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123화 (123/251)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23화

수확의 계절

모르고트는 황궁 내 귀빈들을 위한 개인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티그리스가 숙소와 연결되어 있는 작은 정원에 도착하자 한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르고트였다.

‘……저게 모르고트라고?’

티그리스는 모르고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모르고트가 살이 굉장히 쪘다는 것은 알고 있긴 했지만, 저 정도로 쪘을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티그리스의 기억 속 모르고트는 저렇게 살이 찌지 않았고, 오히려 왜소한 몸매의 사내였다.

티그리스는 회귀 전의 모르고트를 떠올렸다.

티그리스와 모르고트의 첫 만남은 로타와 아르펨이 본격적으로 대륙 점령의 야욕을 드러냈을 무렵이었다.

모르고트는 당시 길리온 왕국의 3군단장과 추악한 사제들의 목을 보따리에 들고 황국군에 들어왔다.

당시 황국은 몰락하고 있었고 로타와 아르펨의 키메라들과 함께 진격하던 길리온 왕국은 한창 승기를 잡 있던 시기였기에 모르고트의 배신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라칸도.

-난 평생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며 살았지만, 선량한 사람들의 목숨까지 빼앗아가며 살고 싶진 않소!

모르고트는 길리온 왕국 내에서 신앙이란 이름하에 벌어지고 있는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낱낱이 밝히며 자신의 변절의 이유를 설명했다.

앞서 말했지만 처음엔 그 누구도 모르고트를 믿지 않았기에 모르고트는 무려 5성 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하지만 황국군 최후의 요새 아렌 요새로 대피할 당시 말레우스와 수인족들을 향해 공격해 오는 키메라들을 홀로 막아내면서 자신이 완전히 황국의 편임을 증명해 냈다.

티그리스는 회귀 전의 모르고트의 천재성과 업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순수하게 지금의 모르고트를 봤다.

모르고트는 티그리스가 온 줄도 모른 채 계속 달리고 있었다.

오러를 이용해 무릎과 고관절에 오는 충격을 분산시켜서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일반인이 저런 육중한 몸으로 달렸다면 관절을 다쳐서 한동안 걷지 못했을 것이다.

‘오러 센스 하나만큼은 역시 타고났다. 하지만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있군.’

티그리스의 기억 속 모르고트는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레이트 웜 키메라들이 황국군의 야영지를 급습할 때, 티그리스 다음으로 반응했을 정도로 외부 자극에 굉장히 민감했다.

보통 이렇게 쳐다만 보고 있어도 누가 쳐다보고 있는지 곧바로 알아챌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 민감함과 생존 본능이야말로 모르고트의 천재성의 기반인데, 이렇게 둔하다면 티그리스의 기억 속 천재 모르고트와 지금의 모르고트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살이 너무 많이 쪄서 그런가?’

티그리스는 모르고트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티그리스는 아주 미약한 살기를 흘렸다.

그와 동시에 모르고트는 달리다가 넙죽 엎드렸다.

살이 까지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 자신을 호위하는 황금 기사에게 향했다.

“왜 그러십니까?”

모르고트를 지키던 황금 기사 하나가 모르고트가 벌레처럼 땅을 기어 다가오자 당황하며 물었다.

“누가……! 누가 내 목숨을……!”

“네?”

“어서! 어서 병력을 불러야 합니다! 저를 누군가가 죽이려 한다니까요?!”

“황궁은 완전히 안전합니다.”

“그게 아니라니까!!! 지금도 지금도 저기에…… 어?”

모르고트가 가리킨 방향엔 티그리스가 서 있었다.

황금 기사는 티그리스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예를 표했다.

“티그리스 경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금 기사단 3팀 소속 아르웬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아르웬 경.”

모르고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어? 분명 이쪽 방향에서 살기가 느껴졌는데…….”

티그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아직 미숙한 것인가.’

회귀 전의 모르고트는 닳고 닳은 군인이었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는 전쟁터 속에서 몇 년 동안 굴렀을 테니 지금과 다른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4성 기사인 아르웬도 눈치채지 못한 미약한 살기를 고리가 겨우 3개인 모르고트가 눈치챈 것을 대단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티그리스는 몸을 털고 일어나는 모르고트를 보며 말했다.

“저를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모르고트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말씀 낮추세요. 티그리스 경. 어차피 전 이제 왕자가 아니니까요.”

“그럼 그러도록 하지.”

“……에?”

놓으라고 하긴 했지만 바로 놓을 줄은 몰랐는지 모르고트는 순간 벙쪘지만, 제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큼! 아무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정식적으로 인사를 드리죠. 모르고트입니다. 전에 티그리스 경의 제자분들과 동생분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네. 그나저나 내게 검을 배우고 싶다고?”

티그리스의 말에 모르고트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왜 검을 배우고 싶지?”

모르고트는 이미 예상한 질문인지 즉답했다.

“먹고살기 위해서입니다.”

“…….”

티그리스는 순간 말을 잃었다.

“먹고살기 위해서?”

“예. 제 앞날을 조금 고민해 봤는데, 언제까지 황궁에서 지낼 수 있는 노릇이 아닙니까? 조만간 독립을 해야 할 텐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검술밖에 없더군요.”

먹고사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긴 했지만 뭔가 맥빠지는 대답이었다.

“그럼 굳이 내게 검술을 배울 게 아니라 아르웬 경에게 배워도 될 텐데 왜 나를 찾은 거지? 아니면 황국에 정식적으로 검술 교관을 요청하거나.”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제가 황궁을 나서면 제일 먼저 입단 테스트를 보고 싶은 기사단이 바로 검은 늑대 기사단이기 때문입니다.”

“검은 늑대 기사단?”

“예. 그렇습니다. 제 몸이 지금 이렇긴 해도 3성 기사입니다. 살을 좀 빼고 근육을 붙이면 제법 쓸 만한 기사가 될 겁니다. 그러나 저는 검은 늑대 기사단에 입단하기엔 ‘변절자’라는 인식 때문에…… 입단이 조금 힘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니 티그리스는 모르고트의 입장을 잘 생각하지 못했다.

모르고트는 길리온 왕국을 버리는 것도 모자라 주요 기밀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떠벌린 변절자라는 타이틀이 평생 따라붙을 것이다.

모르고트는 티그리스가 혹시 자신을 변절자 이미지로 낙인찍고 바라보는 게 아닌가 떠보는 것이었다.

물론 황국이 모르고트에게 새 신분을 준다고 하지만 티그리스가 신분 세탁을 한 모르고트를 못 알아볼 리는 없을 터.

그러니 검술을 배우고 싶다는 것은 단순 핑계고 티그리스에게 검은 늑대 기사단의 입단을 허락받고 싶다는 말과 똑같았다.

‘……그러고 보니 모르고트도 왕자였군.’

단순히 검은 늑대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으니 추천장을 써달라고 말하면 될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돌려서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귀족의 어법이었다.

특히나 매튜 왕자에게 평생을 시달린 모르고트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니까 자네는 내게 검술을 배울 기회보단 검은 늑대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는 추천장이 필요한 거군.”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긴 합니다만…… 그것 외에도 티그리스 경에게 제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모르고트의 대답은 확실히 끌리긴 했다.

모르고트는 최소 5성 기사 아니, 제대로 된 교육만 받으면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는 인재다.

그런 인재가 노르베르드 가문에 알아서 들어오겠다는 건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티그리스 경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황궁에 지내는 동안 검술을 조금 알려주십시오. 물론 지금은 살이 너무 쪄서 검을 들 순 없지만 다다음 달까지 정상 체중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했다.

모르고트의 천재성은 티그리스가 아주 잘 알고 있다.

모르고트는 빠른 반응속도와 감각을 통해 적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스타일, 트리샤와 비슷한 부류의 검술사다.

이런 인재가 집단 전술용으로 만들어진 검은 늑대 검술을 배우는 것이 맞을까?

물론 모르고트의 천재성을 보자면, 다른 검은 늑대 기사들보다 뛰어난 기사가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모르고트의 장점을 다 죽이는 검은 늑대 검술을 배우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하곤 입을 열었다.

“추천장은 얼마든지 써줄 수 있네. 3성 기사라면 검은 늑대 기사단에 들어올 자격은 충분하지.”

“그럼…….”

“하지만 자네에게 선택지를 하나 주겠네.”

“선택지요?”

“난 자네의 근골과 재능에 맞는 검술을 하나 알고 있네. 이미 멸문한 파인스 가문의 검술을 내가 직접 손질해서 만든 검술이지.”

모르고트는 순간 감탄했다.

“그러니까 제게 맞는 검술을 가르쳐 주시겠다는 겁니까?”

“하지만 조건이 있네.”

조건이란 말에 모르고트의 표정이 굳었다.

“조건이요?”

“이 검술을 배우는 순간 자네는 평생 노르베르드 가문을 떠나지 못하네.”

“그렇겠죠. 어떻게 보면 티그리스 경이 개발한 검술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배우는 건데요.”

“그러니 선택지를 주지. 그냥 검은 늑대 기사단에 들어가길 원한다면 내가 굳이 검술을 봐줄 필요가 없네. 그냥 내가 추천서를 써주면 되니까. 하지만 내가 만든 ‘섬뢰’ 검술을 배우는 순간 평생 노르베르드 가문에 봉사하는 기사가 되어야 할 것일세.”

“검은 늑대 기사가 아닌데 어떻게……. 아, 설마 노르베르드 가문의 휘하 가문이 되라는 뜻입니까?”

“자네가 가문을 이루게 되면 그렇게 되겠지. 그게 조건이네.”

노르베르드 가문을 따르는 귀족 가문들은 총 다섯 가문이 있고 평민 출신 가문은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하나가 되라는 뜻이니 모르고트는 당연히 신중해질 수밖에……

“그럼 당연히 좋죠. 노르베르드 가문의 휘하 가문이 되겠습니다.”

모르고트는 티그리스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굉장히 흔쾌히 받아들였다.

“……너무 급하게 결정을 내린 것 아닌가?”

“지금 저는 아무런 지지 기반도 없는 일개 평민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위대한 노르베르드 가문이 제 뒤를 봐주신다는 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모르고트는 생각보다 속물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기회를 잘 잡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특유의 ‘감’ 하나만큼은 굉장히 좋았다.

“다만, 티그리스 경이 가르쳐 주시는 ‘섬뢰’를 후세에게 넘겨주고 개발할 권한만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모르고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제게 주실 검술이 무엇인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지금 보여줘 봤자 지금의 자네는 따라 할 수도 없을 걸세. 대신 내가 작성한 검술서를 주지.”

티그리스는 품속에서 ‘섬뢰’라 적힌 검술서 한 권을 꺼냈다.

“체형을 다듬는 동안 이 검술서에 담긴 묘리를 스스로 깨우쳐 보게. 그때까지 검은 절대 들지 말고. 쓸모없는 버릇이 들을 수 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르고트는 검술서를 보물처럼 껴안았다.

모르고트가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티그리스에게 단순히 검술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제국 대학의 학생들이나 모르고트나 별로 다를 바가 없다.

핵심은 모르고트가 최초로 티그리스가 개발한 검술을 사사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현재 귀족 사회 내에서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갖게 될 것인지 모르고트는 아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 숨만 쉬고 있어도 황국 내에 있는 귀족들이 모르고트에게 몰려올 것이고, 온갖 패물을 선물로 주며 자신에게 연줄을 대기 위해 난리를 칠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오는구나.’

길리온 왕국에선 반항도 하지 못하고 식물처럼 지내야만 했다.

모르고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매튜 왕자가 도저히 자신을 경쟁 상대라고 보지 못하도록 돼지처럼 게으르게 지내는 척하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티그리스와 노르베르드 가문의 휘광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루체트 황국 내에서의 입지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모르고트는 자신을 구원해 준 티그리스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평생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티그리스 경.”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곡식을 추수하는 가을이 되었다.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제국 대학 부지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는 건물들의 공사 현장을 방문했다.

통칭 ‘트리니티 빌리지’의 총책임자인 베이튼이 입을 열었다.

“건물 공사는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에 보고드렸던 대로 시멘트 공장에 대규모 화재가 일어나 시멘트 공급 문제가 있었지만, 타 공장과 빨리 계약을 체결해서 지금은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겨울철에도 공사를 진행할 수 있겠나?”

“알브레 백작님의 휘하 마법사들 쪽에서 조금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추수 감사절에도 가족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연말에는 가족들 얼굴을 보고 싶다고요.”

티그리스는 마법으로 철골을 세우고 있는 마법사들을 보며 말했다.

“그것은 알브레 백작님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겠지. 적어도 2월 초에서 중순까지 핵심 건물들은 전부 세워져야 해.”

“알브레 백작님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럼 고생하게. 베이튼 준남작.”

“예. 알겠습니다.”

베이튼은 얼마 전 준남작의 직위를 받아 명실상부 귀족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번 트리니티 빌리지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황제 폐하께서 친히 남작의 작위를 내리실 예정이었다.

그 덕분인지 베이튼이 티그리스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존경심으로 가득 차다 못해 넘쳐흐르고 있었다.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따로 공사 현장을 한 바퀴 돌며 말했다.

“흑토 지대 안정화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레인로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2군단장이 고생이 많았죠. 1군단장은 역시 티그리스 경이 예상했던 대로 왕창 깨졌고요.”

제1군단장 가믈랭은 굉장히 구시대적인 전술을 사용하는 허영심 많은 장군이었다.

그가 제1군단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여우처럼 군부 내 정치질을 잘했기 때문이었지 군사적 능력이 높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평화의 시대에선 군사적 식견보단 귀족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정치적 능력이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이긴 합니다만, 이젠 그런 정치군인은 필요 없습니다.”

“토드 황제 폐하도 알고 계세요. 내년 이맘때쯤 가믈랭 군단장은 흑토 지대에서 은퇴하게 될 겁니다. 그나마 정치 능력이 좋으니 흑토 지대의 토호 세력들의 불만을 잠재워 줄 수 있겠죠.”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공사 현장을 벗어나 공원 거리를 걸었다.

“2군단장은 좀 어떻습니까?”

“이번 전쟁으로 마셜 군단장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어요. 괴멸당할 뻔한 3사단을 구해내기도 했고 가장 많은 영토를 점령하기도 했죠. 황제 폐하께서 금 십자 훈장을 내리시고 당분간 황궁으로 출근시킬 예정이십니다. 흑토 지대에서 겪었던 전쟁들을 바탕으로 교리를 새롭게 편찬하실 예정이시거든요.”

마셜 군단장이라면 잘할 것이다.

그는 티그리스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장군 중 하나이니까.

“유능하지만 방계 출신이라 출세욕이 강한 인물입니다. 황궁 내에서 주최하는 사교회에 초대장을 많이 보내주십시오.”

“안 그래도 이번 약혼식 초대장을 보냈어요.”

레인로버와 티그리스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수인과 드워프들은 황국이 제안한 경제 및 기술 동맹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이야기.

그레이 타운의 시민들이 전(前) 바로스 후작령에 제공된 임시 숙소로 속속히 이동하여 대규모 철도 공사 준비 및 교육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

길리온 왕국이 납치한 수인 587명을 수인족 자치구에 넘겨주었다는 이야기까지.

마치 농부가 밀을 추수하는 것처럼, 티그리스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추수되고 있었다.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근처 의자에 앉았다.

“솔직히 이렇게 무난하게 일들이 잘 진행될 줄은 몰랐어요. 로타와 아르펨이 훼방을 놓을 줄 알았거든요.”

“로타와 아르펨은 레비스와 솜니움을 잃었고, 펠렌은 왼팔을 잃은 상태입니다. 심지어 황국 내에 있는 로타와 아르펨의 끄나풀이 모두 잘려 나간 상태죠. 당분간 숨을 고르면서 황국을 주시할 겁니다.”

“저희가 성좌의 던전에 들어갈 때도 조용히 있을까요?”

티그리스도 사실 마음이 제일 걸리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트리샤와 나달의 보고에 따르면 철혈 심장 성좌의 던전을 극복하려면 최소 한 달은 걸린다고 했다.

거인의 심장과 닉스의 눈물, 세계수 요정의 날개 가루를 빠르게 구해도 철혈 심장은 연금 마법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별바라기의 천체지도의 시간 왜곡 능력을 최대한 활용한다고 하더라도, 현실 시간으로 최소 3~5일 정도 자리를 비우는 것인데, 그사이 로타와 아르펨이 움직이면 대응할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최대한 들키지 않게 조심히 움직여야겠죠. 철혈 심장을 얻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솔직히 그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워낙 미래가 많이 바뀌어 버린 탓에 이젠 회귀록을 활용하는 것도 한계다.

그나마 인명록을 바탕으로 좋은 인재들을 영입하고 대비하는 것밖에 없었다.

“…….”

티그리스는 순간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분명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티그리스는 낙엽이 떨어지는 거대한 단풍나무를 정확하게 쳐다봤다.

“나오시죠.”

티그리스의 말에 단풍나무 뒤편에서 한 젊은 여인이 곰방대를 물며 나타났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감이 좋네.”

티그리스는 저 여인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챘다.

용사 페레이라의 연인이자 마녀.

아모리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