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 생일파티(2)
시간을 되돌려 황녀의 생일 파티가 진행되기 전날 점심 무렵.
티그리스의 수업이 있는 화요일이었기에 티그리스는 시간에 맞게 제국 대학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집무실 문 앞에 샤를로트나 아이린이 아닌 라칸이 서 있었다.
“어? 교관님!”
티그리스는 라칸이 갑자기 찾아올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라칸과 티그리스의 관계는 생각보다 담백하다.
필요하면 부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논의를 하는 직장 동료와 같은 사이랄까?
라칸이 이렇게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퀘스트와 관련된 일임이 분명했다.
티그리스는 집무실 문을 열고 말했다.
“일단 들어가지.”
“아, 예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집무실 문을 닫고 라칸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저 퀘스트가 떴습니다.”
티그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라칸은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먼저 해결하고 본다.
그러나 이렇게 티그리스를 급박하게 찾아왔다는 것은 라칸이 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무슨 퀘스트지?”
“······듣고 화내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진짜 퀘스트일 뿐이니까요.”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티그리스는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말해라. 화를 내지 않을 테니.”
“저 내일 황녀 전하 생일 파티에서 웃통을 까야 합니다.”
“······.”
티그리스는 욕은 하지 않았다.
그저 무섭게 라칸을 노려봤다.
“황실 모욕죄는 사형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데 무려 5,000포인트나······.”
“5,000포인트를 얻고 죽을 건가?”
“아뇨······. 그건 아닌데······.”
지금까지 라칸이 티그리스에게 퀘스트를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서열전에서 아이린과 같은 팀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물어보는 것 정도였다.
오히려 티그리스가 라칸에게 부탁하는 일이 많았다.
케일 자작을 찾아달라거나, 트리샤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를 찾아달라는 것처럼 오직 라칸만이 가능한 일들을 부탁했다.
라칸은 티그리스의 부탁을 제대로 수행해주었고, 티그리스는 포인트와는 별개로 라칸에게 굉장히 고마웠다.
그래서 티그리스는 라칸이 부탁해 오는 일들을 웬만하면 도와주려 했었다.
“황녀 전하의 생일 파티는 단순한 연회 자리가 아니다. 이번 생일 파티는 혼란스러운 황국을 하나로 단결시키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
키메라 실험실 사건과 흑토 지대 반란 모의 사건으로 인해 황국 내부는 굉장히 혼란스러워졌다.
사실 내부가 썩어가고 있었는데 이제야 막 알아차렸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황국의 분위기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게다가 흑토 지대의 토호들과 귀족들은 민심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하게 반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토 지대의 안정화도 생각보다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 연회를 통해 황제 폐하께선 흑토 지대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군대를 지방 영주들에게서 받아올 생각이시다. 그런 은밀한 정치·외교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네가 그런 해괴망측한 짓을 저지르면 나도 도와줄 수 없다.”
“저도 알고 있죠. 저도 미치지 않고서야 연회가 이뤄지고 있는 와중에 웃통을 벗을 리가 없잖아요.”
“그럼 퀘스트를 포기하는 건가?”
“아뇨. 그건 아니에요.”
티그리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뭔지 잘 모르나?”
“아뇨.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저도 이 퀘스트가 떴을 때, 당연히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저번 주에 길을 지나가다가 이걸 발견한 거예요.”
라칸은 호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공고문 하나를 꺼낸 후 펼쳐 보여줬다.
[연극 ‘페르셴과 아드네’ 오디션 공고!]
5대 비극 ‘페르셴과 아드네’의 단역 배우를 모집합니다!
공연명 : 페르셴과 아드네.
공연 장소 : 봄의 궁전 연회장.
공연 시간 : 6월 11일 수요일.
연습 시간 : 맡은 배역에 따라 다름.
배역 : 일반 병사, 아드네의 시녀, 바바리안 병사, 마법사, 동네 거지 등.
* 신분이 확실한 분들만 받으니 신분증 또는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의 추천서를 반드시 가져올 것.
“설마 이 오디션에 참가한 건가?”
“네. 그리고 단역 배우 역을 따냈고요.”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라칸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가 페르셴과 아드네의 목걸이인데, 하필 5대 비극 중 하나인 페르셴과 아드네의 연극에 참가하다니.
인생이란 게 어떻게 보면 잘 짜인 각본이 아닐까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게 지금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봄의 궁전 연회장에서 진행하니 경쟁률이 높았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배역을 따낸거지? 아니, 그것보다 신분은 어떻게 증명했지?”
“제국 대학 학생증을 내니까 곧바로 통과시켜 주더라고요. 그리고 단장님이 제 얼굴을 바로 알아보시던데요?"
“널 알아봤다고?”
“네. 저 신문에 아주 잠깐 실린 적 있잖아요. 그때 케일 자작을 잡아냈을 때요. 그거보고 알아보셨대요.”
“귀찮게 굴진 않던가?”
“아, 뭐 티그리스 교관님에 대해 물어보거나 그러지 않았냐고요? 의외로 그런 건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연극 준비하느라 바빠서 저한테 신경 쓰시지도 못했고요.”
하긴 당장 며칠 후에 곧바로 연극을 시작하는데 라칸에게 신경 쓸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오디션은 어떻게 합격한 거지? 아무리 네가 제국 대학 학생에 조금 유명하다고 하더라도 연기 실력이 출중한 것은 아니지 않나?”
“연기 실력이 그렇게 중요한 배역이 아니라서요. 오히려 봄의 궁전에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신분을 가진 사람을 구하는 게 어렵다고 했어요. 물론 1,000포인트로 ‘하급 연기’를 구매한 덕분도 있는 것 같아요.”
티그리스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라칸이 매사에 진지하고 열심히 하는 자세는 정말 보기 좋긴 했으나 가끔 아찔할 때가 있다.
“인퀴지터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
“네. 나달 님께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별말 없으시던데요?”
하긴 티그리스가 나달의 입장이더라도 별말이 없었을 것이다.
현재 라칸의 위치는 굉장히 애매하다.
인퀴지터 요원이긴 하지만 실제로 임무를 시키기엔 아직 무력적인 측면도 약하고, 요원 교육이 덜 되었기 때문에 인퀴지터의 임무를 맡길 수 없다.
그리고 인퀴지터의 임무 특성상 누군가로 위장하는 임무도 있었기에, 라칸이 연극을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나저나 네가 맡은 배역 중에 웃통을 벗을 수 있는 역할이 있나?”
라칸은 씨익 웃었다.
“저 바바리안 전사랑 지나가는 시민 역할이에요.”
“기어코······.”
티그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문제는 해결된 거 아닌가? 그럼 왜 날 찾아온 거지?”
“자초지종을 미리 말씀드려야 제가 내일 무대 위에 나타나도 안 놀라실 것 같아서요.”
티그리스는 긴장하며 들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뭔가 굉장히 중요한 부탁을 할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티그리스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니.
‘회귀 전하곤 확실히 다르군.’
회귀 전의 라칸은 티그리스에게 이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티그리스에게만 호의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 애초에 사람을 잘 믿지 못해 웬만한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이야기까지 모두 알려주다니······조금 불안했다.
지금의 라칸은 회귀 전에 비하면 조금 유한 부분이 있다.
회귀 전의 라칸은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 냉철하고 리더십 있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지금은 아직 어린아이 티를 벗어내지 못했다.
물론 저번에 암살자들을 찾아낼 땐 꽤 리더십 있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많이 부족했다.
‘조급해하지 말자.’
라칸은 인퀴지터가 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앞으로 더 많은 일을 겪으면 라칸은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잘 성장하기만 하면 된다.
“알겠다. 그럼 그 외에 다른 점은 없나? 극단에 무슨 문제라도 있거나?”
“아뇨. 지금까진 특별한 문제는 없었어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바로 내게 말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황녀 전하께 말씀드렸나?”
라칸의 눈이 커졌다.
“어······?”
* * *
레인로버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예전에 라칸에게 노출증이라고 말했던 게 좀 미안해지네요.”
“라칸도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나저나 그 퀘스트랑 시스템이란 것을 티그리스 경이 주신 인명록으로 확인하긴 했는데······ 진짜 그게 말이 되는 능력이 맞나요? 포인트로 포션이나 아티팩트를 만들어내고 기술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게?”
“저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현상이 확실하니 그리 믿을 뿐입니다.”
레인로버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뭐, 나중에 기회가 되면 라칸하고 대화를 좀 나눠봐야겠네요. 라칸의 능력의 범용성이 너무 뛰어나서 한계를 명확하게 알아봐야겠어요.”
“나중에 자리를 한번 마련하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저희 응접실에서 너무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제 슬슬 일어나죠.”
“예.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일어나 레인로버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인로버의 구두 굽이 생각보다 높아서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어······?”
레인로버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갑자기 현기증이 났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황녀님!”
티그리스는 재빨리 레인로버의 허리를 잡아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혔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조금 현기증이 났을 뿐이에요. 이 좁아터진 드레스를 입으려고 며칠 동안 밥을 굶다시피 했다 보니 많이 피곤해진 모양이에요.”
게다가 불철주야로 티그리스가 건네준 인명록과 회귀록을 첨삭하다 보니 기력이 많이 쇠했다.
“의사를 부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레인로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 의사가 필요한 게 아니라 초콜릿 빵이 필요해요. 진짜 배고파 죽을 것 같거든요.”
“나가서 먹을 것을 좀 구해 오겠습니다.”
“아뇨. 같이 나가요. 너무 오랫동안 응접실에 있어서 저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이 계실 거예요.”
티그리스는 레인로버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레인로버는 그런 티그리스의 부드러운 손길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살짝 아픈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티그리스가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 주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서 혈류가 갑자기 돌았다.
주륵-
“어······?”
티그리스는 코피를 흘리는 레인로버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그냥 여기에 잠깐 계십시오. 기력이 많이 쇠하신 것 같습니다.”
“······옙.”
티그리스는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문밖엔 시종장과 함께 레인로버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색감의 금발 머리의 사내가 있었다.
해리 데 루체트 황태자였다.
티그리스는 곧바로 예를 표했다.
“황금의 일족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니네. 오히려 내가 영광이지. 황도의 영웅을 보게 되었으니.”
해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티그리스의 어깨를 두들겼다.
“내 동생은 지금 이 안에 있나?”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몸이 별로 좋지 못한 모양입니다.”
“몸이?"
“예. 기력이 쇠하셔서 잠시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그럴 만도 하지. 그 드레스를 꼭 입고 말겠다고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했거든.”
해리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구한테 그 예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원래 저 왈가닥이 저런 불편한 드레스를 입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네?”
“아니네. 내가 헛소리를 했군. 나중에 레인로버한테 맞겠어.”
해리는 시종장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시종장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뒤 레인로버가 쉬고 있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시간이 되면 잠깐 이야기나 나누지. 레인로버는 시종장이 알아서 해줄 걸세.”
티그리스는 레인로버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시종장이라면 티그리스보다 훨씬 나은 대처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해리와 티그리스는 연회장으로 나왔다.
어느새 신나는 음악으로 바뀌어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린, 샤를로트, 리니아와 트리샤는 한쪽 구석에서 음식이나 주워 먹고 있었다.
춤을 권하는 남자들이 올 때면 바로 거절하고 얌전히 음식만 먹는 것이 그녀들답다고 생각했다.
해리는 샤를로트와 아이린을 보며 말했다.
“제자들을 훌륭하게 잘 키웠더군.”
“제가 한 것은 둘의 재능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것뿐입니다.”
“그래도 자네가 아니었다면 저 나이대에 고리 3개를 완성시킬 수는 없었겠지.”
해리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자네는 기사이니 군사학에 대해 잘 알겠지만, 난 이번에 처음으로 군사학을 공부했네. 내가 경제학, 건축학, 정치학, 제왕학 등을 배워봤지만 글로 배우는 군사학만큼 따분한 것은 없더군. 그래서 이번 파티가 끝나는 대로 흑토 지대로 향하기로 했네.”
“흑토 지대를 말씀이십니까?”
“금융을 배우려면 은행에 가야 하고, 정치를 배우려면 국무 회의장을 가야 하지. 말 그대로 군사학을 제대로 배우려면 전쟁터로 향해야 하지 않겠는가?”
티그리스는 솔직히 놀랐다.
티그리스가 알고 있는 해리 황태자는 전쟁을 웬만하면 피하려고 애를 썼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쟁터를 찾아서 나선다니······ 자신이 알던 해리 황태자가 맞나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가? 내가 전쟁터에 나갈 사람으로 안 보이는 모양이지?"
“아닙니다.”
“빈말은 하지 말게. 자네 말대로 난 전쟁터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니까. 난 지금까지 재상의 밑에서 펜대나 굴리며 재정 업무만 해왔네. 돈 놀음이나 하던 내가 갑자기 한창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흑토 지대로 간다고 하니 놀랄 만도 하겠지.”
“왜 군사학을 배우려고 하시는 겁니까?”
해리 황태자는 샴페인을 한 모금 다시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루체트 황국은 강력한 군권을 바탕으로 세워진 국가가 아니네. 황실의 역할은 지방에서 싸움이 나면 중재를 해주는 역할이었어. 마치 결투의 입회인의 역할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네. 저들이 먼저 이빨을 드러냈고 우리는 단죄를 하러 가는 모양새지. 이건 단순한 전쟁이 아닌 황국이 철퇴를 들고 흑토 지대의 돼지 놈들의 머리를 으깨러 가는 거지.”
티그리스는 해리 황태자의 입이 이렇게 험한 줄은 처음 알았다.
해리 황태자는 급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어도 말을 가려가며 했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당연히 알겠지만 이번 흑토 지대 안정화 이후에 큰 전쟁이 하나 더 남았네.”
바로스 후작과 길리온 왕국.
흑토 지대의 루카스와 함께 황국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놈들이었다.
토드 황제는 흑토 지대에서 끝날 생각이 아니었다.
“난 그 전쟁이 진짜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지.”
그 기회가 황권 강화의 기회임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상비군의 숫자를 늘릴지 말지를 놓고 지금까지 지방 영주들의 눈치를 봐왔다면 지금은 달랐다.
지금 만약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다면 흑토 지대의 귀족들 꼴이 날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군사학을 공부하는 것일세. 이 정도면 답변이 되었는가?”
티그리스는 해리 황태자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해리 황태자는 전쟁을 피하지 않을 것임을 티그리스에게 말했고, 자신의 뜻에 동조해 줄 것인지 말 것인지 묻는 것이었다.
‘내가 알던 해리 황태자와는 많이 다르군.’
해리 황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해리 황태자는 지금처럼 눈빛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생기를 잃은 듯한 표정으로 어지러운 황국을 되살리기는커녕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빅토리에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사내의 심장에 야망이 피어오른 것일까?
“해리 황태자님께선 언제 그 전쟁이 터질 것으로 보십니까?”
“4년 후일세.”
해리 황태자의 눈엔 확신이 가득 차 보였다.
“4년 후면 마침 제 제국 대학 검술 교관임기가 끝나는 시기이군요.”
“황국을 위해 일해줄 생각이 있는가?”
“전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해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해리는 이런 확답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레인로버가 남편감 하나는 잘 보는군.”
“······.”
“자네도 당황하긴 하는군.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황실의 6촌 간 결혼 금지 법안의 개정 논의가 이뤄지고 있네. 바로스 후작과 길리온 왕국에게 뒷돈을 처먹은 놈들이 조금 발목을 잡고 있긴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순 없는 법이지.”
티그리스도 사실 레인로버와의 결혼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이상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더 말하면 자네를 곤란하게 만들 것 같군.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 황제 폐하 납시오!
환관의 말에 해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아, 그리고 좀 용기를 내게. 30분 동안 응접실에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게 말이 되나 싶군. 보는 내가 답답했다네.”
티그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 * *
한 사내가 화장실에 앉아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앞엔 룩스의 성배를 축소한 듯한 작은 유리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여신님이시여 제가 앞으로 지을 죄를 용서해 주시고, 사악하고 간악한 자들의 마수의 손길에서 선량한 자들을 구해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십시오. 작은 성냥이 방을 모두 밝히는 빛이 되듯 제 몸을 불살라 저 이단 무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옵소서.”
사내는 기도가 끝나자 잔을 들어 잔에 들어 있는 물을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유리잔을 통째로 입에 넣었다.
와그작- 와그작-
부서진 유리가 입안을 헤집으면서 피가 흘러나왔고, 사내는 그 피가 섞인 물을 신성한 포도주처럼 꿀꺽 삼켰다.
사내는 부서진 피 묻은 유리 조각들을 뱉어내 휴지에 감싸 쓰레기통에 던져서 버린 후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한 사내가 뱃살을 출렁거리며 달려왔다.
“야! 그······ 야! 넌 도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거냐?!”
“긴장돼서 화장실을 좀 다녀왔습니다.”
“젠장. 이래서 초짜들이란! 그리고 너 입에 피는 뭐야?!”
“혀를 씹었습니다.”
“네가 말할 게 뭐가 있다고 어휴······ 됐고 어서 옷이나 벗어. 이제 곧 연극이 시작된다. 그나저나 네 이름이 뭐지?”
사내는 웃통을 벗었다.
사내의 몸엔 바바리안 특유의 기괴한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비스코입니다.”
“그래. 어서 가라. 그런데 너 문신이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이거 제대로 그려진 거 맞아?”
“네. 맞습니다.”
“다른 녀석들하곤 좀 다른 것 같은데······ 단장님한테만 걸리지 마라. 노발대발할 테니까.”
비스코는 그대로 자리를 떠 자신들처럼 옷을 벗고 있는 사내들에게 향했다.
비스코는 사내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한 사내 옆에 자리했다.
라칸이었다.
* * *
라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에 미친 듯이 뜨는 메시지 때문이었다.
[조금 전에 바꾼 문신]
[평소의 비스코가 서 있는 자세와 조금 다르다.]
[비스코는 오른손잡이인데 무기를 왼손에 들고 있다.]
[평소의 겁먹은 표정과 전혀 다르다.]
탐색 결과
1. 비스코로 변장한 사내.
[신규 퀘스트!]
비스코의 정체를 밝혀라!
보상 : 3,000포인트
기한 : 2시간 반.
라칸의 머리에 경종이 울림과 동시에 연극 막이 올랐다.
무대 앞에서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연극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