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청혼
그레이 타운의 회색 쥐 사태는 눈덩이가 불어나는 것처럼 심각해지고 있었다.
회색 쥐라 자처하고 나서는 시위대의 숫자가 처음으로 5만 명을 넘겼고, 처음으로 시위대와 경비들 간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
-티그리스 님은 왜 안 오시는 겁니까?!
-티그리스 님께서 저희에게 새 삶을 주실겁니다! 여러분!
-티그리스 님이 안 오신다면 우리가 간다!
티그리스를 만나기 위해 레인보우 브릿지를 건너려는 회색 쥐 시위대와 레인보우 브릿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중장비를 걸친 경비대 간의 격렬한 싸움 끝에 결국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경비대원 5명이 다치고 시위대 33명이 크게 다쳐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는 내용이 미디어를 타고 흐르면서 빅토리에 시민들도 이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그레이 타운 쥐새끼 놈들이 미들 타운을 습격하는 거 아니야?”
“야. 너무 그러지 마라. 그레이 타운을 전에 한번 가봤는데 사람 살 곳이 진짜 아니긴하더라.”
“그렇다고 그 쥐 새끼들한테 우리가 낸 세금으로 빵을 주라고? 그러면 나도 일 안 하고 시위하지. 얼마나 좋아 그냥 신문 깔고 앉아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면 되는데.”
“걔네들이라고 일 안 하고 싶겠냐? 퍼플타운 공장들엔 이미 사람이 넘쳐 난다는데. 만약 황제 폐하께서 최저임금법을 만드시지 않았다면 그 잃을 것 없는 놈들이 우리 일자리에 치고 들어왔을걸?”
회색 쥐 시위대가 빅토리에 사회의 큰 이슈가 되자 여러 지식인들이 칼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공장주들을 대변해 글을 쓰는 몇몇 칼럼리스트들은 최저임금법 폐지를 논하기도 하고
군인 출신 칼럼리스트들은 황금 기사들을 파견해 진압해 황실의 위엄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그레이 타운 판자촌을 싹 밀어버리고 건물을 세우길 원하는 건설사들은 신규 주택사업을 입에 담기도 했다.
제인은 신문을 내려놓으며 티그리스에게 물었다.
“티그리스. 이거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는거 아니야?”
티그리스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내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니, 그래도 널 찾는 사람들만 5만 명이 넘는다는데 너무 가만히 있는 거 아니야?”
샤를로트와 아이린, 리니아 그리고 열심히 차 마시는 방법을 트리샤에게 배우고 있는 네메시스와 소라도 귀를 쫑긋하며 티그리스의 입에 집중했다.
티그리스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굉장히 궁금한 것이다.
“내가 나서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저들의 복지 문제가 아닌 황제 폐하의 위엄과도 관련된 문제이니까. 문제 해결은 황국에서 해야 한다.”
“그런 고리타분한 정론 말고 티그리스 네 생각이 뭔지 궁금한 거야.”
“기사는 생각이 아닌 명령에 움직여야 한다.”
“어휴! 답답해! 좀 대답해 주면 어디 덧나나?!”
그때 소라가 손을 들었다.
“······뭐지?”
“한 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봐도 되는지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티그리스는 반사적으로 트리샤를 쳐다봤다.
트리샤는 부끄러워서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었다.
“소라! 내가 언제 그런 거 가르쳤어!”
“어?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윗사람한테는 최대한 공손하게 물어보라고 했잖아.”
“지금은 또 왜 반말인데!”
“지금은 친구 모드라서?”
“너 아주 그냥······!”
“아아악!”
티그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궁금한 게 뭐지?”
날아오는 회초리를 피한 소라는 눈을 반짝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여쭈어보는 걸 허락받은······.”
“그냥 말해라.”
“아, 넵! 제가 트리샤에게 배우기론 기사도 자신의 주군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티그리스 님도 황제 폐하께 조언을 드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까?!”
소라의 당돌한 질문에 트리샤는 불안한 눈빛으로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좋은 질문이다.”
소라는 ‘봤지?!’라는 표정으로 으스대며 트리샤를 쳐다봤다.
트리샤는 정말 꿀밤이 마려웠지만 참았다.
“네가 말했던 대로 기사는 조언을 드리는 입장이긴 하지만 명령이 내려지기도 전에 기사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이미 황제 폐하께 조언을 드린 상태다.”
“네? 어떤 조언을 드리셨습니까?”
이번 회색 쥐 사건은 회귀 전에도 없던 일인 데다가 이런 정치적인 문제는 티그리스의 전문이 아니었기에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황제가 짊어지고 있는 정치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제안은 드릴 수 있었다.
“그건 비밀이다.”
소라는 입술을 삐죽였다.
“티그리스 님께선 비밀이 참 많으신 것 같습니다! 조금만 이야기해 주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궁금해 죽겠습니다!”
“소라. 티그리스 님께서 곤란해하시잖아.이제 그만해!”
“하지만 궁금한걸?”
“참아.”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괜히 나온 줄 알아? 난 궁금한 거 못 참는다는······ 아, 미안해! 미안해!”
트리샤가 회초리를 내던지고 달려들자 소라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너! 거기 안 서?!”
“아아아악! 소라 살려!”
티그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라가 기사가 되는 길은 굉장히 험난해보였다.
티그리스는 가만히 차를 마시고 있는 네메시스를 봤다.
네메시스는 그나마 나은 것 같았다.
네메시스도 궁금한 것은 매한가지인 듯 귀가 쫑긋 올라가고 꼬리가 굉장히 경직되어 있었지만, 적어도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으니까.
그때, 네메시스가 입을 열었다.
“티그리스 님.”
티그리스는 뭔가 불안하긴 했지만 입을 열었다.
“왜 그러지?”
네메시스는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다리를 꼬더니 상체를 숙였다.
“저한테만 살짝 알려주시면 안 돼요? 저만 알고 있을게요.”
티그리스는 저 자세와 표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메시스가 남자들에게 정보를 뽑아낼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
“역시 안 먹히나? 보통 이러면 다 넘어오는데.”
다른 사람들도 경악하긴 했는데 리니아는 더욱 충격을 받았는지 손이 덜덜 떨렸다.
외간 여자가 친오빠를 유혹하는 모습을 정면에서 봤는데 충격을 안 받으면 이상할 것이다.
“흐음 각도가 별로 안 좋았나? 아, 단추가 안 풀려 있었네.”
티그리스는 애써 못 들은 척 차를 마셨다.
트리샤가 왔을 때도 복작복작하긴 했는데 소라와 네메시스가 오니 집이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때, 레니가 전문을 하나 들고 티그리스에게 왔다.
“티그리스 님 황실에서 온 전문입니다.”
황실에서 전문이 왔다는 소리에 거실에서 한바탕 레슬링을 하던 소라와 트리샤가 태엽이 멈춘 인형처럼 우뚝하고 멈췄다.
그리고 곧바로 자리에 착석했다.
“티그리스 님. 무슨 내용이에요?”
“내일 해리 황태자님께서 보자고 하시는군.”
제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해리 황태자님은 흑토지대 안정화 문제때문에 흑토지대로 간 거 아니었나?”
“얼마 전에 돌아오셨다.”
“되게 조용하게 돌아오셨네? 흑토지대로 향하실 땐 흑토지대 문제를 완전히 뿌리 뽑고 오겠다고 호언장담하고 가셨는데.”
“빅토리에 문제가 크다 보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깐 들르신 거다.”
샤를로트가 입을 열었다.
“해리 황태자님껜 뾰족한 수가 있으실까요?"
“있을 거다.”
티그리스의 기억 속 해리 황태자는 군사적 식견도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없었다.
물론 저번 레인로버 황녀의 생일 파티 때 보여준 해리 황태자의 모습은 티그리스의 기억과 사뭇 달랐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직면했을 때 쉽게 무너질 수도 있었기에 지금도 그리 믿지 않았다.
“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대요?”
“아직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데요?”
“황녀 전하께서 해리 황태자님께서라면 해결하실 수도 있다고 했다.”
티그리스는 자신의 눈이 그리 좋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레인로버라면 다르다.
레인로버는 사람을 보고 분석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 발군이었으니까.
레인로버가 가능하다면 가능한 것이다.
네메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벌써부터 공처가 기질이 보이니······ 눈앞이 캄캄하네.”
트리샤가 네메시스를 쏘아봤다.
“네메시스······.”
“아, 나도 모르게 본심이. 미안.”
네메시스는 홀라당 다 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몸이 찌뿌둥하네. 리니아 아가씨 밤도 깊었는데 저랑 대련 한 판 하지 않으시겠어요?”
“아, 그럴까요?”
소라도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나도!”
리니아는 최근 네메시스와 소라에게 이쁨을 받고 있었다.
티그리스처럼 무뚝뚝한 놈에게서 어찌 저런 귀여운 아이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며 챙겨주고 싶다고 하던가?
리니아도 은근히 소라와 네메시스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들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는 느낌이었다.
귀족으로서 억제되어 있는 삶이 아닌 말과 행동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수인들의 자유로움에서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오는 것 같았고, 실제로 검술에도 변화가 있었다.
기존에는 딱딱한 검로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면 최근에는 수인족들의 박투술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눈이 트이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리니아는 티그리스를 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대련 좀 하고 와도 될까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거라.”
“네! 감사합니다!”
리니아는 신나서 테라스로 향했다.
그때, 티그리스의 눈에 거슬리는 게 하나 생겼다.
‘······바지가 좀 짧은 것 같은데.’
평상복이라고 해도 마치 네메시스와 소라, 트리샤처럼 다리가 모두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음······.”
리니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변하는 모양이었다.
* * *
티그리스는 해리 황태자와 레인로버 황녀와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흑토지대는 어떻습니까?”
“백성들은 누가 자기 주인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세금 덜 내는 주인이 오길 바라고 있고, 한순간에 지지 기반이 무너진 귀족들과 부패한 관리들은 조금이라도 건지려고 발악하고 있는 중이지.”
한마디로 흑토지대는 여전히 혼란스럽다는 말이었다.
하긴 그 지역에서 최소 몇백 년 동안 대를 거쳐서 살아온 놈들이다.
단번에 썩은 뿌리가 뽑힐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망상에 가까웠다.
“그래도 백성들이 황국군에 잘 협조해 주고 있어서 안정화 작업은 겨울이 되기 전에 끝날 것 같네.”
“다행이군요.”
“그래도 역시 전쟁은 정말 피하는 게 좋은것 같더군. 물론 그게 내 마음 하나만으로 될리가 없지만 말일세.”
“피할 수 없는 전쟁도 있지요.”
“그러니 철저히 대비를 해야지. 특히 황국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일은 반드시 필요해. 그걸 흑토지대에서 보고 왔네.”
해리 황태자는 흑토지대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황국군은 핍박받는 백성들을 구한다는 명분이 있기 때문에 하나로 단결하여 싸울수 있었지만, 흑토지대 귀족들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달랐네. 몇몇 병사들은 대충 싸우는 척하다가 검과 창을 놓고 투항하는 것도 봤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말을 길게 끄는걸까?
티그리스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니 이번 그레이 타운 일도 빨리 해결되어야겠지요. 해결 방안이 있습니까?”
“해결 방안은 아주 간단하네. 저들에게 일자리를 주면 되네.”
그레이 타운의 회색 쥐들이 시위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황도에선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많은 그레이 타운의 시민들을 수용할 만한 일자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왜 없나? 일자리 창출은 대규모 토목 사업만 한 것이 없네. 그리고 때마침 대규모 토목 사업을 해야 하는 일이 하나 있지.”
해리 황태자는 대륙 지도를 테이블에 펼치고 붉은 펜을 들었다.
그리고 밀림 지역과 구(舊) 바로스 후작령을 잇는 하나의 실선을 그었다.
“이 검은 바위 산맥에 거인들의 무덤이 발견되었다지? 조사단의 설명에 따르면 거인들의 무덤에서 출토될 마석의 양은 황국이 향후 100년 동안 마석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네.”
“이 마석들을 유통하려면 열차만 한 것이 없지요.”
“그렇지. 바로스 후작령에서 검은 바위산 근처까지 거리는 직선거리로만 약 150㎞ 정도네. 이만한 땅을 개간하고 철도를 놓고 역을 설치하며 가드 포인트를 설치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 같은가?”
“잘 모르겠습니다.”
“얼추 잡아도 4년일세. 적어도 그레이 타운의 시민들이 4년 동안 굶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지. 심지어 밀림 지역은 겨울이 없어서 사시사철 작업을 할 수 있네. 물론 비가 자주 내린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것은 차차 해결하면 될 일이고.”
티그리스는 속으로 감탄했다.
대규모 토목 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 그리고 그레이 타운의 인구 밀집 현상까지 단번에 해결해 버리다니.
레인로버가 괜히 해리 황태자를 부른 게 아니었다.
‘진짜 재능은 이쪽이었나.’
“하지만 문제가 있네. 이런 대규모 토목사업을 진행하려면 시공사를 찾아내고 자금도 모아야겠지. 그리고 처음으로 수인들과 함께 실시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보니 여러 신규 정책들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네.”
“한마디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내가 계산해 보니 밀림에 첫 삽을 꽂으려면 최소 반년은 필요하네. 하지만 그레이 타운 상황을 보면 회색 쥐들이 반년이나 기다려 줄 거로 보이진 않네. 그럼 당장 저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건데······.”
해리 황태자는 말하기 힘든 제안을 하려는지 말을 살짝 끌었다.
“혹시 자네가 직접 나서서 시위대를 설득해 줄 수 있겠나?”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레이 타운의 시민들이 저를 의지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나서게 되면 황제 폐하께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무슨 걱정을 하는 지 이해하네. 노르베르드 변경백의 후계자가 빅토리에 한복판에서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이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티그리스가 노르베르드의 영주민들에게 정치적인 약속을 하는 것은 별문제가 없다.
하지만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빅토리에에서 일자리를 줄 테니 자신만 믿어달라고 대국민 약속을 하는 것은 황제의 권한을 넘보는 일이 되고 만다.
이 문제를 귀족들이 걸고넘어지면 티그리스나 황제 둘 다 다치고 만다.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네. 노르베르드의 후계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사위이자 부마로서 나서면 모든 것이 해결되네.”
갑자기 결혼 문제가 툭 튀어나오자 레인 로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갑자기 결혼 이야기가 왜······.”
“레인로버 너도 얼마 전 친족 간 결혼 제한 법령이 바뀐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아닌가?”
“아니, 알고 있긴 해도······.”
“그 문제 때문에 내가 중앙귀족들과 입씨름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래서 결혼 중매쟁이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가 봐. 하하하!”
왠지 해리 황태자가 흑토지대에 복귀하자마자 계속 중앙귀족들을 만나고 다니더니 친족 결혼 법안을 개정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레인로버는 아예 폭발하기 직전까지 왔는지 부들부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제발 그 입 좀······.”
“큼! 아무튼 언제까지 이 혼사를 미뤄야 하나? 지켜보는 내가 아주 답답해서······.”
흠칫!
해리는 살기가 담긴 시선에 어깨를 움찔했다.
레인로버의 손엔 포크가 들려 있었다.
“더 말하다간 내가 죽겠군.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그때, 해리 황태자의 수행 비서가 다가왔다.
“해리 황태자님.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
“아, 그런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해리 황태자는 시간을 보더니 일어났다.
“원래 같이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황제 폐하께서 오늘 오찬을 같이하자고 하시더군. 그러니 미안하네만 둘이서 식사를 하게. 그럼 나는 이만 가겠네.”
해리 황태자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고, 어느새 티그리스와 레인로버 둘만 남았다.
레인로버는 너무 더운지 손부채질을 했다.
“그······ 오라버니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티그리스 경. 이게 그렇게 급한 문제도 아니고······ 아니지. 급한 문제인가······?”
“황녀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네?”
티그리스는 홍차에 담긴 자신의 얼굴을 봤다.
“제가 어떤 인간인지 아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와 결혼을 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요.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교훈은 의미가 없다. 옛날의 티그리스 경은 수없이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경험했지만 아프지 않았어요. 티그리스 경은 오만했고 책임감을 가지기보단 남 탓만 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레인로버는 후회에 잠겨 고통스러워하는 티그리스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티그리스 경은 지금 아파하고 있어요. 매일같이 그 지옥 같은 전장을 떠올리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잖아요. 그 결과 티그리스 경은 변했어요. 남을 믿지 못하고 오만했던 티그리스 경은 이제 저와 바스티얀 학교장님, 베르강 경을 믿고 의지하잖아요.”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선물해 준 루비목걸이를 매만졌다.
“저는 변한 지금의 티그리스 경이 좋아요.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고요. 티그리스 경은 안 그러세요?”
레인로버는 얼굴이 루비 목걸이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티그리스는 레인로버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노르베르드 가문에는 내려오는 전통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죠?”
“평생을 함께할 반려에게 늑대검으로 청혼을 합니다. 제 아버지도 제 어머니에게 청혼을 할 때 검으로 청혼을 했었죠.”
티그리스는 레인로버 황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늑대검을 검집째 뽑아 레인로버에게 두 손으로 건넸다.
“레인로버 황녀님은 제게 너무나도 과분한 사람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여인 중에 제일 현명하시고 제 어머니처럼 제 과오와 실수를 보듬어주실 수 있는 인자함까지 갖추셨습니다.”
티그리스는 고개를 들어 사랑스러운 아내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그 누가 제가 다시 삶을 살게 되어 만나게 된 가장 귀중한 인연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레인로버 황녀님이라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와 결혼을 해주시겠습니까?”
레인로버는 남편의 검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티그리스.”
* * *
해리 황태자는 멀찍이 떨어져서 티그리스가 레인로버에게 청혼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거참 세상에서 제일 무뚝뚝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오직 해리 황태자와 황제만 아는 사실이지만, 티그리스는 오늘 레인로버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해리 황태자가 해준 일은 친족 간 결혼 제한 법령을 빠르게 고치는 일과 티그리스가 황궁 내에 늑대검을 들고 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일뿐이었다.
더 추가하자면 티그리스가 용기를 낼 수 있게 조금 등 떠밀어준 것 정도랄까?
“약혼식은 올해 가을에 하고 결혼식은 내년 5월에 하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