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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82화 (82/251)

#082화 – 경호(7)

티그리스와 트리샤는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하자 할키스를 나섰다.

정문이 아닌 시구문이란 시체가 빠져나가는 문으로 말이다.

위장 신분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해가지는 저녁에 할키스를 나서는 것은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기에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둘은 인퀴지터가 알려준 ‘비밀 통로’로 할키스를 빠져나갔다.

할키스는 사방이 두터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그 누구도 쉽게 빠져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했지만, 시체가 나가는 문은 달랐다.

티그리스와 트리샤는 인퀴지터가 소개해준 브로커에게 경비병들에게 먹일 뇌물과 선수금을 넘긴 뒤, 다른 시체들과 뒤섞여 시구문(屍軀門)으로 빠져나왔다.

“다 왔습니다요. 나리들.”

무덤지기의 말에 트리샤와 티그리스는 온몸을 가린 거적때기를 열고 나왔다.

무덤지기는 손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그럼 보수는······.”

철렁 -

티그리스는 작은 주머니를 브로커에게 건넸고, 무덤지기는 주머니를 두 번 정도 위로 던져보며 무게를 가늠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 만약 몰래 들어오실 생각이 있으시면 저기 까마귀 동상 입에 쪽지를 넣어주십시오. 헤헤······.”

티그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무덤지기는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났다.

티그리스와 트리샤는 근처 숲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트리샤는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우.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죽는 줄 알았네요.”

트리샤는 아직도 몸에서 나는 시체 냄새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저나 이런 것은 절대로 안 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하게 하시네요?”

“이런 것이란 게 뭐지?”

“이렇게 시체들하고 같이 섞여서 몰래 나오는 거요. 구정물을 묻힐 바에는 정문을 그냥 몰래 나가시는 걸 선택할 것 같았거든요."

트리샤의 말대로 원래라면 티그리스는 이런 더럽고 귀족적이지 않은 방식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티그리스는 태생이 귀족에 평생 남들이 우러러보는 명예로운 삶을 지향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를 절대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귀한 후 라칸과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라칸이 케일 자작을 찾기 위해 쓰레기 처리장에서 거지들과 함께 반나절 동안 뒤섞여 살았을 때, 티그리스는 라칸을 말리지 않았다.

그것은 라칸이 감수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서 그런 것일까?

만약 라칸이 아닌 티그리스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면 과연 티그리스는 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가기 시작하니, 티그리스는 아직까지도 오만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라칸도 그 더러운 일을 하고 싶어서 했겠는가?

깨끗한 방식으로 케일 자작을 잡을 수 있다면 분명히 그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번 레인로버 황녀의 생일 파티 때도 그랬다.

라칸밖에 할 수 없는 일이긴 했으나, 라칸은 자신이 맡은 일에 극심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라칸은 견뎌냈으며 결국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다.

티그리스는 라칸의 희생정신 하나만큼은 자신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시체들과 뒤섞여 나오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표정 풀면서 말씀하세요.”

“······.”

티그리스는 말없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려 4서클짜리 클린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를 꺼내 사용했다.

“클린.”

몸에서 나는 악취가 사라지고 더러운 오물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티그리스는 평소의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 맞다. 이게 있었군요.”

트리샤는 티그리스에게 아티팩트 건네받아 클린 마법을 사용했다.

샤워를 한 것처럼 상쾌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냄새가 사라졌으니 만족했다.

티그리스는 회중시계를 봤다.

오후 7시 25분이었다.

“그럼 이동한다.”

“네.”

티그리스와 트리샤는 어제 작전을 세웠던 대로 테론 영지와 곧바로 이어지는 남쪽 입구로 이동해 몸을 숨겼다.

할키스 영지 주변은 죄다 벌목을 하고 농토로 개발된지라 몸을 숨길 공간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티그리스와 트리샤는 근처 그늘진 헛간 뒤에 숨어 ‘은묘의 망토’를 뒤집어쓰고 대기했다.

폴리모프 마법은 푼 상태였다.

폴리모프는 사람의 체형을 일시적으로 바꿔주는 마법이다.

다소 단계가 낮은 일루젼 마법이나 환상계열 마법 같은 경우에는 체형까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그 상태로 검을 휘둘러도 몸에 부조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폴리모프 마법은 체형을 아예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폴리모프 마법을 사용한 채 검을 휘두르면 다른 사람의 몸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지게 된다.

특히 이번엔 바로스 후작을 포함해 기백의 용병들과 암살자들을 척살해야 하는 만큼 폴리모프 마법을 사용한 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 판단했다.

그래서 둘은 투시 마법에 저항이 있는 가면을 쓰고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다.

티그리스는 사방을 훑었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지기 시작하고 달은 자신의 시간임을 증명하듯 검푸른 하늘 위에서 단독 공연을 시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농부들도 모두 성안으로 들어가고 밤새들과 박쥐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티그리스는 은묘의 망토를 사용해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 상황이 조금 낯설었다.

망토를 얼굴까지 뒤집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훤히 잘 보였다.

이게 성물의 힘이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

이런 성물들이 제 주인을 만나게 된다면 2배 아니, 10배 이상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조용하군.’

티그리스는 단순히 눈과 귀만으로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최상급 오러 운용술 중 하나인 ‘마나 감지’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상 만물엔 마나가 담겨 있다.

사람은 물론이고 나무 그리고 벌레, 곡식들까지 모든 것이 마나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양이 굉장히 미세할 뿐이었다.

티그리스는 그 마나를 ‘감각’으로 감지해내 머릿속으로 입체형 지도를 그려낼 수 있었다.

범위는 티그리스를 중심으로 사방 1㎞ 정도.

사방 1㎞ 내에 마나가 있는 모든 만물을 감지해 낼 수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정보가 티그리스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작은 벌레의 움직임부터 시작해서 그 벌레를 추격하는 박쥐의 움직임, 풀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까지 모두 감지해 냈다.

그중 티그리스는 꼭 필요한 정보를 제외하곤 전부 걸러냈다.

벌레나 곡식들처럼 너무 마나가 미약한 것들은 버리고, 움직이지 않는 나무들이나 풀들도 제거했다.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산새들의 마나들도 없앴다.

그러자 티그리스에게 남는 것은 바로 옆에 앉은 트리샤와 티그리스 단둘뿐이었다.

이제 이 사방 1㎞ 내로 사람들이 횃불도 없이 떼로 들어온다면, 그놈들이 바로 티그리스의 타깃들이었다.

‘이것도 가르쳐야 하는데.’

아직 샤를로트나 아이린 그리고 리니아에게 가르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로타와 아르펨과의 전면전에 들어가기 전에 검술뿐만이 아니라 갖가지 유용한 오러 운용술도 가르쳐야 하지만 시간이 허락해줄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의 흐름은 티그리스의 등장으로 티그리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제 티그리스의 회귀록에 적힌 대로 미래가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더 빠르거나 더 은밀하게 로타와 아르펨이 움직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티그리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다.

재능 있는 사람들을 빠르게 모아서 가르치는 것.

그리고 그들이 마음 편히 성장할 수 있게 하여 로타와 아르펨에게 대적할 수 있는 인재로 성장시키는 것.

티그리스에게 주어진 사명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티그리스가 용병들과 암살자들에 집중하는 한편, 트리샤는 티그리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제인 말대로 고자인가······?’

티그리스와 트리샤는 거의 몸을 밀착하다시피 붙인 상태였다.

은묘의 망토에 크기가 늘어나는 능력이 있긴 했지만, 겨우 1.5배 정도 늘어나는 것 정도라서 몸을 구겨 넣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서로 몸을 밀착한 상태였다.

거기에 기묘한 살냄새도 섞여 일반적인 남녀라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정상적일 것이다.

지금의 트리샤처럼.

‘······나만 너무 신경 쓰는 건가?’

게다가 열차 내에선 거의 보름이 넘도록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잤다.

그런데 티그리스는 전혀 거리낌도 없이 잘도 잤다.

그때 여자로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말도 못 했다.

트리샤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신은 예쁘다고 생각한다.

자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험한 모험가 생활을 시작할 때 곤혹스러웠던 일이 종종 있을 정도였다.

그럴진대, 티그리스는 트리샤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샤를로트나 아이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레인로버 황녀 정도랄까?

그런데 이렇게 목석같은 사람이 레인로버 황녀에게 헤벌레하는 모습은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트리샤는 문득 티그리스의 연애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저 티그리스 님.”

트리샤의 말에 티그리스는 긴장했다.

티그리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걸 발견한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문제지?”

“아뇨. 그냥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뭐지?"

“티그리스 님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갑작스러운 첫사랑 이야기에 티그리스는 맥빠진 얼굴로 트리샤를 쳐다봤다.

“아니,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좀······.”

“임무에 집중해라.”

“어차피 녀석들이 나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잖아요. 그냥 잡담하면서 시간을 보내려 그랬죠.”

“경계 근무 중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잡담과 담뱃불이다. 초병의 잡담은 최대 500m까지 들리고 담뱃불은 1㎞ 너머에서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여기는 은묘의 망토 안이잖아요. 여기에서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밖에 아무것도 안 들려요. 그리고 우리 둘은 흡연자도 아니고요.”

“경계 집중에 방해된다.”

“뭐,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고요.”

티그리스는 트리샤를 흘끔 쳐다봤다.

이젠 해가 완전히 져서 트리샤의 얼굴이 육안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반달과 반짝이는 별들이 하늘에 총총히 떠 있었지만, 그림자가 지는 헛간이라 육안으론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숨소리나 심장의 박동으로 보아 트리샤는 살짝 토라진 것 같았다.

평소의 티그리스라면 트리샤가 삐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티그리스의 철벽같은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트리샤의 마음을 헤아려줘야 하는 상관이자 스승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티그리스는 바스티얀의 말을 떠올렸다.

- 학생들을 가르칠 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경청이라 생각합니다.

경청은 사전적으로 풀이하자면 남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라고 하지만, 티그리스는 트리샤의 말을 귀 기울여 본 적이 없었다.

이야기할 거리가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티그리스와 트리샤 간의 공감대는 검술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검술을 가르칠 때를 제외하곤 거의 이야기를 나눌 때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조용한 분위기에서 잡담을 나누면, 트리샤의 문제를 다각도로 이해하고 더욱 나은 방향으로 지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물론 트리샤의 말 대로 잡담을 나누는 것 정도론 티그리스의 집중을 흩뜨릴 수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난 20살이고, 한창 여자들에 관심이 많을 나이란 것은 인지하고 있다.”

“······뭐예요. 무슨 그런 학자같이 딱딱한 말투는."

말은 퉁명스럽게 나왔지만 티그리스가 반응을 해줬다는 것에 흥미를 느낀 트리샤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은 남들과 많이 다르다.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지.”

“그런 건 알고 있죠. 평범했으면 20살의 나이에 5성 기사가 될 순 없었겠죠. 그리고 6성 기사인 저를 가르칠 수도 없을 거고요.”

“그 이유가 바로 영감의 차이라고 말했을 텐데 혹시 기억하나?”

“네. 그렇죠.”

티그리스는 바람에 스치는 곡식을 보며 말했다.

“혹시 저 바람에 휘날리는 보리들이 보이나?”

“네. 보여요.”

“네 눈에는 어떻게 보이지?”

트리샤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바람이 동에서 서로 불고······.”

“그렇게 복잡하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냥 네 감각대로 말해라.”

“음. 크지만 가벼운 거인이 풀을 밟고 지나가는 것 같은데요?”

“그 정도면 훌륭하다. 하지만 내겐 한 가지 오러 운용법이 떠오른다. 이름은 무엇으로 지을까. 그래, 풀잎을 달리는 바람이라고 하여 ‘그린 러너'라고 해야 할까?”

“그린 러너? 그게 뭐예요?”

“땅을 밟지 않고 마치 바람처럼 미끄러지듯 풀을 밟고 달리는 경공술이다. 물론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풀이 있다면 땅이 있다는 뜻인데 굳이 풀을 밟고 달릴 이유가 뭐가 있을까? 발소리를 감추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는데 발소리를 감추는 방법은 이것 외에도 너무나도 많다.”

트리샤는 티그리스를 미친놈처럼 바라봤다.

물론 트리샤의 표정은 보이진 않았다.

“······뭐 그런 게 떠올라요?”

“이게 내가 보는 세상이다. 내 머릿속은 검술 또는 검술과 연계된 오러 운용술 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트리샤는 티그리스가 보는 세계가 어떤것인지 정말로 궁금해졌다.

세상 만물이 검술 초식이나 오러 운용술로 보인다는 것인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작에 미쳐 버리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사람을 봐도 똑같다. 네가 처음 검을 시연했을 때, 네 독특한 쌍검술을 보고 태풍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나비 같다고 생각했다. 샤를로트의 경우엔 모든 것을 베어내려는 오만한 방패로 보이고 아이린의 경우엔 분노로 뭉개진 검으로 보인다.”

“사람을 검술로 구분한다는 건가요?”

“그럼 셈이지. 그게 내가 봐오던 세상이니까. 이제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줘야겠군. 난 연애나 사랑과 같은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 내 머릿속은 오로지 검술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트리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트리샤는 과거를 떠돌아다니며 천재들이란 천재는 다 만나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무언가 하나에 미쳐 있는 사람은 대다수가 ‘빌런’들이었다.

미치광이 연금술사나 마법사들처럼 말이다.

트리샤는 티그리스란 사람을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 알고 있던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저나 샤를로트, 아이린을 가르치는 이유도 티그리스 님의 검술의 완성을 위해 그러시는 건가요?”

“아니, 그것은 아니다.”

“그럼 왜 저희를 가르치시는 거죠?”

“샤를로트와 아이린에겐 원석을 발견하면 아름답게 세공하고 싶은 세공사의 마음으로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것도 진실이지.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티그리스의 마나 감지에 암살자들과 용병들이 사방에 흩어져서 테론으로 향하는 게 걸렸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이 너무나도 거대하기 때문이다.”

“······적이요? 설마 키메라들을 말하는 건가요?"

“그것은 나중에 설명해 주마. 암살자들과 용병들이 나타났다.”

트리샤의 기감에도 느껴졌다.

기백의 사람들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풋보리들에 몸을 숨긴 채 테론으로 향하고 있었다.

티그리스와 트리샤는 은묘의 망토를 벗고 나왔다.

시원한 여름 바람이 트리샤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작전 목표를 다시 설명해 주마. 테론에 도착할 때까지 용병들과 암살자들을 단 한명도 남김없이 죽인다. 증원은 따로 없고 우리 둘이서만 해야 한다."

트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하얀 여우 가면을 꺼내 썼다.

티그리스는 눈만 뚫려 있는 검은 가면을 썼다.

“그리고 최종 합류 지점은 테론 입구가 아닌 테론 북쪽 입구에서 약 3㎞ 지점에 떨어진 물레방앗간이다. 30분마다 정기 보고를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트리샤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황금빛으로 빛이 나는 아밍 소드 ‘성화(聖火)의 검’과 붉은 혈조가 길게 난 단검 ‘블리더’를 꺼냈다.

트리샤는 익숙하게 단검을 왼손에 역수로 잡고 성화의 검을 오른 어깨에 걸쳤다.

“그게 네 검인가?”

“네. 아, 그러고 보니 진짜로 보여드리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제 애검인 ‘활활이’랑 ‘콸콸이’예요. 둘을 같이 부를 땐 ‘활활콸콸이’라고 불러요.”

요상한 작명 센스에 티그리스는 트리샤를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긴장은 안 되는 모양이군.”

“죽어 마땅한 놈들을 죽이는 거잖아요. 그리고 수준을 보니까 다 제 아래던데요. 뭘.”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지.”

“네.”

그 말과 함께 트리샤는 콸콸이를 냅다 던졌다.

그러자 콸콸이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용병들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베고 지나갔다.

“크아악!”

비명과 함께 붉은 피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풋보리에 그대로 추락했다.

척!

트리샤는 자기 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콸콸이를 잡았다.

기이하게도 손잡이와 검날엔 피가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지만, 붉은 혈조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 콸콸이 밥 많이 먹었어요?”

콸콸이는 기분이 좋은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티그리스는 트리샤가 직접 전투에 임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트리샤는 전투 모드에 들어가니 피에 미친 살인마인 것처럼 눈빛과 자세가 변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피식자를 사냥하는 포식자의 눈빛과도 같았다.

트리샤가 변한 이유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임을 눈치챘다.

“그럼 맡기지.”

“넵!”

티그리스의 신형이 사라졌다.

어느새 용병들은 트리샤가 있는 헛간을 둘러싸고 있었다.

용병들은 아주 죽일 듯이 트리샤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트리샤는 놈들의 살기를 부드럽게 넘기며 웃었다.

“아직 배부르면 안 돼. 아직 먹어야 할 피가 한가득이거든."

검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트리샤를 기이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용병들은 각종 무기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저 미친년 죽여!”

“우아아아아아!”

용병들은 떼로 트리샤에게 달려들었고, 트리샤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줘야 내가 죄책감이 덜하지. 이 썩을 놈들아.”

트리샤는 보랏빛 안광을 빛내며 용병들의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건 마치 거친 태풍 속을 유영하는 나비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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