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트리샤(3) >
#064화 – 트리샤(3)
트리샤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티그리스 경이 한 가지 알아두실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전 하마자르 왕가의 혈족이긴 하나 공주가 아닙니다.”
트리샤의 표정은 그 어떤 때보다 진지했다.
“전 7년 전 스스로 공주 직위를 포기했으니까요.”
트리샤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트리샤는 왕족으로 태어나 평민들이 누릴 수 없는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맛있는 음식, 포근한 잠자리, 편한 옷은 물론이고 어딜 가나 트리샤는 존중을 받았으며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었다.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고 앞으로의 미래도 트리샤가 원하고 꿈꾸는 대로 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세상엔 대가 없는 행복은 없다.
트리샤가 누리던 모든 사치의 대가는 바로 자유였다.
“앞날이 창창한 18세의 나이에 무려 15살이나 많은 남자랑 결혼을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도망쳐 나왔어요. 물론 그게 잘못된 것이란 것은 알아요. 하지만 전 정말로 하기가 싫었어요.”
트리샤는 약혼식 전날 그냥 무작정 뛰쳐나왔다.
트리샤는 운 좋게 고디바 왕국을 벗어났고, 황국에서 새 신분을 얻어 모험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자유엔 고통과 후회와 책임이 따랐다.
타지에서 모험가 생활을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 거의 며칠간 볼일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침대에선 벌레가 기어 다녀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것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
음담패설은 기본에 사기도 당해보고, 같은 동료에게 뒤통수를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
동료들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을 땐 정말 포기할까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에 책임을 지고 꿋꿋하게 헤쳐 나갔다.
그 결과 성물 사냥꾼이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로 꽤 유명한 모험가가 되었다.
“처음 성물을 팔았을 때, 제게 떨어진 돈이 정확하게 41골드 23실버였어요. 그리고 그 돈 전부를 고디바 왕국에 기증했죠. 철없던 어린 날의 사죄를 위해서요.”
트리샤는 그날을 회상했는지 헛웃음을 쳤다.
“그런데 그 돈이 제 계좌로 다시 고스란히 들어온 거예요. 그때 알게 됐죠. 제가 운이라고 생각했던, 약혼식 전날 밤의 도주가 사실 아빠의 마지막 배려이자 사랑이었다는 것을 말이죠.”
트리샤는 갑자기 코를 쓱 닦더니 씨익 웃었다.
울지 않기 위해 웃는 것 같았다.
“뭐, 당연히 그 돈은 다시 왕국의 복지 재단에 기부해 버렸지만요. 그리고 매년 기부 액수를 늘리고 있어요. 잘살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이죠.”
티그리스는 트리샤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아이참. 배려심도 넘치셔라.”
트리샤는 눈물을 조금 닦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절 공주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진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모두 밝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알겠습니다.”
“존댓말도요. 아이린 씨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보셨죠? 티그리스 경이 갑자기 제게 존댓말 하니까 입도 못 열고 눈치 엄청 봤잖아요.”
티그리스는 잠시 고민했다.
본래라면 자신의 신분을 숨긴 왕족이나 황족의 경우엔 단둘이 있을 때도 예법에 따라 존댓말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트리샤의 경우엔 달랐다.
트리샤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게 아니라 아예 공주 직위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니 트리샤의 요구를 받아주는 것이 맞았다.
“그러지.”
“고맙습니다. 티그리스 경.”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트리샤는 헛기침을 하더니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저를 왜 찾으셨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티그리스는 깍지를 끼고 잠시 생각했다.
앞으로 트리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말이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다시 생각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시려고 그렇게 생각하실까?”
“넌 조만간 죽을 수도 있다.”
“······딸꾹!”
트리샤는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에 놀라 딸꾹질을 했다.
티그리스가 트리샤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티그리스는 회귀 전을 포함해 트리샤를 본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트리샤는 티그리스가 제국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황금 기사로 활동할 당시에 이미 죽었기 때문이었다.
트리샤에 대한 이야기도 밤 여우와 드워프 말레우스에게 거쳐 들은 것이 전부였다.
“뭐······ 뭐. 혹시 그······ 딸꾹! 예언가라도 되시나? 그래서 딸꾹!”
티그리스는 서재에 비치되어 있는 물 주전자와 컵을 가져와 트리샤에게 따라주었다.
“딸꾹! ······감사합니다.”
“몇 달 전 포그우드에 다녀온 적은 있지만 미래를 본 적은 없다.”
예언가는 실제로 있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보다 예언가는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예언가는 미래를 엿보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신비의 땅에 자주 들락날락하하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신비의 땅은 시공간이 뒤섞인 곳이다 보니 현재, 과거,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비밀과 미래를 엿보는 것에 중독된 모험가들이 예언가라고 자칭하며 미래와 과거의 정보를 팔아넘겼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미친 짓이었다.
신비의 땅의 생환율은 30%도 채 되지 않는다.
설령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신비의 땅에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하고 늙어 죽었다.
트리샤는 물을 전부 비운 후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 그럼 어떻게 제가 죽는다고 그렇게 확신하시는데요?”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굉장히 위험한 사람들이 너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저를 노린다고요? 뭐 때문에요?”
“네 성물들 때문이다.”
성물들은 웬만하면 국가가 보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마법 술식 없이 벼락을 만들어 내리쳐 버리거나, 한번 베이면 그 어떤 치유 마법이나 신성 마법으로도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만들거나, 심지어 한번 찔리면 반드시 죽는 능력이 있는 성물들도 있다.
이런 위험한 성물들이 끔찍한 살인범이나 적국에 손아귀에 들어가면 굉장히 위험했다.
그래서 황국은 <창을 제일 안전하게 쓰는 방법은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따라, 트리샤처럼 성물을 찾는 모험가들에게 비싼 가격에 매입하여 보고에 집어넣어 보관했다.
그런데 트리샤는 달랐다.
트리샤는 성물을 많이 발견하여 황국에 많이 팔아넘기기도 했지만, 보관하고 있는 것도 많았다.
공식적으론 다섯 개이지만 그보다 더 많을 것이 분명했다.
“제가 그런 대비책도 안 뒀겠어요? 고대 마법이 걸린 배리어 아티팩트만 무려 5개가 있고, 아공간 주머니도 보안 마법이 걸려 있어서 제가 아니면 열 수도 없게 구성되어 있다고요.”
트리샤가 그 어떤 자구책을 준비했든 간에 결과는 명확했다.
트리샤는 죽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티그리스도 누가 범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당시 말레우스가 트리샤가 어떻게 그리고 왜 죽었는지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올해 안에 죽는다는 것 그리고 암살을 당한다는 것 두 개만 알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준비한 서류들을 꺼내 트리샤 앞에 놓았다.
“최근 너를 대상으로 들어온 암살 의뢰들이다. 총 21건이지. 목표는 모두 동일하다. 널 죽이고 네가 가진 성물들을 모두 탈취할 것.”
이것들은 티그리스가 개인적으로 정보 길드에 문의해 얻어낸 것도 있지만, 인퀴지터가 구해다 준 것들도 있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꽤 유명한 암살자들도 네 목을 노리고 있다. 예전부터 꾸준히 너를 노리는 귀족들은 있었지만, 이렇게 많이 암살 의뢰가 들어온 경우는 처음이지. 네가 자구책을 많이 준비했다고 하지만 과연 이 많은 암살자들의 위협으로부터 너를 지킬 수 있을까?”
트리샤는 말없이 티그리스가 건넨 서류들을 한 장 한 장 읽었다. 뒷세계에서 유명한 암살자들은 죄다 트리샤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중구난방처럼 보이지만 네게 암살 의뢰를 넣은 브로커들의 이름이 겹친다. 게른, 티아고, 마야. 이 세 사람은······.”
“모두 길리온 왕국하고만 거래를 하는 브로커들이죠.”
이 사람들은 단순히 암살 의뢰만 넣는 브로커들이 아니다.
수인들을 사고파는 블랙마켓의 브로커들이었다.
이들의 행적을 리베르는 계속 쫓고 있었는데, 이렇게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길리온 왕국이 설마 내 정체를······?’
티그리스는 트리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예상이 갔다.
자신이 리베르 소속인 것이 탄로 난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티그리스는 본래라면 속 시원하게 그게 아니라고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트리샤가 아니라 트리샤가 들고 있는 성물들이었다.
하지만 레인로버 황녀가 테호와의 협정이 끝날 때까지만 수인족들을 자극하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참고 있었다.
“대상은 너뿐만이 아니다. 다른 모험가나 용병들 중에 성물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면 모두 성물을 탈취하는 의뢰가 들어와 있지. 암살은 부수적인 것이다.”
티그리스는 최근 1년 사이에 성물을 갖고 있는 용병과 모험가들의 이름 목록을 트리샤 앞에 놓았다.
트리샤가 알고 있던 모험가들과 용병들도 더러 있었다.
“마르코에 체니까지······.”
“따로 조사를 해보고 싶다면 해봐도 좋다. 그러나 황도를 직접 돌아다니는 것은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군.”
트리샤는 티그리스의 눈을 보며 말했다.
“제게 뭐를 원하시는 건가요?”
이런 고급 정보를 트리샤에게 건넸다는 뜻은 트리샤에게 뭔가를 바라는 게 있다는 것이었다.
티그리스는 바로 본론을 말하기로 했다.
“이 정보와 안전을 대가로 네게 의뢰를 하나 맡기고 싶다.”
“의뢰요? 혹시 원하는 성물이라도 있으세요?”
“혹시 애통의 반지를 구해다 줄 수 있나?”
모험가에게 성물을 찾아달라고 의뢰를 넣는 것은 아예 없는 일은 아니기에 트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통의 반지라면······ 얼마 없는 해주용 성물이네요? 혹시 주변 사람 중에 저주에 걸리신 분이 있나요?”
티그리스는 애통의 반지가 있는 위치를 알고 있다.
길리온 왕국과 루체트 황국 국경에 위치한 뱀이 지나간 절벽 근처에 애통의 반지를 얻을 수 있는 던전이 있다.
티그리스가 직접 움직이고 싶지만, 티그리스가 황국 밖을 움직이는 순간 길리온 왕국을 포함한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의 레이더망에 포착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믿고 맡길 만한 유능한 모험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트리샤였다.
“아니, 정확한 것은 설명해 줄 수 없지만, 조만간 쓸 일이 있다.”
“뭐 티그리스 경이 쓸데가 있다고 하시니 쓸 일이 있겠죠. 그런데 어떻게 제 안전을 보장해 주실 거죠?”
“네게 걸린 암살 의뢰들도 모두 처리해 주겠다.”
“어떻게요?”
“암살을 받아들일 암살자가 없다면 암살 의뢰는 끊기겠지.”
이 암살자들은 죄다 수배범들이다. 티그리스는 이 암살자들의 위치를 알아내는 순간 직접 찾아가 목을 베어 죽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티그리스가 트리샤를 보호한다는 소문이 돌면, 트리샤를 향한 암살 의뢰도 뚝 끊기게 될 것이다.
대신 더 위험한 로타와 아르펨의 관심을 끌게 될 수도 있지만, 현재 발이 자유로운 사람은 레비스와 아르펨뿐이다.
그런데 아르펨은 아직 이 행성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라 함부로 몸을 드러낼 수 없다.
만약 아르펨이 모습을 드러내면 티그리스가 당장에 베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약해진 상태니 오히려 모습을 드러내면 더욱 좋다.
레비스의 경우엔 잠든 로타를 대신해 권속들의 연락 담당을 하고 있다곤 하지만, 레비스는 티그리스의 대적자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당장 트리샤에게 신경 쓸 틈이 없다는 것이다.
“흠······.”
트리샤는 깊게 고민하는 듯했다.
만약 이 의뢰를 받아들인다면 암살 의뢰들을 모두 처리함과 동시에 티그리스의 명성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어마어마한 혜택이었다.
“혹시 언제까지 애통의 반지를 구해다 주면 되죠?”
“늦어도 8월 중순까지다.”
“엑. 엄청 빠듯한데요?”
“불가능하다고 하진 않는군.”
트리샤는 애통의 반지의 던전 난이도와 입장 조건을 알고 있었다.
얼마 없는 해주의 성물이기 때문에 혹시 필요하면, 바로 공략해서 사용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공략 난이도는 중에서 중상 수준.
트리샤라면 공략에 걸리는 시간이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던전의 입장 조건도 고리 3개 이상 갖고 있는 성인 한 명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트리샤에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가 성물 사냥꾼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겠죠.”
트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돈이 아니라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티그리스 경이 직접 제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건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거니까요.”
물론 그것만이 아니었다.
트리샤는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티그리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 생각이었다.
티그리스는 황국의 중심이 될 인물이 확실했기 때문에 이런 사람과 인연을 터놓으면 리베르나 트리샤의 입장에서 모두 좋을 테니까.
“그런데 제 안전은 어떻게 보장해 주실 건가요? 그 비밀 경호원들을 붙여주시는 건가요?”
역시 트리샤는 아이린을 지키는 비밀 경호원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 집에 손님용 빈방이 몇 개 있다. 하나를 내어주지.”
“오! 그렇게까지 바라지 않았는데. 호텔비도 굳고 좋네요.”
트리샤는 물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이제 제가 티그리스 경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듣기론 마법을 없애는 검술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변이체를 상대하셨을 때요. 제가 뭐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날아오는 화염구를 막 휙휙! 찔렀더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혹시 그게 사실인가요?”
“엘프들의 주문 사냥의 술을 이야기하는 건가?”
“오! 맞아요! 맞아. 그거예요. 제가 용의 시대에서 엘프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검술을 사용하더라고요. 그게 진짜인지 궁금해서 찾아왔거든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게 왜 궁금한 거지?”
“제가 던전을 하나 공략하려고 하는데······ 아 혹시 성좌의 던전에 대해······ 많이 아시겠구나.”
트리샤는 티그리스가 성좌와 관련된 서적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무튼, 제가 들어갈 성좌의 던전의 입장 조건이 엘프의 검술을 익힌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서요. 혹시 그 주문 사냥의 술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흠···.”
티그리스가 고민하기 시작하자 눈치 좋게 트리샤는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공짜는 아니죠! 애통의 반지뿐만이 아니라 다른 성물이 필요하시면 두 개, 아니, 세 개도 찾아드리겠습니다!”
“일단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엘프들이 사용하고 있는 주문 사냥의 술은 검술이 맞긴 하지만, 원래 인간의 몸으로 배울 수 있는 검술이 아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엘프들의 몸은 인간과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많이 다르다.
체온은 인간의 체온보다 평균적으로 8도에서 10도 정도 낮고, 마력 회로의 위치도 모두 다르며, 고리가 생겨나는 위치도 다르다.
겉모습만 서로 비슷할 뿐이지 내부는 아예 다른 종족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하지만 티그리스 경은 주문 사냥의 술을 사용하셨잖아요.”
“난 엘프들이 사용하던 주문 사냥의 술을 인간의 몸에 맞게 탈바꿈시켜 사용한 것이다. 오리지널을 변질시킨 것이기 때문에 진짜 엘프들이 사용하던 주문 사냥의 술의 것보단 못하지만, 형태가 보이는 마법들은 소멸시킬 수 있지.”
“그럼 그 주문 사냥의 술을 어떻게 익히셨는데요?”
“그건 비밀이다.”
티그리스는 성물 ‘우로스’를 얻기 위해 성좌의 시련에 들어갔을 때 엘프들이 사용하던 주문 사냥의 술을 보고 익혔다.
이걸 설명하려면 티그리스가 회귀했음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알려줄 수 없었다.
“왜 알려주실 수 없는······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례했군요.”
트리샤의 입장에서 티그리스가 주문 사냥의 술을 익혔다는 것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 고마움도 모르고 왜 더 알려주지 않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럼 주문 사냥의 술을 가르쳐 주시는 것도 불가능하겠죠?”
노르베르드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면 가헌에 위배되기 때문에 가르쳐 줄 수 없지만, 티그리스의 주문 사냥의 술은 가문의 비전이 아니기 때문에 알려줄 수는 있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내가 익힌 주문 사냥의 술은 엘프들의 것과 차이가 있다. 이걸 익혀도 네가 원하는 던전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티그리스가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자 트리샤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래도 엘프들의 검술에 제일 가까운 거잖아요! 일단 배워보고 싶어요.”
확실한 아군의 전력을 상승시키는 것은 확실한 적을 죽이는 것만큼 중요하다.
트리샤는 말레우스가 젊은 나이에 죽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선하면서도 재능 있는 모험가였으니, 주문 사냥의 술을 가르쳐 주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문제는 트리샤가 주문 사냥의 술을 배울 수 있을 만큼 검술에 재능이 있는가였다.
주문 사냥의 술은 엘프들 중에서도 소수만이 사용할 수 있던 고난이도 검술이었다.
그 검술을 인간의 몸에 맞게 개조했으니, 난이도는 한층 더 올라갔다.
웬만한 재능 있는 검술가도 이 검술의 묘리를 이해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럼 일단 일어나지. 대가를 치르건 말건 일단 자네가 주문 사냥의 술을 익힐 수 있는 재능이 있는지 확인부터 해봐야 하니까.”
“오! 진짜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네가 아이린이나 샤를로트, 리니아 수준의 재능만 있다면 1년 안에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매일같이 내게 검술 지도를 받아야 하겠지만.”
트리샤는 순간 멈칫했다.
뭔가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눈치였다.
“음······.”
“왜 그러지?”
“아뇨. 일단 가죠. 혹시 모르니까요.”
잠시 후······.
트리샤는 땀을 뻘뻘 흘린 채, 테라스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헉···헉···. 다 확인하셨나요······?”
“그렇다.”
“······주문 사냥의 술을 익히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티그리스는 곧바로 진단을 내렸다.
“5년.”
“으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