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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49화 (49/251)

#049화 – 복수(3)

아이린의 꿈은 언제나 행복하게 시작했다.

아기 궁둥이같이 보드라운 흑토를 밟으며 파종하는 농부들이 반갑게 인사하고, 마을 아낙네는 아이린에게 산딸기를 찾았다면서 맛 좀 보라고 건네고, 드래곤을 베어낸 벨프 가문의 기사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창천 기사단들이 아이린에게 멋지게 예를 표했다.

그러나 아이린은 웃을 수 없었다.

저 멀리 붉은 대검을 든 혈귀가 아이린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도망쳐!’

아이린은 목소리를 내 외쳤지만,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아이린은 다급하게 농부들과 아낙네 그리고 창천 기사단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가까워지기는커녕 멀어지기만 했다.

아름다운 화폭을 망가뜨리는 붉은 붓이 움직였다.

미소를 머금은 농부의 몸이 조각나 사방에 흩뿌려졌다.

다시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미소를 머금은 아낙네들과 기사들의 얼굴이 사라지며 몸뚱이를 잃은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이린은 털썩 주저앉았다.

붉은 대검을 질질 끌고 오는 혈귀가 아이린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입김에서 끔찍한 피비린내가 났다.

아이린은 숨을 죽이고 웅크렸다.

저 붉은 대검이 제발 내게 다가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붉은 혈귀가 아이린에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은··· 너다.

공포와 절망감이 묵직하게 아이린의 몸을 속박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대로 숨이 막혀 질식할 때까지 괴로워하다가 땀에 푹 젖은 침대에서 일어날 것이다.

‘아니.’

아이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이린의 손엔 어느샌가 흑룡아가 들려있었다.

아이린의 악몽이 변화하고 있었다.

공포에 짓눌린 고개가 들렸다.

아이린은 흑룡아를 지팡이 삼아 절망에 웅크려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흑룡아를 머리 위로 치켜세웠다. 아이린의 눈이 살기로 가득 차올랐다.

‘이번엔 내가 찾아가겠다.’

살기가 가득 담긴 아이린의 대검이 하늘을 가르듯 수직으로 베어 들어갔다.

쩡-!

아이린의 대검과 로이의 검이 부딪혔다.

로이는 침음을 삼켰다.

두 무릎이 순간 꺾일 뻔했지만 겨우 흘려 냈다.

드드드드드!

로이는 뒤로 밀려났다. 로이가 밀려 나간 자리는 곡괭이 두 자루가 지나간 것처럼 긴 흔적을 남겼다.

관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작은 몸에서 저런 힘이 나온다고?

-저걸 막아낸 로이는 어떻고.

‘···이게 용 가르기.’

와이번, 바실리스크와 같은 용족의 단단한 비늘을 깨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대검술.

한 번 검을 맞대어보니 로이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로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이가 알기로 아이린은 이제 검을 잡은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로이는 15년 가까이 검을 휘둘러 왔다. 그런데도 아이린보다 못하다는 게 너무나도 분했다.

그것이 천재와 범인의 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저 천재성도 빈스모크 가문의 검술에 스러지게 될 것이다.

3년 전 벨프 가문이 멸문했을 때처럼.

로이는 자세를 낮추고 검을 머리 위로 치켜세웠다.

반동 검술의 준비 자세였다.

용 가르기 대검술에는 빈스모크 가문의 붉은 사냥개 검술처럼 도중에 검로가 바뀌는 검식이 없다.

루카스는 용 가르기가 놀라운 파괴력과 속도를 얻은 대신 굉장히 단조롭다는 점을 주목했고, 그 힘을 역이용하는 방법을 스프링에서 찾아냈다.

반동 검술의 핵심은 스프링처럼 위나 옆에서 들어오는 대검의 힘을 몸 전체에 골고루 분산시켰다가 단번에 쳐올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고 할지라도 몸 전체에 데미지를 고루 나누면, 검이 꺾이지 않는 한 두 무릎이 먼저 꺾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해 밀어내 큰 빈틈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용 가르기와 같은 대검술에 한정하여 이보다 더 나은 검술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반동 검술에도 단점이 있었다.

반동 검술은 아무나 익힐 수 없는 고난이도 검술이라는 것이었다.

외부자극에 민감한 신체와 세밀한 오러 운용이 중요한 검술이다 보니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배우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그러나 루카스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지 않은 기사라도 이 검술을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는 약물을 레비스로부터 얻었다.

‘찰나의 순간’이라는 약물이었다.

반사신경을 비롯한 전체적인 신체의 민감도를 급격하게 상승시켜주고 고통을 억제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각성제였다.

물론 약물 효과가 끝나면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주기적으로 찰나의 순간을 복용하면 괜찮아져서 오히려 이 약물을 기반으로 쓸모 있는 기사들을 빈스모크 가문에 묶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로이는 그 ‘찰나의 순간’을 치사량에 근접하게 복용했다.

로이가 반동 검술을 아직 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것도 있었고, 확실하게 아이린을 이기기 위해 루카스가 강제로 주입한 것이었다.

‘인정받고 말 테다.’

로이는 루카스의 아들 중에 제일 못난이로 태어난 자신을 증오했다.

이번에 티그리스의 제자이자 벨프 가문의 정통 계승자인 아이린을 불구로 만든다면, 아버지의 관심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린의 검이 로이의 검에 맞닿았다.

‘큭!’

어마어마한 힘의 격류가 로이의 팔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반동 검술의 핵심은 저 무식한 힘의 격류를 흘려 내는 것이 아니라, 한 터럭의 힘의 낭비 없이 새끼발가락 하나까지 골고루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로이는 아이린의 힘을 오러를 이용해 몸 전체에 골고루 분산시키는 데 결국 성공했다.

‘찰나의 순간’을 복용하지 못했다면 실패했을지도 몰랐다.

이제 이 힘을 무릎과 허리의 힘으로 받아쳐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로이는 반동을 주며 위로 쳐올리려 했다.

그러나 로이의 계획은 실천될 수 없었다.

쿵!

갑자기 땅이 크게 상하좌우로 흔들리며 몸의 균형이 완전히 틀어졌다.

‘어···?!’

스프링이 위로 튀어 오르기 직전 지면이 갑작스레 흔들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진동의 근원지는 아이린의 오른발이었다.

아이린은 발을 땅에 댄 채로 ‘땅 울리기’를 펼친 것이었다.

반동 검술의 최대 단점이라고 한다면 힘의 격류를 발바닥까지 내보냈다가 반동으로 올려 쳐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숙련될수록 빠르게 쳐올릴 수 있었지만, 루이는 겨우 2성 기사이기에 0.2~0.3초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린이 해야 할 것은 0.2~0.3초 내로 오러 고리를 하나 빠르게 빼내 기초 오러 운용술인 ‘땅 울리기’를 펼치면 되는 것이었다.

말이야 쉽지, 아이린 정도의 재능이 아니라면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테크닉이었다.

지면이 크게 흔들리며 로이의 몸에 축적된 힘이 나갈 곳을 찾아 나섰다.

본래라면 어느 곳이라도 일단 튕겨 보내면 되었지만, 로이는 너무나 당황해 이 축적된 힘을 사용하지 못했다.

퍽-!

결국 로이의 양 허벅지 뒤쪽이 터졌다.

마치 고무공이 과한 압력에 옆구리가 터져버리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두 다리 인대를 포함해 마력 회로가 뒤틀리고 망가지면서 두 다리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그 모습을 본 관중들은 모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놀란 것은 아이린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쉽게?’

사실 아이린은 뒤에 올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땅 울리기를 사용하고 나면 아이린도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아이린과 티그리스는 로이의 수준을 너무 높게 평가했다.

티그리스는 회귀 전 4성 기사였던 로이의 실력을 떠올리고 있었고, 아이린은 자신의 기습을 피한 로이의 반응속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로이는 생사가 오가는 전투를 치러본 경험이 없는 초짜 기사일 뿐이었다.

가뜩이나 고난이도 검술을 사용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돌발 변수가 갑자기 치고 들어오니 사고(思考)가 멈춰버린 것이었다.

아이린은 의사가 아니었지만 로이의 양다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앞으로 로이는 평생 두 다리를 쓰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로이는 비명을 하나도 지르지 않았다.

약물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로이는 계속 일어나려고 했지만 두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로이는 반사적으로 루카스를 쳐다봤다.

루카스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로이를 쳐다봤다.

로이의 눈에 절망이 담겼다.

“으아아아아!”

로이는 엎드린 채로 검을 휘둘렀다.

기습적으로 아이린의 발목이라도 자르려고 했지만, 아이린은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가볍게 피했다.

“죽어! 죽어어어!”

로이의 상태는 딱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두 다리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린을 죽이기 위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두 다리에서 흐르는 피가 연병장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 끔찍한 광경에 관객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그만해라. 로이. 패배를 인정해라.”

“넌 죽어야 한다! 네가 죽어야 내가···! 내가 산다! 난! 난···!”

도저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에 아이린은 레인로버를 쳐다봤다.

결투를 진행할 수 없었다.

레인로버가 결투를 중단시키려고 완드를 들어 올리자 루카스가 말했다.

“황녀 전하. 아직 로이는 싸울 수 있습니다.”

레인로버는 루카스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지금 로이의 상태가 아직 싸울 수 있다고 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전하. 로이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루카스는 로이를 보며 말했다.

“그렇지? 로이?”

로이의 입술이 파래졌다.

“대답해라. 로이.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말해라!”

로이는 덜덜 떨었다.

고통 때문이 아닌 루카스의 눈빛이 너무나 무서워 떠는 것이었다.

로이는 루카스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흑토 지대 수천 년의 역사 중 전쟁이 일어난 날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날을 세는 것이 더 빠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흑토 지대는 수도 없이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루카스가 흑토 지대의 패권자가 되면서 지난 2년간 흑토 지대에서 단 한 번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가 혈귀 사태 때문이라는 말이 많았으나, 로이는 왜 그런 것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루카스가 벨프 가문을 철저히 붕괴시키면서 흑토 지대의 귀족들을 공포와 폭력 그리고 피로 통합시켰기 때문이었다.

세간에 지탄받을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흑토 지대에 평화가 찾아왔다.

영주민들은 전쟁으로 아들과 아버지를 잃을 일이 없어졌고, 전투에 사용되던 마법사를 농사에 투입함으로써 지난 2년간 흑토 지대는 전례 없던 풍년을 연속으로 맞이했다.

영주민들은 모두 흑토 지대에 평화를 안겨준 루카스를 찬양했다.

봄철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게 해준 빈스모크 가문을 칭송했다.

황국이 빈스모크 가문을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빈스모크 가문을 지키는 것은 철옹성 같은 성벽도 아니고 흑철로 중무장한 기사들도 아니었다.

바로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루카스에게 향해있기 때문이었다.

흑토 지대는 빈스모크 가문, 아니 루카스 없이 평화는 없었다.

루카스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어서!!!”

로이는 다급하게 말했다.

“전···싸울 수 있습니다! 황녀님. 전 싸울 수 있습니다!”

로이는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이 결투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레인로버는 루카스를 쏘아봤다.

로이에게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로이가 싸울 수 있다고 말하는데 결투를 중단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결투는 무의미했다.

아이린과 로이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이린은 이런 생각이 들면 안 되지만 로이가 안쓰러웠다.

로이는 입술을 강하게 물며 아이린에게 엉금엉금 기어갔다.

로이의 눈빛은 너무나도 처절했다.

아이린은 이런 결투를 원하지 않았다.

명예롭게 로이를 완벽하게 꺾고 승리를 얻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으아아아아!”

로이가 검을 애처롭게 휘둘렀다.

아이린의 흑룡아가 번뜩였다.

로이의 손목이 통째로 부러지며 로이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훙-훙-

로이의 검은 하늘 높이 날다가 루카스의 앞에 꽂혔다.

결투의 승패가 결정 났다.

레인로버는 씁쓸한 표정으로 승자와 패자를 결정지었다.

“승자 아이린 드 벨프.”

승자가 발표되었지만, 환호성은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결투 중에 이렇게 조용하고 찝찝한 승리는 없을 터였다.

승패가 결정되자 루카스는 연병장으로 걸어왔다.

루카스와 아이린이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아이린은 루카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루카스는 아이린의 건방진 눈빛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뿌리를 뽑았다고 생각했건만 벨프 가문의 이름은 자꾸 잡초처럼 루카스를 귀찮게 굴었다.

루카스는 작게 속삭였다.

“그때 너와 네 어미도 죽였어야 했는데.”

아이린은 순간 욕지거리가 나올 뻔했다.

하지만 아이린의 어깨를 잡는 크고 따스한 손길에 입을 다물었다.

“이 결투는 이렇게 끝나선 안 되었소. 빈스모크 백작.”

“세상에 모두가 만족하는 결투는 없소. 하지만 모두가 불행한 결투는 있지.”

루카스의 뼈 있는 말에 레인로버는 루카스를 노려봤다.

레인로버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참았다.

더 말해봤자 입만 더러워질 뿐이었다.

“반동 검술의 파훼법을 알려준 건 자네인가?”

“급조된 검술인 만큼 허술한 점이 많더군.”

지팡이를 잡은 루카스의 손에 핏대가 올라왔다.

루카스는 당장에 눈앞에 있는 두 놈의 목을 쳐버리고 싶었다.

그 무엇보다 제일 죽여버리고 싶은 것은 바로 로이였다.

황녀 앞만 아니었다면 곧바로 로이의 목을 쳤을 것이었다.

황녀는 아이린을 보며 말했다.

“아이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승자의 권리를 집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로이의 몸 상태로 봐선 서는 것은커녕 무릎을 굽히는 것조차 할 수 없어 보였다.

아이린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결국 기절해버린 로이를 흘금 보며 말했다.

“지금 승자의 권리를 갖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겠지요. 상처를 치유하고 나서 승자의 권리를 제대로 받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황녀는 루카스를 보며 말했다.

“빈스모크 백작. 결투 간 로이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의사들을 불러 치료시킨 후 로이를 추궁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루카스는 지팡이 검을 꽉 쥐었다.

“예. 알겠습니다. 황녀 전하.”

찰나의 순간은 복용하고 나면 신체에 흔적이 전혀 남지 않는다.

물론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인퀴지터는 로이의 상태를 보고 찰나의 순간을 주입했다는 것을 눈치채겠지만, 몸에 흔적이 남지 않으니 증거를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설령 로이가 말한다고 하더라도 루카스의 죄를 뒤집어쓸 일회용품들은 많았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가겠습니다. 이틀 뒤 황궁에서 뵙겠습니다.”

루카스는 짧게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티그리스는 아이린을 흘금 봤다.

아이린의 눈은 붉게 충혈되었다.

당장에 루카스를 베어 죽이고 싶었지만, 실력으로나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아이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잘했다. 아이린.”

아이린은 자기도 모르게 티그리스의 몸에 머리를 기댔다.

“···감사해요.”

마치 그 옛날 오라버니에게 기댔던 것처럼.

* * *

그날 밤, 제국 대학의 병실.

창백한 달빛이 병실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로이는 저명한 의사들과 치료술사 덕분에 두 다리를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사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걸을 수만 있지, 뛸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기사의 생명이 끝났다는 말과 똑같았다.

“난··· 끝났구나.”

로이에게 있어서 검은 평생의 동반자였다. 이젠 두 번 다시 검을 휘두를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좌절감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버지에게 버려졌다는 것이었다.

빈스모크 가문엔 로이가 있을 곳이 없었다.

“죽자.”

벨프 가문의 여식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는 모습이 메스컴에 타는 것을 루카스는 절대로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 전에 로이를 어떻게든 죽이려 들 것이었다.

죽음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병실엔 자살할 수 있는 도구가 마땅한 게 없었다. 흔한 날붙이 하나가 없었지만 로이는 테이블 옆 꽃병을 발견했다.

로이는 병실 밖에 대기 중인 간호사가 듣지 못하도록 꽃병을 이불에 돌돌 만 뒤 조심스럽게 부쉈다.

개중 날카로운 파편을 하나 골라 손목에 가져다 댔다.

손목의 동맥은 생각보다 깊게 있다. 단번에 파고 들어가 긋지 않으면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로이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손목을 항해 도자기 조각을 박아넣으려 했다.

드르륵-

그때, 한 사내가 병실 문을 열었다.

티그리스였다.

“넌···.”

티그리스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의 후유증이 확실히 심각하긴 한 모양이군. 6시간도 지나지 않아 자살하려 하다니.”

“···네가 어떻게 찰나의 순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인퀴지터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빈스모크 가문의 많은 기사들이 주기적으로 그 약물을 공급받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설마 자기 아들에게 주입했으리라곤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

로이는 주먹을 부서져라 쥐었다.

날카로운 도자기 파편에 찔려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로이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날 동정하러 온 건가? 아니, 심문하러 온 것이겠군. 하지만 나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난 아버지의 아들 중에서 제일 못난 놈이거든. 그래서 백작님이 내게 맡긴 일이라곤 아이린에게 시비를 거는 일 정도밖에 맡기지 않았지. 나를 털어봤자···”

“말이 많군.”

티그리스는 서류용 가방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냈다.

레니의 무쇠팬이었다.

“일단 정신부터 차리고 시작하지.”

티그리스는 무쇠팬을 들고 천천히 로이에게 다가갔다.

“무슨 소릴··· 으아아악!”

무쇠팬에서 갑자기 제인이 튀어나오자 로이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떨어졌다.

“흐음~ 확실히 영혼에 뭔가 이상한 게 붙어 있네.”

“치료가 가능한가?”

“그냥 떼어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가능할 것 같은데? 해볼게.”

제인은 놀라서 덜덜 떠는 로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파닥-파닥-파닥-

그러자 잘려 나간 검지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진짜 검지는 아니고 영혼으로 만들어진 검지였다.

착-!

제인은 그 검지를 손바닥으로 으깨버렸다.

“음! 해결됐어. 복잡한 술식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냥 달라붙어서 영혼을 괴롭히는 저급한 혼령술이라 해결하는 게 쉽네.”

로이는 자신의 몸을 쳐다봤다.

“지금 이게 무슨···.”

로이는 정신이 맑게 깬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이 불에 덴 듯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로이는 오른손바닥에 박힌 도자기 조각을 떼어냈다.

티그리스는 의자를 갖고 와 앉았다.

“이제 준비가 된 것 같군. 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대로만 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목숨을···?”

“왜 죽고 싶은가?”

로이는 잠시 말없이 생각했다.

좀 전까지 죽고 싶어서 도자기까지 깨부쉈건만, 그 이상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니.”

로이는 죽고 싶지 않았다.

로이는 죽기엔 너무 젊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에게 살해당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티그리스 경. 당신은 나를 지켜줄 수 있소?”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게 있군. 난 너를 지켜줄 의무가 없다.”

“···뭐? 그럼 협상하는 이유가.”

티그리스는 살기를 내뿜었다.

“협상이 아닌 협박이다. 넌 아이린의 결투를 더럽힌 불명예스럽고 추악한 놈이다. 내가 너를 지금 당장 죽여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겠지.”

로이는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살려준다고 한 게···.”

로이는 티그리스가 든 무쇠팬에서 은빛 오러가 피어오르는 것을 봤다.

“난 아이린처럼 자비롭지 못하다. 인내심도 많은 편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뒀으면 좋겠군.”

로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 50. 루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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