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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62화 (62/251)

< 62. 트리샤(1) >

#062화 – 트리샤(1)

룩스 교단.

빛과 치유의 신 룩스를 믿는 종교 집단.

티그리스에게 있어서 룩스는 그냥 사람들이 믿는 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륙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룩스의 기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번에도 룩스는 대륙의 멸망에 무관심할 것이다.

아니면 무능하든가.

티그리스는 인류에게 무관심하고 무능한 신을 모실 생각이 없었다.

“별로 놀라시지 않는군요?”

“어떤 게 말씀이십니까?”

“룩스 교단에 지하 감옥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별로 놀랄 것도 없었다.

현재 룩스 교단의 지하에 주술사들의 실험실이 있다는 것만 몰랐을 뿐, 수인족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은 이미 티그리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역사적으로 봐도 룩스 교단의 지하에 감옥이 있다는 건 별로 이상할 게 없었다.

“과거 이단 심문관들이 사용하던 감옥이지 않겠습니까?”

나달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마녀의 시대에 잠깐 등장했던 건데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마왕의 시대가 끝나고 난 후에 시작된 마녀의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룩스교의 황금기라고 봐도 무방했다.

고대 마녀들이 사용하던 흑마법과 지배력은 ‘룩스의 성배’가 지닌 ‘신성력’에 쥐약이었다.

당시 룩스교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룩스의 성배로부터 받은 신성력을 바탕으로 마녀들을 사냥했다.

마녀들은 겉모습으로만 보면 인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에 인간들 틈에 숨어지내곤 했는데, 이단 심문관들은 그런 마녀들을 색출해 내는 일을 했다.

그게 무려 900여 년 전의 일이었지만, 그 역사의 잔재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었다.

나달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현재 수인족들은 지하 감옥에서 갖가지 실험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확한 실험 내용은 그녀도 알지 못하는 것 같지만, 어떻게 룩스 교단이 수인족을 공급받고 있는지 알고 있더군요.”

“밀렵꾼들과 블랙 마켓이겠군요.”

나달은 살짝 놀랐는지 왼쪽 동공이 살짝 커졌다.

“굉장하시군요. 블랙 마켓까지 알고 계시다니.”

“블랙 마켓이 있다는 사실은 귀족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아닙니까? 그곳에서 수인들이 팔린다는 것도요.”

“그렇긴 해도 단번에 떠올리기란 쉽지 않죠. 아무튼 룩스 교단은 매년 수인족들을 블랙 마켓에서 대량으로 구매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몰래 밀렵꾼들과 개인적으로 계약을 맺고 구매한다고 하더군요.”

나달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가장 큰 문제는 길리온 왕국의 국민들입니다. 국민들이 수인족들을 배척하는 정서가 강하고 기자들의 말보다 교단의 말을 더욱 믿습니다. 수인족들을 상대로 고문하고 실험을 했다고 해도 믿지 않을 가능성도 있고 아예 반기는 쪽도 있을 겁니다.”

나달은 길리온 왕국 국민들의 성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실제로 룩스 교단이 수인족을 대상으로 키메라 실험을 했다는 게 밝혀졌을 때, 황국은 난리가 났지만 길리온 왕국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룩스교의 교주들이 키메라 실험은 신성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말 한마디로 일축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길리온 왕국의 국민들은 룩스교에 미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선 수인족들과 친교를 맺어 길리온 왕국과 바로스 후작을 압박하시길 원하시지만, 저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수인족들의 무력이 생각보다 굉장히 약합니다. 고리 2개짜리 용병들에게 납치될 정도라고 하니 그들의 도움을 받아봤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수인족 납치는 6~7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문제였다.

그전까진 수인족을 납치하기는커녕 밀림에 잘못 들어갔다가 죽는 모험가들과 용병들이 많아서 문제였다.

수인족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들보다 육체적으로 굉장히 좋은 데다가 밀림은 그들의 놀이터나 다름이 없었기에 수인족들을 사냥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니 수인족이 6~7년 전부터 갑자기 약해졌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티그리스는 왜 수인족들이 갑자기 약해졌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수인족들이 섬기는 사냥의 신의 성물 ‘마사라이의 뼈바늘’이 실종됐기 때문이었다.

‘마사라이의 뼈바늘’은 수인족들이 성인식을 진행할 때 사용되는 성물로 수인족의 신체 성능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켜 주는 성물이다.

이 성물이 사라지니 최근 성인이 된 수인들은 ‘마사라이의 뼈바늘’의 축복을 받은 수인들보다 훨씬 약했다.

밀렵꾼들이 노리는 수인들이 바로 이제 막 성인이 된 수인들이었다.

“그 문제는 황제 폐하께서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나달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맞군요. 저희가 고민해 봤자 의미가 없는 문제입니다.”

어차피 이 일은 나달이나 티그리스가 결정할 일은 아니다.

둘은 각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달은 황제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고 티그리스는 황국의 적을 죽이는 것이다.

국가 간 거래를 하거나 외교적인 문제는 티그리스나 나달의 전문이 아니라, 황제와 가신들의 몫이었다.

“그나저나 라칸은 좀 어떻습니까?”

“성실하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 마법사입니다.”

라칸은 ‘서클 마법의 구조적 이해’라는 기술을 포인트로 구매했기 때문에 나달의 가르침을 다소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발전하려는 성향이 굉장히 강했기 때문에 나달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배포도 있고 집중력 있게 마법을 잘 사용합니다. 배우는 속도도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빠르고요.”

“7서클에 오를 수 있는 인재인 것 같습니까?”

“음······.”

나달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심상을 구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베르강 경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남길 수 있는 경지라고 하던가요?”

“소드 마스터를 설명한 글 중 제일 잘 설명된 한 문장 같습니다.”

“제가 잘 이해한 것 같아 다행이군요. 대마법사는 조금 다릅니다. 소드 마스터가 검으로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면, 대마법사는 세상의 작은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경지랄까요?”

나달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꽃잎 하나를 툭 뗐다.

그리고 나달의 손끝에서 나온 탁한 회색빛 마력실들이 붉은색 꽃잎을 감쌌다.

그러자 붉은빛의 꽃잎은 그 색과 형태를 잃고 수십 종류의 가루로 구분되어 테이블 위에 차곡히 쌓였다.

“제 경우에는 ‘유기물 분해’라는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기물을 최소 단위로 분해할 수 있죠. 반면 바스티얀 학교장님의 경우에는 ‘동물의 행동 패턴’을 완전히 이해하셨기 때문에 모든 마법과 아티팩트에 동물의 의지를 담으실 수 있죠.”

나달은 분해된 가루들을 티슈로 모아 꽃병 안에 집어넣었다.

“7서클의 대마법사는 단순히 마법을 잘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작은 규칙과 원리를 찾아내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마법으로 구현할 줄 알아야만 7서클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이론상으로만 보면 지금의 라칸도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원리 중 한 가지를 통달한다면, 7서클의 대마법사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7서클의 마법을 바로 구현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요.”

나달은 티슈를 깔끔하게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결론을 내리자면, 아직 전 라칸이 7서클의 경지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라칸은 마치 어린아이 같습니다. 모든 게 신기하고 호기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달려듭니다. 그 태도는 마법사로서 굉장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려면 자신이 진정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를 정하고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조금 기대가 되는군요.”

티그리스는 살짝 놀라고 있었다.

라칸에게서 7서클의 대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여서도 아니고, 나달이 라칸을 칭찬해서도 아니다.

나달은 인조적인 미소가 아닌 감정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달은 아직 눈치채고 있지 못하는 듯했다.

‘······도대체 지난 한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라칸은 한 달 만에 1서클 공통마법을 모조리 섭렵했고, 나달은 감정이 담긴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변화가 나달에게 있어서 긍정적으로 작용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훨씬 사람다워진 것 같았다.

* * *

고요한 망치질 소리만 가득한 난장이의 대장간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벌컥-!

“땅딸보 아저씨 나 왔어!”

텅-!

여인은 능숙하게 발뒤꿈치로 문을 닫았다.

여인은 고디바 사막에 사는 히르페인처럼 구릿빛 피부에 콧대도 날카롭게 섰으며 속눈썹도 굉장히 짙었다.

그녀는 스쳐 지나가면 남녀 불문하고 한 번쯤은 뒤돌아볼 만큼 묘한 매력을 풍기는 미인이었다.

여인은 단숨에 달려와 키 작은 사내를 꽉 껴안았다.

“이것 놔라! 어디 말만 한 처자가!”

“그만큼 보고 싶었단 거지~ 나 거의 3년 만에 처음 보는 거잖아. 말레우스 아저씨 그동안 잘 지냈어?”

말레우스는 여인을 밀쳐내며 말했다.

“또 던전에 들어갔다가 온 모양이군. 안 본 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 여기 시간은 그렇겠구나. 뭐가 됐든 내가 3년간 못 본 거니까!”

“또 달려들 생각하지 마라!”

말레우스가 망치를 집어 들자 ‘꺄아악~!’ 소리를 내지르며 도망쳤다.

고양이 귀의 여인, 소라는 대들보 위에서 발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오랜만이야 트리샤. 우리 땅딸보 아저씨 좀 살려줘. 아직 여자한테 약하단 말이야.”

“나이도 300살이나 먹어놓고 아직도 여자한테 약하면 어떻게 해. 드워프 나이로도 장가갈 나이는 이미 지나지 않았나?”

“이것들이!”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트리샤는 낡은 의자를 끌고 와 모루 앞에 앉았다.

소라는 트리샤에게 차를 한 잔 건넸다.

“고마워 소라. 별일은 없었지?”

“뭐, 별일이라면 많았지.”

“별일이 많았다고?”

“최근 황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

“아, 뭐 대충 키메라 실험실이 발견됐다는 건 들었어. 그런데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황도 지하에 키메라 시험실을 지을 수 있지?”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도 꿈에도 몰랐다니까. 하수도에 키메라 실험실을 지어서 냄새를 전혀 못 맡았어. 네메시스도 그 소식을 듣곤 얼마나 놀랐다고.”

트리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혹시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어? 궁금한데?”

“땅딸보 아저씨는 모르겠지만, 나야 시간이 많으니까 얘기해 줄 수 있지.”

소라는 차가 세 번 비워지고 채워질 때까지 계속 이야기를 해나갔다.

트리샤는 수다쟁이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경청자였다.

트리샤는 소라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소라의 말이 끝날 때까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경청했다.

“그러니까 그 티그리스란 꼬마가 그렇게 대단한 꼬맹이다?”

“꼬맹이라니. 20살이니까 꼬맹이는 아니고 남자 정돈되지 않을까?”

“20살이 무슨~ 난 42살이라고.”

“진짜 나이는 25살인 건 알지? 던전에 너무 오랫동안 지내면 시간적 괴리감이 심해져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나도 알아. 요새 나도 괴리감이 심해지는 걸 조금 느껴.”

트리샤는 뒤를 돌아 창문 밖에 보이는 풍경을 봤다.

사람들의 옷부터 시작해서 건물 양식, 마차들의 모습까지 모든 것이 어색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전 불감증에라도 걸린 듯 얇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다녔으며, 어린아이들이 여인의 손을 잡고 산책을 했다.

“이 시기의 바이케르······ 아니, 빅토리에는 너무나도 평화로워.”

인류의 천적이라 불리는 마왕도, 마녀도, 거인도, 드래곤도 없는 너무나도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이 평화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종족이 피를 흘리고 죽어 나갔는지 생각하면 몸이 떨려왔다.

소라는 트리샤의 표정이 굳어지자 눈치 있게 대화 주제를 바꿨다.

“이번엔 또 무슨 성물을 찾으러 던전에 들어간 거야.”

트리샤는 우울한 표정을 풀고 씨익 웃었다.

“궁금해?”

소라의 꼬리가 살랑살랑거렸다.

“당연히 궁금하지.”

“잘 봐~ 두구두구두구~”

트리샤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작은 귀걸이 하나를 꺼냈다.

바다를 품은 듯한 푸른 사파이어가 인상적인 귀걸이였다.

“이게 무엇이냐! 바로 ‘하늘이 흘린 눈물’이라 불리는 고대 엘프 무녀들이 착용했던 귀걸이다~ 이 말이지!”

말레우스는 성물을 흘금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요상한 성물이나 주워 온 모양이구나.”

“요상하다뇨. 이 귀걸이에 담긴 능력이 무엇인지 알면 정말 놀랄걸요?”

“무슨 능력이지?”

“잘 봐요.”

트리샤는 귀걸이를 착용했다.

“큼! 내 부름에 응답하라. 엘리미아.”

그러자 푸른 보석에서 시원한 냇물의 냄새가 나더니 푸른빛의 작은 꼬마가 튀어나왔다.

꼬마는 두리번거리더니 소라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소라는 귀여운 사촌 동생을 본 것처럼 꺅~ 소리를 질렀다.

“우아아아~ 너무 귀여워!”

반면, 말레우스는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설마 이거 정령이냐?”

“맞아요. 엘프들만이 부릴 수 있다고 전해지던 바로 물의 정령이죠! 이름은 내가 엘리미아로 붙였어요.”

“작은 물방울이라······. 썩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엘리미아는 이 대장간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구경했다. 그리고 시뻘건 숯이 타오르고 있는 화덕을 향해 손짓했다.

-뜨겁다!

트리샤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와! 맞았어. 엘리미아! 저게 뜨겁다고 하는 거야!”

-붉다!

“와! 엘리미아 천재야!!!”

엘리미아는 즐거운지 한참을 웃다가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엘리미아 졸린 모양이구나. 하긴 여긴 좀 더우니까.”

-응······.

“그럼 들어가 있어.”

엘리미아는 트리샤의 품에 쏙 들어가더니 푸른 물방울로 변하며 푸른 사파이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신기하군. 엘프들은 멸종한 지 300년이 지났는데, 성좌의 힘이 남아 있다니.”

“그만큼 엘프들이 열심히 성좌들을 모셨다는 뜻이겠죠.”

트리샤는 성물을 모으고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성좌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다.

성좌들이 지성체들에 의해 탄생되고 잊히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으며, 자신이 잊히지 않기 위해 성물을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말은 이 ‘하늘이 흘린 눈물’도 푸른 눈방울 자리가 자신이 잊히지 않기 위해 발악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트리샤는 귀걸이를 떼어내며 사파이어를 매만졌다.

굉장히 씁쓸해 보였다.

“이제 엘프들의 별자리도 잊히고 있어요. 엘프들이 모셨던 성좌들의 성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는 게 그 증거겠죠.”

“트리샤 네가 엘프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넌 인간이다. 넌 결국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야 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전 엘프들을 단순히 잊지 않는 것만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요.”

트리샤는 엘프들을 되살리고 싶었다.

수인족들이 갖고 있던 ‘마사라이의 뼈바늘’이 실종되고 나서 수인족 자치구와 인류 간의 힘의 균형은 무너졌다.

마사라이의 뼈바늘을 누가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서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자든 후자든 밀림의 미래는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그럴 바엔 아예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게 나았다.

“그러니까 어서 세계수를······.”

“세계수는 이미 죽었다. 세계수의 씨앗도 없고. 그러니 던전을 들어가는 이유가 세계수의 부활을 위해서라고 하는 거라면 당장에 그만둬라. 네 몸을 망치는 일이니까.”

말레우스의 단호한 말에 트리샤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이 주제로 싸운다면 한도 끝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리샤는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참나, 저도 안다고요. 꼰대 아저씨.”

말레우스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무튼 이번엔 뭐가 망가진 거냐.”

트리샤는 검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붉은 루비가 박혀 있는 단검이었고 하나는 금빛이 은은히 도는 아밍 소드였다.

단검의 끝은 살짝 부러져 있었고, 아밍 소드는 이가 큼지막하게 나가 있었다.

말레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물을 이렇게 험하게 다루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트리샤.”

“3년 동안 쉬지 않고 썼는데 이 정도면 양호한 거죠. 아무튼 고칠 수 있나요?”

말레우스는 단검과 아밍 소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칠 순 있다. 성좌들이 너를 굉장히 예뻐하긴 하는 모양이구나. 성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부서지지 않은 걸 보니까.”

“아싸~! 얼마나 걸릴까요?”

“한 달 정도 걸린다. 그때까지 쓸 검은 있느냐?”

“테티우스가 있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트리샤는 말레우스에게 은근슬쩍 다가왔다.

“저······ 아저씨. 드워프의 기록 보관소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전에도 말했지만 안 된다고 했다.”

“아~ 왜요! 저 유물이랑 돈 많아요. 필요한 대로 다 드릴게요.”

“세상엔 잊혀야 할 기록들이 있고, 우린 그 기록들을 보관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내가 들여보내 주고 싶어도 들여보내 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텐데?”

드워프의 기록 보관소에 들어가려면 드워프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만 했다.

“진짜 다른 건 안보고 딱 하나만 볼게요. 엘프들의 검술 아무거나 딱 하나만! 저 그걸 익혀야 ‘세계수를 지키는 송곳니’ 던전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럼 그 하늘이 흘린 눈물을 얻을 때 엘프들에게 검술 좀 알려달라고 하지 그랬냐?”

“엘프들이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절대 안 알려주죠!”

“아무튼 안 된다. 세상이 멸망한다면 모를까 그 기록 보관소에 보내줄 순 없다.”

트리샤는 혀를 찼다.

“참나. 드워프들이 다 그렇지. 아주 꼰대들이야 꼰대들.”

“흠······.”

말레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티그리스에게 한번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

“갑자기 여기서 그 사람 이름이 왜 나와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키메라 실험실 사건 때, 마법을 소멸시키는 검술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말에 트리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을 소멸시키는 검술이라면 설마··· 주문 사냥의 술? 엘프 중에서도 용 사냥꾼들에게만 전해진다는 그 검술을요? 그걸 그 사람이 어떻게 익혀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이 그렇다는 거지.”

말레우스는 아밍 소드와 단검을 화덕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으로 하지. 나도 그 사실의 진위가 궁금하니 정말로 티그리스가 사용한 그 검술이 주문 사냥의 술이었는지 알아 와라. 그러면 50골드로 퉁 쳐주마.”

“아저씨가 왜 그게 궁금한데요?”

“주문 사냥의 술과 관련된 기록은 오직 기록 보관소에만 있다. 그런데 티그리스가 어떻게 그걸 익혔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엘프들의 지식을 어떻게 구한 것인지 알고 싶다는 이 말씀이시죠?”

“그런 셈이지.”

트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30골드면 봐드릴게요.”

“40골드.”

“콜!”

“기어코 10골드를 깎는구나. 에잉······. 만약 못 알아 오면 100골드를 낼 생각 해라.”

그때, 가만히 듣던 소라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어? 트리샤 너 운 되게 좋다.”

“왜?”

소라는 대들보 위로 올라갔다.

“곧 알게 될 거야.”

그 말과 함께 소라의 몸이 사라지며 트리샤도 기척을 찾을 수 없었다.

수인족 특유의 은신술 ‘그림자 숨기’였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찾아왔다.

“혹시 대검 수리가 가능할까요?”

아이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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