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난해
펠렌은 헐렁이는 왼쪽 소매를 정리하지 않은 채 아르펨의 앞으로 향했다.
아르펨은 마왕이 앉았던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다가오는 펠렌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아르펨의 시선은 펠렌의 펄럭이는 왼쪽 소매에 고정되어 있었다.
펠렌은 아르펨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아르펨 님.”
아르펨은 말없이 펠렌을 내려다봤다.
펠렌은 다른 권속들과 달리 언제나 격조있고 귀품이 있었다.
펠렌은 윗사람에게 순종하되 비굴해 보이지 않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태생이 귀족이라서 그런 것이라기보단 펠렌은 본디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거나 복종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지배하기위해 태어난 오만하고 교만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방심했느냐?”
“아닙니다. 신중했습니다.”
“솜니움이 실수한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그럼 실패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황국 측의 대응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습니다.”
솜니움의 위치를 어떤 방법으로 알아냈는지도 문제였지만, 황국이 티그리스를 보냈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
바스티얀 개인이 움직인 것까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
제국 대학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바스티얀이 할 일이니까.
하지만 티그리스는 다르다.
티그리스는 일개 교관일 뿐이다.
학생들이 정신 세뇌에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티그리스가 직접 나설 이유가 없다.
티그리스와 연이 깊은 학생들도 아니고 티그리스의 성질을 긁어댄 어린 마법사들의 정신 세뇌를 풀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나이트메어에 감염된 환자들을 굉장히 빠르게 치료하고 있습니다. 알아본 결과 설탕이 다량 포함된 물로 나이트메어들을 빼내고 있다고 합니다. 나이트메어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이렇게 빠르게 대처할 수 없습니다.”
펠렌의 말은 신빙성이 있었다.
지금까지 티그리스만 죽이면 모든 일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번 일을 겪어보니 황국 자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황국은 밀림과 수교를 맺고 거의 연을 끊고 지내다시피 했던 고디바 왕국에 대사를 파견하고 길리온 왕국과 룩스교를 배척하고 있다.
티그리스 혼자서 이 모든 일을 진행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네 판단은 어떻지?”
“지금 섣불리 티그리스를 죽이거나 건드리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티그리스는 뜨거운 강철과도 같아서 건드리면 오히려 저희가 다칠 것입니다.”
“충분히 지켜보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뜻이군. 오슬로를 보내는 것도 안 되겠나?”
“예. 그렇습니다. 지금 오슬로가 티그리스와 만나면 티그리스의 검술을 배우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수준 격차가 심한가?”
“성수로도 치유할 수 없는 참격을 날리는 자입니다. 오슬로는 당분간 길리온 왕국 내에서 성장시키시지요.”
아르펨은 몸을 일으켜 펠렌에게 다가갔다.
펠렌은 아르펨이 다가오자 고개를 더욱 숙여 아르펨의 발끝을 쳐다봤다.
“일어나라.”
펠렌은 공손하게 일어났다.
아르펨은 헐렁거리는 소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르펨의 긴 손톱이 펠렌의 소매에 닿자 마치 종잇장처럼 잘려 나갔다.
“재생은 안 되는 모양이군.”
“예. 그렇습니다.”
아르펨은 자신의 왼팔을 향해 손을 뻗더니 그대로 왼팔을 뽑아냈다.
선혈이 튀며 바닥을 흥건히 적셨지만 아르펨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르펨은 뽑힌 왼팔을 펠렌의 단면에 가져다 댔다.
꿈틀- 꿈틀-
아르펨의 왼팔이 펠렌의 몸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펨의 왼팔은 툭 하고 떨어졌다.
아르펨은 떨어져 나간 왼팔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신기하군. 그냥 잘려 나간 것이라면 붙어야 할 텐데 말이야. 혹시 환통은 있나?”
“전혀 없습니다.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왼팔에 붙어 있는 영혼 자체가 잘려 나간 기분이었습니다.”
“영혼은 잘려 나가는 것도 소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군.”
“왼팔을 되찾을 방법이 있습니까?”
아르펨은 고개를 저었다.
“없다. 넌 왼팔을 사용한다는 개념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마 너는 왼팔을 어떻게 움직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텐데 맞나?”
“정확히 말하자면 왼팔을 움직일 자신이 없습니다. 꿈속에서도 왼팔을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이건 나도 위험하겠군.”
티그리스에게 목이 베어진다면?
아르펨은 절대 부활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다른 권속들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오슬로는 영혼 자체가 없고 기억만 전송되는 형태라 티그리스와 대적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 경지에 오른 티그리스를 오슬로가 감당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네 말대로 티그리스는 건드리지도 접근하지 않는 편이 좋겠군.”
“한 가지 묘안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봐라.”
“티그리스를 건드리지 못한다면 티그리스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르펨은 펠렌의 계책을 곧바로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티그리스는 노르베르드 변경백의 후계자였지.”
“베오울프를 죽여 티그리스를 노르베르드에 묶어두기만 한다면 황국에 일어나는 일들에 신경을 쓰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노르베르드 변경백이 되고 나면 막강한 군사력을 얻게 된다. 심지어 최근 수많은 방랑기사들과 용병들이 노르베르드로 움직였다지?”
“노르베르드가 간신히 숨만 쉴 정도로 망가진다면 티그리스가 황국의 일에 관여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르펨은 펠렌의 눈을 보며 말했다.
“가능하겠나?”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시간도 많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지원이 필요하지?”
“그것은 노르베르드를 자세히 분석한 뒤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을 겪어보니 시간을 들여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황국이 얼마나 저희에 대해 알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요.”
아르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얼마든지 주지. 난 급할 게 없으니까.”
아르펨의 말에 펠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처음으로 보이는 격한 감정에 아르펨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네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9년 3개월 18일 16시간 31분입니다.”
“그 안에는 끝낼 수 있겠나?”
펠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만 확실히 해주신다면 가능합니다.”
“로타의 도움도 필요하다면 이야기해 두지. 녀석은 솜니움을 잃어서 제정신이 아니거든.”
펠렌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바빠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러게.”
펠렌은 텔레포트로 사라졌다.
아르펨은 사라진 펠렌의 빈자리를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한 세기를 건너뛰는 일도 고려해 봐야겠군.”
* * *
황국은 총 두 가지 이슈로 떠들썩했다.
하나는 티그리스와 레인로버 황녀와의 결혼 소식이었고.
[레인로버 황녀, 티그리스와 결혼 예정.]
[레인로버 황녀의 약혼식은 이번 가을에 할 예정.]
[황실과 노르베르드 가문 모두 합의된 사안.]
다른 하나는 티그리스가 그레이 타운 시민들의 앞에 직접 나타나 황제의 교지를 직접 전달한 내용이었다.
[토드 황제 폐하, 티그리스 경을 통해 그레이 타운 시민들에게 약속해.]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전달하는 토드 황제 폐하.]
[대규모 토목 사업을 통한 일자리 제공과 황국을 혼란케 하는 범죄자들 강력 처벌 예정.]
[수인족 자치구에 거인들의 무덤이 발견돼······.]
[마약 유통을 포함한 각종 강력 범죄들 규탄할 것을 티그리스 경에게 전달.]
‘회색 쥐’들은 그레이 타운의 시민들 몇몇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직의 세뇌를 받았다는 것까지 세상에 밝혀지면서 빠르게 해산되기 시작했고 황도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티그리스의 펜트하우스는 혼돈의 카오스를 맞이했다.
“세상에······ 나 꿈꾸고 있는 건가?”
하루 종일 훈련하느라 땀 냄새 풀풀 날리는 티그리스의 펜트하우스에 레인로버 황녀가 찾아오자 펜트하우스 식구들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반가워요. 앞으로 같이 잘 지내봐요.”
네메시스는 어이가 없는지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니, 잠시만. 황녀님께서 여기에서 같이 사신다고요?”
“네.”
“왜요?”
“그냥 제가 그러고 싶어서요. 혹시 불편한 가요?”
레인로버의 말에 샤를로트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뇨. 불편하지 않습니다.”
레인로버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됐네요.”
정말로 레인로버가 티그리스의 펜트하우스에 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은 별다른 뜻은 없었다.
티그리스가 고백을 한 날 티그리스와 여러 이야기를 많이 하다 보니 펜트하우스에 빈방이 딱 하나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방이 티그리스의 바로 옆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황궁에서 벗어나 복작복작한 티그리스의 펜트하우스에서 살면 재밌지 않을까란 생각이 앞선 것도 있었다.
샤를로트가 입을 열었다.
“전 어제 소식을 듣긴 했지만 정말로 황제 폐하께서 허락해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티그리스 경을 황궁에서 살게 하는 방안도 검토하시긴 했는데, 앞으로 1년 내로 황궁이 아니라 티그리스 경의 곁에서 살아야 하니까 미리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아······그렇군요.”
그때, 소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트리샤는 굉장히 불안한 표정으로 소라를 쳐다봤다.
또 저번처럼 이상한 말을 내뱉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었다.
“황녀님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레인로버는 소라가 꼬리와 귀 그리고 손이 동시에 올라가는 게 재밌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소라 씨.”
“티그리스 경이 어떻게 청혼했습니까?”
소라의 질문에 모든 사람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긴 했다.
티그리스처럼 목석같은 사람이 황녀와 결혼한다는 것도 신기한데 먼저 고백까지 했다는 게 정말로 믿어지지 않았다.
레인로버는 소라의 당돌한 질문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고, 티그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범하게 차를 마셨다.
“으음~ 나비가 바람을 타고 제 찻잔에 날아와 앉았을 때였던가? 그때, 티그리스가 제게 한쪽 무릎을 꿇고 늑대검으로 고백했어요.”
“오오! 뭐라고 청혼했던가요?”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표정을 봤다.
티그리스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지만 레인로버는 알 수 있었다.
티그리스는 살짝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껴안아주고 싶었지만 레인로버는 간신히 참아냈다.
“그건 비밀이에요.”
물론 티그리스의 고백 내용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다.
티그리스의 고백 문구 속엔 회귀 내용이 담겨져 있었으니까.
소라는 맥빠진 표정으로 황녀를 쳐다봤다.
“······티그리스 님의 아내 되실 분이 맞으신 것 같네요.”
“왜죠?”
“티그리스 님도 레인로버 황녀님처럼 비밀이 많으시거든요.”
황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둘이 알고 있는 지식 중엔 여러분들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이른 것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언젠가 말씀드릴 수 있는 날이 분명히 올 거예요. 그리고 그 진실은 그 누구보다 여러분들이 먼저 알게 될 겁니다.”
샤를로트, 아이린, 트리샤, 리니아, 네메시스와 소라까지.
여기에 모여 있는 이들이 모두 대륙의 희망이다.
샤를로트와 아이린, 트리샤는 티그리스가 공언한 소드 마스터 예정자고.
리니아도 티그리스가 재능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으니, 대륙 역사상 최초로 한 시대에 소드 마스터가 둘이나 나오는 가문이 나올지도 몰랐다.
네메시스와 소라는 앞으로 트리니티에 올라올 수인들을 가르칠 예비 교관이자 여우와 고양이 종족의 차기 우두머리였다.
이들 하나하나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할 수 없는 큰일을 해내야 할 인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알게 될 날이 곧 올 것이다.
“아, 티그리스 경 혹시 지금 따로 얘기가 가능할까요? 황제 폐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어서요.”
레인로버의 말에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로 가시죠.”
* * *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서재를 구경하며 입을 열었다.
“우와······ 정말 다양한 책들이 많네요. 심지어 최근에 발간된 책들도 있고, 예전에도 책을 많이 읽으셨나요?”
“예전에는 책을 잘 읽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검술서 정도가 전부였죠.”
티그리스가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시점은 회귀한 직후다.
티그리스가 검을 제외하면 다른 지식들이 생각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회귀를 통해 알았기 때문에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여러 책들을 읽었다.
“최근엔 뭘 읽고 계신가요?”
“테호 대장로님께서 주신 점성술 관련 서적입니다. 수인어도 공부할 겸 읽고 있죠.”
“그럼 이제 별을 보면 미래를 점칠 수 있겠네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점성술에 재능이 있진 않은 모양입니다. 개념은 대충 이해되지만 하늘의 운행을 읽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티그리스 경은 혼령술을 제법 잘 사용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주술에도 재능이 있는 줄 알았는데요.”
“혼령술도 마찬가지로 개념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지 혼령술사들처럼 영혼을 부리거나 부적을 만드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악령 베기를 만드셨잖아요. 그건 혼령술에 재능이 있어서 가능하신 게 아니었나요?”
“정확히 말하자면 구마 의식 자체에 ‘베어내고 끊어낸다.’라는 개념이 존재해서 제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겁니다. 구마 의식은 악령이 갖고 있는 악행과 업을 끊어내는 것이 핵심이거든요. 그래서 악령 베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끊어내고 베어낸다는 개념과 검술과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악령 베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거네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요?”
“네. 그렇습니다.”
레인로버는 소파에 앉았다.
“하긴 티그리스 경이 주술에도 재능이 있었다면 마사라이의 뼈 바늘에 주술의 문양이 나왔겠죠. 오히려 검술과 거의 관련이 없는 분야를 검술의 영역으로 끌어온 티그리스 경이 대단한 거겠네요.”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무슨 내용을 전달하라고 하셨습니까?”
“아, 원래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말이 길어졌네요.”
레인로버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서적 하나를 꺼내 들었다.
'천벌'이라는 검술서였다.
“그건 400년 전에 멸문한 파인스 가문의 검술 아닙니까?”
“역시 바로 알아보시네요. 혹시 이 검술을 알고 계신가요?”
“그런 검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사용하진 못합니다.”
“그럼 이 검술서를 읽고 이 ‘천벌’을 부활시킬 수 있나요?”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검술서에 적힌 내용이 얼마나 정확하고 자세하게 적혀 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가능할 것입니다. 그 검술을 제가 익혀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트리니티에 다닐 학생들에게 필요할지도 모르죠.”
티그리스는 레인로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각각의 학생들의 재능에 맞는 검술을 가르치면 빠른 성장이 가능하겠군요.”
“네. 맞아요. 그리고 트리니티에 다니는 학생들에겐 황궁의 서고에 있는 각종 기술서에 접근할 권한을 주기로 했었잖아요? 하지만 그 기술서 중에 영원히 봉인되어야 할 기술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티그리스 경이 그 기술서들을 모두 읽고 트리니티 학생들에게 허용해도 될 기술서들과 봉인 또는 파기되어야 할 기술서들을 구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트리니티 학생들에게 각종 검술과 오러 운용술을 가르쳐 줄 수 있다는 점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가문들의 기술서들을 엿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일부터 황궁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좋으세요?”
티그리스는 레인로버의 감정 변화를 순식간에 캐치했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만이 한 줌 섞인 듯했다.
“지금 티그리스 경 표정이 어떤지 모르죠? ‘나 지금 엄청 신나!’라는 표정이에요.”
티그리스는 레인로버의 감정변화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도대체 왜 뭐가 불만인 걸까?
그때, 티그리스의 귓가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레인로버 황녀님과 단둘이 서고에서 책을 읽을 수 있어 좋습니다.’ 라고 대답해. 어서.
티그리스는 잠시 고뇌하고 입을 열었다.
“······레인로버 황녀님과 황궁 서고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좋은 겁니다.”
티그리스의 대답에 레인로버는 살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티그리스가 이런 입에 발린 소리를 할 줄 알았다는 데 놀란 것일까?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레인로버의 미소속에 숨어있던 불만이 싹 사라져 있었다.
“큼! 책을 읽으러 황궁에 가실 필요는 없어요. 연락만 넣으면 황금 기사들이 이쪽으로 가져올 거거든요.”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에게 ‘천벌’을 건네며 일어났다.
“저 방에서 읽던 책 좀 가져올게요. 오늘 잠들기 전까지 단둘이 책이나 읽죠.”
레인로버는 싱글벙글 웃으며 서재를 나갔고, 티그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인. 누가 멋대로 훔쳐보라고 했지?”
제인은 천장에서 실실 웃으며 나타났다.
“미안. 이번만 봐줘.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 정말 궁금해서 말이야.”
“앞으로 서재와 내 방에 들어오는 일은 없도록 해라.”
“알았어. 그런데 방금 나 아니었으면 정말 곤란해질 뻔한 거 알지?”
“······레인로버 황녀님은 이런 사소한 일로 화를 내지 않으신다.”
“하지만 바가지는 좀 긁히겠지. 지금은 연인 관계니까.”
“······.”
제인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연애 상담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팁 정도는 줄 테니까. 여자 마음은 여자가 제일 잘 아는 법이거든.”
제인은 천장으로 쏙 사라졌다.
티그리스는 제인이 사라지자 ‘천벌’을 펼쳐 책을 읽었다.
하지만 도통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해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