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149화 (149/251)

#149 떠나는 이들에게

페이라는 구름까지 솟구쳐 오르는 화염의 벽을 보곤 다짐했다.

“이젠 진짜로 도망쳐야겠군.”

원래 페이라는 베르강이 나선 시점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까지 여기에 남아 있었던 이유는 눈먼 검은 번개를 피하면서 도주할 자신이 없었고, 두 발로 달려서 도망치기엔 노르베르드와 길리온 왕국이 너무나도 멀었기 때문이었다.

“오슬로 넌 도망칠 거냐?”

오슬로는 태평하게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뭐……. 나는 많이 배우기도 했으니까 만족해.”

페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 네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페이라는 펠렌을 쳐다봤다.

문제는 이곳을 탈출하려면 텔레포트 마법이 필수적이지만 비브라토는 죽었고, 펠렌은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다는 점이다.

정말로 펠렌의 번개를 뚫고 달려서 길리온 왕국으로 도망을 쳐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 오슬로가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음……. 혹시 이게 필요할까?”

오슬로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다중 텔레포트 스크롤을 꺼냈다.

“……네가 그걸 어디서 구한 거지? 넌 아공간 주머니가 없을 텐데?”

“비브라토가 죽었을 때 몰래 빼 왔어.”

페이라는 의외라는 식으로 오슬로를 쳐다봤다.

“네가 그런 생각도 할 줄 알았나?”

“그냥 눈앞에 떨어지길래 주웠는데?”

“그럼 그렇지.”

콰릉-!

페이라는 정신없이 벼락을 내리치는 펠렌을 쳐다봤다.

이제 남은 고민은 하나였다.

펠렌을 데리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긴 하지만 비브라토뿐만이 아니라 놈도 잃게 되면 아르펨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다.

웬만하면 데려가는 게 좋겠지만 저렇게 이성이 잃은 상태에서 돌아가자고 말하면 페이라에게 벼락을 꽂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고민은 의외로 길지 않았다.

서걱-!

펠렌의 정면에 있던 크리처들의 허리춤으로 한 줄기의 바람이 스며들더니 모두 동강이 났다.

보통 크리처들은 저렇게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만, 이상하게도 크리처들은 손가락 까딱하지 못한 채 죽었다.

심지어 죽은 크리처들에게 벼락을 내리꽂혔지만, 크리처들은 기이하게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복구 불가능한 상처를 입히는 기사.

페이라가 알기로 그런 기사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티그리스가 검을 종으로 긋자 거대한 돌풍이 일어나더니 죽은 크리처들이 양옆으로 날아갔다.

펠렌과 티그리스 사이에 대로가 뚫렸다.

펠렌은 이성을 잃은 와중에도 티그리스를 정확하게 노려봤다.

“네놈……! 그래! 네놈이었어! 네놈이 모든 것을 망친 거다!”

펠렌이 티그리스를 향해 번개를 내리쳤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번개를 튕겨냈다.

다른 일반적인 벼락도 아니고 펠렌의 검은 벼락을 튕겨내자 페이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저놈이 티그리스인가…….’

그냥 보기만 해도 베르강보다 위험한 놈이라는 게 느껴진다.

그러니 펠렌이 티그리스를 암살하려는 계획 대신 노르베르드에 처박아두겠다고 한 거겠지.

페이라는 처음으로 펠렌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페이라는 오슬로를 쳐다봤다.

오슬로는 티그리스에게 완전히 눈동자가 고정되어 있었다.

“……완벽해.”

지금까지 오슬로가 수없이 많은 기사들을 만나왔지만,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한 적은 처음이었다.

“뭐라고?”

“서 있는 모양새부터 시작해서 손가락의 위치까지 모두 검을 휘두르기 위해 최적화되어 있어.”

평소의 썩은 동태눈 같던 눈에 총기가 돌았다.

“저거구나. 저게 내가 바라던 이상향. 그 자체였어.”

오슬로는 마치 신을 영접한 사제들처럼 환희에 찬 눈물을 흘렸다.

오슬로는 당장에라도 티그리스와 검을 나누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그러나 페이라는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퍽-!

페이라는 크리처들을 마치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이 죽이는 티그리스를 향해 홀린 듯이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는 오슬로의 모습을 보곤 명치에 주먹을 갈겨 기절시켰다.

그리고 페이라는 기절한 오슬로의 몸을 촉수로 감쌌다.

“제정신이 아닌 건 펠렌 하나만으로도 족하다.”

페이라는 펠렌을 쳐다봤다.

펠렌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마법을 티그리스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썩어가는 살점’부터 시작해서 ‘중력 사슬’, ‘연화(蓮花)’, ‘볼케이노’, ‘소행성 낙하’…….

그러나 드윈의 검을 든 티그리스를 막아낼 수 없었다.

티그리스는 차분하게 펠렌의 마법을 하나하나 파훼하는 것도 모자라 소행성 낙하 같은 대규모 마법의 경우엔 일부러 옆으로 튕겨내 크리처들을 모조리 뭉개 버렸다.

명백한 패배의 향기가 전장에 가득히 퍼져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펠렌은 마법을 쏟아부었다.

펠렌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오히려 티그리스가 점점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페이라마저도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지.”

페이라는 티그리스에게 정신이 팔린 펠렌을 뒤로하고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했다.

누군가는 살아남아 이 사태에 대한 정확한 보고를 해야하니까.

* * *

티그리스는 오랜만에 만난 애병, 드윈의 검을 마치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사용했다.

실제로 베오울프가 죽은 후에 가장 많이 사용한 검이 바로 이 드윈의 검이기도 하고, 티그리스가 가장 오랫동안 갈고닦았던 ‘노르베르드류’와 제일 잘 어울리는 검이기 때문이었다.

티그리스는 사방에서 동시에 달려드는 크리처들을 향해 검을 단 한 번 내질렀다.

티그리스가 시전한 검식은 노르베르드 검술 제8식 ‘난류(亂流)’.

주변에 검기의 소용돌이를 일으켜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나 검을 막아내는 방어형 검식이지만, 이 검술이 드윈의 검과 만나면 전혀 다르게 변한다.

드윈의 검을 타고 흐르는 티그리스의 검기가 수천 갈래의 날카로운 바람으로 변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달려들었던 수백 마리의 크리처들이 마치 두부 조각처럼 잘려 나가는 것도 모자라 바람에 휘날려 사방으로 날아갔다.

절단의 심상도 같이 담았기에 크리처들은 살아 움직일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펠렌은 입술을 씹었다.

“큭!”

펠렌은 소환술사들처럼 ‘감응’의 재능을 이용해 크리처들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서 크리처들이 아무리 죽어 나간다고 한들 정신적인 충격은 없다.

하지만 주변에 살아 움직이는 크리처들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죽은 크리처에 아무리 번개를 내리쳐도 크리처들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그저 잠깐 뭉쳤다가 흐물흐물 흩어질 뿐이었다.

“페이라 어서 저놈을……!”

펠렌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페이라는커녕 오슬로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주변을 계속 돌아봤지만 펠렌의 주변엔 그 누구도 남지 않았다.

그저 피와 살점만이 가득한 황무지만 보일 뿐이었다.

펠렌은 주먹을 부서져라 쥐었다.

“이럴 순 없다. 이렇게 될 순 없어.”

펠렌은 티그리스를 향해 검은 벼락을 내리쳤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그 벼락을 가볍게 털어냈다.

펠렌은 중력 사슬 마법을 걸었다.

그러나 티그리스가 한 번 검을 내지르자 수백 가닥의 중력 사슬들이 모조리 잘려 나갔다.

펠렌은 땅을 뒤집었다.

티그리스의 검이 수평으로 긋자 땅이 평탄하게 닦였다.

어느새 티그리스는 펠렌의 앞에 서 있었다.

펠렌은 티그리스를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도대체 넌 뭐냐. 뭐길래…… 이토록 강한 것이냐. 말이 되질 않는다. 난 너보다 2배는 넘게 살았다. 네가 살아온 나날보다 대마법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더 길단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넌 나보다 강한 것이지? 이건 불공평하잖나?”

펠렌의 검게 변한 눈이 돌아오며 검은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펠렌의 핏발이 선 눈동자가 티그리스를 노려본다.

“어서 대답해라! 넌 왜 그토록 강한 거지? 넌 왜 내 복수를 막아서는 것이냐? 왜 내 앞을 가로막는 거냔 말이다?! 이제 한 발자국만 남았다! 이제 단 한 발자국만 남은 상황에서 넌 왜 나를 막아서냐는 것이다!”

펠렌의 무릎이 꺾였다.

교만한 손의 능력의 부작용으로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광경은 마치 펠렌이 티그리스에게 처형을 당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티그리스는 비틀거리는 펠렌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네 의문에 내가 답해줄 의무도 없고 이유도 없다.”

티그리스는 세계수가 말한 말을 떠올렸다.

세계수는 티그리스를 세상을 지키기 위한 균형자라 말했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그런 운명 따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티그리스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 아니다.

그런 숭고한 의무를 받아들일 만큼 티그리스가 성숙한 존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티그리스는 검을 들어 펠렌의 심장께에 가져다 댔다.

“그저 네가 황국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한 것처럼.”

티그리스는 천천히 펠렌의 심장을 향해 검을 밀어 넣었다.

펠렌은 살을 파고드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반사적으로 검을 쳐내려 하지만 손에 힘이 풀려 밀려나지 않았다.

“네가 로드엘림 가문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처럼.”

검 끝으로 가냘프게 뛰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진다.

“나도 네게 복수하는 것이다.”

티그리스는 검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검이 파고들며 심장을 꿰뚫고 척추를 부수며 등을 꿰뚫고 나왔다.

펠렌은 티그리스의 손에 검게 죽은 피를 토해냈다.

티그리스는 역하고 따뜻한 죽음의 감촉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죽어가는 펠렌의 눈동자를 덤덤히 쳐다봤다.

“넌……. 도대체…….”

펠렌의 동공이 열리며 죽음을 맞이했다.

* * *

전장 정리라고 할 것은 딱히 없었다.

펠렌의 벼락 때문에 이 인근이 모두 황폐화되었기 때문에 평평한 황무지가 되었다.

크리처들의 사체 또한 샐러맨더의 검으로 모조리 불태워 버렸기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공허하고 피비린내만 가득한 황무지에 작은 제사상이 펼쳐졌다.

아모리스는 평소와 다르게 새하얗고 정갈한 옷을 입은 뒤, 얼기설기 잘린 단발을 깔끔하게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깨끗한 종이 위에 붓을 들어 지방(紙?)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열차 사건으로 죽은 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가는 모습은 평소의 선머슴 같던 아모리스답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고결해 보였다.

아모리스는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사상이 차려지기 시작하자 죽은 혼령들이 몰려들어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페니 스미스.

아냐 메이든.

아벨 클라크.

조지아 존스.

구피 데이비스.

모라 윌슨.

……

아모리스는 황혼이 땅에 스며들기 직전까지 혼령들의 이름을 모두 적었다.

그 숫자는 무려 529명.

귀족이거나 관직이 있는 자는 총 87명이었고, 평민 출신은 442명이었다.

아모리스는 지방을 다 적자 북쪽에 정갈하게 놓은 뒤 일어났다.

레인로버, 베오울프, 베르강, 티그리스, 나달 등은 모두 숙연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아모리스가 제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아모리스는 은으로 만든 술잔에 술을 담아 한 바퀴 돌린 뒤 입을 열었다.

“모두 한을 풀고 떠나라. 이곳은 산 자가 살아가는 곳이지 죽은 자들이 있을 곳이 아니다. 사자(死者)는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삶에 미련을 갖지 말아라.”

따뜻한 차례상과 달리 아모리스의 말은 첨예하면서도 차가웠다.

“죽음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조차도 알지 못하기에 답을 해줄 수 없다. 그러나 너희들이 구천을 떠돌며 산 자의 흉내를 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스산한 바람이 주위를 맴돈다.

마치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이 말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여린 리니아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고, 살아남은 황금 기사들과 인퀴지터들은 죽은 동료들의 비명 같아 고개를 떨구며 입술이 피가 나도록 악물었다.

“그러니 떠나라. 너희들의 억울한 죽음은 우리가 잊지 않을 것이다. 미련과 아쉬움은 산 자에게 모두 남기고 떠나라. 우리가 너희들의 미련과 아쉬움을 대신 지고 가겠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주홍빛 황혼에 데워진다.

“그러니 모두 떠나라.”

그리고 아모리스가 정성껏 적었던 지방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방에 적힌 이름이 하나둘씩 푸른 불꽃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다.

혼령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것이다.

화르륵 화륵-

제일 먼저 사라지는 이름은 마지막까지 베오울프와 함께 싸웠던 늑대 기사들이었다.

베오울프는 죽은 늑대 기사들의 이름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뒤이어 황금 기사들과 인퀴지터들의 이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베르강과 나달 또한 그들의 이름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베오울프와 베르강 그리고 나달은 이들이 미련 없이 현세를 모두 떠나자 고개를 숙였다.

이미 떠난 이들에게 감사를 표해도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특히 나달은 더욱 고개를 깊게 숙였다.

나달은 지금까지 요원들의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인퀴지터에 들어왔고, 예상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죽으리란 것을 각오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죽어도 별 상관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분명 그랬건만…….

뚝- 뚝-

고개 숙인 나달의 볼과 턱을 타고 황혼에 반짝이는 눈물이 흘렀다.

왜 갑자기 지금 와서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는 나달은 알 수 없었다.

아모리스가 요술이라도 부려서일까?

아니면 이 엄숙한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라칸 때문일까?

나달은 처음 겪어보는 슬픔이란 감정의 격류에 눈물을 제어할 수 없었다.

지방에 적힌 이름은 해가 물러나고 달과 함께 별이 총총 뜨기 시작할 무렵 푸른 불꽃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 * *

장례가 모두 끝나고 베오울프는 티그리스와 작은 모닥불 근처에 앉았다.

타오르는 불꽃을 잠시 말없이 보던 베오울프는 입을 열었다.

“황녀님께서 약혼식은 다음에 하자고 하더구나.”

티그리스도 이미 들은 이야기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대참사를 겪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약혼식을 올리면 괜한 말이 나올 수 있기 때문도 있었지만, 솔직한 이유를 말하자면 노르베르드 가문에게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검은 늑대 기사들이 무려 40명이나 죽고 하얀 늑대 기사들은 5명이나 죽으면서 전력에 큰 공백이 생겼다.

베오울프는 어쩔 수 없이 노르베르드로 돌아가 늑대 기사단을 재정비하고, 노르베르드와 연결된 유일한 열차 선로가 끊기면서 공급받기로 한 식량 대책을 다시 세워야 했다.

이번 겨울은 노르베르드에게 있어서 유독 추울 것이다.

“슈베어트에도 참석하긴 힘들 것 같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오히려 백성들이 이번 겨울을 어떻게 나아야 할지 걱정이 됩니다.”

베오울프는 티그리스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티그리스가 강한 기사인 것은 이번 일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티그리스가 백성들을 생각하는 어진 마음을 갖고 있으리란 것은 알지 못했다.

못 본 1년 사이에 성숙해진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인가?

베오울프는 티그리스를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 슬며시 피어올랐다.

“네 생각은 어떻느냐? 이번에 백성들이 이번 겨울을 나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노르베르드 지역과 직통으로 연결된 선로가 망가졌지만, 여전히 마차가 다니는 육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제가 황도로 내려가면서 유통업자들과 만나보겠습니다.”

“육로라. 배를 이용하면 되지 않나? 노르베르드와 황도는 루체트강과 연결되어 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지금은 괜찮지만, 보름 후면 루체트강은 얼어붙습니다. 배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일 테니 육로가 훨씬 낫습니다.”

베오울프는 자세를 고쳐 앉아 마치 가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육로밖에 없군. 그럼 황도에서 마차로 노르베르드 수도까지 얼마나 걸리지?”

“두 달 정도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도가 아닌 노르베르드 변경령 인근에 있는 헤이즈 자작가와 체이로 자작가에게 식량을 받으면 보름 내로도 식량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순순히 식량을 내어줄까? 그들도 겨울을 나야 할 텐데?”

“노르베르드 가문이 미리 사둔 식량과 교환해 주겠다고 말하면 될 것입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신용 문제를 걸고넘어진다면 레인로버 황녀님께 공증을 서달라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베오울프는 막힘없이 나오는 티그리스의 답변에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베오울프가 생각하고 있던 답과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는 긴급 배급 대책만 세우면 되겠군.”

“저는 돌아가는 길에 체이로 자작가와 헤이즈 자작가에 잠시 들르겠습니다.”

베오울프는 티그리스의 눈을 보며 말했다.

“티그리스.”

“예. 변경백님.”

“고맙다. 네가 내 아들이라 든든하구나.”

베오울프는 어느새 티그리스가 의지해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게 너무나도 대견스러웠다.

동시에 이대로 눈을 감아도 노르베르드 가문과 변경령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이 들자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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