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24화
아모리스와 라칸
레인로버는 아모리스란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모리스가 누구인가?
용사 페레이라와 함께 마왕을 봉인한 최고의 주술사이자 마녀가 아닌가?
비록 인류의 역사서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했지만, 티그리스를 통해 그녀가 마왕을 막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알게 되었다.
레인로버는 아모리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레인로버 데 루체트라고 합니다.”
아모리스는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반가워. 티그리스가 내 얘기를 해준 모양이네?”
“네. 그렇습니다. 토드 황제 폐하께서도 아모리스 님을 꼭 만나 뵙고 싶어 합니다.”
“에……? 그건 좀 불편한데.”
레인로버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꼭 만나 뵙길 원하십니다. 아모리스 님의 업적을 기록한 새로운 역사서도 발간할…….”
“아아악! 안 돼. 그건 안 돼.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
“그래도 잘못된 역사를 다시 바로잡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내 위인전을 쓰겠다는 게 말이 돼? 그건 너무 부끄럽잖아.”
레인로버는 티그리스를 흘금 보며 말했다.
“이미 티그리스 경의 위인전은 출판 예정 중입니다. 아마 한 달 뒤에 출판될 거고 벌써 사전 예약만으로도 재고가 동나서 2쇄 계약까지 끝났습니다.”
아모리스가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진짜? 그걸 네가 허락해 줬다고? 너 안 부끄러워?”
“부끄러울 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사실 그대로만 적은 건데요.”
“와……. 넌 진짜 철면피다. 난 그런 거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절대 안 돼. 내 위인전을 적거든 나 죽고 나서 해.”
“…….”
아모리스는 티그리스의 눈에 담긴 복잡미묘한 감정을 읽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너 설마 내가 늙어 죽으려면 1,000년은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불경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기록에 따르면 어떤 마녀는 300살이 넘도록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신비의 땅에서 아모리스 님이 1,200년이 넘는 세월을…….”
“너 진짜 너무해!”
티그리스는 아모리스가 진심으로 상처받은 표정을 짓자 당혹스러운 듯 아모리스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레인로버는 아모리스의 성격이 굉장히 쾌활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티그리스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되어 조금 신기했다.
네메시스나 소라가 티그리스에게 장난을 칠 때는 그냥 무시했는데, 아모리스처럼 말도 안 되게 높은 사람이 장난을 치면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했다.
‘귀여워…….’
레인로버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아모리스가 티그리스를 더더욱 괴롭혀 주길 바랐다.
“……죄송합니다.”
“맨입으로? 내 여린 마음속에 남은 상처는 어떻게 할 건데?”
“뭐를 원하십니까?”
“너 그런 태도 진짜 안 좋아. 지금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겠다는 거야? 내가 그런 거 바라는 것 같아? 나도 돈 많아 짜샤!”
“돈으로 해결해 드리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아모리스 님의 화를 풀어드릴 수 있을지 궁금해서 여쭈어본 겁니다.”
아모리스는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네가 찾아야지.”
“…….”
레인로버는 아모리스에게서 신세계를 발견한 것 같았다.
티그리스를 저렇게 갈굴 수 있구나.
앞으로 티그리스가 레인로버에게 잘못하면 저렇게 괴롭혀야겠다고 생각하며 숙련된 조교의 시범을 머릿속에 담았다.
“레인로버 네가 참 고생이 많겠다. 이렇게 딱딱한 남자와 결혼을 하다니.”
레인로버는 슬쩍 티그리스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좋은 점이 더 많은걸요?”
“뭐야. 지금 남편이라고 편들어주는 거야? 이거 옆구리 시려서 참…….”
“그러지 말고 아모리스 님. 빅토리에는 오랜만이시죠? 제국 대학 근처에 맛있는 식당이 있는데 같이 식사는 어떠세요?”
“맛집이라……. 그러고 보니 점심을 못 먹어서 배가 좀 고프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제가 디저트 맛집이랑 전부 소개시켜 드릴게요. 그러니까 화를 푸시는 게 어떠세요?”
아모리스는 티그리스를 보며 말했다.
“진짜 넌 복 받은 줄 알아야 해 티그리스. 이렇게 귀엽고 똑똑한 여자랑 평생 살게 된다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와……. 네 입에서 그런 로맨틱한 말이 나올 줄이야. 속이 드글드글거리는 게 화끈한 게 먹고 싶네.”
레인로버가 곧바로 답했다.
“미들타운에 진짜 맛있는 핫윙을 파는 데가 있어요. 오늘 저녁은 그곳에서 드시는 게 어때요? 핫윙에 크림소스를 찍어 먹어도 진짜 맛있어요.”
“오올~ 핫윙~ 나쁘지 않은데? 그러자!”
아모리스와 레인로버는 만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친자매처럼 친해졌다.
레인로버도 황녀라는 신분 때문에 언제나 남들이 우러러보는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아모리스는 ‘황녀’라는 인식 없이 레인로버를 대해주니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런 걸 원하셨던 것일 수도.’
그때, 저 멀리서 제국 대학 경비들이 사방을 바쁘게 오가는 것이 보였다.
경비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잡으며 신분을 검색했다.
-혹시, 학생증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방문증이 있으십니까? 방문증은 항상 패용하고 계셔야 합니다.
-젠장, 도대체 어떤 놈이 교관 사칭을 한 거지?
티그리스는 아모리스를 슬쩍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아모리스의 가슴에 방문증이 걸려 있지 않았다.
“혹시 어떻게 제국 대학에 들어오신 겁니까?”
“나? 왜?”
아모리스는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듯 티그리스의 눈을 피했다.
티그리스는 경비들이 왜 난리가 난 것인지 대충 이해했다.
“제국 대학에 오신다고 연락을 넣어주셨으면, 따로 신분을 만들어 드렸을 텐데요.”
“그러면 널 놀래킬 수 없잖아.”
티그리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아모리스를 쳐다보자, 아모리스는 허리에 팔을 올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설마 지금 내가 몰래 들어왔다고 지금 면박 주는 거야?”
“그게 아니라 절차가…….”
“아우 딱딱해.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
“저기 경비들이 난리 난 거 안 보이십니까?”
아모리스는 시선을 돌려 경비들을 쳐다봤다.
경비들은 발에서 불이 날 정도로 제국 대학 곳곳을 쏘다니고 있었다.
아모리스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어……. 음……. 미안.”
레인로버는 안주머니에서 루체트 황가의 상징을 꺼냈다.
“이거면 제 손님 자격으로 자유롭게 제국 대학을 돌아다닐 수 있을 겁니다. 다음부턴 이걸 사용하세요.”
“오, 역시 황녀님이야. 고마워.”
티그리스는 저 멀리서 경비들이 다가오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번 일 해결해 주면 화 풀어줄게.”
티그리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뭐야 방법이 있는 거야?”
“생각이 있습니다.”
경비들은 레인로버 황녀와 티그리스를 보자 경례를 했다.
“티그리스 교관님. 레인로버 황녀님. 죄송하지만 교관증과 학생증을 볼 수 있겠습니까?”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교관증과 학생증을 넘겼다.
경비들이 전용 아티팩트로 교관증과 학생증을 점검하더니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침입을 한 모양이지?”
“예. 그렇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교관을 사칭하고 들어온 듯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네?”
“이미 내가 잡았으니까.”
아모리스는 어느샌가 자신의 양손에 묶여 있는 천공의 사슬을 보더니 경악했다.
“너…… 어어……!”
아모리스는 천공의 사슬의 효과로 다리가 풀려 풀썩 쓰러졌다.
“아, 설마 이 여인이…….”
“경비대장에겐 용의자는 내가 알아서 심문을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정상 근무로 돌아가라고 전하게.”
경비는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경례를 하며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만 철수하자!”
“네!”
경비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티그리스는 천공의 사슬을 풀어주었다.
아모리스는 분한 듯 티그리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너 지금 나한테 복수한 거야?”
“복수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한 겁니다. 그리고 거짓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너 지금 입꼬리 살짝 올라간 거 다 봤거든? 너 진짜……!”
아모리스가 분노 게이지가 폭발하기 직전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의 사내가 달려왔다.
라칸이었다.
“어? 티그리스 교관님! 레인로버 황녀님!”
라칸은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
“혹시 제국 대학에 몰래 침입한 사람이 있다던데 못 보셨어요?”
“왜 그러지?”
“아 그게…….”
라칸은 뒤에 있는 아모리스를 흘금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듯했지만, 일단 이어서 설명을 했다.
“경비들이 찾고 있길래……. 그냥 좀…….”
“퀘스트 때문인가 보군. 침입자를 찾으라는 내용인가?”
“어? 아, 네.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이분은 괜찮다. 이분은 내가 회귀를 했다는 것도 알고 계신 분이니까.”
라칸은 그제야 경계심을 풀고 활짝 웃었다.
“아하~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라칸이라고 합니다!”
아모리스는 라칸의 인사를 받지 않고, 라칸을 잠시 묘한 표정으로 계속 쳐다봤다.
“저기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아, 아~ 그렇군요. 전 아모리스라고 해요. 그나저나 영혼이 참 순수하시고 강인하시네요.”
“……제 영혼이요?”
라칸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를 아십니까?’가 갑자기 떠올라 아주 살짝 뒷걸음질 쳤다.
“네. 제가 아는 사람의 영혼과 느낌이 비슷해서 조금 놀랐어요.”
라칸은 아모리스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를 슬쩍 쳐다봤다.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도 갑자기 존댓말을 하는 아모리스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모리스를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모리스는 라칸의 눈을 계속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방금 티그리스가 퀘스트라고 했는데, 혹시 시스템이 시키는 의뢰인가요?”
“아, 예. 맞아요. 좀 이해하시기 어렵죠?”
“아녜요. 티그리스에게 잘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나저나 퀘스트 성공 메시지는 안 뜨나요?”
“퀘스트 성공 메시지요?”
“제가 그 침입자거든요.”
“어?”
라칸은 눈앞에 뜬 메시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방금 떴어요. 제국 대학에 티그리스 교관님과 레인로버 황녀님을 보러 오신 건가요?”
“네. 맞아요. 원래 티그리스를 조금 골려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큰 민폐를 끼치게 될 줄은 생각도 몰랐네요.”
“아하~ 그러시군요.”
라칸은 납득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 저는 가봐야겠네요. 조코비지 교관님 수업을 도와드려야 하거든요.”
“그래요.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라칸.”
“네. 그럼 다음에…… 어?”
그때, 라칸의 눈앞에 퀘스트 메시지가 떴다.
라칸이 허공을 찬찬히 읽자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조금 불안해졌다.
또 퀘스트가 뜬 모양인데 그 퀘스트 내용이 뭔지 대충 예상이 갔다.
아모리스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게 분명했다.
레인로버는 다급하게 말했다.
“라칸. 그 퀘스트가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티그리스는 말없이 라칸을 쳐다봤다.
하지만 웬만하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모리스는 현재 황제 폐하와 비견될 정도 아니, 어떻게 보면 그것보다 더 존경받아 마땅한 존재다.
라칸이 갑자기 옷을 벗고 이상한 셔플 댄스라도 추는 순간 티그리스는 부끄러워서 아모리스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라칸은 퀘스트 메시지를 다 읽곤 아모리스를 쳐다봤다.
“아모리스 씨.”
“네. 라칸 씨.”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레인로버는 차마 보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면 데이트 어떠세요?”
“……?”
“……?”
아모리스는 라칸의 눈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신규 퀘스트!]
아모리스에게 오늘 데이트 신청하기.
보상: 50포인트
[신규 퀘스트!]
아모리스에게 옷 골라달라고 하기.
보상: 50포인트
[신규 퀘스트!]
아모리스에게 옷 사주기.
보상: 50포인트
[신규 퀘스트!]
근사하게 차려입고 아모리스에게 저녁 식사 사기!
보상: 50포인트
* * *
티그리스는 근사하게 차려입고 식사를 하는 라칸과 요조숙녀처럼 앉아서 파스타를 오물오물 먹고 있는 아모리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거 굉장히 맛있네요. 라칸.”
“입에 맞아서 다행이네요. 혹시 부족하지 않나요?”
“아뇨. 오히려 배가 부른걸요? 더 나오면 못 먹을 것 같아요.”
아모리스의 등 뒤에 여우 꼬리가 있는 게 아닌지 싶을 정도로 여우 같은 미소를 지었다.
티그리스는 그 모습에 굉장히 이상함을 느꼈지만, 더 이상한 것은 바로 라칸의 시스템이었다.
라칸의 퀘스트의 패턴은 일정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거나 귀한 사람을 만나면 웃통을 벗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왜 아모리스에겐 그런 퀘스트가 뜨지 않는 걸까?
그러나 티그리스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도저히 아모리스와 라칸의 대화에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모리스가 너무 행복해해서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라칸 씨는 그러고 보니 매운 걸 정말 잘 드시네요?”
“이 정도는 매운 것도 아니죠.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불닭마라탕도 매일같이 먹었는걸요?”
“불닭마라탕이라……. 제가 아는 사람도 그거 참 좋아했었는데. 콜라도 정말 좋아하셨죠.”
“와 정말요? 제가 여기 와서 제일 먹고 싶은 게 그 콜라예요. 지금 연금술을 배우고 있는데, 연금술로 콜라를 만들어보려고 연구하고 있어요.”
“정말요? 완성되면 저도 한번 맛보고 싶네요.”
“꼭 맛보시게 해드릴게요.”
둘은 은근히 죽이 잘 맞았다.
아모리스는 페레이라가 해준 한국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끌어갔고 라칸도 한국 이야기가 나오니 신나서 떠들었다.
“그나저나 그분 먹성 취향이 저랑 맞았나 보네요. 그리고 저만 이 세계에 떨어진 게 아니라는 것도 신기하고요.”
“네. 그렇죠. 참 운이 좋네요.”
“혹시 그분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요.”
아모리스는 페레이라의 얼굴을 잠시 떠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이미 죽었어요.”
“아……. 그랬군요. 죄송해요.”
“아녜요. 그래도 덕분에 좋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돼서 좋았어요.”
“그럼 그분 한국 쪽 성함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모리스는 잠시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표정은 라칸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굉장히 슬퍼 보였다.
“……알려주지 않았어요.”
티그리스는 아모리스의 심장박동과 표정을 통해 거짓말을 한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무슨 심정으로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아……. 그래요? 아쉽네요.”
“그럼 라칸 씨의 한국식 이름은 어떻게 되나요?”
“저요? 김유신이에요.”
놀람, 환희, 슬픔, 연민, 그리움.
아모리스의 눈동자에 수십 개의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티그리스는 느낄 수 있었다.
아모리스는 목이 타는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김유신…….”
“어? 한국어를 굉장히 잘하시네요? 발음하기 힘드실 텐데.”
“그분한테 한국어를 조금 배워서 말이죠.”
“한국어를 가르쳐 주셨는데 이름을 왜 알려주시지 않은 걸까요?”
“……저야 모르죠.”
아모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 네.”
레인로버는 곧바로 눈치를 보더니 아모리스를 뒤따라 나섰다.
“저도 다녀올게요.”
레인로버와 아모리스는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아모리스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모리스 님 괜찮으세요?”
“아…….”
아모리스는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지 눈물을 결국 터뜨렸다.
그녀의 눈물이 볼을 타고 떨어져 세면대에 추락했다.
“그래……. 이상하긴 했어. 내가 신비의 땅에서 이렇게 살아 돌아왔는데…….”
레인로버는 아모리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예상이 갔는지 입을 가렸다.
“아니죠? 설마……. 아니죠? 김유신이 페레이라의 환생…….”
아모리스는 거울에 비친 레인로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맞아요. 라칸은 페레이라예요.”
레인로버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말했다.
“그럼 왜 라칸에게 숨기신 거예요?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셨잖아요.”
아모리스는 한동안 말을 못 하더니 입을 간신히 열었다.
“하지만 지금의 라칸은 페레이라가 아닌걸요. 영혼이 같다고 해서 동일한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페레이라와의 추억과 시간, 극복했던 시련들. 그 무엇하나 공유할 수 없는…… 아예 다른 사람이에요.”
레인로버는 아모리스의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왜 내게 이런 시련을……. 룩스 님도 무심하시지 차라리 이렇게 만날 거면 내 기억도 아예 없애주시지. 그러면……. 그러면…….”
아모리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아무 거리낌 없이 지금의 라칸을 사랑할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