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충돌(3)
고즈넉한 겨울 숲을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메마른 늦가을을 거쳐 알맞게 타기 좋은 나무들에 불이 옮겨붙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흉흉한 달의 달빛이 땅에서 피어오른 주홍빛 화염에 집어삼켜질 무렵.
호른은 눈을 떴다.
“크어어어어어어!”
호른은 마치 물고문을 당한 죄수처럼 숨을 크게 들이켰다.
눈을 먼저 떴으나 오감 중 가장 먼저 돌아온 감각은 아이러니하게도 청각이었다.
“끄으으으…….”
“으으으…….”
사방에서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지옥에서 악마에게 고문을 당하는 죄인들의 비명 같았다.
호른은 몸을 간신히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앞이 흐려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눈의 문제인가 아니면 불타고 있는 숲의 연기 때문인가?
호른은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진 부러진 칼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 타지 않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섰다.
“……살려줘.”
호른의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 옛날 불사의 대장군이 부렸다던 좀비를 연상케 하는 움직임이었지만, 호른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무렵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밀러…….”
호른이 직접 키워낸 검은 늑대 기사들 중 하나였다.
호른의 목소리에 밀러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단장님…….”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호른은 밀러의 잘린 오른팔을 옷 조각으로 동여맸다.
하지만 밀러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단장님. ……다리에 감각이 없습니다. 왜 다리가 움직여지지가 않죠……?”
밀러는 몸을 일으켜 다리를 보려 했다.
하지만 호른은 억지로 몸을 눕혔다.
밀러의 양다리는 이미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어라. 곧 구출대가 올 것이다.”
“다리가…… 다리……. 단장님…….”
밀러는 천천히 감겨오는 눈꺼풀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밀러는 그대로 눈을 감았고, 심장도 멈추었다.
호른은 밀려오는 절망감에 분통을 삼키고 옆에 있던 얀을 쳐다봤다.
얀은 눈을 뜬 상태였으나 동공이 열려 있었다.
이미 얀의 폐부에는 부러진 철 조각이 박혀 있었다.
좀 전까지 숨을 쉬고 있었지만, 밀러와 함께 운명을 달리했다.
호른은 참았던 울분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아아!”
호른은 불타는 겨울 숲을 걸었다.
아니, 달렸다.
밀러와 얀은 이렇게 죽을 기사들이 아니었다.
밀러는 몇 년만 수련하면 4성 기사가 될 인재였고, 얀은 검은 늑대 기사단의 차기 부기사단장이 될 인재였다.
노르베르드를 노리는 오크들과 싸우다가 죽으면 몰라도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기사들이 아니었다.
“오슬로……. 페이라…….”
호른은 놈들의 인상착의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슬로는 백사처럼 새하얀 놈이었고, 페이라는 붉은 대검을 장난감처럼 내던지고 다니는 사제였다.
그놈들의 목은 반드시 자신이 치리라.
쩡-! 쩌엉-!
타오르는 불길을 가르고 들어오는 강철의 비명에 호른은 발을 멈췄다.
누군가가 전투를 벌이고 있다.
호른은 심장에 돌고 있는 다섯 개의 오러 고리들을 가동시켜 근육에 부어 넣었다.
온몸의 근육들이 찢어질 듯이 아파왔지만, 호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 소리의 근원지를 쫓아가면, 오슬로와 페이라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호른은 불길을 가르고 타다 만 나무도 부수며 숲을 가로질렀다.
얼마나 달렸을까?
호른은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주변 불길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면서 나오는 충격파로 인해 주변 사물들이 진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날카로움과 묵직함을 동시에 겸비한 오러의 기운.
굉장히 익숙했다.
이 오러는 베오울프의 것이었다.
베오울프가 살아 있다는 기쁨과 함께 베오울프가 위험하다는 위기감이 교차하며 감정이 수시로 오락가락했다.
호른은 진동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가슴을 울리는 묵직한 진동은 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호른의 심장을 조여왔다.
호른은 솔직히 말하자면 베오울프가 나서서 싸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멸지의 오우거가 광산을 습격했을 때일까?
이젠 오우거들도 하얀 늑대 기사단이나 검은 늑대 기사단이 직접 상대하면서, 베오울프는 변경령 관리에만 신경을 썼다.
그것만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그렇다 보니 베오울프의 실력이 조금 녹슬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호른의 착각이었다.
쩌저저정!
페이라의 거대한 대검 네 자루가 베오울프의 몸을 동시에 노리고 들어갔다.
그러나 베오울프는 대검을 한 번에 베어내 튕겨냈다.
드윈의 검이 제아무리 뛰어난 성물이라고 하지만 열차를 두 동강 냈던 대검을 네 자루나 한 번에 튕겨내 막아내는 것은 베오울프의 순수한 실력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다.
심지어 베오울프는 드윈의 검의 능력을 하나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위험……!”
오슬로가 베오울프의 그림자 뒤로 나타나 검을 찔러 넣으려 하자 호른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베오울프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오슬로의 검을 쳐내고 양팔을 베어냈다.
서걱-!
오슬로는 양팔이 잘려 나갔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페이라는 오슬로의 잘린 양팔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확실히 대단하군.”
페이라는 순수하게 베오울프의 실력에 감탄했다.
아르펨에게 이 대검의 능력을 받은 이후로 이렇게 치열하게 싸워본 적은 흑토 전쟁 때를 제외하면 없었다.
펠렌이 말하길 베오울프의 실력은 소드마스터 베르강과 견줄 만하다고 하더니만 아예 헛소리는 아닌 듯했다.
오슬로는 페이라에게 다가왔다.
“페이라 부탁해.”
페이라의 왼팔에 돋아난 대검 하나가 날아가더니 오슬로의 목을 쳤다.
거침없이 오슬로의 목을 날리는 페이라의 모습에 베오울프의 눈썹이 까딱였다.
지금까지 베오울프가 오슬로를 네 번이나 죽였지만, 오슬로는 어디선가 계속 나타났다.
심지어 실력까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놈의 부활 조건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베오울프가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오슬로가 부활해서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정확하게 3분.’
3분 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페이라를 죽이면 되겠지만…….
베오울프는 뒤를 흘금 쳐다봤다.
베오울프의 뒤에는 기절한 아내가 있었다.
페이라는 베오울프가 자신을 노리고 들어올 때면 집요하게 베오울프의 아내, 이자벨을 노렸고 베오울프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각하!”
그때, 불타는 숲에서 호른이 뛰쳐나왔다.
베오울프는 호른의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호른의 몸 상태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달리는 열차에서 튕겨져 나간 탓에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그래도 살아남은 기사들 중에선 호른이 제일 정상에 가까웠다.
베오울프는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전에 단호하게 말했다.
“호른. 여기는 내가 막을 테니 이자벨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라.”
“각하! 어떻게 제가 각하를 놓고……!”
그때, 호른의 옆구리로 페이라의 대검이 날아왔다.
베오울프는 즉각 검기를 날려 대검을 막았다.
그러나 검기는 기이하게도 지금까지의 은빛 오러의 형태가 아닌 보이지 않는 바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서걱-!
베오울프의 검기와 부딪히면 그저 날아가기만 했던 대검이 잘려 나가자 페이라는 경계심을 더욱 올렸다.
그것보다 호른은 큰 충격에 빠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페이라가 대검을 날린 줄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호른의 몸 상태는 그 정도로 많이 망가진 것이었다.
호른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눈물이 흘렀다.
베오울프는 고함을 쳤다.
“어서!”
호른은 이를 악물고 이자벨을 향해 달려갔다.
그사이 페이라가 대검을 날렸지만, 베오울프의 검격에 모조리 잘려 나갔다.
호른은 이자벨의 앞에 섰다.
이자벨의 주변에는 붉은 방어막이 펼쳐져 있었다.
며칠 전 티그리스가 이자벨의 생일에 노르베르드로 가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보내온 선물이었다.
무려 7서클 리플랙션 배리어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였기에 열차의 충격에서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호른은 배리어 해제 주문을 말했다.
“고귀한 장미가 화원에 들어간다.”
그러자 이자벨의 몸에 걸려 있는 배리어가 사라졌다.
호른은 이자벨을 등에 업었다.
“증원을 부르겠습니다. 각하. 조금만 버티십시오.”
베오울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른은 눈물을 삼키며 전장을 이탈했다.
오슬로가 화마를 뚫고 페이라의 옆에 섰다.
“내가 추적할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저놈들은 이 숲을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까.”
베오울프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우리가 네 아들에게 너무 많이 당해서 말이다. 이번 작전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투자했거든.”
“……티그리스에게 원한이 있는 놈들이었나?”
페이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나 오슬로에겐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하지만 내 뒤에 있는 놈은 조금 다르지.”
타오르는 화염이 둘로 쪼개지며 외팔의 노인이 천천히 걸어왔다.
펠렌이었다.
“잡소리가 많다. 페이라.”
베오울프는 긴장했다.
펠렌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법사인 것은 확실해 보였지만 그 실력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
베오울프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마법사라면 최소 7서클의 대마법사임이 분명했다.
페이라와 오슬로를 상대하는 것도 벅찬데 최소 7서클의 대마법사까지 지원이 오다니.
놈들은 베오울프를 작정하고 노린 게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대학살을 저지른 거지?”
“궁금한 게 많겠지만 알려줄 수는 없다. 한번 방심했다가 너무 큰 것을 잃어버려서 말이지. 그저 한 가지만 알아두면 된다.”
베오울프는 순간 중력이 거꾸로 뒤집힌 듯한 느낌이 들며, 몸이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이 모든 죽음의 원인은 네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말이다.”
베오울프는 드윈의 검을 허공에 내질렀다.
그러자 뭔가를 베어내는 뿌듯한 감각이 느껴지더니 중력이 원상태로 복귀되었다.
펠렌은 눈썹을 찌푸렸다.
“역시 드윈의 검인가. 마법을 오러로 베어내다니…….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드윈의 검.
노르베르드 가문의 보검이자 상징.
드윈의 검은 마녀잡이자리의 성물로 능력은 총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지금처럼 모든 종류의 마법을 잘라낼 수 있는 ‘마법 무효화’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폭풍의 검’이라는 능력.
마지막으로 검을 들고 있는 검사에게 무한한 마나를 주는 ‘마나의 축복’이라는 능력이었다.
“그 검이 티그리스에게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펠렌은 마법을 다시 펼쳤다.
“그 검도 함께 부숴주지.”
베오울프는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중력에 검을 휘둘렀다.
펠렌의 마법진에서 발한 마법의 연결 고리를 정확하게 베어낸 베오울프는 앞으로 전진했다.
이자벨과 호른이 위험하다.
대마법사까지 직접 등장할 정도라면 방금 도망친 둘을 노리는 새로운 암살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놈들을 모두 죽이고 쫓아간다.’
베오울프는 노르베르드 검술 제1식 폭포 가르기를 펼쳤다.
드윈의 검에서 발한 날카로우면서도 보이지 않는 바람이 세 사람에게 동시에 날아갔다.
세 명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펠렌은 배리어를 사용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곧바로 블링크로 도망쳤고.
오슬로는 반응하지 못한 채 양팔과 허리를 내어주었으며.
펠렌은 대검 네 자루를 들어 막아냈다.
이 중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한 사람은 펠렌이었다.
서걱-!
“어?”
오슬로는 땅이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오슬로의 검과 함께 허리가 통째로 베어진 것이었다.
페이라의 경우에는 네 자루의 대검으로 간신히 막아내긴 했으나 네 자루의 대검 중 세 자루가 완전히 잘려 나갔다.
페이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힘을 숨길 여유가 있었나?”
그게 아니라 적의 전력을 모두 파악하기 전에 자신의 수를 모두 보여줄 수 없었기에 숨긴 것이었지만…… 베오울프는 말을 아꼈다.
지금 상황은 베오울프에게 유리한 게 절대로 아니다.
부활하는 오슬로는 놔두고 제일 먼저 마법사인 펠렌을 노리기로 했다.
베오울프의 안광이 은빛으로 물들었다.
신체의 반응속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각성 오러 운용술인 베르세르크였다.
드윈의 검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온몸에 퍼져 있는 마력 회로를 질주하며 근육을 달궜다.
1,000분의 1초까지 느껴지는 이 기이한 감각에 금세 익숙해진 베오울프는 재빠르게 다시 검을 내질렀다.
수십 개의 날카로운 바람이 펠렌과 페이라에게 날아간다.
페이라는 주변에 흩어져 있는 죽은 인간들의 피를 흡수시켜 대검을 빠르게 재생시켰다.
그리고 날카로운 바람을 빠르게 막아냈지만, 좀 전처럼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하고 저 멀리 날아갔다.
베오울프의 눈이 정확히 펠렌을 응시했다.
은신 마법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펠렌을 정확하게 쳐다본다는 의미는 최상급 감지계 오러 운용술 ‘마나 감지’를 익혔다는 뜻이다.
펠렌은 쓸데없이 마나를 잡아먹는 은신 마법을 풀었다.
베오울프는 짐승처럼 펠렌에게 날아갔다.
펠렌은 재빠르게 블링크로 빠져나갔다.
‘……역시 만만치 않군.’
티그리스의 재능이 이상한 것인 줄 알았으나, 베오울프를 보니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드윈의 검의 능력이 워낙 사기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것을 온전히 다루는 베오울프의 실력은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펠렌은 중력 사슬을 만들어냈다.
중력의 사슬이 베오울프의 팔다리를 향해 날아갈 때, 베오울프는 아주 가볍게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모든 사슬을 베어냈다.
하지만 사슬은 마치 무한히 재생하는 트롤의 팔처럼 온갖 곳에서 날아와 베오울프를 속박하려 했다.
드윈의 검의 능력인 마법 무효화에 단점이 있다면 마법을 무조건 베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펠렌은 지금처럼 계속 마법을 빚어내 베오울프를 압박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서걱!
그러나 그것은 펠렌의 착각이었다.
베오울프는 사슬을 모조리 자르고 펠렌의 지팡이와 남은 팔 하나마저 잘라냈다.
펠렌은 비명을 꾹 참고 긴급하게 블링크를 사용했다.
그런데 베오울프는 그 블링크 마법마저도 베어냈다.
마법진이 활성화되기도 전에 마법진 자체를 베어내 버림으로써 마법의 발동을 막아버린 것이다.
펠렌은 우악스럽게 날아 들어오는 베오울프의 왼손에 메모라이즈해 둔 배리어 마법을 펼쳤다.
5서클 앱솔루트 배리어 마법이었지만, 베오울프는 무지막지한 오러의 힘으로 그 배리어 마법을 우악스럽게 깨부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베오울프의 왼손이 펠렌의 목을 잡아채려고 하자 거대한 대검이 베오울프의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베오울프는 왼손을 틀어 대검을 내려쳤다.
콰아아앙!
검과 손이 부딪혔다고 말할 수 없는 거대한 굉음이 폭발하며 펠렌의 고막이 터져 나갔다.
베오울프는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펠렌의 목을 부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놓치고 말았다.
페이라는 흉흉한 은빛 오러를 내뿜고 있는 베오울프를 보며 헛웃음을 쳤다.
“정말 괴물이 따로 없군.”
베오울프가 변경백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순수한 기사로서 검술 단련에만 힘을 썼다면, 두 번째 소드 마스터가 탄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게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펠렌은 리커버리 주문으로 팔을 재생시키며 말했다.
“티그리스가 왜 그리 강한 것인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괴물은 괴물을 낳는 법인가?”
펠렌은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페이라는 그 상자를 보더니 침을 퉤 뱉었다.
“결국 사용하는 거냐?”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니까.”
펠렌은 상자의 걸쇠를 풀었다.
그러자 상자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이 검은 연기에 집어삼켜져 사라졌다.
베오울프는 드윈의 검에 뭔가 이상이 생겼음을 감지해 냈다.
드윈의 검에서 끊임없이 공급되는 마나가 뚝 끊겼기 때문이었다.
펠렌은 혀를 찼다.
“마법 무효화의 능력이 사라지길 바랐는데. 아쉽군.”
펠렌은 상자를 미련 없이 버렸다.
“……그건 뭐지?”
베오울프는 지금까지 성물의 능력을 없애거나 봉인하는 성물이란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별빛 성녀의 물안개다.”
“말도 안 된다. 그 성물은 성물을 봉인하는 능력이 아니라……”
펠렌은 베오울프의 말을 잘랐다.
“다른 성물의 능력을 증폭시키거나 망가진 성물을 완전 복구시켜 주는 능력이지. 하지만 우리가 조금 손을 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타락을 시켰다랄까?”
펠렌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새로운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펠렌은 마법 술식을 다시 빚기 시작했다.
“네 노쇠한 육체가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