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55화 (55/251)

< 55. 서열전(2) >

#055화 – 서열전(2)

“······노예?”

라칸은 반사적으로 아이린의 표정을 훑었다.

[붉어지는 얼굴.]

[수축되는 동공.]

[부들거리는 오른손.]

[위험. 위험. 위험.]

라칸의 생존 본능 스위치가 켜졌다.

라칸은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미안! 아니, 그게······!”

“······제대로 설명해 볼래?”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아이린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바로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라칸이다.

다른 사람에겐 그냥 괴짜나 미친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아이린과 샤를로트 그리고 리니아에겐 굉장히 특별한 녀석이었다.

라칸은 티그리스가 자신들만큼이나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당최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티그리스는 중요한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라칸과 함께 행동했다.

아이린이나 샤를로트 그리고 리니아는 그게 살짝 불만이었다.

우리가 있는데, 왜 하필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놈하고 같이 케일 자작을 찾은 것일까?

우리가 아직 못 미더운 것일까?

라칸의 재능이 뭐가 그리 특별하길래 우리가 아니라 라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일까?

아이린은 그게 알고 싶었다.

라칸은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그러니까 노예가 되겠다고 한 말은 진짜 노예가 되겠다고 한 게 아니라, 그만큼 네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거야. 난 이번 서열전에서 최대한 서포트할 준비도······.”

라칸의 말은 투박하고 정돈되지 않았다.

마치 산골짝이 시골 소년이 도시 아낙네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진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만”

아이린은 라칸의 말을 끊었다. 더 들어봤자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았다.

“왜 나랑 같은 팀이 되고 싶은 건지만 얘기해 줘.”

“어······.”

“혹시 티그리스 교관님이 시킨 거야? 둘이서 잠깐 얘기 나누러 숲으로 들어간 것 같던데?”

아이린은 티그리스와 라칸이 잠깐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

혹시 티그리스가 라칸을 시켜서 자신을 돌봐달라고 부탁한 것이라면 조금 분할 것 같았다.

그만큼 티그리스가 아이린을 못 미덥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아니, 아니, 절대 아니야. 어떻게 하면 너랑 같은 팀이 될 수 있을지 조언을 얻으려고 한 거였어.”

“정말이야?”

“그럼 티그리스 교관님께 물어보면 되잖아. 그리고 티그리스 교관님이 그런 부탁을 할 리도 없잖아.”

아이린은 곧바로 납득했다.

“그렇긴 하지······. 그럼 왜 나랑 같은 팀이 되고 싶은 건데?”

라칸은 구차하게 여러 이유를 붙이는 것보다 담백하게 나가기로 했다.

마치 티그리스처럼.

“그냥 너랑 같은 팀이 되고 싶어. 그것뿐이야.”

라칸의 표정에서 티그리스가 보였다.

“너도 뭘 숨기고 있구나.”

“어? 나 진짜 티그리스 교관님이 보내신 게······.”

“그건 아니란 거 알아. 그런데 너도 뭔가 스승님처럼 숨기고 있는 게 느껴져서.”

“아······ 그······.”

라칸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해.”

아이린은 잠시 생각했다.

아이린에게 같은 팀이 되어달라고 다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티그리스와 친해져 보려고 다가오는 사람들뿐이었다.

아이린은 그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팀원을 아직 구하지 못했다.

아이린이 지금 라칸을 거절해 버린다면 아이린이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들과 같은 팀이 될 수 있었다.

아이린도 솔직히 말하자면 물불을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좋아. 받아줄게.”

“정말? 진짜로?”

“대신 내 눈앞에서 옷 벗으면 죽도록 때려줄 거야.”

라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연하지! 절대로 안 벗을게!”

[신규 퀘스트!]

아이린 보는 앞에서 웃통 벗기.

보상: 500포인트

제한 시간: 5일

라칸의 표정이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굳어졌다.

“왜 그래?”

“아······ 아냐. 그냥······.”

라칸은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이건 수치심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이걸 어떻게······.’

땡- 땡- 땡-

때마침 네이션 학과장이 종을 울렸다.

“전교생, 짐을 챙기고 집합하십시오.”

라칸은 일단 아이린 앞에서 웃통을 벗는 퀘스트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5일이란 시간이 있으니 분명 웃통을 벗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 나 짐 챙겨 와야 하는데······.”

“어차피 조원 보고할 때, 보고해야 하니까 중간에 만나.”

“응! 그럼 나 가볼게.”

라칸은 자기 텐트를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선배. 나와요.”

텐트 뒤에서 샤를로트는 헤헤 웃으며 나타났다.

“알고 있었어?”

“일부러 저 알아채라고 기척 안 숨겼잖아요.”

샤를로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큼! 뭐, 아무튼 왜 받아줬는지 얼추 이해는 하겠는데 괜찮겠어? 쟤 별로 소문이 좋지 않아.”

“야밤에 나한테 옷 벗고 달려들면 목을 꺾어버릴 거예요.”

“목을 꺾는 건 심하지.”

“손을 꺾어야 하나?”

“아니, 거기를 그냥 확 올려 쳐버려. 구슬 두 개를 아예 으깨 버리라고.”

“그게 더 끔찍한 것 같은데.”

“목 꺾는 건 괜찮고?”

아이린은 흑룡아를 들어 어깨에 멨다.

“그것보다 선배는 누구랑 같이하기로 했어요?”

“나? 에프린이랑 같이 하기로 했어.”

“에프린이 누구죠?”

“봉사 활동 동아리 친구. 최근에 너랑만 붙어 다닌다고 울상이었거든.”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가 봉사 활동 동아리를 다녔어요?”

“1학년 때부터 봉사 활동 동아리에 다녔지. 꼭 학기 중에 봉사 활동에 참가할 필요도 없고 여름방학이랑 겨울방학에 한 번씩 봉사 활동을 하면 되거든.”

“봉사 활동은 왜 하는데요?”

“음······.”

아이린의 말에 샤를로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뭔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듯했다.

“뭐, 그런 게 있어. 그건 나중에 얘기해 줄게. 그것보다 이번 서열전에서 이길 자신 있어?”

아이린은 작게 웃었다.

“당연하죠.”

아이린은 최근 미소를 자주 보여줬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토드 황제와 만남을 가졌을 때, 황제는 아이린과 그녀의 어머니 로라에게 흑토 지대에 벨프 가문을 세울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벨프 가문을 복권시키고 봉토를 되돌려 주면,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린의 역할이 중요했다.

아이린은 다른 귀족들이 납득할 만한 공적을 쌓아야만 했다.

아이린은 일단 이 서열전에서 1등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서열전에서 1등을 하게 되면 학교장에게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제국 대학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다.

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르면 각 지역 신문들에 아이린의 이름이 올라오게 된다.

티그리스의 제자라든가 아니면 로이와 결투를 한 벨프 가문의 여식이란 이유로 명성을 얻는 게 아닌, 오직 아이린이 다른 제국 대학 학생들을 꺾고 서열전에서 1등을 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샤를로트는 작년 서열전에서 1등을 했기 때문에 굳이 서열전을 치를 필요는 없었지만, 아이린이 나와달라고 부탁을 해서 나오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린은 샤를로트가 없었기 때문에 서열전에서 1등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그래서 아이린은 샤를로트에게 진심으로 서열전에 임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샤를로트는 아이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니 샤를로트는 진심으로 나올 생각이었다.

아이린에게 필요한 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샤를로트를 꺾는 것이니까.

물론 아이린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문제도 있었다.

“그럼 우리도 가자. 이제 슬슬 시작하겠다.”

“네.”

* * *

아이린과 라칸.

겉보기에도 어울리지 않는 둘이 같은 팀이 되자 시끌시끌했다.

“라칸이 아이린한테 팀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했다던데?”

“노예가 될 테니 제발 같이 서열전을 같이해 달라고 했다면서?”

“노예? 평생 아이린의 노예가 되겠다고 한 거야?”

“평생은 아니지 않을까?”

“······아이린이 벨프 가문을 세우면 기사로 받아달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거겠지.”

“그런데 왜 벨프 가문을······.”

사람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다 들려왔지만 둘 다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에 무덤덤한 편이라 사람들이 떠들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그저 각자 장비를 확인하고 작전 계획을 세울 뿐이었다.

“무기는 뭘 써?”

“이거. 블링크 마법이 걸려 있긴 한데 사용하면 200포인트 삭감한다고 해서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그건 아예 사용하지 말라는 소리 아니야?”

“그래도 필요한 상황이면 써야지. 아, 물론 개인 점수만 까지니까 네가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넌 그 대검만 사용할 거지?”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그럼 넌 주로 어떻게 포인트를 얻으면 좋겠어? 몬스터 사냥? 아니면 참가자들이랑 결투?”

“일단 가리지 않고 하는 게 포인트를 얻는 게 좋긴 하겠지만, 확실히 참가자들을 찾아 싸워서 포인트를 얻는 게 제일 좋겠지. 나도 포인트를 얻을 수 있지만 다른 참가자들의 포인트도 떨어뜨릴 수 있으니까. 문제는 어떻게 녀석들을 찾아내냐는 건데······.”

아이린은 티그리스와 함께 수련의 숲을 정비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수련의 숲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 있었다.

결투를 하는 것 자체는 그리 걱정되지 않지만, 다른 참가자들을 찾는 게 엄청 힘들 것이다.

그리고 녀석들은 아이린을 보자마자 도망갈 게 분명했기 때문에 잡으러 가는 것도 일일 것이다.

라칸은 피식 웃었다.

“그런 거라면 내게 맡겨. 사람을 찾는 것 하나는 내가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네가? 아······.”

그러고 보니 라칸은 그레이 타운에 숨어 있는 케일 자작을 찾아낸 이력이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라칸이 어떻게 케일 자작을 찾아냈는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넌 체력 안배만 해. 내가 나머지 일은 다 해줄게. 말했잖아, 내가 네 전용 서포터가 되어주겠다고.”

“······노예라고 하지 않았어?”

“노예도 괜찮아?”

“서포터로 할게.”

“오케이.”

땡- 땡- 땡-

네이션 학과장이 또 종을 울렸다.

“작전 회의 시간이 끝났으니 모두 버클과 코인을 받아 가도록!”

라칸은 벌떡 일어났다.

“넌 가만히 있어. 내가 가져올게.”

“아냐. 나도······.”

“이런 잡다한 건 나한테 맡겨. 말했잖아. 난 서포터라고. 그럼 다녀온다!”

달려가는 라칸의 뒷모습을 아이린은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 * *

아이린과 라칸 그리고 많은 학생들은 수련의 숲 안으로 진입했다.

현재 학생들끼리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는 학생들의 버클이 모두 푸른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버클이 푸른색일 때는 학생들끼리 공격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만약 푸른색 버클을 달고 있는 학생을 공격하면, 그 학생은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탈락했다.

기습이나 결투는 오직 버클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을 때만 가능했다.

이런 조치를 한 이유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푸른색 버클이 상징하는 것은 총 두 가지였다.

방금 사망 처리를 당했거나 부활한 지 6시간이 지나지 않았거나.

만약 사망 처리를 당한 경우 버클의 이중 배리어 마법 중 하나가 벗겨진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학생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배리어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버클이 푸른색일 땐, 공격을 해선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아이린과 라칸은 6시간 동안 가만히 있을 순 없었기 때문에 몬스터 사냥을 하기로 했다.

아이린은 티그리스에게 배운 대로 몬스터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우선 수련의 숲을 크게 가로지르는 강으로 먼저 향하기로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생각이 비슷한지 전부 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달린다면 먼저 도착할 수 있겠지만······.’

아이린은 라칸을 흘금 봤다.

라칸은 이제 고리가 1개다. 아이린이 진심으로 달린다면 라칸이 아이린을 쫓아올 수 있을 리 없었다.

‘일단 라칸 보폭에 맞춰서······.’

“아이린. 이리 와봐.”

“응?”

라칸이 조심스럽게 아이린을 부르자 아이린은 라칸에게 향했다.

“망키의 흔적을 찾았어.”

“망키를?”

망키들은 나무 위에서 생활하는 중소형 몬스터다.

성체의 크기는 일반 성인 남자만 하고 완력은 일반 성인 남자보다 3배 세다.

털도 울창한 숲에서 발견되기 힘든 검은색인 데다가 상당히 민첩한 탓에 기사들이 사냥하기 굉장히 힘든 몬스터 중 하나였다.

그래서 고블린의 경우에는 한 마리당 1포인트밖에 되지 않았지만 망키의 경우에는 한 마리를 사냥할 때마다 3포인트씩 얻을 수 있었다.

라칸은 나무에 발려 있는 분변과 털을 가리켰다.

“이거 망키의 똥이랑 털이야.”

“그걸 어떻게 알아?”

“기초 몬스터학 시간 때 기억나? 망키는 잡식성이지만 육식은 거의 안 하고 나무의 열매를 주로 따 먹는다고?”

“그랬었지?”

“특히 망키가 좋아하는 열매는 ‘메로 열매’야. 메로 열매의 씨앗은 굉장히 납작하고 붉은색을 띠는 게 특징이지.”

라칸은 장갑을 낀 채로 망키의 분변을 만졌다. 그리고 분변 속에 섞여 있는 붉고 납작한 메로 열매 씨앗을 보여주었다.

아이린은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그걸 관찰했다.

“이게 메로 열매 씨앗이야?”

“어. 맞아. 물론 다른 몬스터일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수련의 숲의 몬스터 생태계를 고려해 봤을 때, 메로 열매를 먹고 나무에 이런 식으로 영역 표시를 하는 몬스터는 망키 하나밖에 없지.”

아이린은 묘한 눈으로 라칸을 쳐다봤다.

“너 이런 걸 어떻게 알아? 몬스터 사냥을 해봤어?”

“그냥 책을 보고 배운 거지 뭐. 나 최근에 도서관에서 책 많이 읽었잖아.”

라칸이 ‘상급 탐색’의 능력을 사용한 덕분에 이 털 섞인 분변이 망키의 영역 표시란 걸 쉽게 알아챈 것은 맞다.

하지만 상급 탐색은 라칸의 지식을 바탕으로 사용이 된다.

라칸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상급 탐색은 굉장히 1차원적인 정보만 제공해 주기 때문에 라칸은 열심히 공부해야만 했다.

라칸은 장갑을 나무에 문지르며 말했다.

“아마 이 근처에 망키가 있을 거야. 따라와 봐.”

아이린은 무의식적으로 라칸의 뒤를 따랐다.

원래 아이린은 티그리스와 함께 몬스터 사냥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 자신이 팀을 주도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라칸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주도권이 넘어간 것 자체가 그렇게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라칸은 계속 망키의 흔적을 쫓았고, 10분 뒤 나무 위에서 쉬고 있는 망키 무리를 발견했다.

“······진짜 있네?”

“혹시 망키 무리를 어떻게 사냥하면 되는지 알아? 난 거기까진 몰라서.”

아이린은 티그리스가 알려준 망키 사냥법을 떠올렸다.

“망키는 굉장히 겁이 많은 몬스터지만 피 냄새를 맡으면 흥분해서 무조건 달려들어. 그걸 노리면 될 거야.”

“그럼······.”

라칸이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장갑을 벗고 가차 없이 손등을 찍으려 하자 아이린은 재빠르게 라칸의 손목을 잡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피 냄새가 필요하다면서.”

“아니, 그래도 그렇지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면 어떻게 해.”

“그럼 어떻게 해?”

“굳이 네 피일 필요는 없어. 망키 한 마리만 잡아 죽이면 돼.”

아이린은 나무 위에서 늘어져 서로 털을 뽑아주고 있는 망키를 보며 말했다.

“문제는 저 망키 한 마리를 떨어뜨리는 건데······.”

“망키를 떨어뜨리기만 하면 잡을 수 있어?”

“어.”

“오케이. 그럼 나한테 맡겨.”

라칸은 심호흡을 하고 망키와 자신과의 거리를 재며 중얼거렸다.

“거리가 대충······ 30m니까 오차 범위는 12㎝ 정도 되나?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칸은 집중해서 영창했다.

라칸의 손끝에서 청백색의 마법진이 만들어지더니······.

마탄 마법이 5초 만에 완성되었다. 마법진은 라칸의 오른 손목에 팔찌처럼 달라붙었다. 마법 발동 준비가 끝이 난 것이다.

이제 타깃을 설정하고 쏘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한 마리 떨어뜨려 줄 테니까 가서 죽여. 오케이?”

“······오케이.”

아이린은 라칸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이렇게 능숙하게 사용할 줄은 몰랐다.

라칸의 눈은 베테랑 저격수의 것과 비슷해 보였다.

[하품을 하는 망키.]

[곧 늘어져 잘 것 같다.]

‘저놈이다.’

라칸은 가는 나뭇가지 위에서 늘어져 잠을 자려는 망키 한 마리를 발견했다.

라칸은 손을 뻗어 늘어져 잠을 자려는 망키의 나뭇가지에 타깃을 설정했다.

라칸의 마탄 마법은 파괴력이 그리 높지 못하다.

사람의 갈비뼈 하나 겨우 부러뜨리는 수준이라 살상 능력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저런 나뭇가지 하나를 부러뜨리는 데는 충분했다.

통-!

맑고 청아한 소리와 함께 청백색의 마탄이 나무 사이사이를 뚫고 정확하게 망키가 밟고 있던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

우직-!

-끼에에에에!

망키는 바닥에 추락했다.

그와 동시에 가슴뼈와 심장을 부수는 끔찍한 고통에 손발을 허우적댔다.

아이린이 망키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심장에 대검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아이린은 대검에 대롱대롱 매달린 망키를 순수한 완력으로 다른 망키들을 향해 쏘아 올렸다.

망키들은 자신의 동료가 죽자 굉장히 놀라 도망치려 했으나, 아이린의 대검과 날아온 동료의 피 냄새를 맡자 눈이 붉게 변했다.

고대 마왕이 만들어 낸 몬스터들답게 피 냄새에 사족을 못 쓰는 것이었다.

-끼에에에에! 끼에에에에!

놈들은 아이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린은 숨을 들이쉬고 망키들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린의 눈이 번뜩였다.

훙- 훙-

바람을 가르는 전방위 사선 베기.

아이린의 대검은 날아든 망키들을 모두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린은 주변을 훑어 혹시 살아 움직이는 망키가 없나 확인한 뒤, 멍한 눈으로 쳐다보는 라칸을 봤다.

아이린은 왜 스승님이 라칸을 믿고 있는 것인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칸은 추적술도 추적술이지만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딱딱 해주었다.

아이린이 만약 저 망키들을 잡으려 했다면 최소 5분은 걸렸겠지만, 라칸과 함께하니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편해.’

반면 라칸은 조각난 망키들의 시체들 사이에서 고고히 서 있는 아이린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라칸의 눈에 시스템 창이 하나 떴다.

[탐색 결과]

1. 뒤지기 싫으면 깝치지 마세요.

‘······나도 알아.’

저 무지막지한 대검을 나뭇가지처럼 휘두르는 여자에게 깝쳤다간 목이 날아갈 게 분명했다.

‘근데 어떻게 웃통을 벗지?’

아이린 앞에서 웃통을 벗는 순간 저 망키들처럼 조각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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