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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61화 (61/251)

< 61. 미소 >

#061화 - 미소

난데없는 베르강과 황금 기사들의 등장에 가뜩이나 소란스러운 빅토리에역은 더 소란스러워졌다.

황금 기사들은 마치 전쟁터라도 나갈 것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5번 승강장으로 오와 열을 맞춰 걸었다.

승객들은 귀족이고 평민이고 할 것 없이 황금 기사들의 길을 비켜주었다.

-무슨 일이래.

-어제 티그리스 경이 습격을 당했다더구먼.

-뭐? 진짜? 크게 다치셨대?

-몰라. 아무튼 테른에서 열차를 타고 오신다고 하더구먼.

-테른은 원래 열차가 안 멈추는 곳 아니었나?

-티그리스 경이 탄다고 하니까 멈춘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멈췄겠어?

황금 기사들은 5번 승강장으로 향했다.

5번 승강장은 기자들과 승객들로 가득했는데, 기사들은 철도에서 사람들을 최소한 3m 이상 떨어뜨려 놓았다.

사람들은 강제로 뒤로 밀려나 시루떡처럼 변했지만, 그 누구도 황금 기사들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황금 기사들의 표정이나 몸에서 발하는 기운으로 보나, 수틀리면 정말 베어버릴 듯이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소심히 셔터를 누르거나 눈썹을 찌푸리는 것밖에 없었다.

베르강은 군중들 앞에 섰다.

가뜩이나 싸늘한 승강장에 찬 바람이 불며,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베르강이 내뿜는 포악한 살기에 마치 뱀 앞의 쥐처럼 몸이 굳어버린 것이었다.

베르강은 말없이 범처럼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기자들과 승객들을 쏘아봤다.

기자들은 셔터를 누르려다가 베르강과 눈을 마주치자 침을 꿀꺽 삼키고 카메라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베르강은 목소리에 마력을 담아 말했다.

“지금부터 기사들의 몸에 손을 대거나 허락 없이 1m 이상 다가오는 사람은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곧바로 구속할 것이오. 왜 그런지는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알고 있소.”

베르강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승객들과 기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티그리스가 황도 빅토리에 내에서 갖는 위상은 거의 황녀나 황자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

그런 존재가 어젯밤 괴한들로부터 습격을 당했다.

이건 황국을 향한 전쟁 선포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잔뜩 날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베르강의 경고가 끝나자 열차가 들어왔다.

기자들은 베르강의 눈치를 보며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윽고, 열차가 멈추며 제일 앞칸 문이 열렸다.

티그리스는 멀끔한 모습으로 열차에서 내렸다.

도저히 어제 습격을 당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기자들은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황금 기사들의 날 선 눈빛에 쫄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군중들의 박수에 맞춰 소심하게 셔터를 누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티그리스의 옆으로 베르강과 황금 기사 둘이 다가왔다.

“몸은 좀 괜찮나? 티그리스 경?”

“네. 괜찮습니다.”

“혹시 집 말고 다른 데 들를 곳이 있나?”

“없습니다.”

“그럼 알겠네. 황제 폐하께서 자네 집으로 의사와 치유 마법사를 보냈으니 진찰을 받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베르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호 태세로 들어갔다.

본래 법도상 블랙 마이스터의 호위를 받으려면 황족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분노한 황제의 앞에 법도를 들먹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베르강도 티그리스가 단순한 5성 기사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호위 임무를 곧바로 받아들였다.

티그리스와 베르강은 승강장을 벗어나 빅토리에 역 정문에 미리 준비되어 있는 황금색 마차로 향했다.

마차는 황금 기사들이 직접 호위를 하고 있었으며, 철혈 마법사들도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해 배리어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난 혹시 모를 일을 위해 밖에 있겠네.”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레인로버 황녀였다.

“티그리스 경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으신 거 맞나요? 황궁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졌다.

레인로버는 어젯밤 티그리스가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설쳤다.

티그리스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인퀴지터의 보고가 새벽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너무나도 두근거려 침대 위에서 계속 뒤척였다.

대신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쓴 회귀록과 인명록을 뒤져보며, ‘검은 아귀’라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복수할 것인지, 앞으로 티그리스를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 것인지 계획을 짰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자신에 대해 서술해 놓은 내용 중 ‘분노가 끝까지 차오르면 잠을 자지 않는다’라는 말을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전 괜찮습니다. 레인로버 전하.”

“뭐가 괜찮아요. 그 평형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이상한 주술에도 걸렸다면서요.”

“주술사를 죽였기 때문에 이미 그 주술은 다 풀렸습니다.”

레인로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멍청했어요. 티그리스 경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티그리스는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이 노리는 제1 순위 제거 대상이 되었다.

슈비츠의 키메라 실험실의 위치를 모두 알아내고, 케일 자작을 포함한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의 정보를 알고 있는 자들을 사로잡았으며, 루카스를 죽여 황국이 흑토 지대에 간섭할 여지를 만들었다.

놈들은 티그리스를 찢어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을 것이다.

그런 상황인 줄 알면서 티그리스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다니······.

이건 명백한 레인로버의 실책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황금 기사 12명, 철혈 마법사 3명을 1개 팀으로 편성하여 티그리스 경의 개인 호위 임무를 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티그리스 경이 머물고 있는 노르베르드 타워에 철혈 마법사들을 일부 상주시켜 방호 마법을 상시 펼치도록 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담담한 눈을 쳐다봤다.

“저와 베르강 경이 막았습니다.”

레인로버와 베르강은 티그리스의 회귀록과 인명록을 3번이나 정독했다.

회귀록 속 티그리스의 무위는 멸지의 마왕을 봉인한 ‘페레이라’와 비견될 정도로 대단했다.

봉인이 풀린 드래곤과 홀로 싸워 철혈 마법 병단이 장거리 텔레포트 마법을 펼칠 시간을 벌어주었으며.

‘뿔의 기사’와 키메라화 된 악령 ‘검은 사신’, ‘월식 기사’로 구성된 1만 마리의 군세를 뚫고 ‘저주받은 성배’를 부쉈고.

로타의 권속 2명과 아르펨의 권속 2명이 작정하고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로타의 입 레비스를 죽이고 도주하는 데 성공했으며.

모든 기사의 대적자로 키워진 ‘오슬로’를 죽였다.

그런 무지막지한 존재에게 호위를 붙인다?

이건 티그리스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티그리스가 지금 고리가 5개이기에 아직 전성기 시절보다 모자란 것은 맞지만, 그만큼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도 약한 상태다.

지금 티그리스를 죽여보려고 나서는 순간 오히려 그들이 역습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러니 티그리스에게 필요한 것은 호위가 아니었다.

“대신 황제 폐하께서 1등 보고의 문을 허락하실 겁니다. 호위를 받지 않는 대신 티그리스 경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종류의 성물을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으니 무기보단 치유나 회피 아니면 방어막 종류의 성물을 고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가려운 부위를 딱딱 알아서 긁어주었다.

티그리스는 과거 검 종류를 제외한 성물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검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황국의 보고가 부서지면서 성물 수천 개가 증발해 버렸으니까.

그러나 이번에 ‘천공의 사슬’을 사용해 보며, 다른 성물도 잘만 사용하면 얼마나 편하게 전투를 이어갈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대신 티그리스 경의 주변 인물, 샤를로트와 아이린 그리고 리니아에겐 비밀 호위가 붙을 겁니다. 4성 기사 하나와 4서클 마도사가 하나가 짝을 이룰 겁니다. 이건 저희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황제는 회귀록의 존재를 모른다.

현재 레인로버가 첨삭 중이었고 다음 달 아니면 다다음 달 내로 완료될 예정이었다.

그때 황제에게 회귀록과 인명록을 진상하면서 설명하면, 티그리스와 제자들에게 더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티그리스는 레인로버에게 회귀록과 인명록을 맡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일이 터지기 전 만약 호위가 먼저 붙었다면, 티그리스는 마치 족쇄를 찬 것처럼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레인로버가 알아서 조율을 해주니, 티그리스가 구태여 호위는 필요가 없다고 황제 폐하께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었다.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레인로버는 입을 열었다 앙다물었다 몇 번을 반복했다.

뭔가 할 말이 있었지만, 입 밖으로 잘 나오질 않는 모양이었다.

“······역시 이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티그리스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레인로버가 나중에 얘기해 준다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예. 알겠습니다.”

“후······.”

레인로버는 특유의 딱딱한 사무적인 표정을 지우고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변했다.

“이 문제 때문에 베르강 경하고 제가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몰라요. 저 진짜 오랜만에 황제 폐하께 혼났다니까요.”

그럴 만도 했다.

티그리스에게 호위를 붙여야 한다고 황제는 물론이고 가신들이 입을 모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베르강과 레인로버 둘이서 절대 안 된다고 반박을 했을 테니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티그리스는 레인로버와 베르강에게 굉장히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곤란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뭘요. 진짜 힘든 건 티그리스 경이었겠죠. 그 ‘검은 아귀’들을 홀로 상대하는 것도 모자라서 병사들을 지켜야 했으니······.”

레인로버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래도 뭐 그렇게 미안하면 작은 부탁 하나 들어주실 수 있나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하십시오.”

티그리스는 웬만한 부탁이라면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레인로버의 부탁은 굉장히 뜬금없으면서도 난감했다.

“웃어주세요.”

“······네?”

레인로버는 고장 난 티그리스의 표정이 웃겨 풉! 하고 웃고 말았다.

“저 티그리스 경이 진짜로 웃는 걸 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한 번만 제대로 웃어주세요.”

“······그 부탁 말고 다른 건 없으십니까?”

“원래 다른 부탁이 있긴 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보고 싶어졌어요. 한 번 웃어주세요. 이렇게.”

레인로버는 환하게 웃었다.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수천 번 연습한 끝에 만들어진 미소였지만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음······.”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자신 앞에서 침음을 삼키는 걸 처음 봤다.

그래서 더 골려주고 싶었다.

“왜요? 힘들어요? 아, 그럼 하지 마시고요.”

“······정말로 다른 건 없습니까?”

“네. 이거 아니면 다른 건 없어요.”

티그리스는 정말 어렸을 때를 제외하곤 진심으로 웃어본 기억이 없었다.

10대와 20대 초반엔 검에 미쳐 살았고, 20대 중후반엔 끔찍한 전쟁터를 전전하며 살았으니 웃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 레인로버처럼 저렇게 환하게 웃어본 적은 회귀 전까지 포함해 거의 20년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흉내는 가능했다.

티그리스 정도의 무인이 되면 세밀한 근육 하나하나까지 통제 가능하기 때문에 적당히 나쁘지 않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될 것이다.

“후······.”

티그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티그리스는 마치 검술을 훈련한다 생각하고 진지하게 임했다.

레인로버는 비장한 표정의 티그리스의 모습이 너무나도 웃겼다.

그 누구도 저 표정이 웃기 직전의 표정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티그리스는 웃었다.

“······.”

“풉!”

티그리스의 환한 미소······.

아니, 미소 비스름한 것을 보니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만큼 티그리스의 미소는 엉망진창이었다.

“미쳤나 봐! 정말 미쳤나 봐아아아!”

레인로버는 너무 웃겨 티그리스를 마구 때렸다.

레인로버는 정말 웃기면 가까운 사람을 때리는 스타일이었다.

레인로버의 손바닥이 더 붉게 물들었지만, 레인로버는 참을 수 없었다.

“지금 그게 웃은 거예요? 와 세상에······ 티그리스 경이 못하는 것도 있었다니!”

“······이제 되셨습니까?”

“설마 이건 삐진 거예요?”

“아닙니다.”

레인로버는 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어젯밤 티그리스를 걱정하며 생겼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미소 짓는 법을 가르쳐 줘야겠네요. 앞으로 매주 1시간 제게 미소 짓는 법을 배우세요.”

“······그 정도로 엉망입니까?”

“네. 맞아요. 오늘부터 제가 티그리스 경의 스승입니다. 알겠어요?”

“꼭 배워야 하는 겁니까?”

“꼭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지만 명령입니다. 티그리스 경. 제게 웃는 법을 배우세요.”

레인로버는 티그리스를 움직이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레인로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처음은 이렇게 시작하는 거죠.”

“······네?”

레인로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그냥 혼잣말이에요.”

토드 황제는 레인로버에게 그동안 언급했던 혼사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노르베르드 변경백과 이야기를 마쳤다. 티그리스가 원한다면 너와 결혼을 해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조만간 티그리스에게 의중을 물어보도록 하마.

그 이후에 중앙집권을 위해서 티그리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니 결혼이 성사되도록 티그리스의 마음을 돌리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레인로버는 잘 들리지 않았다.

황녀로 태어난 이상 순수한 사랑만으로 결혼을 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티그리스와 정략적인 이유로 결혼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하니 조금 찝찝했다.

조금만 더 레인로버에게 시간이 있었다면 마치 그녀가 좋아하는 로맨스 연극처럼 진정한 사랑 이후에 결혼을 치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판타지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와 미래를 공유하는 입장으로서 티그리스가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사랑을 하기엔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이 있는······ 정확히 말하자면 먼저 반한 사람이 나서는 게 맞았다.

‘뭐, 내가 먼저 고백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다만, 그녀에게도 시간이 좀 필요했다.

아주 조금.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이 요동쳤다.

* * *

다음 날, 레비올라 찻집.

티그리스는 인퀴지터의 호출을 받고 레비올라 찻집으로 향했다.

레비올라 찻집은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티그리스는 그중 하얀 중절모를 쓴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자연스럽게 꽃병을 돌리고 중절모를 벗었다.

나달이었다.

나달은 장갑을 벗고 티그리스에게 악수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티그리스 경.”

“네. 오랜만입니다.”

티그리스는 자리에 앉았다.

나달은 특유의 인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티그리스 경이 넘겨주신 정보 덕분에 조사가 굉장히 쉬웠습니다. 역시 예상하신 대로 수인족 대장로 ‘테호’와 길리온 왕국의 제2왕자 ‘모르고트’가 목표였습니다.”

나달은 티그리스가 잡아 온 라야와 텐의 진술서를 꺼내 티그리스에게 건넸다.

둘의 글씨는 굉장히 삐뚤빼뚤했는데, 그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둘은 B-13 가드 포인트에 걸어둔 주술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술사는 ‘검은 아귀’에 임시로 들어온 팀원이라서 거의 모르는 사이였다고 하더군요. 일부러 그 주술사가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흠······.”

티그리스의 몸에 걸린 주술을 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주술사를 죽였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 주술사를 어떻게든 살려둘 걸 그랬다.

‘놈들이 테호를 노렸다는 점에서 무슨 주술인지 예상이 안 가는 건 아니다.’

아마 수인족들의 이성을 날려 버리는 주술 ‘야생의 본능’이라는 주술을 걸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야생의 본능은 말 그대로 수인족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야생의 본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수인족은 본능에 충실한 종족이긴 하지만 이성을 갖추고 있어 다른 종족들과 대화와 거래가 가능했다.

밤 여우처럼 본능을 많이 억제할 수 있는 경우에는 인간들과 무난하게 섞여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야생의 본능’ 주술에 걸리면 이성으로 억제하고 있던 본능을 터뜨려 버린다.

초식 동물 쪽이라면 그나마 온순해서 다행이지만, 밤 여우처럼 육식을 하는 맹수가 섞인 종족인 경우에는 같은 수인족이고 인간이고 상관없이 사냥을 하고 먹어치운다.

게다가 테호는 호랑이족 출신 수인족이다.

만약 야생의 본능의 주술에 걸리게 된다면 호랑이의 야생 본능이 튀어나와 그 열차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을 해쳤을 것이다.

그리고 황국과 길리온 왕국 그리고 수인족 자치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나쁘지 않은 정보를 하나 입수했습니다.”

“그게 뭐죠?”

“길리온 왕국에 협조하는 주술사들의 연구실이 있는 모양입니다. 텐이라는 여자는 그 위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티그리스도 모르던 정보였다.

주술사와 연구실은 굉장히 이상한 조합이었지만, 아마 십중팔구 로타의 입 레비스와 연관된 연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 연구실엔 수인족들이 굉장히 많이 잡혀 있는 모양입니다.”

“그 수인족들을 풀어주면 수인족 자치구와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겠군요.”

“예. 맞습니다. 문제는 그 위치입니다.”

나달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길리온 왕국의 수도에 위치한 룩스 교단 지하 감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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