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마탄총(1)
티그리스가 건축에 대해 많이 아는 것도 아니었기에 살바도르와 나눌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티그리스는 살바도르에게 베이튼을 소개시켜 주고 황궁으로 가기로 했다.
“저는 황궁에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티그리스는 베이튼을 쳐다봤다.
“그럼 맡기겠네. 베이튼.”
“······예.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떠났고, 베이튼과 단둘이 남게 된 살바도르 백작은 품속에서 시가 파우치를 꺼냈다.
“한 대 피워도 되겠나? 알렉스?”
베이튼은 오랜만에 듣는 옛 이름에 잠깐 감상에 빠졌다.
“이제는 베이튼입니다. 백작 각하.”
“그렇군.”
베이튼은 자신이 사용하는 재떨이를 말없이 가져와 살바도르의 앞에 가져왔다.
살바도르는 무영창으로 발화 마법을 시전하더니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내가 자네 앞에서 담배 피우는걸 허락받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저는 이런 식으로 백작님을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살바도르는 시가 파우치에서 시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시가는 불이 붙는 데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짧은 침묵의 시간.
그 시간 동안 둘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깊게 생각했다.
“아직도 날 원망하나?”
살바도르의 질문에 베이튼은 주먹을 꽉쥐었다.
“······귀족적인 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잊질 못하는군.”
“그 일을 누가 잊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나도 잊질 못하는데.”
베이튼의 ‘고든 가문'은 원래 대대로 알브레 백작 가문을 섬기던 가문이었다.
그것도 알브레 백작 가문 내에서도 신망 두텁던 가문이라 준귀족 취급을 받는 가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21년 전 베이튼이 이제 막 아버지를 쫓아 일을 배우기 시작할 때, 사고로 살바도르 백작의 막냇동생이 죽었다.
그날 왜 성채가 무너졌는지 그 누구도 밝혀낼 수 없었다.
하지만 살바도르는 아끼던 막냇동생이 죽었다는 분노와 다신 이런 참사가 없어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로, 그날 안전 책임관이었던 베이튼의 아버지에게 책임을 씌우고 죽였다.
“누군가는 그때 책임을 졌어야만 했었지.”
“하지만 제 아버지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베이튼은 자신의 아버지가 잘못을 저질렀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이튼은 미친놈처럼 삽 하나를 들고 성채 주변을 밤낮으로 팠다.
그리고 약 한 달 만에 결국 왜 이 성채가 무너졌는지 밝혀냈다.
“하필 그때 성채 지하로 자이언트 웜이 지나갔고 지하수를 터뜨려 버렸을 뿐이죠. 잘못은 주변 몬스터들을 관리하지 못한 용병들과 알브레 백작가의 마법사들에게 있었습니다.”
살바도르는 불붙은 시가를 깊게 빨아들였다.
탁하고 독한 연기가 폐부를 찌르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깎여 나가는 자존심에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살바도르는 한숨을 내쉬듯 연기를 내뿜었다.
“······그랬었지.”
베이튼은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살바도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얼마나 길었던가.
베이튼은 그날 자이언트 웜이 지나간 흔적을 찾아 살바도르에게 보고하고 무너진 고든 가문과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게 해달라고 했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 판단은 살바도르의 잘못이 맞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귀족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베이튼은 너무나도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릴 수가 없었다.
만약 이걸 외부에 알리는 순간 평민이 귀족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 되기 때문에 결투고 뭐고 할 것 없이 죽여도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이튼은 자신이 귀족이 될 때까지 꾹꾹 참아왔던 것이다.
귀족이 되면 아버지의 명예와 고든 가문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젠 그런 것 따위는 필요 없었다.
티그리스가 신뢰하는 집사이자 ‘더 노르베르드’의 회장이라는 직함 하나로 살바도르의 인정을 받아냈다.
“제가 ‘더 노르베르드’의 회장이란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
살바도르는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전혀 몰랐네. 개명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으니까.”
만약 베이튼이 고든 가문 사람인 줄 알았다면 더 노르베르드의 휘하의 시공사로 들어가는 걸 고민했을 것이다.
살바도르는 시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오늘 참 쉽지 않은 날이 되겠군.”
* * *
티그리스는 황궁에 도착하자 레인로버와 함께 산책을 했다.
“그나저나 베이튼하고 알브레 백작하고 무슨 관계인지 알고 계셨잖아요? 왜 안 말해준 거죠?”
“알브레 백작이 만약 베이튼이 더 노르베르드의 회장인 것을 알았다면 심사숙고했을 겁니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팔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만약 그게 껄끄러웠다면, 베이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회장으로 세웠어야죠. 아니면 적어도 계약서에 도장찍기 전까지 같이 있어 주거나요. 알브레 백작이 자존심 때문에 계약을 포기할 수도 있었잖아요.”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알브레 백작은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칠 사람은 아니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요?”
“노르베르드 가문 내에서 베이튼을 제외하면 이번 일을 맡길 인재는 없었습니다. 그말은 결국 베이튼과 알브레 백작은 부딪힐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요?”
레인로버는 앞선 두 대답이 핑계란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그냥 본심을 밝히기로 했다.
“······이제 슬슬 베이튼을 믿어줄 때도 되었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베이튼은 티그리스의 입장에선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노르베르드 가문이 갖고 있던 자산의 50%를 통째로 날려 버렸으니까.
하지만 이젠 베이튼의 과거를 알기도 했고, 지난 반년간의 감시 결과 노르베르드 가문을 배신하려는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티그리스와 노르베르드 가문에 도움이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렇기에 이제 슬슬 베이튼에게 큰일을 맡기려 했었다.
“이번 트리니티 프로젝트가 베이튼의 시험의 무대가 될 겁니다.”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이 베이튼에게 접근하리라 보는 건가요?”
“무조건 그럴 겁니다. 베이튼은 노르베르드 가문의 자금줄을 꽉 잡고 있는 데다가 트리니티의 모든 건물에 깊게 관여하고 있으니까요.”
레인로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알브레 백작을 소개시켜 준 거군요. 놈들의 유혹을 뿌리칠 이유를 만들어 주려고요.”
“그런 셈이죠.”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은 하나같이 뱀의 혀를 갖고 있다.
그나마 레비스가 완전히 봉인되어 괜찮지만,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로타의 눈 ‘솜니움’이 접근하면 베이튼도 흔들릴 것이다.
그때, 이번 일을 떠올리며 유혹을 뿌리친다면 티그리스는 베이튼을 끝까지 믿고 귀족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잡담을 하다 보니 어느새 봄의 궁전에 도착했다.
봄의 궁전의 접견실에는 말레우스와 테호가 커피를 물처럼 마시며 연신 회고록과 인명록을 훑고 있었다.
“아, 티그리스 경 왔는가?”
테호와 말레우스의 눈은 퀭해 보였다.
근 일주일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인명록과 회귀록만 봤다고 하던데 진짜인 모양이었다.
“다 읽으셨습니까?”
“각자 3번씩 읽었네.”
“혹시 궁금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하나 있네.”
말레우스는 인명록 중 라칸 페이지를 펼쳤다.
“이 라칸이라는 아이 만나볼 수 있는가?”
“······라칸을 말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 적힌 대로 보자면 라칸이 살던 세계는 각종 기계가 가득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네만 맞나?”
“예. 그렇습니다. 저도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말 없이 다니는 마차가 있을 정도로 기계 문명이 발달한 곳이라 하더군요.”
말레우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자넨 그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었는가? 고도화된 기계화 문명에서 이 세계로 넘어왔다고 하지 않나?”
“······그 세계의 검술에 대해선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기계공학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문명의 기술을 듣는다고 해서 기초 지식이 없다 보니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 전문 기계공학자 앞에 데려다가 앉혀놓고 강의를 하게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안 되겠군! 당장에라도 라칸을 화산 지대로 데려가겠네! 눈앞에 다이아몬드를 두고 크리스탈이라 여기는 자들에게 라칸은 너무나도 아까운 인재니까!”
말레우스가 당장에라도 라칸을 보쌈해 갈듯이 말하자 레인로버는 진정시켰다.
“말레우스 님. 저희도 라칸이 이세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 세계의 문화라든가 각종 기술 등을 물어봤었죠.”
“역시 다 티그리스처럼 검에 미친 사람만있는 게 아니군요. 그 기계 기술에 대해 물어보셨습니까?”
“예······ 그렇긴 한데 그리 많은 도움은 안 될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 십니까?”
“라칸이 이 세계로 넘어올 때 라칸의 나이는 겨우 15살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그 세상에 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해요.”
“어찌 그런 걸 모른다는 말입니까? 여기에 적힌 말에 따르면 기계로 우주로 여행을 떠나는 세상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런 세상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기계를 모른다는 말입니까!”
말레우스의 기계 사랑은 뜨겁다 못해 데일 정도였다.
이런 초흥분 상태에서 아무리 설명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란 걸 알았기에 레인로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한번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시는 게 낫겠네요.”
“암요. 화산 지대로 가기 전에 꼭 만나볼겁니다. 황국의 기계공학은 그리 많이 발달하지 못해서 라칸의 높은 지식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레인로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라칸은 황궁으로 오라는 소식에 그레이타운에서 올라왔다.
신종 마약 레드 파우더를 유통하는 갱단들을 조사하느라 거지꼴로 있었던 터라 행색이 남루했지만, 클린 마법을 사용해 냄새는 나지 않았다.
라칸은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 법한 드워프가 눈앞에 떡하니 있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반갑습니다. 라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드워프 맞으세요?”
“그럼 당연하지.”
“우와······.”
드워프가 누구인가?
작가 설정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전설의 무기를 뚝딱뚝딱 만들고, 주인공의 장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주는 최고의 조력자가 아닌가?
라칸은 드워프로부터 좋은 장비를 얻을수 있을 것 같아 심장이 마구 두근두근거렸다.
말레우스도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기계와 강철로 가득 찬 세상!
모든 드워프의 꿈과도 같은 세상이 아닌가?
그런 세상에서 살다가 온 이세계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이야.
말레우스는 마치 300년은 더 젊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큼! 내가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이리 불렀네. 혹시 시간은 괜찮은가?”
“네. 마침 제 임무도 보고만 하면 끝나서 시간이 남거든요. 저도 드워프 님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나야 좋지. 역시 강철과 기계의 세상에 살다가 왔다 보니 드워프에 관심이 많나 보군. 역시 우리는 통하는 뭔가가 있어!”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에게 속삭였다.
“······충격이 심하실 텐데 괜찮을까요?”
“이미 저희 손을 떠난 일입니다.”
“그렇긴 하네요. 그래도 지켜보는 재미는 있을 것 같아요.”
레인로버는 과자를 먹으며 둘의 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럼 일단 나부터 질문을 하지. 정말로 그 세계는 모든 것이 다 기계로 굴러가는 세상인가?”
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 세상은 마법이 없으니까요.”
“말 없는 마차, 하늘을 나는 기계가 있는것도 사실이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죠. 진짜 대단한 건 컴퓨터라고 있죠. 그 세상은 컴퓨터 없인 아무것도 안 돌아가는 세상이에요.”
전혀 들어보지 못한 기계의 등장에 말레우스의 콧김에서 김이 나올 정도로 흥분했다.
“컴퓨터? 컴퓨터가 뭐지?”
“어······.”
라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컴퓨터는 그냥 컴퓨턴데요?”
“그러니까 그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냐는 말일세. 그리고 컴퓨터가 하는 역할이 뭐고.”
“아. 컴퓨터는 전기로 돌아가고 제가 말한 그 기계들을 움직이게 만들어요.”
“그래! 컴퓨터는 마치 엔진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거군! 그래 컴퓨터는 엔진이었어! 우리 세계는 마석으로 돌아가지만, 그 세계는 모든 게 컴퓨터로 움직인다는 거군! 그럼 그 전기······ 그러니까 벼락이라고 해야 하나? 그 벼락은 도대체 어떻게 통제하는 거지?”
“어······ 잘 모르겠는데요?”
말레우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어떻게 그 컴퓨터를 통제한다는 거지? 벼락을 통제해야 컴퓨터를 움직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냥 전원 버튼 누르면 되는데요?”
“그래. 그럼 전원이 뭐지?”
“어······ 전원은 전원인데.”
말레우스는 마치 이빨 요정이 없다는 진실을 처음 들은 어린아이처럼 표정이 무너졌다.
“이 무슨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어떻게 벼락을 통제하는 법도 모르면서 그런 엔진을 다룰 수 있다는 뜻인가?!”
“어······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제가 마법을 모르는데도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4서클 체인 라이트닝 마법을 사용할 수 있잖아요? 그거랑 똑같아요.”
“그······ 그렇군. 그래. 컴퓨터는 굉장히 고도화 된 기술이라 자네가 아직 익히지 못한 거라는 거군.”
말레우스는 아직 포기하지 못한 듯했다.
“그럼 하늘을 나는 기계는 어떻게 만드는거지?”
“비행기요? 비행기 만드는 회사가 알지 않을까요?”
“그럼 말없이 다니는 마차는?”
“자동차 회사가 알겠죠?”
“······그럼 자네가 알고 있는 기계공학 기술은 뭐지?”
“기계공학이요? 저는 아직 문과 이과도 안 정했는데요?”
“그럼 도대체 뭐를 배운 겐가?!”
라칸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공부는 잘 안 하고 판타지 소설만 읽어서······.”
라칸은 기계로 된 세상에 살았지만, 전공은 판타지 전공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라칸은 판타지 세상 공부를 너무 잘해서 이 세상에 굉장히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문명의 도약을 몇번이고 할 수 있는 최첨단 문명에서 산 사람이 어찌······.”
말레우스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다시 눈을 번쩍 떴다.
“그래.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지. 혹시 자네가 살았던 세상의 기계들을 그려줄 수 있나?”
그것만이라도 건진다면 이 만남이 아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라칸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명을 드워프의 시점에서 본다면 뭔가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레인로버는 미리 준비한 서류 봉투에서 자료를 꺼냈다.
“그거라면 저희가 갖고 있어요.”
황국도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세상을 이해해 보기 위해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했고, 라칸은 일주일이 넘게 골방에 박혀서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적어야만 했다.
말레우스는 도시 그림들과 비행기, 자동차, 전봇대, 스마트폰, 컴퓨터, 전기밥솥, TV, 총, 대포 그림들을 하나하나 넘겨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눈빛으로 계속 넘겨보다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했는지 표정이 굳었다.
“음······.”
말레우스는 라칸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당혹스러워했다.
말레우스는 대포와 총 그림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걸 정말 라칸 자네가 그린 게 맞나?”
“네. 맞아요.”
“이건 말도 안 되는데······ 아니지 설마······.”
말레우스는 살짝 패닉에 빠진 듯 계속 대포와 총 그림을 쳐다봤다.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건 우리 드워프들이 1,000년 전에 개발한 무기들일세. 당시 인간들과 거인, 드래곤들 몰래 만들어진 무기들이다 보니 아무도 알지 못하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이 무기들은 한 인간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이야.”
티그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 말입니까?”
“그래. 자네들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인간이지.”
“그 사람이 누굽니까?”
“용사 페레이라.”
용사 페레이라라는 말에 레인로버는 물론이고 티그리스와 테호와 라칸도 깜짝 놀랐다.
“이걸 페레이라 님께서도 만들어 달라고 했단 말입니까?”
“그렇네. 굳이 기록 보관소를 들어갈 필요없이 화산 지대로 돌아가면 페레이라 님이 친필로 그린 구상도가 있네.”
“그럼 설마 페레이라 님도 라칸이 살던 세상 사람인 겁니까?”
“그건 나도 알지 못하네. 그저 페레이라 님께서 요청했다는 것만 알지. 그리고 당시에 살던 모든 드워프들은 늙어서 죽었으니 진실을 알 수 없을 걸세.”
“그럼 기록 보관소에는 그와 관련된 내용이 없겠습니까?”
말레우스는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만약 페레이라 님께서 자신의 출신을 밝혔다면 아마 있겠지.”
“······기록 보관소에 들어갈 이유가 또 하나 생겼군요.”
말레우스는 총과 대포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튼, 이것들은 전부 화약으로 움직이는 물건들이 맞지?”
“예. 맞아요. 신기하게도 이 세상은 총이랑 대포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걸 만들어 줄 수 없냐고 여쭈어보려고 했었어요.”
“허······ 역시 그랬군.”
라칸은 눈빛을 반짝였다.
“그래서 이것들은 쓸모가 있었나요?”
“······음. 쓸모는 확실히 있네. 초당 300~400m를 날아가는 납덩어리는 웬만한 몬스터들의 살점을 찢어발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러 문제가 있었네.”
일단 이런 총알이 정확한 궤도를 따라 날아가 박히려면, 정밀 기계공학 기술이 필요했다.
그리고 강선에 탄매가 적게 남으면서도 화력이 강한 특수한 화약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 외에도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는데, 드워프들은 개발하면 개발할수록 이 총과 대포라는 물건이 정말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마법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 그런 순수 공학적인 총을 만들어야 하냐는 의견이 나왔다.
“납덩어리는 공기저항에 너무 많이 흔들리기도 하고, 드래곤과 거인들에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기엔 화약이란 추진체는 화력이 너무 약했네. 차라리 총열 안에 화력을 극한으로 죽인 익스플로전 마법을 갈기는 게 훨씬 나았지.”
“그래서 우리는 굳이 납덩어리가 아니라 순수한 마나의 결집체, 마탄을 작게 응집시켜 빠르게 날리기로 했네.”
라칸은 벌떡 일어났다.
“그건 레이저 건이잖아요! 왜 그 물건이 아직도 세상에 나오지 않은 거죠?”
“드워프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건 이제 300년이 되었네. 그때까지 드래곤과 거인들의 핍박을 받으며, 그들이 입을 갑옷과 무기들을 만들고 둥지를 장식하느라 신무기를 개발할 시간도 정신도 없었지. 그 때문에 마탄총이라 불릴 수 있는 물건이 나온 지는 이제 200년도 채 되지 않았네.”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하며 말했다.
“혹시 그 마탄총을 가지고 계십니까?”
“내 아공간 주머니에 호신용 마탄총이 하나 있네. 한번 시험해 볼 텐가?”
“괜찮겠습니까? 마탄총은 드워프 마공학 기술의 총아일 텐데요.”
말레우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인데 그런 걸 따질새가 있겠나? 일단 보여주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