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우노와 마왕
티그리스는 아모리스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이해했습니다. 절대 라칸이 봉인술을 배우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모리스는 티그리스의 확언에 안심했다.
티그리스를 오랫동안 지켜본 것은 아니지만, 티그리스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티그리스.”
“하지만 아모리스 님도 한 가지 알고 계셔야 하는 게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마왕을 봉인하는 봉인술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아모리스 님 하나뿐이라는 걸요.”
티그리스의 말은 굉장히 섬뜩해 레인로버의 어깨마저 움찔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티그리스의 말의 의미를 레인로버도 아모리스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만약 우노를 죽이는 방법을 찾지 못할 경우, 우노를 봉인해야 할 사람은 오직 아모리스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안 그러면 우노에 의해 이 세상은 결국 멸망하고 말테니까.
아모리스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럼 봉인술에 대해 몇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봉인술에 대해 뭘 물어보려고?”
“마왕을 봉인한 봉인술로 우노를 봉인시킬 수 있는 게 확실한지 궁금합니다.”
아모리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마왕을 봉인한 방법에 대해 내가 예전에 설명해 준 적 있지? 마왕을 지금의 신비의 땅이 있는 곳으로 유인해서 마왕을 봉인했다고.”
“예. 맞습니다.”
“그럼 왜 하필 신비의 땅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힌트를 주자면 우리는 신비의 땅밖에 선택지가 없었어.”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과거 신비의 땅이 있었던 곳은 드래곤들의 성지(聖地)라고 들었습니다. 그 성지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100% 정답은 아니지만 거의 정답에 근접했어.”
아모리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마왕과 드래곤의 관계부터 설명을 해야겠네.”
“당시 마왕은 이상할 정도로 드래곤에 집착했어. 대륙의 최상위 포식자가 드래곤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대륙 점령의 가장 큰 걸림돌이 드래곤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 그래서 마왕은 드래곤들이 마왕에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도록 드래곤의 성지인 비늘산을 노렸지.”
드래곤에게 있어서 성지는 유년기를 보낸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드래곤들은 비늘산에서 태어나고, 헤츨링 시기를 보낸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알을 낳을 시기가 되면 부화장에서 알을 낳는다.
마치 연어처럼.
드래곤의 종 자체를 유지하는 유일한 곳을 마왕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왕의 군세가 두려워 자신의 레어도 버리고 도망쳤던 드래곤들이 성지를 지키기 위해 피를 뿌리며 마왕의 군세와 맞붙었다.
마왕은 드래곤들의 거센 저항에 고착 상태에 빠졌고 페레이라와 아모리스는 그 순간을 노렸다.
“그럼 설마 드래곤과 함께 드래곤의 성지를…….”
“드래곤들은 나나 페레이라와 달리 살아 있는 채로 봉인되진 않았어. 대다수의 드래곤들은 마왕과 싸우다가 날개가 꺾여 죽었으니까. 그나마 살아남은 드래곤들은 성지를 버리고 도망친 변절자들이었지. 골드 드래곤 아우로므처럼 말이야.”
이것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라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많은 드래곤들을 마왕이 다 죽였다는 건가요? 어떻게요?”
“간단해. 마왕의 갑주는 드래곤의 브레스에도 뚫리지 않았지만 반대로 마왕의 검은 드래곤의 비늘과 뼈를 가를 수 있었으니까.”
마왕의 갑주는 그 무엇으로도 뚫리지 않고 검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 단순한 힘의 논리에 의해 드래곤들은 쓰레기처럼 죽어 나갔다.
“그리고 마왕은 드래곤을 죽이면 언데드화시켜서 역으로 공격을 했으니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지는 건 드래곤 측이었지.”
“그럼 어떻게 비늘산에 진입해서 마왕의 봉인술식을 만드실 생각을 하신 건가요? 드래곤들이 성지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불사했을 정도로 성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아모리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몰래 했지. 그래서 엘프나 수인들이나 수많은 왕국의 왕들이 페레이라와 내게 미쳤다고 말한 거고. 하지만 승산은 분명히 있었어. 드래곤이나 마왕이나 모두 전쟁이 온 신경이 팔려 있던 터라 정작 비늘산 안에 있는 ‘부화장’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신경을 쓰지 못했거든.”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페레이라와 아모리스의 과감한 도박에 혀를 내둘렀다.
자칫 잘못하면 마왕이 아니라 드래곤에게 죽을 수도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과감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레인로버는 절대 그런 도박은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런 나나 페레이라에게 실망했을지 모르겠네. 우리가 드래곤을 이용해서 마왕을 봉인시켰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건 알아둬야 해. 인간, 수인, 엘프, 드워프들이 마왕을 막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드래곤들은 성지로 도망쳐 버렸다는 걸 말이야.”
드래곤들은 대륙의 최상위 포식자로 활약하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
드워프와 드루이드, 인간들을 거의 노예로 부려 먹으면서 살았고, 드래곤에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었던 엘프와 거인 종족들만이 각각 밀림 지역과 뱀이 지나간 절벽에 자리 잡아 간신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 도마뱀 새끼들은 우리를 부려 먹을 만큼 부려 먹었지만 정작 마왕이 나타나자 버리고 도망쳤어. 그러니 화가 나겠어? 안 나겠어? 그놈들은 뒤져도 싼 놈들이야.”
영주민들이 영주의 폭정에도 가만히 있는 이유는 외세와 몬스터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자가 영주와 기사들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외세의 세력이 공격해 왔을 때 영주와 기사들이 먼저 도망쳐 버린다면 영주민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아모리스와 페레이라가 겪은 일은 그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도마뱀 놈들이 생각보다 비실비실해서 마왕을 제대로 못 막아내더라고. 그래서 결국 페레이라가 나서야만 했었지. 성물 비늘의 영광만 드래곤들에게 있었어도 잘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어디론가 사라졌더라고.”
“비늘의 영광은 골드 드래곤 아우로므가 갖고 있었습니다.”
“설마 아우로므가 지 살겠다고 비늘의 영광을 들고 튄 건가? 아니지. 그래야 말이 되긴 하지. 아우로므 그놈은 정말 끝까지 민폐네.”
아모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봉인술식 안으로 마왕을 밀어 넣을 수 있었으니까 결과는 좋았다고 할 수 있겠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우리가 마왕을 봉인할 수 있었던 것은 마왕이 봉인술식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라는 거지. 마왕도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제 발로 봉인술식 안으로 들어올 리가 없으니까.”
“우노도 마찬가지로 봉인술식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려면 확실한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겁니까?”
“그렇지. 우노는 마왕과 조금 다르잖아? 우노의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 아니, 정확하게 우노가 이 땅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우노는 성좌고 마왕은…… 뭐, 마왕이니까.”
“아모리스 님도 마왕의 진짜 정체에 대해 알지 못하시는 겁니까?”
아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마왕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모든 수를 다 써봤지만, 알아낼 수 없었어. 다만 그놈이 이 세상의 규칙과 어긋난 존재라는 것과 다른 성좌들이 언급하기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레인로버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성좌들이 말하기 두려워했다고요? 성좌들은 이 세상의 지성체들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잖아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성체들이 죽고 나면 자기들도 죽을 텐데 그걸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었나요?”
“그래서 우리도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했어. 분명히 성좌들은 마왕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 하지만 말하지 못했어. 심지어 성물들의 능력들이 마왕의 앞에선 제대로 능력이 발동되지 않았지.”
“……그 말은 마왕이 성좌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였다는 거네요?”
“맞아. 마왕이 왜 그런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성좌들의 근본적인 힘의 원천과 마왕이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어. 아니면 성좌들을 제압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을 갖고 있거나.”
잠자코 듣고 있던 티그리스가 입을 열었다.
“정리하자면 적어도 우노는 마왕보다 격이 낮은 존재라는 거군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연인 자리가 우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을 테니까요.”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럴 확률이 상당히 높겠지.”
아모리스는 찻잔에 남은 차를 다 마시곤 입을 열었다.
“만약에 우노를 죽이지 못하고 봉인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면, 우노를 현현 시킨 다음 봉인술식에 몰아넣어야겠지. 그런데 네가 우노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등장했다고 하지 않았어?”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최후의 전쟁 이후 로타와 아르펨이 모두 죽은 후에 등장했습니다.”
“참 이상하네. 내가 만약 우노라면 로타와 아르펨과 연계해서 너희를 사로잡았을 거야. 아니, 애초에 최후의 전쟁까지 끌 필요도 없었어. 황도가 무너진 시점부터 우노가 등장했다면 너희는 반항도 못 했겠지.”
티그리스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노가 현세에 등장할 수 있다면 왜 로타와 아르펨이 죽고 난 이후에 등장한 걸까?
우노가 만약 최후의 전쟁에 난입했다면 티그리스나 라칸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죽었을 텐데.
“그 말씀은 우노가 등장하기 위해 로타와 아르펨이 죽을 필요가 있었다는 뜻입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노나 마왕이 이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규칙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거지. 분명 놈들은 자신들만의 원칙과 법칙을 따를 거야. 그 법칙을 찾아낸다면 우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문제는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겁니다. 만약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연인자리가 제게 알려줬겠죠.”
연인자리의 말에 따르면 우노는 이미 이 행성 말고도 다른 행성들에 자신을 기억하는 지성체들을 심어두었다.
티그리스가 설령 로타와 아르펨을 죽여서 우노의 침공을 일시적으로 막아냈다고 해서 천 년, 아니, 백 년 이후에 우노가 다시 행성을 침공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연인자리가 모른다면 다른 성좌들에게 물어보거나 드워프들의 기록 보관소에 그 방법이 적혀 있을 수도 있겠지.”
“아모리스 님도 모르시는데, 기록 보관소를 찾아서 답이 나올까요?”
아모리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레인로버를 쳐다봤다.
“날 진짜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나도 모르는 거 엄청 많아. 그리고 난 거의 1,000년 동안 잠들어 있었어. 그사이 드워프들이나 엘프들은 수없이 많은 기록들을 남겼고. 그 기록 중에 분명히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을 거야.”
아모리스는 하품을 했다.
“흐아아암~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가 좀 졸리네?”
아모리스는 차를 내려놓고 서재 소파에 옆으로 누웠다.
“내가 할 말은 다 끝났으니까 이제 나 여기서 좀 잘게. 괜찮지?”
“빈 침대가 있으니 그쪽에서 주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움직이기 귀찮아.”
아모리스는 티그리스를 흘금 보며 말했다.
“왜? 내가 불편해?”
“……아닙니다.”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말해. 괜찮으니까.”
“여기서 주무시면 불편하지 않을까 해서 여쭈어본 겁니다.”
아모리스는 소파 쿠션을 머리에 베더니 말했다.
“안 불편하니까 괜찮아. 그 담요 있으면 좀 갖다줘.”
티그리스는 아모리스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 * *
아모리스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으으으~ 잘 잤다.”
서재에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서 달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아모리스는 산발 된 머리를 정돈하며 분명 보이지 않을 서재의 구석을 정확하게 쳐다봤다.
“왜? 누가 날 감시하라고 했니?”
아모리스가 바라보는 곳엔 어린 혼령 하나가 아모리스를 몰래 쳐다보고 있었다.
어린 혼령은 아모리스가 자신과 눈을 정확하게 마주치자 깜짝 놀라 벽으로 숨어들었고, 아모리스는 그 광경을 보곤 피식 웃었다.
“30년이나 산 주제에 꼬맹이인 척하네.”
이 노르베르드 타워에는 수십 마리의 혼령들이 살고 있었다.
보통 이 정도로 많은 혼령들이 몰리면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게 당연했지만, 수호령 하나가 혼령들을 제대로 컨트롤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똑똑-
문이 열리며 레니가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모리스 님?”
“응. 잘 잤어.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꼬마 아가씨?”
“……네?”
“아, 지금 모습으론 처음인가?”
아모리스가 품속에서 곰방대를 꺼내 물자 노파의 얼굴로 변했다.
레니는 예전 포그우드에서 봤던 그 무서운 노파의 얼굴을 보자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아……. 그…… 그분이셨군요.”
아모리스가 곰방대에서 입을 떼자 원래 젊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모리스는 레니의 손을 보며 말했다.
“선한 혼령들이 모여드는 게 네 수호령 때문인 줄 알았는데 네 덕이 큰 모양이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무서워하니까 네 친구들이 아주 드글드글 모여서 나를 째려보잖아. 보통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거든.”
“네? 친구들이요?”
레니가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이 퍽 귀여워 아모리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모리스는 몸을 일으켜 레니에게 다가갔다.
“역시 넌 아직 혼령을 못 보는구나?”
“……혼령이라면 제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인은 수호령이니까 당연히 보이는 거고. 널 지켜주는 혼령들을 말하는 거야.”
“저를 지켜주는 혼령들이요? 아~ 제인이 부리는 혼령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그 혼령들. 너 매일같이 그 혼령들에게 제삿밥을 차려주지?”
레니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삿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남는 반찬이 있으면 작은 소반에 밥상을 차려서 제인에게 가져다줬어요. 혼령들도 밥을 먹어야 힘이 불끈불끈 난다고 해서요.”
“흐음~ 그랬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착한 혼령들이 많이 모이는 거지.”
아모리스는 레니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빙긋 웃었다.
“이런 종류의 재능은 정말 흔치 않은데…….”
레니는 아모리스의 미소가 살짝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모리스는 레니가 뒷걸음질 친 만큼 다가갔다.
그러자 사방에 퍼져 있던 혼령들이 난리가 났다.
“레니야 너 혹시…….”
“잠까아아아안!”
갑자기 뒤에서 제인이 나타나더니 레니를 뒤로 강하게 당겨 안았다.
“우리 레니를 괴롭히지 마!”
아모리스는 으르렁거리는 제인과 혼령들을 둘러보더니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재미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