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 모르고트(4)
샤를로트는 성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성기사들의 숫자는 총 7명.
검을 들지도 않고 아이린과 리니아 둘이 저 7명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둘의 몸놀림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성기사들의 움직임이 굉장히 단조롭고 굼떴기 때문이었다.
‘이상해.’
1시간 전, 켈틱 호텔 앞에서 3명의 성기사들을 단숨에 제압한 것은 기습 공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성기사들과 검을 나눠보니 굉장히 이상했다.
툭-
아이린은 성기사의 주먹을 쳐냈다.
3성 기사인 만큼 성기사의 공격은 묵직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단조로웠다.
차라리 숲지기의 넝쿨 공격이 더욱 복잡할 지경이었다.
사방에서 뻗어오는 손과 발을 아이린은 마치 미꾸라지처럼 피해내고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컥!”
성기사는 오늘 저녁에 먹은 음식을 모두 게워냈다.
아이린의 주먹은 오러 고리 1개만 있었다면 충분히 버텨낼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 성기사는 고리 3개를 모두 활용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듯, 고리 3개를 1개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아이린이 방금 정권을 내지를 때, 발목에 고리 1개를 투자하여 순식간에 성기사와 거리를 좁혔고, 나머지 한 개는육감 감지를 돌려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경계했으며, 마지막 한 개는 주먹에 투자하여 정권을 내질렀다.
이런 고리의 분할 사용은 기사들이라면 갖춰야 할 아주 기본적인 소양일 테지만, 이 성기사들은 마치 멧돼지들처럼 단순하게 주먹 하나만 믿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아무리 검을 다루지 못했더라도 고리를 2~3개 정도 갖고 있다는 뜻은 어느 정도 몸 쓰는 데는 자신이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 성기사들은 고블린이나 놀들처럼 본능적인 공격과 방어에만 치중하고, 심리전 따위는 개나 줘버린 듯 무식하게 움직였다.
이런 단순한 공격쯤은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었다.
“컥!”
리니아도 자신이 상대하던 성기사의 관자놀이에 하이킥을 날려 기절시켰다.
리니아도 이게 맞을 줄은 몰랐다는 듯,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성기사들과 싸워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성기사들 굉장히 이상하다.
뒤이어 샤를로트까지 합세했다.
성기사들 중 한 놈이 검을 뽑아 들려고 했다.
지금까지 검을 뽑지 않았던 이유는 지금이 상황에서 검까지 뽑아 들었다간, 길리온 왕국에 가지도 못하고 평생 루체트 황국의 감옥이나 노역장에 갇혀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둘씩 동료들이 제압을 당하자 자신도 모르게 검에 손이 갔다.
그러나 샤를로트는 그 성기사의 앞으로 폭발적으로 돌진하여 놈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우득-!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뿌듯한 감각과 함께 놈이 튕겨져 날아갔다.
“이 새끼가!”
옆에 있던 성기사들이 샤를로트의 팔다리를 잡아 내팽개치려 손을 뻗어왔다.
역시나 속도만 빠를 뿐 공격 방향은 단조로웠다.
-직선은 곡선으로 대응한다.
티그리스가 조언한 것처럼 샤를로트는 오른쪽에서 뻗어온 손을 부드럽게 잡아 메쳤다.
쿵-!
바닥이 부서질 정도로 강력한 메치기에 성기사는 순간 숨이 막혔다.
샤를로트는 놈의 턱을 밟아 기절시켰다.
어느새 아이린과 리니아도 자기가 맡은 성기사들을 모조리 때려눕혔다.
리니아는 기절한 성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이 사람들 조금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 유명한 백사자 기사들답지 않았지.”
백사자 기사단은 길리온 왕국의 왕과 왕족 그리고 성직자들을 지키는 기사들이다.
이들이 겨우 이 정도 실력이라면 길리온 왕국의 미래는 조금 암울하지 않나 생각이들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모르고트는 레인보우 브릿지를 절뚝이며 걸어 나왔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그것보다 여길 빠져나가는 게 좋겠군요.”
워낙 소란이 컸다 보니 경찰들을 비롯해 길리온 왕국의 성기사들도 모두 몰려올 것이다.
특히 백사자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레오파드 경이 온다면 모르고트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응급 마차가 급하게 샤를로트네를 향해 달려왔다.
“뒤로 물러나세요.”
샤를로트와 아이린과 리니아는 검을 뽑아들고 마차를 경계했다.
경찰들이 탄 마차보다 응급 마차가 먼저 온다?
샤를로트가 기억하기론 응급 마차를 부를 수 있는 건, 근처 병원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수정구를 갖고 있는 경찰이나 경비들뿐이다.
순서를 따지자면 경찰들이 탄 마차가 우선이고 그 다음이 응급 마차가 오는 게 맞다는 것이다.
응급 마차를 모는 마부가 손을 흔들었다.
“샤를로트! 어서 타세요!”
마부의 얼굴은 달랐지만, 목소리는 굉장히 익숙했다.
라칸이었다.
마차에 올라탄 네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겠네요.”
라칸이 어떻게 때맞춰서 구해 온 건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살았다.
라칸이 구해 온 마차는 응급 환자를 수송하는 마차라서 경찰들과 경비들의 검문 없이 바로 통과되었다.
라칸은 마차 내부로 작은 아티팩트를 하나 건넸다.
“클린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입니다. ‘클린’이라고 외치면 자동으로 깨끗해질 겁니다.”
누가 사용하라고 준 것인지 알고 있었다.
모르고트는 조심스럽게 아티팩트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모르고트는 담요 위에서 클린 마법을 사용했고 머리카락까지 붙은 오물들이 깨끗하게 담요로 후두둑 떨어졌다.
샤워를 한 것 같은 상쾌함은 없었지만,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 자체에 만족했다.
모르고트는 직접 오물이 붙은 담요를 꽁 싸맨 후 한쪽 구석에 박아두었다.
“그나저나 라칸 어떻게 우리가 레인보우 브릿지에 있다는 걸 알아낸 거야?”
“제가 알아낸 거 아니에요.”
“그럼?”
“세 분을 비밀 경호하는 황금 기사분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긴급 회선으로 제게 알려줬어요.”
“아. 맞다. 그분들이 있었지. 어? 잠시만.”
그러고 보니 켈틱 호텔에서 탈출할 때도 동쪽 대로변 하나만 깨끗했다.
마치 동쪽으로 이동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레인보우 브릿지에서 그 사달이 나는 동안 성기사들의 추가 병력 하나 오지 않았고.
라칸이 응급 마차를 끌고 올 때까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설마 모르고트 왕자님의 위치를 황금 기사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샤를로트 선배랑 우연히 만난 덕분에 쉽게 추적할 수 있었죠.”
모르고트는 자신을 레인보우 브릿지로 데려간 경찰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그 경찰분은 설마······.”
“아뇨. 그 경찰은 정말 우연히 만난 겁니다. 원래 인퀴지터 요원이 접선하려고 했는데, 그 경찰이 중간에 모르고트 왕자님을 데려간 탓에 일이 조금 꼬였죠. 뭐, 결과론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문제는 잘 해결됐으니 된 거겠죠.”
샤를로트는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모르고트 왕자님의 망명을 네가 왜 돕는 거고.”
“사실 원래 제가 맡은 임무는 모르고트 왕자님의 근접 관찰이었어요.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면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죠.”
“그러니까 왜 네가 그런 일을 하냐고.”
“그건 제가 설명드릴 수 없는 문제라서요. 정확히 말하자면 권한이 없다랄까?”
라칸은 마차를 멈췄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바로 답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야.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샤를로트는 라칸의 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귀족이고 평민이고를 떠나서 자신보다 라칸이 황국과 티그리스에게 더 필요한 존재라는 게 너무나도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냐.”
샤를로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문을 열었다.
익숙한 정문이었다.
황궁이었다.
* * *
모르고트는 메디컬 체크를 위해 황궁 내 병원으로 향하고, 세 사람은 황녀의 부름에 따라 봄의 궁전으로 향했다.
황녀는 테라스에서 세 사람을 맞이했다.
샤를로트가 대표로 레인로버 황녀에게 예를 표했다.
“위대하신 황금의 일족을 뵙습니다.”
“예를 거두세요. 샤를로트.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레인로버는 샤를로트와 세 사람을 꼭 안아주었다.
“정말 세 사람이 없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어요. 베르강 경하고 황금 기사들이 마침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망명은 계획된 게 아니었습니까?”
“원래 망명 작전은 모레에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미카엘 외무대신이 모르고트 왕자의 망명을 눈치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급하게 망명을 시도한 거죠. 만약 오늘을 놓쳤다면 모르고트 왕자는 텔레포트로 길리온 왕국에 도착했을 테니까요.”
왠지 이번 망명 작전이 전체적으로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더니만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다.
만약 제대로 된 작전이었다면 샤를로트와 세 사람이 끼어들 틈도 없었을 거다.
레인로버는 테라스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서 조금 얘기를 하죠. 저도 궁금한 것도 있고 세 사람도 궁금한 게 있을 테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전하.”
세 사람은 레인로버와 마주 앉았다.
“그런데 어떻게 켈틱 호텔로 향하실 생각을 하신 거예요?”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우연히 사복을 입은 레오파드 경과 다른 성기사들이 뭔가를 급히 찾고 있는 것을 우연히 봤습니다. 저희는 성기사단 쪽에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따로 조사를 해보기 위해 켈틱 호텔로 '향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그런 일을 마주하면 그냥 스쳐 지나가게 마련이지 않나요? 왜 조사를 하려고 하신 거죠?”
“그것이······.”
샤를로트가 살짝 머뭇거리자 아이린이 대신 말했다.
“저희가 스승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인지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샤를로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2달간 황금 기사단에서 배운 것도 있고, 실력도 다른 동급의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호기롭게 조사를 시작했던 것이죠.”
리니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단순히 실력만으론 큰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모르고트 왕자님이 저희에게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이번 일로 오라버니와 가문의 명예가 훼손당할 수 있다고요. 그때, 저는 순간 머뭇거렸습니다. 실제로 길리온 왕국 측에서 이 일을 걸고넘어진다면 오라버니와 가문은 곤란해지겠죠.”
“그럼에도 왜 끝까지 모르고트 왕자를 도와주기로 하신 건가요?"
샤를로트는 레인로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니까요.”
레인로버는 당당한 샤를로트의 눈빛을 쳐다봤다
그리고 티그리스가 언급한 샤를로트에 대한 기록을 떠올렸다.
-정의로운 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기사.
-그러나 가장 기사다운 기사다.
샤를로트는 빅토리에 대침공 사건 때,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홀로 로타의 손과 키메라들에 대항해 싸웠고 결국 그들을 지켜냈다.
저런 올곧고 정의로운 마음이 그녀의 날카로운 검이 되어 로타의 손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왜 살아 있는 샤를로트를 보자마자 감정이 격해졌는지 알것만 같았다.
후회하는 티그리스로선 샤를로트의 저 올곧은 눈과 신념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완벽한 기사처럼 보였을 테니까.
“옳은 일을 위해 나서는 것은 기사의 본분이죠. 그리고 그게 황국이 내세우는 진짜 가치니까요. 그러니 이번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니, 황국이 여러분의 용기에 반드시 보답할 겁니다.”
레인로버의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 모습이 풋풋한 기사를 보는 것 같아 레인로버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네. 물어보세요.”
“라칸이 왜 모르고트 왕자님의 망명을 돕고 있던 겁니까?”
레인로버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건 극비 사항이긴 하지만 라칸과 엮일일이 많을 테니 말씀해 드리죠. 라칸은 인퀴지터 요원입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풀린 것만 같았다.
티그리스가 라칸을 자주 부른 이유가 라칸이 인퀴지터 요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라칸이 황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요원이었기 때문에 각종 비밀 임무를 진행했던 것이었다.
“······라칸이 언제부터 인퀴지터 요원이 된 겁니까?”
“키메라 실험실 사건과 케일 자작을 찾아낸 공로를 바탕으로 인퀴지터 요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그런데 라칸과 엮일일이 많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황녀는 냉수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티그리스 경이 예전부터 제게 강조해 왔던 말입니다. 세 분에게 필요한 것은 검술 교육도 있지만 경험이라고요. 아마 세 분은 마치 용병처럼 황금 기사나 인퀴지터가 필요하면 라칸과 함께 작은 임무를 맡게 될 겁니다.”
“정말입니까?”
“물론 공식적인 직책도 있어야겠죠. 이번 모르고트 왕자의 망명 작전처럼 책임 소재를 두고 머뭇거리지 않게요.”
세 사람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레인로버 황녀는 미소가 절로 나왔다.
“혹시 또 궁금한 게 있을까요?”
“아, 네. 모르고트 왕자님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황제 폐하의 승인이 이미 떨어진 상태라 오늘 자정이 지나고 나면 공식적인 황국의 보호를 받는 백성이 됩니다. 물론 모르고트 왕자가 황국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정보의 급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고 정착 지원금의 액수가 달라지겠죠.”
“그렇군요. 그런데 길리온 왕국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지게 될 텐데 괜찮나요?”
레인로버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루체트 황국과 길리온 왕국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됐습니다.”
“이번 룩스 교단 사건 때문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 사안은 세 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굉장히 큰 사건이거든요.”
미카엘 외무대신의 요청에 따라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주기적으로 사람들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내용은 발표되지 않았다.
만약 이것까지 발표된다면 길리온 왕국의 근간이 완전히 흔들릴 테니까.
그 대신 길리온 왕국 내에 있는 모든 수인들을 내놓고 밀렵꾼들을 모조리 처단하며, 키메라 실험실과 관련된 모든 연구원의 신병과 연구 성과를 제공받기로 했다.
그리고 애초에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피를 마셔야 한다는 정보는 루체트 황국의 입장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았다.
나중에 길리온 왕국과의 전쟁이 임박하거나 길리온 왕국이 루체트 황국에게 여론전을 펼치기 시작할 때, 역으로 공격할 수단 하나쯤은 갖고 있는 편이 좋았으니까.
“그리고 모르고트 왕자의 망명 소식이 퍼지면 길리온 왕국의 내부 여론을 흔들 수 있고, 루체트 황국의 백성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셈이니 황국에게 나쁠 게 전혀 없습니다.”
“아······!”
샤를로트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마를 탁! 쳤다.
길리온 왕국과 루체트 황국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다.
그런 와중에 길리온 왕국의 왕자가 차기왕이라 불리는 매튜 왕자의 암살 시도에 못이겨 망명을 시도했다는 내용이 대륙 전 지역에 퍼지면 루체트 황국에 좋을 일밖에 없었다.
“저희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까요?”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런 정치·외교적 사안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라면 이미 완성된 기사일 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경험이 필요한 거겠죠.”
레인로버 황녀는 시계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헤어져야 할 시간이네요. 이번 작전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진행된 거라서 사방에서 문제가 터졌거든요.”
“아, 저희가 시간을 빼앗았군요.”
“아뇨. 세 분하고 대화를 할 시간은 있어야죠.”
레인로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내일까지 푹 쉬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의 발걸음이 굉장히 가벼웠다.
* * *
미카엘은 들고 있던 유리컵을 던졌다.
쨍그랑!
“그래서! 눈앞에서 모르고트 왕자를 놓쳤다고?!”
레오파드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성기사 교육을 어떻게 시켰으면 겨우 세명한테 여덟 명이 모조리 당할 수 있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레오파드는 할 말이 많았다.
백사자 기사단의 성기사들은 모두 템페의 권속들이다.
템페의 권속들은 빠르게 고리 개수를 늘려갈 수 있지만, 오러를 컨트롤하는 것은 순수한 재능의 영역이다.
오러의 양을 늘리고 고리의 개수를 늘려 강하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루는 기술은 떨어지다 보니 전체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런 약점을 신성 회복 주문으로 극복했지만, 티그리스의 제자들은 회복할 틈도 주지 않고 모조리 때려눕혔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미카엘의 화를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레오파드는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자네는 이것밖에 할 줄 모르나? 그럴 거면 내가 앵무새를 키우고 말지.”
미카엘은 머리를 감싸 쥐며 의자에 앉았다.
“젠장! 우린 죽은 목숨이다. 우린 길리온 왕국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끔찍한 지하 감옥에 들어가게 될 거란 말이다.”
가뜩이나 루체트 황국에게 약점이 잡혀있는 상황인데, 매튜 왕자의 어두운 부분을 모조리 알고 있는 모르고트 왕자까지 망명해 버렸으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레오파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수가 있나?”
“엄밀히 말하자면 모르고트 왕자는 길리온 왕국의 입장에선 범죄자입니다. 저희는 그 범죄자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티그리스의 제자들에게 습격을 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놈들이 멍청하게 먼저 경찰을 건드리지 않았나? 경찰들을 구하려 한 것이라 여론전을 펼치면 답이 없어.”
“그래도 사람 목숨을 죽일 정도는 아니죠.”
“사람이 죽어? 누가? 아.”
미카엘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돌아왔던 스콧 경을 떠올렸다.
“큼. 그래. 어쩔 수 없이 백사자 기사단원 중 하나가 죽었다고 치면, 어떻게 할 셈이지?”
“길리온 왕국의 범죄자를 쫓기 위해 나섰던 기사단원 하나가 죽었으니, 백사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제가 나설 명분이 생기는 겁니다.”
“하지만 그년들에겐 티그리스가 있어. 티그리스가 제자들의 명예를 복권시켜 주겠다는 명분으로 대신 나서면 어쩔 거지?”
“티그리스는 현재 빅토리에에 없습니다.”
미카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티그리스는 황금 기사들을 교육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만약 티그리스가 있었다면 이번 모르고트 왕자의 망명 작전을 안 도왔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빅토리에에 머문 3일동안 티그리스가 코빼기도 안 보였고요.”
“흠······ 그러니까 티그리스는 현재 빅토리에에 없다 이 말인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추측 아닙니까? 그리고 바로스 후작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100% 티그리스 밖에 없습니다.”
미카엘은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가 직접 결투라도 하겠다는 건가?”
“제가 직접 나서는 것은 모양이 빠지죠. 하지만 백사자 기사단원 중에 샤를로트를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베테랑 기사가 하나 정돈 있습니다. 심지어 샤를로트와 동일한 3성 기사죠.”
“황국이 중재에 나설 가능성은?”
“황국이 중재에 나서겠지만 결투를 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수준이 맞는 사람과 매칭을 시키겠다는데 황국이 막을 이유도 없죠.”
“결투의 대가는?”
“생사결까진 안 되겠지만······ 엄지 하나 아니면 진심 어린 사과 정돈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미카엘에게 절을 하는 샤를로트라······.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것만 같았다.
“책임은 자네가 지는 걸세.”
레오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노르베르드 타워 앞.
레오파드 경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서 내 제자에게 죄를 묻겠다는 말인가?”
“아니, 그것이······.”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생각엔 내 제자에겐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자네들 생각은 다르겠지. 백사자 기사단의 성기사가 죽었는데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자네들의 명예 문제니까.”
티그리스는 검을 뽑으며 말했다.
“피는 피로 씻는 것이 맞겠지. 생사결로 할 텐가?”
“티그리스 경이 직접 나서실 정도까지는······.”
“제자의 명예를 되찾아 주는 것은 스승으로서 해야 할 일이네. 자네도 자네의 휘하 기사가 죽었으니 자네가 직접 나서는 것이 좋지 않겠나?”
“······.”
레오파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서 결투 종류는 무엇으로 할거지?”
레오파드는 사방을 둘러봤다.
휘하 성기사들뿐만이 아니라 기자들과 시민들이 죄다 몰려 있었다.
샤를로트가 결투를 피하지 않도록 하려고 일부러 소문을 크게 냈었던 것인데 이게 자신의 발목을 잡을 줄은 전혀 몰랐다.
“······생결로 부탁드립니다.”
레오파드는 아직 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