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드워프의 시험(3)
라칸이 마탄총을 만들 수 있다는 말에 드워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라칸이 마공학 기술을 갖고 있다고?”
“아직 갖고 있진 않습니다.”
티그리스는 말레우스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곧 가질 수 있겠죠.”
말레우스는 티그리스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라칸의 포인트 상점에선 포션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기술부터 시작해서 지식 또한 구매가 가능하다.
라칸의 포인트 상점에는 ‘Lv. 1 하급 마공학 기술’이 있었다.
비록 하급이지만 구매에 필요한 포인트는 무려 50,000포인트나 되었다.
호고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게 변했다.
“이게 무슨 말이지? 말레우스? 혹시 네놈이 라칸에게 마공학 기술을 전수한 거냐?”
“당연히 아니지. 내가 전에 말해줬잖아. 라칸은 용사 페레이라가 받았던 룩스 여신의 축복을 이어받았다고.”
룩스 여신의 축복.
포인트 상점을 드워프들이 나름대로 해석해서 부르는 방식이었다.
시스템이니 포인트 상점이니 이런 내용을 드워프들의 시각으론 받아들이기 힘드니까, 룩스 여신이 인간들에게 내려준 축복이라 이해하는 것이다.
“라칸은 원한다면 우리의 대장장이 기술도 습득이 가능해. 마치 용사 페레이라처럼.”
“허…….”
드워프들은 모두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티그리스의 눈빛은 싸늘해졌다.
‘왜 엘프들이 드워프들을 모두 죽였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군.’
페레이라와 라칸의 비밀을 모르는 드워프가 없다.
그 말은 드워프들은 모든 정보를 서로 공유한다는 뜻이고, 티그리스가 회귀했다는 정보까지 공유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말레우스와 같은 드워프들은 다른 종족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배척하는 분위기가 강하지만, 한 번 믿음을 주면 죽을 때까지 믿음을 주는 성격 탓인 듯했다.
말레우스의 입장에선 모두 믿을 만한 동료들이니 숨김없이 정보를 공유했다고 하지만, 그 안일함 때문에 로타와 아르펨 측에 귀한 정보가 넘어갈 수 있었다.
‘……말레우스 님께 뭔가를 말할 때는 조심해야겠군.’
마왕이 성좌라든가 아니면 우노를 죽이는 방법과 같은 정보는 웬만해선 드워프들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아 보였다.
자칫 잘못했다간 엘프들과 드래곤들이 했던 짓을 티그리스의 손으로 직접 해야 할 지도 모르니까.
티그리스의 변한 분위기를 읽지 못한 드워프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 수군대기 시작했다.
두 부류가 바라보는 라칸의 온도 차는 극명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라칸을 쳐다보는 부류와 마땅치 않게 보는 부류가 있었다.
굳이 구분을 짓자면 말레우스처럼 젊은 드워프들은 라칸을 대체적으로 좋게 보고 있었고, 나이가 있는 드워프들은 별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라칸이 마탄총 개발에 참여한다면 제법 이른 시일 내에 생산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어허! 그게 말이 될 것 같아? 난 그 룩스 여신의 축복을 믿을 수 없다! 그 요상한 포인트라는 것으로 기술을 단번에 습득이 가능하다고? 그렇게 쉽게 얻은 기술이 피땀 흘려가며 개척한 마공학 기술과 똑같다는 게 말이나 돼?”
“용사 페레이라는 포인트로 마법과 검술을 익혀서 소드마스터이자 대마법사가 되었지. 그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허~ 그건 검술하고 마법이니까 가능했던 거지. 페레이라가 대장장이 기술을 배웠다는 말 들어봤나?”
나이 든 드워프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맨땅에 헤딩해 가며 마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개척했는데, 라칸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배울 수 있다고 하니 쉽게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호고의 입이 열렸다.
“난 인정할 수 없네.”
호고가 말을 하자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라칸 자네가 마공학 기술을 익히는 것은 내가 막을 수 없겠지. 하지만 드워프의 기술 개발실에 발을 들이는 것은 절대 허가할 수 없네.”
티그리스는 사실 드워프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말레우스에게 전해 듣기로 마공학 기술은 드워프의 자존심이었다.
티그리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르베르드 가문의 검술과 비견되는 정도랄까?
만약 라칸이 포인트로 노르베르드류를 배워서 자기도 노르베르드류를 사용할 수 있다고 티그리스에게 말한다면 어이없는 것을 떠나서 호고처럼 화가 날지도 몰랐다.
레인로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마탄총 개발에 진척이 있으려면 라칸의 마법 지식이 반드시 필요할 거예요. 안 그런가요?”
“필요하고 말고 상관없이 망치 하나 쥐어보지 못한 주제에 내게 이래라저래라 말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네! 마공학 기술은 나와 드워프들의 자존심이야! 드래곤도 엘프도 거인도 우리를 노예로 부렸을지언정 우리의 기술만큼은 뺏어가지 못했네!”
말레우스도 레인로버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이번 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호고는 그냥 늙은 드워프가 아니다.
호고는 마공학 기술을 창시한 최초의 마공학 기술자다.
그 말은 마공학 기술을 익히고 있는 모든 드워프들은 호고에게 기술을 전수받았다는 뜻이자, 여기에 있는 모든 드워프가 호고의 제자라는 뜻이었다.
그런 호고가 인정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니, 다른 드워프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자네가 마공학 기술을 배우겠다고? 그럼 내 인생은 뭐가 되는 건가? 그 버튼 하나 누르는 것으로 내 기술을 모두 가져가 버리면?! 마공학 엔진 개발을 위해서 쏟아버린 내 500년은 도대체 뭐가 되냐는 말이다!”
호고의 눈이 붉게 충혈되며 급기야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호고에게 있어서 마공학은 그의 인생 자체였고 삶이었다.
그것을 단번에 가져가겠다는 것인데 열불이 날 만도 했다.
그때, 라칸이 입을 열었다.
“호고 님. 제가 마공학 기술을 배운다고 해도 전 결코 마공학 기술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호고는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
“암! 당연하지!”
“기술을 체득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걸 티그리스 교관님께 배웠습니다.”
라칸이 갑자기 티그리스를 언급하자, 티그리스는 의외라는 듯이 라칸을 쳐다봤다.
“전 불과 약 1년 전 제국 대학에서 검술학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단지 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제국 검술을 포인트로 배웠고, 간신히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검술을 익혔다고 해서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습니다. 검술은 전투에 필요한 요소일 뿐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판단력과 전투 센스니까요. 전 그것이 부족했고, 결국 전 검술학을 포기하고 마법학부에 편입했습니다.”
라칸의 설득에 호고의 표정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제가 마공학 기술을 포인트로 배우는 이유는 호고 님의 마공학 발전에 있어서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배우는 것입니다. 제가 마공학 기술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필요한 조언을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뭐가 됐든 내 기술을 훔쳐 배우겠다는 뜻 아닌가?”
“기술은 배우겠죠. 하지만 호고 님의 인생을 가져가진 못할 겁니다. 호고 님이 500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쌓아 올리신 노하우나 데이터는 제가 감히 볼 수 없을 테니까요.”
호고는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네. 기술 개발실에 들어오게. 단! 조건을 붙이겠네.”
호고는 자신이 만든 마탄총을 순식간에 분해하더니 마나 추출기와 엔진을 꺼냈다.
“말레우스가 앞에서 설명했지? 마공학 기술은 마나 추출기와 마공학 엔진이 거의 전부라고. 딱 일주일 주겠네. 이 마공학 엔진과 마나 추출기를 완벽하게 분해 조립하고 내게 설명할 수 있다면 자네를 기술 개발실 고문으로 세워주겠네.”
라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신규 퀘스트!]
드워프 호고에게 인정을 받아라!
호고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넘어 경악하게 만들면 추가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보상.
1) 10,000포인트~50,000포인트.
2) 드워프들의 인정.
“마공학에 대해 논하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겠지. 아주 깐깐하게 테스트를 볼 테니 단단히 각오하게!”
라칸은 눈을 번뜩였다.
“예. 알겠습니다.”
호고는 말레우스를 포함한 다른 드워프들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내 제안에 불만 있는 놈들 있으면 당장 나와!”
다른 드워프들은 별말 없이 받아들였다.
“뭐, 자네의 인정을 받는다면 다 한 거지.”
“호고 할아범이 인정한다면 우리도 군말 없이 인정해야지.”
호고는 말레우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말레우스. 네 마공학 엔진하고 마나 추출기도 보여줘. 네게 그나마 밸런스가 좋으니까. 그리고…… 렌치 잡는 법 정도는 알려줘. 딱 봐도 어떻게 분해하는 건지도 몰라서 허둥지둥 댈 게 뻔해 보이니까.”
호고는 그렇게 툴툴대며 훈련장을 떠났다.
***
드워프들은 아우로므를 구경하기 위해 드라코 레퀴엠 산으로 향하고, 라칸과 티그리스는 라칸의 집으로 향했다.
한 달 전 집을 샀는데 한번 구경하러 오라는 취지였지만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초대하는 것 같았다.
레인로버는 토드 황제가 불러서 다음에 오겠다고 했고, 티그리스는 라칸에게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었기에 그냥 따라갔다.
라칸의 집은 제국 대학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2층짜리 저택이었다.
주변이 큰 빌딩으로 가려져 있어서 채광이 그리 좋진 못했지만, 산책할 수 있는 작은 정원도 있어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제 집을 보여 드리는 것은 스승님 이후로 처음이라 부끄럽네요.”
1층은 주방도 있고 거실도 있는 일반적인 가정집 같았고, 2층은 라칸의 개인 실험실인 듯 실험도구들과 각종 시약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아, 여기 앉으세요. 교관님. 전 이것 좀 놓고 올게요.”
라칸은 말레우스와 호고의 마탄총을 2층에 있는 실험실에 놓으러 올라갔다.
그사이 티그리스는 집을 조금 구경했다.
한 달 전 이사를 했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가구 몇 개가 비어 보였다.
화초도 없어서 집이 쓸쓸하고 차가웠다.
라칸은 따뜻하게 데워진 차와 찻잔을 들고 내려왔다.
“티그리스 님의 펜트하우스에 비하면 좀 누추하죠?”
“네 나이에 황도에 이렇게 큰 저택을 갖고 있는 게 이상한 거다.”
“하하. 사실 이 집을 구할 때 베이튼 씨의 도움을 좀 많이 받았어요.”
“베이튼에게?”
“예. 케일 자작 기억나세요? 사실 이 저택은 케일 자작이 갖고 있던 거라고 하더라고요. 투자 목적으로 ‘더 노르베르드’에서 구매했었는데 제게 적당한 가격으로 팔아주셨어요. 아, 은행 대출도 도와주셨고요.”
“대출을? 차라리 내게 말하지 그랬나?”
라칸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집은 제힘으로 구해보고 싶어서요. 그래도 집 값이 샀을 때보다 훌쩍 뛰어서 대출금 상환은 걱정 없어요. 저 부자에요. 부자.”
불과 1년 전의 라칸은 철이 없는 10대로 보였는데, 지금의 라칸은 어엿한 사회인 같았다.
“가구는 아직 덜 들어온 모양이군.”
“네. 일단 실험실부터 꾸며서요.”
“가구는 내가 베이튼에게 따로 얘기해서 넣어주도록 하지.”
“아뇨!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좋은 가구를 고르는 법도 아직 모를 테니, 베이튼이 추천하는 대로 받아라.”
“헤헤……. 감사합니다.”
라칸은 티그리스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제가 걱정되시나요?”
마공학 관련 이야기였다.
“걱정은 되지 않는다. 너라면 할 수 있을 테니까.”
“오오……. 감동이에요. 절 이렇게 믿어주시다니.”
티그리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것보다 섭섭하진 않았나? 내가 나선다면 도와줄 수 있었다. 투자의 조건으로 네게 마공학 기술을 전수해 주는 조건을 걸었다면, 아마 호고는 받아들였겠지. 그들에겐 마석이 절실하니까.”
라칸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의 마음을 사진 못했을 거예요. 겪어봐서 알아요.”
“겪어 봤다니?”
라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인퀴지터에 처음 들어갔을 때 별명이 무엇인 줄 아세요? 낙하산이었어요. 티그리스 님의 도움을 받아서 나달 님의 수제자가 되기도 하고 인퀴지터에 들어가기도 했으니까요.”
“인퀴지터 영입 결정은 나달이 직접 선택한 거다. 결코 낙하산이 아니지.”
“하지만 다른 요원분들이 보시기엔 낙하산으로 보였겠죠. 인퀴지터 요원 선발 기준은 진짜 까다롭거든요. 그런데 검도 제대로 못 다루고 마법사도 아닌 제가 나달 님의 원픽으로 딱 뽑혔으니……. 처음엔 눈칫밥 좀 먹었죠.”
티그리스는 그런 뒷이야기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라칸은 차를 홀짝 마셨다.
“하지만 레인로버 황녀님의 생일파티 때처럼 굵직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니까 저를 다르게 보더라고요. 저 그래서 벌써 머리가 두 개예요. 제 직속 후임도 있고요. 헤헤.”
라칸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이번에도 제가 실력으로 증명해 낼게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군.”
용사 페레이라답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김유신이라는 사람 자체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뭐가 되었든 라칸은 티그리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단단한 녀석이었다.
“말레우스에게 마나 추출기와 마공학 엔진 제작을 위해 필요한 재료들과 공구 목록은 미리 받아놨다. 내일 오전 중으로 배달이 올 것이다.”
“오! 마침 그거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감사합니다.”
“더 필요한 게 있나?”
“아뇨. 그런 건 없어요. 하지만 좀 궁금한 건 있긴 해요.”
“궁금한 거?”
라칸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모리스 님에 대해서요.”
갑자기 아모리스 이야기가 나오자 티그리스는 뜨끔했다.
“……아모리스 님의 뭐가 궁금한 거지?”
“아모리스 님이 저를 굉장히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계신 것을 알아요.”
“……알고 있었나?”
“그걸 눈치 못 채면 인퀴지터 때려쳐워야죠.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긴, 라칸의 눈치는 세계 정상급이다.
아모리스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튼, 최근 들어 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담배도 완전히 끊으신 것 같은데…….”
“담배를 끊은 이유는 너 때문이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아, 그런가요? 괜히 김칫국 마셨네. 헤헤.”
“그래서 뭐가 고민인 거지?”
라칸은 찻잔을 한참 동안 매만지며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해라.”
“그게 사실…… 아모리스 님이 조금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티그리스는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확실히 아모리스가 유난이긴 했다.
겉모습은 영락없이 아름다운 20대 여인이지만, 1,300살 먹은 여자가 풀메이크업을 하고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 말도 조신하게 하는데 당연히 부담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다.
티그리스는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화…… 확실히 아모리스 님이 연세가 많긴 하지.”
“아뇨! 나이 때문이 아니에요!”
“……나이 때문이 아니라면 뭐가 부담스럽다는 거지?”
라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예전에 단둘이 마차에 있었을 때 아모리스 님께 말씀드리긴 했는데……. 저를 통해서 아모리스 님의 전 애인분을 보고 계신 것 같아요.”
“전 애인이라면……. 그 한국인을 말하는 거군.”
“네. 맞아요.”
‘그러고 보니 아직 라칸은 자신의 전생을 모르는군.’
티그리스는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차를 마셨다.
라칸이 페레이라고 페레이라가 라칸이긴 한데, 엄연히 구분하자면 별개의 경험과 기억을 쌓아 올린 별개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보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애매했다.
“음……. 그렇군.”
“이런 고민을 마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분은 티그리스 님밖에 없다 보니…….”
“나달에겐 말 안 했나?”
“스승님은 워낙 바쁘셔서요. 괜한 일로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죄송해요.”
“아니다. 네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니까. 그래서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그걸 저도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라……. 제가 한국에 있을 때에도 완전 아싸여서 또래 여자애들이랑 얘기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소설에도 연애 얘기 나오면 전혀 공감할 수 없어서 막 그냥 넘기고 했었는데……. 그래서…….”
티그리스는 당혹스러움에 차만 계속 마셨다.
티그리스도 사실 연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고백만 먼저 했지 대쉬도 레인로버가 먼저 했고 언제나 레인로버가 먼저 다가왔으니까.
라칸에게 무슨 조언을 해줘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아무튼 아모리스 님과는 앞으로도 부딪힐 일이 많잖아요. 하지만 제가 이렇게 불편한 감정을 갖고 만나면, 언젠간 문제가 터질 것 같아서요.”
“음…….”
어느새 찻잔에 차가 다 비워졌다.
차가 더 필요했다.
“아모리스 님이 많이 부담스럽겠군.”
“아모리스 님은 제가 아니라 저를 통해서 전 애인분을 떠올리고 계신 거니까……. 안쓰럽기도 하고……. 아무튼……. 좀 그래요.”
티그리스는 빈 찻잔을 멍하니 쳐다봤다.
최근 라칸에게 너무 무심했다.
아니, 나달이라면 알아서 하겠지라며 방관한 것일 수도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할 수 있겠어.’
아모리스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충격에 빠져서, 다시 담배를 뻑뻑 피울지 모른다.
최근 담배 끊는다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막대 사탕을 물고 다니는데…….
다시 골초로 만들 수는 없다.
“이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 역시 그런가요?”
“하지만 확실히 아모리스 님과 이 주제를 갖고 대화를 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내가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도록 하마.”
“역시 부딪히는 게 맞겠죠?”
“그래.”
티그리스는 빈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혹시 이 문제로 머리가 복잡하다면, 호고 님께 내가 직접 말씀드려서 테스트 일정을 뒤로 미뤄달라고 하겠다.”
“아뇨.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대신 아모리스 님은 테스트를 끝내고 만나는 것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알겠다. 그럼 그렇게 일정을 조율하도록 하마.”
티그리스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말없이 차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