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화 – 생일파티(3)
라칸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했다.
라칸에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 반이지만 이것을 온전히 사용할 수는 없다.
바바리안 전사와 지나가는 시민 역할도 해야 하고, 수시로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분장도 새로 고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얼추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2시간가량.
2시간이면 티그리스에게 비스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려줄 시간은 충분히 된다.
그러나 단순히 비스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비스코가 노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젠장 은사만 들고 있었어도.’
라칸은 인퀴지터의 비밀 요원 신분이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인퀴지터임을 들키면 안 된다.
봄의 궁전에 들어올 때 경비들이 모든 아티팩트와 성물을 검사하기 때문에 은사를 어쩔 수 없이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루비 목걸이는 성문 앞 경비들과 얘기가 돼서 들고 오긴 했는데, 지금 중요한 것은 소통 수단이었다.
라칸은 비스코를 흘금 봤다.
무슨 이상한 짓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녀석은 가만히 서 있었다.
‘이놈이 노리는 게 도대체 뭘까?’
이 녀석은 천지에 황금 기사들과 철혈 마법사들이 깔려 있는 이 봄의 궁전에 완벽하게 잠입한 인물이다.
당연히 수준이 높은 마법사거나 기사이거나 암살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 녀석이 왜 하필 비스코로 잠입했는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라칸은 일단 비스코가 평상시에 어떤 친구였는지 떠올렸다.
비스코는 라칸과 같은 평민 출신으로 딱히 연극에 꿈이 있던 친구는 아니었다.
- 나 황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눈으로 보고 싶어.
흑토 지대 쪽에서 19년을 농사지으며 살아온 이 순박한 시골 청년은 단순히 황궁을 직접 눈에 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상경한 녀석이다.
라칸은 미소가 순박한 이 청년이 마음에 들었고 연습이 끝나고 쉴 때마다 종종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흑토 지대가 전쟁이 많은 동네인 것은 맞긴 하지만 비스코가 살던 파포스 마을은 워낙 구석진 곳에 있어서 전쟁의 화망에서 많이 벗어난 지역이라고 말했다.
그 외에 세금을 걷으러 오는 세수관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남동생이 얼마나 말을 안듣는지, 상경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무려 5년 동안 비누를 만들어 판 일, 글을 몰라 처음 빅토리에에 올라왔을 때 헤맸다는 일 등 소소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비스코의 인생사는 향기로운 흙냄새가 났다.
라칸은 지금의 비스코를 봤다.
녀석은 긴장되면 말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녀석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그냥 가만히 구석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라칸은 놈의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지?’
키나 근육 발육 상태, 손의 흉터까지 모조리 다 비스코였다.
아주 작은 습관의 변화까지 캐치할 수 있는 라칸의 ‘상급 탐색’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비스코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저 문신.’
만약 비스코를 완벽하게 따라 하고 싶었다면 문신까지 완벽하게 따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비스코의 문신은 라칸이나 다른 사람의 것과 살짝 달랐다.
물론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갈 수준의 변화였지만, 비스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으니 저 문신의 변화도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2시간 반은 라칸이 홀로 움직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라칸이 자주 밖으로 돌아다니면, 놈이 의심을 할 수 있다.
티그리스나 황녀, 베르강처럼 거물이 직접 움직여도 문제다.
녀석이 어떤 수를 감추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이상 눈에 띄게 움직이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렇다면 눈에 크게 띄지 않고 라칸의 수사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데.
그때, 무대 감독이 단역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바바리안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준비!”
라칸의 등에서 땀이 흘렀다.
만약 지금 비스코가 난동을 부리거나 이상한 짓거리를 하면 라칸은 막을 수 없다.
‘일단 이번만 어떻게든 넘긴다.’
라칸은 모형 칼을 꽉 쥐었다.
무대 감독의 큐 사인이 들어갔다.
“출발!"
라칸은 하급 연기를 펼치며 무대 위로 달려 올라갔다.
리허설 할 때는 의자에 사람들이 텅텅 비어 있어서 몰랐는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자 중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라칸은 일단 필사적으로 티그리스를 찾았다.
티그리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벽에 볼록 튀어나와 있는 블록형 좌석에 앉아 황녀와 함께 연극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덤덤한 것으로 보아하니 아직 비스코가 이상하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라칸은 일단 시나리오대로 바바리안 대장 ‘미사트’의 뒤에 섰다.
라칸이 해야 할 일은 미사트의 독백이 끝나면 고함을 지르며 미사트의 뒤를 쫓아가는 것이었다.
라칸은 놈을 흘금 봤다.
놈은 그래도 시나리오를 익히긴 했는지 제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검을 잡은 손이 문제였다.
바바리안들은 모두 검을 오른손으로 드는 것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그때, 비스코의 옆에 있던 토미가 작게 중얼거렸다.
“야. 비스코. 오른손. 오른손.”
“아.”
비스코는 오른손으로 검을 옮겨 잡았다.
‘마법진?’
아주 잠깐이었지만 라칸은 분명히 봤다.
저 녀석의 왼 손바닥에 기묘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녀석이 왼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손바닥에 그려진 기묘한 마법진을 감추기 위함이었던 것이었다.
라칸은 재빨리 머릿속을 뒤졌다.
저 마법진이 무슨 마법진인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라칸은 기억을 뒤져봤지만 무슨 마법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너무 짧기도 했고 각도가 좋지 못해서 파편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젠장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최소 5서클 마법진이라는 것이다.
마법의 서클은 마법을 담을 수 있는 원.
즉, 서클의 개수에 따라 달라진다.
저 작은 손바닥 안에 분명 원 다섯 개가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하급 수사 메모장이 있어서 다행이야.’
라칸이 방금 본 파편적인 마법진이 분명히 수사 메모장에 담겨 있을 것이다.
티그리스에게 그림을 그려서 알려줘야겠다.
“저 간악한 페르셴의 목을 치러가자!”
미사트의 웅장한 독백이 끝났다.
“우와아아아!”
라칸은 정면을 보며 검을 하늘 높이 찌르며 소리를 질렀다.
라칸의 등에서 땀이 흘렀다.
미사트가 달려가자 라칸은 달렸다.
비스코도 라칸의 옆을 따라 잘 오고 있었다.
‘지금은 아닌 모양이군.’
아직 타이밍이 아니란 걸까?
그나마 다행이었다.
라칸은 무대 뒤로 향하기 전 티그리스의 얼굴을 흘금 봤다.
혹시나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티그리스의 눈은 라칸을 향해 고정돼 있었다.
하지만 워낙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 눈치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라칸은 분장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는 대로 티그리스에게 가기로 했다.
[퀘스트 성공!]
황녀의 생일파티 때 웃통 벗기.
5,000포인트 획득!
‘에잇 저리 치워!’
퀘스트 성공 메시지도 라칸의 긴장감을 덜어주진 못했다.
* * *
‘라칸이 조금 이상하군.’
티그리스는 퇴장하는 라칸을 주목했다.
라칸답지 않게 굉장히 긴장한 듯 보였다.
이런 무대가 처음이다 보니 긴장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자꾸 옆에 있는 사내를 의식하는 듯했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방금 라칸 봤어요? 되게 긴장해서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거?”
“아, 예․ 봤습니다.”
“오늘 연극 기대 이상으로 재밌네요. 알고 지내던 사람이 연극에 나오니까 언제 또 나올지 기다리는 맛이 있다랄까?”
“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굳은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무슨 문제 있어요? 티그리스 경?”
“음······.”
티그리스는 고민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라칸에게 찾아가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 볼지 아니면 가만히 있을지.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심증이기 때문에 티그리스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만약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레인로버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티그리스의 직감에 따르면 일단 움직이는 것이 맞았다.
티그리스는 고심 끝에 진실을 섞은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오늘은 레인로버의 생일이다.
오늘 제일 행복해야 할 사람이 괜히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뇨. 약간 고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요.”
“고증이요?”
“바바리안은 문신을 저렇게 피부에 덕지덕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결투에서 승리했을 때만 문신을 하나씩 새기죠. 그런데 저 일반 바바리안 전사부터 시작해서 미사트까지 문신이 큼직큼직하게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저건 고증 오류입니다."
레인로버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참 내 난 또 뭐라고. 연극인데 고증 오류가 뭐 어떻다고. 연극은 연극답게 봐야죠.”
“그냥 살짝 불편했을 뿐입니다.”
“됐네요. 나도 뭐 심각한 문제인 줄 알았네. 뭐, 그런데 그 점이 티그리스 경답기도 하고.”
‘일단 진위 여부부터 확인하자.'
티그리스는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설마 지금 단주한테 가서 따지려는건 아니죠?”
“······절대 아닙니다.”
“농담이었어요. 어서 다녀와요. 자리 오래비우면 혼낼 거예요.”
티그리스가 앉은 좌석은 벽에 붙은 블록형 2인용 좌석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티그리스는 문밖을 나선 뒤, 바로 옆 블록 좌석으로 향했다.
그곳엔 샤를로트를 포함한 네 명이 좌르륵 앉아 연극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바바리안들 중에 라칸 닮은 사람 있지 않았어?”
“어? 저만 그렇게 생각한 줄 알고 있었는데.”
“이제 웃통만 벗고 있어도 라칸이 보이는 지경에 이른 걸까?”
“그럴 리가요······.”
티그리스는 네 사람 옆에 다가왔다.
“어? 티그리스 님.”
“조용히.”
티그리스의 진지한 눈빛에 네 사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요?”
“아니, 확실한 것은 없다. 내 심증뿐이다.”
티그리스는 네 사람 중 트리샤를 보며 말했다.
“나머지 세 명은 여기에 있고, 트리샤 너는 무대 뒤편으로 향해서 라칸을 찾아라.”
“······라칸을요? 잠시만 그럼 그 우리가 말했던 라칸 닮았다던 사람이······.”
“아마 너희가 본 사람이 라칸이 맞을 거다.”
“세상에······. 왜 라칸이······.”
“그건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 일단 최대한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라칸에게 접선해 봐라.”
“라칸에게 가서 뭘 하면 될까요?”
“그냥 내가 보냈다고 말해라. 만약 무슨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가 무엇인지 듣고 네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면 알아서 처리해라. 만약 내 도움이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면 나를 찾아오도록. 알겠나?”
트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혹시 저만 말고 여기에 있는 샤를로트랑 아이린이랑 리니아도 데려가도 될까요? 저 혼자보단 이 세 사람이랑 같이 움직이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티그리스는 세 사람을 잠깐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판단이 그렇다면 그리해도 좋다.”
“예. 알겠습니다.”
* * *
라칸은 시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분장도 새로 고친 뒤 무대 뒤편으로 나왔다.
라칸이 무대 위로 올라오려면 4장이 시작되어야 하니까 약간 여유가 있었다.
라칸은 비스코를 흘금 봤다.
비스코도 지나가는 시민 역을 맡아 라칸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비스코는 양손에 장갑을 낀 상태였다.
‘혼자 두면 살짝 불안한데······.’
라칸이 잠시 나갔다가 온 사이에 놈이 무슨 짓거리를 저지를 수도 있었다.
고심은 길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알리는 게 우선이다.’
라칸은 비스코를 뒤로하고 무대 감독에게 찾아가 말했다.
“감독님.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빨리 다녀와라.”
“옙! 알겠습니다.”
라칸은 몰래 화장실을 지나쳐 무대 뒤와 객석을 연결하는 통로로 향했다.
통로 끝엔 경계를 서는 경비병들이 있었다.
‘아, 경비병이 있었지.’
객석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위층 사람들이기 때문에 테러나 각종 암살을 대비해서 무대 뒤편과 관객석이 연결되어 있는 통로는 경비병들이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라칸을 보자 곧바로 경계했다.
“무슨 일이지?”
“고생 많으십니다. 피오라 극단의 단역으로 일하고 있는 라칸이라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잠깐 밖에 나갔다가 와도 될까요?”
“······무슨 목적이지?”
라칸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티그리스에게 긴급하게 전할 말이 있다고하면 이 경비병들은 안 보내줄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비스코가 이상하니 경계 수위를 높여야 한다고 말하면 미친놈으로 볼 것이 뻔했다.
‘잠시만, 나 꽤 유명하지 않나?’
단주님이 라칸의 얼굴을 알아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경비병들도 라칸의 얼굴을 알고 있지 않을까?
라칸은 자신감 있게 빵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혹시 저 모르십니까? 저 라칸입니다.”
“······라칸? 라칸이 누구지?”
“그 있지 않습니까. 케일 자작도 잡아내고 키메라 실험실 찾는데 큰 공헌도 했었던 그 사람이요. 그게 바로 접니다.”
라칸의 당당한 자기소개에 경비병들은 살짝 벙쪘지만 두 사람은 자기 할 일에 집중했다.
“음······. 뭐, 그런 사람이 있던 것 같긴 한데. 근데 그게 너라고?”
“예. 맞아요. 이거 신문을 들고 다녀야 하나? 아, 아니지. 이거 보세요.”
라칸은 루비 목걸이를 꺼내 보여줬다.
경비병은 루비 목걸이와 라칸을 위아래로 훑었다.
“네가 라칸이 맞다고 치면 왜 여기서 단역으로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어······. 그게······.”
라칸은 여기서 티그리스의 이름을 팔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아니지 여기서 티그리스 교관님의 이름을 파는 게 맞다.’
여기서 라칸이 티그리스를 언급하면 경비병들은 진위 파악을 위해 티그리스에게 직접 물어볼 것이고, 티그리스와 접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티그리스 님이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 저를 이 피오라 극단에 심어두셨습니다.”
“무슨 일?"
“네. 혹시나 무대 뒤에서 테러라든가 암살기도라든가 뭐 이런 거 있잖아요.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서 저를 심어두셨다는 말이죠.”
라칸은 자신이 생각해도 꽤 괜찮게 대답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경비병의 눈은 오히려 살벌해졌다.
“그러니까 티그리스 경께서 황궁 경비대와 황금 기사 그리고 철혈 마법사들을 믿지 못하시고 너를 이 극단에 심어두셨다 이 말이냐?”
“······네? 아뇨. 아뇨. 황궁 경비대를 못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왜 우리에게 그런 내용을 알리지 않고 너를 극단에 심어둔 거지?"
“아······ 어······ 이건 그러니까 기밀 사안이니까······.”
“네가 인퀴지터라도 되는 것도 아니고 무슨 기밀이냐. 너 뭔가 수상하군. 네가 진짜 라칸이 맞나?”
“맞다니까요?! 인명부 한번 확인해 보세요. 라칸 우드. 딱 네 글자가 있을 거라니까요?”
“그럼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은 누가 있지? 황금 기사단장님이신가? 아니면 철혈 마법단장님?”
“아니······. 그게······ 황녀님이요.”
경비들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쳤다.
“황녀님께서 만약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적어도 경비대장님이나 베르강 경에게 알려주었겠지. 혹시 그 두 분은 알고 있나?”
라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거짓말이 점점 눈덩이처럼 쌓여 라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오고 말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렇게 허술하게 보였나 보군.”
경비병은 결국 검에 손을 올렸다.
“지금 당장 벽에 손을 붙이고 뒤로 돌아라.”
“아니! 잠시만요! 지금 수정구로 티그리스 경에게 확인해 보시면 될 거 아니에요! 전 티그리스 경에게 어서 찾아가 봐야 한다고요!”
라칸은 고구마를 100개쯤은 삼킨 답답함에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다른 경비병은 허리춤에서 수갑을 꺼냈다.
“당장 벽에 손을 붙여라. 이제 네놈이 진짜 라칸이 맞는지도 의심이 가기 시작했으니까.”
“아니, 진짜 저 라칸 맞다니 까요? 저 티그리스 님이랑 황녀 님이랑 같이 밥도 먹고?어? 차도 마시고? 다 했다니까요?”
스릉-
경비병은 결국 검을 꺼냈다.
“네 놈의 이상 행동 때문에 황녀 전하와 티그리스 경의 연극 관람을 방해한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어서 벽에 손을 붙여라. 안 그러면 강제 집행하겠다.”
경비병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라칸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아아! 미치겠네! 이게 아닌데!”
“잠시만요!”
그때, 저 멀리 복도에서 네 인형이 보였다.
트리샤와 샤를로트, 아이린 그리고 리니아였다.
“오. 할렐루야.”
라칸은 지금 네 명의 여신을 영접한 기분이었다.
* * *
경비병은 리니아의 선에서 정리되었다.
경비병들은 티그리스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칸과 네 사람은 조용한 창고 같은 곳에 들어갔다.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네요.”
“네가 진짜 연극을 할 줄은 몰랐어. 그나저나 무슨 일 때문에 경비병들한테 잡혀 있었던 거야?”
라칸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경비병분들이 제 얼굴을 모르시더라고요. 티그리스 교관님께 전할 말이 있어서 보내달라고 했는데 안 보내주셨어요.”
“······.”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요. 저도 곧 유명해질 테니까요. 아니지 유명해지면 안되는 건가? 아무튼 어떻게 여길 찾아오신거예요?”
샤를로트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티그리스 교관님이 보내셨어.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한 모양이네.”
“교관님이 어떻게 아셨대요?”
트리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몰라. 교관님이 약간 찌릿찌릿하는 게 있으시잖아. 그 촉이 또 발현된 게 아닐까?”
티그리스가 어떻게 라칸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몰라도 덕분에 살았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
아니, 모로 가도 황도로 가면 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말일지 모른다.
“아무튼 무슨 문제가 터진 거야? 설명해줄 수 있어?”
“네. 바로 설명해 드릴게요. 아직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하는데, 이번 연극단원들 중에 ‘비스코’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바꿔치기 당한 것 같아요.”
“바꿔치기 당했다는 게 누군가가 비스코 시늉을 하고 있다는 뜻이야?”
“네. 맞아요. 특이한 점은 왼 손바닥에 5서클 마법진을 그렸고, 몸에 이상한 문신을 그렸어요. 이 바바리안 특유의 문신이 아니라요.”
라칸은 웃옷을 배까지 들어 올려 문신 문양을 슬쩍 보여주었다.
네 사람은 살짝 기겁했지만 라칸의 진지한 눈빛에 표정을 관리했다.
“일단 그 문신하고 손바닥 마법진을 그려서 보여줄 수 있어?”
“네. 그런데 문신은 제가 전체적으로 봐서다 알고 있는데 손바닥 마법진은 파편적으로 봐서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했어요.”
라칸은 소품 창고에서 가져온 노트와 펜을 들어 즉석에서 그림을 그렸다.
라칸의 그림 솜씨가 영 좋지 않아서 그렇지 생각보다 디테일하게 그렸다.
특히 몸 문신 쪽은 앞과 뒤까지 완벽하게 그렸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너 이걸 어떻게 다 기억하는 거야?”
“내가 순간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야.”
“아······. 그래.”
라칸은 그림을 네 사람에게 건넸다.
“전 이제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할 시간이라서 바로 돌아가 봐야 해요. 그러니까 네 분이 바쁘게 움직여 주셔야 해요. 이제 1시간 반밖에 남지 않았어요.”
“1시간 반? 그 구체적인 시간은 어떻게 아는 거야?”
“이번 연극이 한 시간 반 뒤에 끝나니까요. 그 안에 범인이 무슨 일이든 저지르겠죠.”
네 사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알려 드릴 것은 다 알려 드렸어요. 저도 무대 뒤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볼게요."
“알았어. 우리도 티그리스 님께 바로 알려볼게."
라칸과 네 사람은 창고를 나섰다.
* * *
라칸은 통로를 지나며 경비병과 다시 얼굴을 마주쳤다.
경비병들은 약간 켕기는 게 있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라칸을 보내주었다.
멈칫!
라칸은 잠시 발을 멈춰 뒤로 돌아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시죠?”
이제 경비병들이 존댓말까지 하자 사이다를 먹은 것 같이 속이 뻥 뚫렸다.
일단 이 기분은 제쳐두고 수사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혹시 이 통로 외에 무대와 관객석을 연결하는 통로는 따로 없나요?”
경비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대와도 직접 연결되어 있긴 한데, 그곳으론 사람이 다닐 수 없게 황금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습니다.”
“그럼 이 통로 외엔 다른 사람들은 출입할 수 없다는 뜻이네요? 그리고 사람들이 이동하면 무조건 두 분이 체크를 하셔야 하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혹시 피오라 극단을 제외한 외부 인원 중 무대 뒤편으로 이동한 사람이 있습니까?”
“잠시만요.”
경비병은 벽에 걸려 있는 출입 명부를 훑더니 입을 열었다.
“음······. 네. 한 명 있네요.”
라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요? 그게 누구죠?”
“룩스 교단의 사제분이시네요. 무대가 시작되기 전에 축사 기도를 위해 오셨었습니다.”
기억났다.
피오라 극단의 단주는 신실한 룩스 교단의 교인이었다.
그래서 본 무대가 시작하기 전에 축사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모두 불러 모았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비스코는 이상이 없었어.’
“그분이 혹시 밖으로 나가셨나요?”
“아뇨. 아직 안 나가셨습니다.”
라칸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사람이다!”
라칸은 생각 외로 범인을 금방 찾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