린다는 말은 설마 지하에 흑마법사의 실험실이라도 있다는 말인가요?”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납치를 했다는 점, 그리고 실종된 사람 중에 시체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던 점으로 보아 황도 아래에 인체 실험이 일어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키메라 실험이 대표적이죠.”

황제가 사는 황도 지하에 거대한 키메라 연구시설이 있다는 말에 황녀는 물론

이고 베르강은 충격을 받았는지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실험하려면 실험체도 필요하지만, 시약이나 각종 실험

도구들도 필요하잖아요.”

“하수구로 오러 유저를 납치하기까지 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공수하는 건 더

쉬운 일일 겁니다. 외부 협력자와 말만 맞추면 될 일이니까요.”

“···세상에.”

황녀는 수없이 널려 있는 맨홀들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만약 키메라 실험실이 확실하다면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 해야 해요.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맨홀 뚜껑으로 키메라들이 튀어나와 황도를 난장판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그 사이에 연구원들은 텔레포트 스크롤이나 다른 도주 경로로 도

망을 가겠죠.”

그렇다고 시가지를 봉쇄하고 대대적인 작전을 펼치는 순간 실험실에서 바로

눈치챌 가능성이 높았다.

“이건 저희끼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군요. 세밀한 작전 계획이 필요해

보여요.”

티그리스도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없었다. 티그리스도 생각해봤을

때, 마땅히 떠오르는 작전은 없었다.

대신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와줄 사람은 알고 있었다.

“인퀴지터의 히드라에게도 이 정보를 알려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금지된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들을 색출한 뒤 척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탄생

한 부대 인퀴지터.

인퀴지터의 수장이라면 뾰족한 수가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 불법 실험실 소탕

작전을 많이 실행해봤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조언을 받아들이죠.”

레인로버는 라칸을 흘금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죠?”

“레인로버 황녀님께 직접 찾아가 연락을 드렸던 베이튼과 저 그리고 라칸 이

셋뿐입니다.”

“베이튼은 믿을만한 사람인가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티그리스는 베이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믿는 것이었다.

만약 베이튼이 키메라 연구소와 같은 패거리였다면, 티그리스에게 공사가 중

단된 하수도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라칸.”

“예! 황녀 전하!”

“제가 당신을 오해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굉장히 이상하고 가벼운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황국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일 줄은 전혀 몰랐어요.”

라칸은 황녀의 칭찬이 좋은지 입이 귀에 걸렸다.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황녀는 후후 웃었다.

라칸은 그녀의 웃음 속에 섞인 의중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미안한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어떤 부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티그리스라면 몰라도 당신은 조금 불안해서요.”

라칸은 고개를 갸웃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듣기론 아무 여자에게나 찝쩍거리고, 팬티 차림으로 연병장을 도는 특이한

사람인 걸로 알고 있거든요?”

“아니···. 아니 그게···.”

라칸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수치심에 얼굴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특이한 성벽을 가진 사람이 입이 가볍다는 연구 결과는 없지만 그래도 제 마

음이 불안해서요.”

‘특이한 성벽’이란 말에 라칸은 충격을 받았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퀘스트를 깨기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 사건이 해결할 때까지 잠시 저희랑 같이 있어 줘야겠어요. 정말

미안해요.”

“황녀님. 전··· 컥!”

베르강은 라칸의 뒷목을 쳤고 라칸은 그대로 기절했다.

티그리스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이미 예상하였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레인로버는 평소엔 다정하지만, 일을 진행할 때는 변수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황녀와 티그리스는 자주 부딪혔었다.

티그리스는 강력한 아군임과 동시에 황녀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였기 때문이

었다.

레인로버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일어났다.

“라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둘게요. 대충 계단에서 굴러서 병원에 입원한 것

으로 하면 되겠죠.”

기사 지망생이 계단에 굴렀다고 입원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되긴 했지만, 차라

리 그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황녀님.”

“네?”

“라칸은 유능한 인재입니다. 라칸이 없었다면 이렇게 일찍 황녀님께 보고드리

지 못했을 겁니다.”

“알아요. 황제 폐하께 라칸의 공도 보고해달라는 말씀이시죠?”

“그것도 맞지만 라칸이 만일 이번 사건 수사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면

도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티그리스는 묘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레인로버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라칸의 행실이 다소 가볍긴 하지만 분명 이번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는 인재

일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상황을 봐서 한번 믿어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 * *

그리고 사흘 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를 찾아왔다.

티그리스는 집무실에 있는 차를 꺼내 레인로버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티그리스 교관.”

“아닙니다. 그나저나 벌써 조사 결과가 나온 겁니까?”

“네. 맞아요. 이번 주말에 인퀴지터가 조사했는데 티그리스 교관 말이 맞았어

요. 키메라 실험에서 주로 사용되는 각종 시약 물질이 하수구에서 발견되었

고, 키메라들이 하수구를 통해 움직인다는 명확한 증거 또한 찾아냈어요.”

티그리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소탕 작전은 세워졌습니까?”

“워낙 탈출 루트가 많고 키메라의 숫자가 정확하게 확인이 되지 않은 터라 작

전 규모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감도 안 오는 상황이에요. 작전 계획은 좀

걸릴 것 같아요.”

“그럼 제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레인로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저 잘했다고 칭찬 좀 해주세요.”

티그리스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네?”

“푸핫! 당신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군요!”

레인로버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동안 이 문제 때문에 골머릴 썩힌 터라 웃음이 필요했

어요.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래서 도울 일은 없습니까?”

“네. 죄송하지만 없어요. 아니, 오히려 도와주시려고 움직이시면 절대로 안

돼요.”

“왜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티그리스 교관이 세간의 주목을 너무 많이 받았거든요. 며칠 전에 그레이 타

운에 나타나 맨홀 뚜껑을 확인하고 다녔었죠? 그 때문에 티그리스 교관이 하

수구를 의심한다는 소문이 이 바닥에 자자해요.”

“···그게 그렇게 소문이 많이 났습니까?”

레인로버는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듯이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당신이 얼마나 유명한지 몰라요? 당신이 예전에 입고 다녔던 모험가 패션 있

잖아요? 그게 지금 황도에 대유행 중이에요. 패션 업계에선 ‘티그리스 패션’

이라고 불리죠.”

“···그 정도입니까?”

“당연하죠. 19살에 4개의 고리를 완성 시킨 불세출의 천재. 거기에 잘 생기고

키도 훤칠하고 집안 좋고 아직 미혼에 약혼까지 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황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입을 뗐다. 장난기가 사라진 진지한 눈빛

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정말 가만히 있어 주는 편이 좋아요. 괜히 황궁에 자주 들

락날락하거나 그레이 타운 쪽으로 이동하는 순간 키메라 실험실 측에서도 민

감하게 반응할지 모르니까요. 이 말을 전해주려고 제가 직접 온 거예요.”

가만히 있어라.

티그리스는 이 주문이 굉장히 익숙했다. 회귀 전 레인로버가 티그리스의 귀가

닳도록 얘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회귀 전 티그리스는 이 말을 최후의 전쟁까지 단 한 번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예. 알겠습니다. 가만히 있겠습니다.”

변한 티그리스는 다르다. 이젠 부동(不動)도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었다.

“여자 말까지 잘 들으니 아주 1등 신랑감이네요. 우리 결혼할까요?”

“법도에 어긋납니다.”

“참 딱딱한 양반이야. 금단의 사랑! 이 얼마나 가슴이 떨리는 단어입니까?”

“연극을 너무 많이 보신 것 같습니다.”

레인로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대사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로맨스 코미디 연극 ‘거지 백작과 부자 시

종’의 명대사였다.

“이 명대사를 알아요?”

“전에 여동생과 본적이 있습니다.”

“이걸 여동생이랑 보다니···. 이번 일 다 해결되고 나면 저랑 같이 보러 가요.”

“똑같은 연극을 말씀이십니까?”

“연극은 처음 볼 때랑 두 번째 볼 때랑 기분이 완전히 다르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약속한 거예요? 꼭 보러 가요.”

레인로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중에 봬요.”

레인로버는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는지 집무실을 나가다가 발을 멈췄다.

“아! 라칸이 생각했던 것보다 유능하더라고요. 왜 한번 믿어보라고 했는지 이

해가 갔어요.”

“라칸이 도움이 된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하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난리를 치길래 현장에 데려갔더니, 키메라 실험실

에 물건을 대는 공장 세 곳을 집어내더라고요.”

‘역시···.’

라칸은 티그리스의 예상대로 이번 수사에 큰 도움을 준 모양이었다.

라칸의 진짜 재능은 ‘수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티그리스의 예상이 맞아떨어

졌다.

레인로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바로 다음 날에 팬티차림으로 궁녀에게 찝쩍댔다가 턱이 부러지긴 했지

만요.”

“······.”

어쩔 수 없는 행동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티그리스도 커버해줄 수 없었다.

32. 맞지 않는 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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