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 레비스
레비스는 허망한 표정으로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모든 것이 티그리스의 손바닥 안이었다.
레비스의 저주와 관련된 것도, 악령 키메라들과 관련된 것들도 티그리스는 모두 알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레비스는 다리를 움직여 티그리스에게 달려들려 했다.
이대로 가만히 당해줄 수는 없었다.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이 심장에 박힌 천공의 사슬을 끊어내든지 아니면 티그리스를 죽이든지.
철푸덕-
레비스의 기합과는 달리 육체는 맥없이 쓰러졌다.
척추와 함께 심장을 꿰뚫은 천공의 사슬 때문에 허리 아래로 움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 팔도 움직이지 않았고 눈도 점점 감겨오기 시작했다.
레비스의 육체는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레비스는 마음이 급해졌다.
보통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자연스럽게 육체를 떠난다.
하지만 레비스의 상태는 다르다.
천공의 사슬에 영혼 자체가 꿰였기 때문에 강제로 이 죽은 육체에 계속 담겨 있을 것이다.
죽은 육체에 강제로 영혼이 속박되면 의식이 끊기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영혼 자체만으로는 혼령술을 부리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까.
한마디로 ‘완벽한 영혼 봉인'이라는 뜻이었다.
“나를 구해라! 다른 놈들은 필요 없다. 나를 먼저 구해라!”
레비스의 절박한 명령에 황금 기사들와 철혈 마법사들과 싸우던 월식 기사들과 검은 사신들이 일제히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 키야아아아아악!
사방에서 소름 끼치는 귀곡성이 울려 퍼지며 티그리스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막아라!”
황금 기사들과 철혈 마법사들이 뒤를 추적해 죽였지만, 월식 기사들과 검은 사신들은 팔다리가 잘려 나가든 말든 상관없이 티그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겁에 질려 눈을 뒤집어까야 할 상황.
그러나 티그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샐러맨더의 검을 치켜세웠다.
샐러맨더의 검에 붙은 불이 붉은색이 아닌 푸른색으로 변하며, 검신에 혼령술사들이 사용하는 신어(神語) 한 문장이 그려졌다.
[푸른 분노로 사르리라.]
티그리스의 오리지널 검술.
악령 베기.
제7식 화염지옥.
티그리스는 검을 횡으로 그었다.
검로는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부드럽고 느릿했지만, 검에서 발한 푸른 화염은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화르륵-!
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화염이 월식 기사들과 검은 사신을 마치 해일처럼 덮쳤다.
- 캬아아아아아아아!
월식 기사들과 검은 사신들은 마치 날개에 불이 붙은 나방처럼 사방을 뒹굴었다.
몸에 붙은 불을 끄려 나무에 부딪히고 땅을 구르고 하늘을 잽싸게 날아보아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푸른 불은 그들의 몸을 좀먹을 뿐이었다.
그 광경에 티그리스를 도우러 달려온 황금 기사들과 철혈 마법사들은 모두 멈춰 서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뭐지?
“마법은 아니긴 한데······.”
주술을 겪어볼 일이 거의 없는 황금 기사들과 철혈 마법사들은 모르지만, 네메시스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건 주술이다.”
이 푸른 화염은 주술로 작용하는 불꽃이었다.
그렇기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술을 사용할 땐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다.
그 대가라고 함은 시간이나 정성, 영혼, 육체와 같은 인간에게 소중하거나 삶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들을 의미했다.
물론 그 대가를 치르기만 한다고 해서 주술이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제사와 같은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검을 휘두른다고 해서 주술을 발현시킬 수 있는 게 절대로 아니다.
물론 그 주술의 대가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술용 성물이나 주문박이와 같은 것들이 사용되긴 하지만, 티그리스가 그런 주술용 도구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주술사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저 푸른 불꽃은 주술이다.
제사 과정을 생략했다고 치더라도 그럼 티그리스는 무엇을 대가로 주술을 펼친 것일까?
티그리스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직 오러가 많이 부족하군.’
티그리스가 개발한 악령 베기는 주술과 검술의 혼합 형태의 검술이다.
이 악령 베기의 근원적인 주술은 포그 우드 전체를 감싸고 있는 ‘푸른 등불의 술’이다.
이 푸른 등불의 술은 다른 주술과 달리 굉장히 독특한 것이 ‘마나’를 매개로 타오른다.
주술을 발동시키는 것 자체는 꽤 복잡한 축성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푸른 불꽃을 유지 시키는 것은 포그 우드에 널려 있는 마나인지라 독특한 마나 파동이 푸른 등불에서 나오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푸른 등불의 술의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한 뒤, 그 독특한 마나 파동을 접목시켜 악령만을 베는 '악령 베기’란 독특한 검술을 만들었다.
물론 악령 베기는 일종의 주술에도 한 발걸쳐 있는 검술이기 때문에 그 대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티그리스는 이 악령 베기의 대가를 '오러'하나만으로 고정시켰고, 그 때문에 어마어마한 양의 오러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건 나도 따라 할 수 없겠군.’
베르강은 티그리스의 이 악령 베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검술은 단순한 검술이 아니라 제령에 대한 이해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현재로선 오직 티그리스만이 사용이 가능한 오리지널 기술이었다.
레비스는 푸른 불꽃에 집어삼켜져 사라진 월식 기사들과 검은 사신들에 놀라 고통도 잊은 채 티그리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레비스에게 걸어갔다.
레비스는 처음 느껴본 미지의 공포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네놈이 떠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군.”
“어으애애······.”
레비스는 입도 굳어가는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티그리스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전혀 모른다는 미지의 공포 앞에서 레비스가 할 수 있는 것은 떠는 일밖에 없었다.
티그리스는 육신이 죽어가는 레비스를 유심히 살폈다.
“널 이리 자세히 보는 것도 처음이고.”
티그리스는 지금까지 두 번 레비스의 육체를 죽여봤다.
안개의 숲에 있는 레비스와 로타의 실험실에서 한 번, 빅토리에 대침공 사태 때 한번.
영혼까지 완전히 베어 죽인 경우는 노르베르드 침공 사태 때였다.
지금 티그리스는 절단의 심상으로 레비스의 목을 쳐 레비스의 영혼까지 죽여 버리는 수도 있다.
하지만 레비스의 영혼에 남아 있는 기억은 로타에게 흘러 들어가 월식 기사와 검은 기사의 연구가 계속 진행될 수 있고, 로타가 필요 이상으로 티그리스를 경계할 수도 있다.
그것은 티그리스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티그리스는 레비스의 영혼에 담겨 있는 기억도 로타에게 흘러가지 않길 바랐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다.
바로 레비스를 신비의 땅에 천공의 사슬과 함께 묶어 영원히 봉인시켜 버리는 것이다.
레비스의 육체와 영혼을 찾기 위해 신비의 땅에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이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신비의 땅에서 레비스를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이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 미약한 가능성을 위해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이 몸을 던진다면 오히려 좋다.
놈들은 알아서 자멸할 테니까.
“흠······.”
티그리스가 계속 레비스의 육체를 지켜보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레비스의 육체 구조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한 육체와 다른 육체가 똑같은 경우는 쌍둥이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
하지만 레비스의 몸은 티그리스 기억 속 어떤 이와 거의 90% 이상 일치했다.
티그리스가 죽어가는 레비스의 육체를 말없이 계속 쳐다보자 베르강이 다가왔다.
“마음이 복잡한가? 역시 내가 가는 것이······.”
“아뇨. 그것이 아닙니다.”
티그리스는 나달을 흘금 봤다.
나달은 레비스의 육체를 마치 예술품처럼 하나하나 뜯어보며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역시 나달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달, 잠시 따로 대화를 좀 할까요?”
나달은 레비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베르강에게 말했다.
“레비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티그리스와 나달은 따로 구석으로 이동했다.
나달은 사운드 블록 마법을 펼쳤다. .
나달은 티그리스와 나눌 대화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나달은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레비스가 저와 같은 호문쿨루스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뇨.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레비스의 육체는 놀랍게도 호문쿨루스였다.
즉,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신체라는 것이다.
티그리스는 원래 호문쿨루스와 평범한 인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오슬로도 처음 봤을 땐 호문쿨루스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티그리스가 레비스의 육체가 호문쿨루스라는 것을 확신한 이유는 나달과 신체 조건이 완벽하게 맞았기 때문이었다.
내장의 위치부터 시작해서 근골의 발달도까지 모두 나달을 빼다 박았다.
다른 점은 피부와 얼굴 구조 정도뿐이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신기함? 흥미로움? 아.”
나달은 갑자기 의안을 빼더니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그 기괴한 모습에 티그리스는 순간 움찔했지만, 나달은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게 재밌는 듯 미소까지 지었다.
“설렘이군요.”
티그리스는 나달의 말에 다소 복잡해졌다.
티그리스는 나달에 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황국과 레인로버 황녀를 위해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달이 평소에 어떤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달이 레비스를 봄으로써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놈을 해부해 보고 싶어요. 그럼 제 연약한 피부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
티그리스의 걱정은 기우였다.
혹시나 나달이 황국을 배신하거나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종류의 인간으로 변하진 않을 것 같았다.
조금 사이코 같긴 하지만 나달다운 답변이라 티그리스는 다소 안심했다.
“하지만 임무가 우선이겠죠. 욕심을 부리기엔 이번 일은 중요하니까요.”
“······잘린 팔은 드릴 수 있습니다.”
“오!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죠.”
나달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신기하군요. 전 지금까지 제 과거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굳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 레비스를 보니 갑자기 생겼습니다.”
“제가 듣기론 양아버지인 마고 드 아센시오 남작이 마법사의 연구실에서 데려왔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탐사 기록을 저도 읽어봤으니까요. 하지만 그 마법사의 연구실을 직접 가보거나 그 연구실에서 나온 실험 물품들을 직접 보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사를 따로 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나달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설렘이란 감정은 정말 신기합니다. 그 누구도 제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저를 움직이다니. 인간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요.”
“나달, 당신은 인간이 되고 싶습니까?”
“답변을 드리자면 ‘굳이 그래야 하나?’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전 육체적으로만 보면 완벽하게 인간과 동일합니다. 사고방식이 독특해서 그렇죠.”
“제 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고 싶냐는 것입니다.”
나달은 깊게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게 있어서 결여된 부분이다 보니 채우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예전엔 이 무덤덤한 감정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을 고문해 진실을 내뱉게 하는 것은 감수성이 높은 인간은 절대 할 수 없으니까요.”
나달의 눈은 꽤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라칸을 가르치면서 제가 마치 ‘마고’가 된 기분이 듭니다. 그 간질거리는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안으로도 알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제 감정이 풍부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감정의 변화로 인해 제가 더 이상 남을 고문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면 황국측면에서는 굉장히 손해겠죠. 그럼 마고가 제게 내린 명령인 ‘황국을 지키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점에서 보자면 별로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 수도 있겠네요.”
나달은 티그리스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티그리스 경은 제 변화가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달의 고민은 티그리스의 고민과 굉장히 흡사했다.
티그리스도 풍부해진 감정 때문에 과거에는 고민하지도 않았던 일들을 고민하고 생각했다.
티그리스의 마음 한편에 자리한 미련 때문에 모리타를 죽이는 것을 망설였던 것처럼, 누군가를 죽이고 상처 입히는 일에 양심이 찔려 검이 무뎌지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변한다고 생각하지 말죠.”
그러니 이 대답은 나달의 고민에 대한 대답이자 티그리스의 고민에 대한 대답이다.
“더욱 성숙해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나달은 티그리스의 대답이 꽤 만족스러웠는지 미소를 지었다.
“우문현답이군요.”
* * *
티그리스는 네메시스에게 천공의 사슬을 넘겨받았다.
레비스의 육체엔 신호가 없었지만, 천공의 사슬이 레비스의 심장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영혼을 단단히 결속한 것 같았다.
‘아쉽군.’
이 천공의 사슬은 레비스의 봉인 때문에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한다.
요 몇 달간 제법 잘 사용했었는데 이렇게 보내줘야 한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레비스의 영혼을 이 육체에 완전히 결박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럼 뚜껑을 닫겠습니다.”
레비스의 육체는 네모난 목제관에 들어갔다.
티그리스는 이 관을 천공의 사슬로 둘러싸 단단히 고정했다.
이제 이걸 들고 신비의 땅까지 가기만 하면 된다.
베르강이 티그리스의 옆에 다가왔다.
“티그리스 경, 자네가 직접 가야겠나? 신비의 땅은 알다시피 위험하기도 하고 자칫 잘못하면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힐지 모르네.”
신비의 땅은 시공간 개념이 뒤틀린다.
그 때문에 신비의 땅에서의 하루는 외부 세계의 1초가 될 수도, 1달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신비의 땅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반드시 ‘신비 현상’을 한번 마주하게 된다.
그 신비 현상이 미래를 보여줄지 과거를 보여줄지 아니면 멸지나 대륙이 아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다.
최소 5년에서 10년 정도 육체 나이를 강탈당하기 때문에 몸이 전부인 기사에게 있어서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제가 직접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물론 황금 기사들이나 철혈 마법사들에게 맡겨도 되겠지만 티그리스는 꼭 자신이 직접 레비스를 처리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베르강은 티그리스와 레비스와의 관계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잡지 않았다.
“······알겠네. 조심히 다녀오게.”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라칸과 리니아 그리고 제 제자들을 부탁드립니다.”
“그건 맡겨두게.”
티그리스의 앞으로 트리샤가 왔다.
“······이번엔 저 안 데려가시나요?”
“가서 좋을 것은 없다. 그리고 안개의 숲과 신비의 땅은 나 혼자 가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트리샤는 입술을 삐쭉였다.
“······샤를로트랑 아이린의 처지를 공감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오늘 이해가 되네요. 절 좀 더 믿어주시면 안 돼요? 전 티그리스 님 기사잖아요.”
“널 믿기 때문에 놓고 가는 거다. 내게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리니아와 내 제자들을 지켜줄 테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불안해지네요.”
트리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제가 조른다고 될 일도 아니고······ 알았어요. 대신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서 오지만 마세요.”
“알겠다.”
그때, 네메시스가 모리타를 끌고 왔다.
“그런데 이 녀석은 어떻게 할 거야?”
모리타의 상태는 겉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무릎을 꿇고 있긴 했지만,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고 두 눈은 퀭했으며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간신히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전부인 상황.
모리타는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죽여라.”
모리타는 지금까지 살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그리프 자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빅토리에로 올라와 제국 대학 교관 시험을 치렀고.
티그리스에게 양팔이 잘린 채 길바닥에서 겨울을 버텼으며.
양팔이 잘린 검투사로 반년을 살았다.
지금까지 메마른 사막에 자란 선인장처럼 간신히 버텨왔지만, 이제 버틸 수 있는 정신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네가 왜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는지 알아야겠다.”
모리타는 바보가 아니었다.
티그리스가 결투장에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자신이 아닌 레비스를 잡기 위한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겉으로 드러난 진실이 아닌 진실 속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 싶었다.
왜 자신이 이런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아야 했는지.
그리고 왜 나는 이 악마 같은 레비스에게 유혹을 당한 것인지.
모든 것을 알아야 죽더라도 마음 편히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으로 질기고 질긴 악연이다.’
끝의 끝까지 살아남아 티그리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이 아직 세상엔 놈에게 주어진 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
“좋다.”
모리타는 이 모든 진실을 알고 죽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안 된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으니까.
“네메시스. 받아라.”
티그리스는 레비스에게서 빼앗은 마사라이의 뼈 바늘을 네메시스에게 건넸다.
네메시스는 뼈 바늘을 받자 평소의 당당한 표정과 달리 뭔가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고마워. 티그리스.”
“날 믿어준 대가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네메시스는 뼈 바늘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물론이지. 뭐, 조심히 다녀와라.”
티그리스는 나달을 쳐다봤다.
나달은 눈치 좋게 미리 준비한 7서클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텔레포트 마법과 함께 티그리스, 모리타 그리고 레비스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