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희생 >
#060화 – 희생
“······어?”
붉은 머리칼에 한쪽 눈에 흉터가 있는 여인이 갑자기 픽- 하고 쓰러졌다.
바로 옆에 있던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사내가 여인을 받았다.
사내는 여인의 뺨을 쳤다.
“라야! 정신 차려!”
덜덜덜덜
라야가 경련을 일으키고 코피를 쏟기 시작하자, 결국 사내는 주사기를 꺼내 라야의 몸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라야의 몸의 경련이 잦아들며 거칠었던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윽고 검은 두건을 쓴 이들이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제이콥, 무슨 일이야!”
“라야가 정신적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방금 안정제를 투입했으니 괜찮을 거다.”
제이콥은 검은 머리칼이 빼꼼 나온 여인에게 말했다.
“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해.”
텐은 자신이 탐지 마법으로 봤던 그대로 설명했다.
“라야가 부리던 트롤들은 모두 전멸했고, 오크들도 절반 이상이 괴멸됐어. 티그리스가 딱 한 번 검을 내질렀을 뿐인데 말이야.”
“······뭐? 단 한 번?”
“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티그리스는 더 강한 모양이다.”
텐은 기절한 라야를 흘금 보며 말했다.
“라야는 안타깝게 됐지만, 제이콥 네 판단은 맞았던 것 같다. 만약 티그리스를 섣불리 공격했다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었을 거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티그리스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루카스를 단칼에 죽인 괴물 같은 놈을 우리가 어떻게 죽여.”
“그런데 매튜 왕자님께서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잖아. 작전을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크게 노하실 텐데?”
제이콥은 라야를 업으며 말했다.
“책임은 내가 진다. 트롤 10마리를 단칼에 죽인 괴물 같은 놈을 죽이는 건 현재 우리로선 불가능하니까.”
“그래. 뭐,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본 임무를 실패한 것도 아니잖아?”
길리온 국왕이 ‘검은 아귀’에게 내린 명령은 황국과 길리온 왕국을 잇는 동부 철도 한 지역에 ‘어떤 주술’을 발동시키고 오라는 것이었다.
티그리스를 죽이라고 한 것은 매튜 왕자의 추가적인 의뢰였다.
제이콥은 탁한 회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에게 말했다.
“케니. 주술은 잘 발동된 거겠지?”
“주술은 마법처럼 딱딱 떨어지는 게 아니다. 발동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 테호를 포함한 수인족들이 이곳을 지나쳐야만 정확히 알 수 있다.”
대검을 든 거구의 사내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뭐 그딴 게 다 있어. 성공했으면 성공한 거고 실패했으면 실패한 거지. 그딴 식으로 보고했다간 매튜 왕자님께 대가리 깨져 인마.”
“가능성으로만 따지자면 9할 이상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되나?”
거구의 사내는 툴툴거렸다.
“1할의 확률로 실패하면 우린 다 뒤지는 거야. 댁은 살 수 있을 것 같아?”
“적어도 너보단 오래 살 것 같군. 넌 무식해서 단명할 팔자거든.”
“팔자? 그건 또 무슨 단어야. 내가 모르는 이상한 단어 쓰지 말라고 했지.”
싸움이 나려고 하자 제이콥은 두 사람을 쏘아봤다.
“둘 다 적당히 해라. 바로스 후작령까지 걸어가야 하니 시끄럽게 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그때, 케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깐. 혹시 티그리스를 죽이고 싶지 않나?”
“주술로 티그리스를 죽이겠다는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또 네놈의 개 같은 짓거리에 놀아나기 싫으니까.”
제이콥은 길리온 왕국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고문은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신앙의 문제가 아닌 사람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역겨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맡았던 저 주술사와 함께한 임무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최악이었다.
사람의 힘줄과 동맥을 끊고 최대한 천천히 고통을 주며 죽인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고역이었다.
제이콥은 길리온 왕국의 비밀 결사 부대 ‘검은 아귀’의 수장이었기에 최대한 담담히 수행했지만, 다신 경험하기 싫은 일이었다.
“또 주술을 사용할 것은 없다. 이미 주술은 발동된 상태니까.”
“뭐?”
“사실 네놈들이 생각보다 열심히 해준 덕분에 시간이 조금 남아서 그 제물들에게 재밌는 주술을 하나 걸어놨거든. 사실 발동 안 할 확률이 더 높긴 했는데, 트롤과 오크들이 떼로 죽으면서 우연찮게 발동한 모양이다.”
제이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하면 그 괴물 같은 놈과 마주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런데 주술이 걸려 있다고 하니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무슨 주술이 발동된 거지?”
“그냥 간단하다. 시신 냄새를 맡으면 평형감각을 잃어버리는 주술이다.”
“평형감각을 잃어버린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그냥 지진이나 배 위에 올라섰을 때를 떠올리면 좋다. 땅은 그대로 있는데 마치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랄까? 아마 녀석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닐 거다.”
제이콥은 텐을 보며 말했다.
“텐, 확인해 봐.”
“잠시만.”
텐은 눈을 감고 탐지 마법을 펼쳤다.
“······진짜다. 진군 속도가 확연하게 줄었어. 몇 명은 아예 구토를 하면서 달리고 있군.”
케니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티그리스를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놈들을 덮치면 적어도 그란츠 정도는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나? 뭐 재수가 좋다면 티그리스까지 죽일 수도 있을 거고.”
“······주술의 지속 시간은 어느 정도지?”
“한 반나절 정도? 시체들을 이용한 거라서 효과가 길진 않다.”
케니의 말은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이대로 돌아가도 본 목적은 수행한다.
하지만 티그리스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매튜 왕자에게 단단히 찍힐 게 분명했다.
그래도 그란츠의 목을 베어 간다면 정상참작 정돈해 주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제이콥. 놈들의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덮치면 아무 소용 없어.”
제이콥은 라야를 텐에게 넘겼다.
“제이콥 정말 가게?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어.”
“티그리스 목을 못 베더라도 그란츠의 목이라도 베어 가는 게 맞겠지.”
최근 정신 상태가 오락가락하는 매튜 왕자가 임무를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정말 제이콥을 홧김에 죽일 수도 있었다.
그란츠의 목이라도 베어 가면 그나마 정상참작이라도 될 수 있었다.
제이콥은 케니를 쏘아봤다.
“대신 케니 너도 간다. 네놈이 날 꼬드겼으니 너도 책임을 져야겠지.”
케니는 피식 웃었다.
“뭐, 그 정도야 해주지. 적당히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고.”
제이콥은 텐을 보며 말했다.
“만약 우리가 돌아오지 못하면, 라야랑 함께 길리온 왕국으로 가라.”
“······알았다. 그런데 웬만하면 그냥 돌아와.”
제이콥은 칼을 뽑아 들며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한다.”
* * *
‘······주술에 걸렸군.’
오크들과 트롤들이 쫓아오진 않았지만, 병사들의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전진 속도가 확연히 줄었고 전열은 흐트러졌다.
‘평형감각을 잃게 만드는 주술이 틀림없다.’
땅이 파도처럼 울렁거리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회귀 전 이런 주술을 레비스와 레비스가 키워낸 저주술사들에게 많이 당해봤다.
평형감각을 잃거나, 한쪽 눈이 안 보인다거나, 물이나 음식을 먹을 때마다 역겨운 맛을 느끼게 하는 등 신체의 컨디션을 최악으로 만드는 종류의 주술이었다.
티그리스는 이런 최악의 컨디션에서 싸움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익숙했지만, 그란츠을 포함한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 공격이 들어온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놈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타이밍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기습하면 병사들은 맥도 못 추고 죽을 것이다.
티그리스 밖에 지켜줄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50명이 넘는 병사들을 다 지키려다 보면 티그리스가 죽거나 크게 다칠 수 있었다.
티그리스는 검을 꽉 쥐었다.
티그리스는 이런 딜레마가 너무나도 익숙했다.
회귀 전에 주술만큼이나 너무나도 많이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특히 패주(敗走)할 때 이런 상황이 많이 나왔다.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은 약해지고 지친 병력들을 미끼 삼아 티그리스를 꼬여내 죽이려 했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단 한 번도 병력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적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티그리스가 죽으면 황국 전체의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0명이 죽고, 100명이 죽고, 1,000명이 죽어도 티그리스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병력들을 모조리 버리며 도망을 쳤다.
그게 옳은 선택이었는지 틀린 선택이었는지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레인로버 황녀도 티그리스를 질린 눈빛으로 쳐다볼 뿐 뭐라 하지 않았다.
정말 티그리스는 황국에게 없어선 안 될 무력 자원이었으니까.
그러나 티그리스는 지금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그때, 티그리스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그냥 포기했을 뿐이었다.
날아오는 화살이나 마법을 쳐내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체력을 유지한다는 핑계로 막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이번이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바꿀 기회였다.
회귀 전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
희생.
티그리스는 자신이 오만함을 진정 버렸다는 증명을 하늘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하늘에서 불현듯 검은 두건을 쓴 여인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란츠마저도 인식을 못 했지만, 티그리스는 알아챘다.
티그리스는 뒤로 돌아 검을 내질렀다.
범고래가 물개를 사냥하는 것처럼, 은빛 검기가 순식간에 검은 두건의 여인의 목을 물어뜯었다.
여인의 목이 하늘을 날며 추락했다.
그러자 숲에서 검은 두건을 쓴 암살자들이 나타났다.
티그리스는 선두에서 벗어나 검은 두건을 쓴 놈들과 대치했다.
“티그리스 경!”
“가시오! 그란츠 경. 여긴 내가 막을 테니.”
“아니오! 제가 막겠······.”
채재쟁!!!
티그리스는 그란츠를 향해 날아온 암기 세 개를 검기를 쏘아내 맞췄다.
그란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암기가 날아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막을 테니 지원 병력을 이쪽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란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란츠의 몸 상태는 좋지 못했다.
초인적인 인내심과 체력으로 버티고 있다지만, 눈앞이 팽글팽글 돌았다.
그란츠는 자신의 발이 멈추는 게 티그리스에게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젠장······.”
그란츠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나약함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란츠는 앞을 보고 달렸다.
지금 티그리스를 도와주는 것은 말 그대로 전장에서 벗어나는 일밖에 없었다.
콰광! 쾅!
티그리스는 이어서 병력들을 향해 날아온 각종 암기와 화살 그리고 마법들을 모조리 쳐냈다.
일반 병사들은 티그리스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자신의 옆에 나타나더니 암기와 마법을 쳐내고 사라졌다.
마치 귀신같았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티그리스가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뒤처지면 티그리스가 더 위험해진다.
자신들은 현재 짐덩이밖에 되지 않으니까.
병사들은 올라오는 구토감을 꾹 참아내며 더욱 발을 빠르게 놀렸다.
티그리스는 날아온 단검을 쳐내고, 옆구리를 파고들어 온 사내의 검을 막았다.
티그리스는 반격을 하려 했지만, 거대한 바위가 병사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사내의 배를 차고 뒤로 물러난 뒤, 순식간에 바위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위를 옆으로 비껴 쳤다.
바위의 궤도가 기이하게 바뀌더니 티그리스를 향해 검을 찔러 넣던 사내에게 날아갔다.
“으아아악!”
바위는 사내의 몸을 짓뭉개 버렸다.
바위를 날려 보낸 마법사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듯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놀랄 틈은 없었다.
티그리스는 회중시계에 걸려 있는 금줄을 빼 들었다.
그러자 금줄이 굵은 사슬로 변했다.
얼마 전 1등 보고에서 가져왔던 성물, 천공의 사슬이었다.
티그리스는 천공의 사슬을 방금 바위를 날렸던 마법사에게 날렸다.
조준할 필요는 없었다.
천공의 사슬은 티그리스가 인식한 목표를 향해 알아서 날아가니까.
마법사는 블링크 마법으로 도망을 쳤다.
천공의 사슬은 기이하게 꺾이더니 도주한 마법사를 정확하게 추적했다.
차륵-!
“무슨!”
다시 블링크 마법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몸이 묶이자 두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천공의 사슬에 실린 ‘쇠약’의 능력 때문이었다.
티그리스는 쇠사슬을 강하게 잡아당겨 마법사를 끌고 왔다.
“으리아!”
거대한 대검을 든 사내가 사슬을 끊을 생각으로 대검을 내려쳤지만, 오히려 사슬은 대검을 든 사내까지 묶어버렸다.
“이게 무······.”
서걱!
티그리스는 가차 없이 마법사와 대검을 든 사내의 목을 동시에 날려 버렸다.
이제 원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놈은 단 하나.
티그리스는 나무 뒤에 숨어 있는 궁수를 향해 피 묻은 천공의 사슬을 날렸다.
“피해!”
그러나 천공의 사슬은 나무를 박살 내며 궁수의 몸을 단단히 속박했다.
티그리스는 강하게 사슬을 당겼다.
마치 대어를 낚은 것처럼 궁수의 몸은 티그리스를 향해 날아왔다.
“이 새끼가!”
쌍검과 창을 든 사내 두 명이 동시에 티그리스의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샐러맨더의 검으로 놈의 쌍검과 창을 부드럽게 옆으로 밀어냈다.
차륵-!
이어서 사슬이 두 놈을 한 번에 감쌌다.
“젠······.”
서걱!
티그리스의 검은 가차 없이 궁수와 쌍검사, 창술사의 목을 동시에 베었다.
이제 남은 것은 네 놈뿐이었다.
나무에 숨어 있는 회색 머리칼의 여인 하나 그리고 검을 든 사내 세 명.
그중 티그리스의 눈에 익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제이콥.
길리온 왕국의 비밀 결사 부대 ‘검은 아귀’의 수장이었다.
놈의 특기는 각종 공작과 암살로, 놈에게 당한 장군의 목만 세도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저놈은 오늘 죽여야 했다.
제이콥은 차분한 눈으로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뭔가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아직 어지럼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주술의 효력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어서 주술사를 죽여야 몸 컨디션이 제대로 돌아온다.
이 상태로 심득을 담은 검술을 사용했다간 몸이 망가질 수 있었다.
‘도박이다.’
티그리스는 천공의 사슬을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여인을 향해 날렸다.
“이런 제기랄!”
여인의 몸이 나무와 함께 휘감겼다.
티그리스는 강하게 당겼다.
우드드득!
나무가 뿌리째로 뽑히며 티그리스를 향해 날아왔다.
세 사내가 동시에 달려왔지만 티그리스는 요령 좋게 날아온 나무와 여인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검을 내질렀다.
서걱!
티그리스는 나무와 함께 여인의 목을 잘라냈다.
그러자 여인의 몸이 순식간에 슬라임처럼 진득한 핏빛 젤로 변했다.
그 붉은 젤은 티그리스를 향해 날아왔다.
티그리스는 그 젤을 유령 걸음으로 피해냈다.
그러나 기 기괴한 젤은 티그리스를 향해 미친 듯이 추적해 왔다.
‘주술사다.’
자신의 목이 날아가기 직전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바쳐 요상한 주술을 부린 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티그리스의 평형감각이 돌아왔다.
티그리스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절단’의 심상을 담아 검을 내질렀다.
수려하고 깨끗한 호선이 젤을 가름과 동시에 티그리스를 향해 날아오던 세 사내의 허리를 갈랐다.
철벅-!
핏빛 젤은 핏물로 변해 바닥에 퍼졌고, 제이콥을 포함한 세 사내는 눈을 뜬 채로 죽었다.
주변은 온통 피바다였다.
그러나 아군의 시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티그리스는 얼마 전 슈비츠의 분신을 죽이고 난 후에 느꼈던 간질거렸던 기분이 다시 느껴졌다.
안도감이었다.
티그리스는 작게 숨을 고른 후 하늘을 쳐다봤다.
‘이제 계속 쳐다보던 놈들을 잡으러 가야겠군.’
티그리스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그란츠는 5백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티그리스가 격전을 치렀던 곳을 향해 달려갔다.
‘없다······.’
티그리스를 습격했던 무리의 시체들만 있을 뿐, 티그리스가 보이지 않았다.
그란츠는 입술을 씹었다.
혀끝에서 피 맛이 났다.
‘만약 티그리스 경이 사로잡히기라도 했다면······.’
티그리스의 무위를 봤기 때문에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혹시’라는 의심이 그란츠의 마음을 지렁이처럼 파고들었다.
그란츠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흩어져서 티그리스 경을 찾아라!”
“예!”
병사들이 하이덴 숲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저 멀리 사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란츠는 숲 사이로 번쩍이는 금빛의 사슬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윽고 초승달이 구름에서 벗어났다.
“어?”
티그리스였다.
티그리스는 기절한 두 여인을 사슬로 꽁꽁 싸맨 채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그란츠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티그리스 경!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덕분에 전원 몸에 이상 없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티그리스는 기절한 두 여인을 바닥에 내려놨다.
“이 사람들은 혹시······.”
“그 검은 두건을 쓴 암살자들의 동료입니다.”
그란츠는 이를 뿌득 갈았다.
당장에 갈아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이었다.
“이놈들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인퀴지터로 데려갈 생각입니다. 이미 인퀴지터를 호출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란츠는 티그리스와 잠깐 눈을 마주쳤다가 고개를 떨궜다.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 티그리스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5성 기사라는 놈이 할 수 있는 게 그냥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게 얼마나 티그리스와 병사들에게 부끄럽던지 아직도 얼굴이 화끈했다.
이 상황에서 그란츠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는 것밖에 없었다.
“오늘 정말 감사드립니다. 티그리스 경. 덕분에 저와 제 소중한 병사들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티그리스는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진 그란츠를 보며 말했다.
“그란츠 경은 그 상황에서 그란츠 경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전 병력의 통솔권자도 아닙니다. 전 일반 기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란츠 경은 기사단장이자 부대의 지휘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고, 전 기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티그리스는 붉게 충혈된 그란츠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 제게 이렇게 고개를 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의 임무를 다한 것이니까요.”
그란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란츠는 도망친 게 아니라 병력을 통솔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티그리스가 이렇게 말해주니 구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더 정진하겠습니다. 티그리스 경을 위해서.”
“저를 위할 필요는 없습니다. 황국을 위하는 길이 저를 위하는 길입니다.”
그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황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 60. 희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