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순회(3)
할키스는 트리샤가 방문했었던 반년 전보다 생동감이 넘쳤다.
폭군 루카스 후작을 죽인 티그리스가 할키스에 도착했기 때문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할키스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길목마다 놓였던 루카스 후작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은 사라지고, 곤봉을 들고 다니던 경비대나 날 선 눈빛으로 백성들을 쏘아보던 기사들도 사라졌다.
루카스 후작을 욕하던 벽보가 사라지고 대신 구인 광고가 자리를 차지했고, 내란죄로 목이 매달린 시체가 사라지고 작은 시장이 생겨났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들이었다.
인간들 틈에서 간간이 수인들이 보였고, 사람들은 그런 수인들을 신기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배척하진 않았다.
수인들이 안전하게 할키스 영지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남부 지역이 얼마나 빨리 안정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트리샤는 검은 두건을 쓴 채 주점 구석에 앉아 네메시스, 소라, 리니아와 함께 벌꿀술을 마셨다.
“캬아~ 쥑인다! 벌꿀술을 여기서 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벌꿀술은 수인족 중 ‘곰 부족’이 겨울철에 빚어 먹는 술이다.
워낙 달고 맛있어서 술이 약한 토끼족도 홀짝홀짝 마실 수 있지만, 방심하고 막 마시다 보면 호랑이족도 넘어뜨리는 독주다.
소라는 벌꿀술을 단번에 들이켜며 말했다.
“어떻게 곰탱이들이 인간들한테 벌꿀술을 팔 생각을 한 거지? 지들 먹을 것만 해도 부족할 텐데?”
“듣기론 인간들이 곰탱이들한테 꿀을 납품하고, 곰탱이들이 벌꿀술을 만들어 납품한다고 하던데?”
“와~ 진짜 세상이 많이 변했나 봐. 1년 전만 해도 인간들하고 사업을 할 거라 생각이나 했겠어?”
“그러니까 말이야. 어? 술 다 떨어졌다. 한 잔 더 시켜야지~”
트리샤는 소라를 쏘아보며 말했다.
“소라. 너무 풀어지는 거 아니야?”
“뭐 어때. 열흘 동안 고생했으니까 오늘 좀 쉬라고 티그리스 님이 말씀하셨잖아. 지금 아니면 어떻게 쉬어.”
“내일 아침 일찍 남부 철도 공사 현장 방문해야 하잖아.”
“알았어. 어휴~ 그럼 난 딱 이거 한 병만 마실게.”
리니아는 갑자기 네메시스를 껴안았다.
“언니~ 이거 너무 맛있당~ 한 잔 더 줘용~”
트리샤는 네메시스를 쏘아봤다.
“네메시스. 설마 리니아 아가씨한테 벌꿀술을 준 거야?”
네메시스는 당황하며 말했다.
“먹어보고 싶다고 하길래 조금만 따라 드렸는데……. 술이 이렇게 약하신 줄은 몰랐네.”
“어휴……. 못살아.”
네메시스는 리니아를 토닥이며 안아주었다.
“폭신폭신해……. 우리 엄마 같아…….”
리니아는 네메시스의 가슴에 폭 안겨 잠에 들었다.
“티그리스 님한테 들키면 난 모르는 척할 거다.”
“뭐 어때. 리니아 아가씨도 술에 취해서 골아떨어지는 경험해 봐야지. 티그리스 님 앞에선 이런 경험은 절대 못 하잖아.”
“……그런 경험은 필요 없어.”
소라는 벌꿀술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 티그리스 님한테 불만 있어.”
“……취했냐? 갑자기 너 왜 그래.”
소라는 네메시스 품에 안겨 있는 리니아를 빼앗아 안았다.
“이렇게 귀여운 여동생을 왜 그렇게 쌀쌀맞게 쳐다보는 건데?! 한 번쯤은 웃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안 그래요?”
리니아는 음냐음냐거리며 말했다.
“우리 오라버니 욕하지 마요오오.”
“어휴. 티그리스 님도 복이 참 많네. 알았어요. 알았어.”
“헤헤헤…….”
소라는 리니아를 잠잘 때 안고 자는 애착 인형처럼 쓰다듬었다.
네메시스는 벌꿀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티그리스 님하고 레인로버 황녀님은 어딜 가셨대? 행사 끝나자마자 바로 마차 타고 ?~ 하고 사라지시던데?”
“에이미로 황자님이 저녁이나 먹자고 연락이 왔나 봐.”
“아, 레인로버 황녀님 오빠 말하는 거야?”
“맞아.”
트리샤는 벌꿀술을 조금 들이켰다.
“……별일 없으면 좋겠는데.”
“왜? 무슨 일 있어?”
트리샤는 어제 티그리스가 한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좋다. 하지만 너무 좋다.
-해리 황태자님의 자리를 위협할 만큼.
티그리스는 레인로버와 비슷하게 변수가 생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에이미로 황자가 회귀 전처럼 반역을 일으키려고 준비한다면, 에이미로 황자를 죽이려 할 것이다.
하지만 토드 황제나 레인로버 황녀가 그것을 받아들일까?
트리샤는 벌꿀술을 모두 들이켰다.
“아냐. 됐어.”
레인로버 황녀에게 그런 비극이 오질 않길 트리샤는 바랐다.
***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마차에서 내려 에이미로 황자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저택 밖으로 나오는 사내들과 마주쳤다.
사내들은 레인로버를 보자마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황금의 일족을 뵙습니다. 레인로버 황녀님의 용모는 날이 갈수록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사내들의 혀는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매끄러웠다.
레인로버는 이들이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과거 바로스 후작에게 줄을 댔던 귀족들과 상단주들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쪽은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경이에요.”
사내들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만나 뵐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본데 가문의 가주 리처드 폰 본데라고 합니다. 여기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티그리스는 사내들의 눈을 일일이 맞추면서 이름을 말했다.
“에스트리센 자작님, 에델펠트 자작님, 브리크스 남작님, 에겔 상단주, 퀘이드 상단주.”
이들을 어찌 잊겠는가?
여기에 있는 모두는 바로스 후작에게 줄을 댔다가, 빠르게 손절해서 살아남은 놈들이었다.
“맞으시죠?”
사내들은 티그리스의 묘한 눈빛에 등골이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아하하……. 맞습니다!”
“다행입니다. 혹시 마주칠 일이 없지 않을까 해서 며칠 전 인퀴지터가 준 보고서를 훑어보길 잘했군요. 인퀴지터들이 역시 사진을 잘 찍는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사내들은 마치 똥이라도 마려운 개처럼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에이미로 황자 전하와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몸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티그리스는 고개 숙여 예를 표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를 슬쩍 보며 말했다.
“너무 몰아세운 거 아니에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물게 마련이에요.”
“에이미로 황자 전하께서 저들을 지켜주고 있지 않습니까? 궁지에 몰린 건 아니죠.”
“오라버니가 저들과 가까이하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수인족과의 교류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려면, 자치령 내부가 안정되어야 하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은 거고요.”
레인로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티그리스가 저들을 혐오하고 있다는 건 에이미로 황자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일부러 타이밍 좋게 티그리스가 저들과 마주치게 했다.
‘너무 뻔하게 도발하네.’
에이미로 황자는 티그리스가 저들에게 실수하기를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티그리스의 멘탈을 건드려 보고 싶은 심술 맞은 성격과 티그리스가 어떤 인물인지 슬쩍 떠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사람이 변하질 않네.’
오늘 식사 자리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집사의 안내에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상석에 에이미로 황자가 식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와인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주변에 와인 병 여러 개가 널려 있었다.
티그리스는 정중하게 에이미로 황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황금의 일족을 뵙습니다.”
에이미로 황자는 레인로버의 골드핑크 머리칼과 다르게 찬란한 금색이었다.
술이 적당히 취해 눈이 살짝 풀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이미로 황자는 굉장히 차가운 유리 조각 같은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만나서 반갑네. 티그리스 경. 레인로버 오랜만이구나.”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취해 있었지만, 혀가 꼬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상하군.’
티그리스의 기억 속 에이미로 황자는 술을 즐기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눈이 풀릴 정도로 과하게 마시는 스타일은 아니다.
언제나 날카로운 이성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최고의 판단을 내리던 인간일진대…….
마치 은퇴해서 잔뜩 풀어진 노장처럼 굴고 있으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레인로버는 덤덤히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오라버니.”
“어서 앉거라.”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착석했다.
시종이 티그리스와 레인로버의 잔에 와인을 채우려 하자 티그리스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난 술을 안 하니 물만 따라주도록.”
에이미로 황자는 재밌다는 듯이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그대는 술을 안 즐기나?”
“예. 그렇습니다. 전하.”
“레인로버는 와인을 좋아하는데. 홀로 마시려면 제법 심심하겠어.”
레인로버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저랑 같이 마셔줄 사람이 많아서 괜찮아요.”
“누가 있지? 샤를로트? 아이린? 트리샤? 아! 네메시스와 소라인가? 수인족들은 술을 제법 잘 즐기더군.”
“……트리샤랑 자주 마셔요.”
“그 성물 사냥꾼을 말하는 거군. 참 대단해. 어떻게 그 유명한 모험가를 기사로 받아들일 생각을 했는지 말이야. 게다가 길바닥 출신답지 않게 예법도 잘 안다고 하더군. 그런데 고디바 왕국에서 쓰는 예법이 종종 보인다고 하던데……. 어떻게 평생 황국에서 산 평민이 고디바 왕국의 예법을 아는 걸까? 신기하군.”
레인로버는 에이미로 황자를 쏘아봤다.
“저희에게 관심이 많으시네요.”
“혈육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황국에서 나나 형님보다 유명한 티그리스 경에 대해 관심을 안 가지기란 쉽지 않지.”
“오빠!”
에이미로 황자는 레인로버의 날 선 목소리에도 킬킬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왜 그러지? 사지(死地)로 유배당한, 내가 이 정도 불만은 터뜨려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사지라뇨.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지금 황국은 노골적으로 길리온 왕국을 압박하고 있지 않나? 관세를 강하게 매기고 룩스교를 탄압하고 있지. 지금 당장 길리온 왕국과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국경에선 긴장감이 흐르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지. 수인족과 협력해서 길리온 왕국의 공격으로부터 대비하는 거야.”
에이미로 황자가 수인족 유화정책에 저항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펼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생존하기 위해서였다.
수인족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만 보여줘도 중앙에서 지원이 쏟아졌고, 최근 거인들의 무덤이 수인족 자치령에서 발견되면서 대규모 철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인족과 척을 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수인족 놈들을 당최 믿을 수 있어야지. 놈들은 영토를 지켜야 한다는 개념이 희박해. 애초에 국경을 가른 것도 루체트 황국 쪽에서 정한 거야. 그놈들은 숲에서 뛰어놀 수 있다면 만사 오케이지. 에이미로 자치령이 길리온 왕국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든 말든 지들 숲에만 문제없으면 상관이 없다 이거야.”
“길리온 왕국이 황국을 선제공격을 하겠어요? 전쟁 빌미를 주는 건데요.”
“레인로버 너는 아직 멀었다. 종교에 미친놈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말고는 알 바가 아니야. 직접적인 공격은 안 하더라도 룩스교 신자들을 자극해서 테러를 저지르겠지. 지금은 아직 조용하지만 내가 장담하마. 1년 내로 미치광이 신도 하나가 익스플로전 아티팩트를 사용해 자폭 테러를 할 거다. 놈들은 그 짓거리를 순교라고 알고 있거든.”
티그리스는 에이미로 황자의 통찰력에 살짝 놀랐다.
실제로 회귀 전, 룩스교 신자들은 순교라는 이름하에 자폭 테러를 저질렀다.
때려 맞힌 것인지 아니면 그럴 조짐이 지금 보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러리라 예측하신 겁니까?”
에이미로 황자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
“티그리스 경 자네는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 모양이군.”
“실제로 경험해 봤으니까요.”
에이미로 황자는 레인로버를 슬쩍 보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레인로버 너도 경험해 봤군. 책상물림이나 하는 나보단 훨씬 낫겠어.”
“오라버니…….”
“무섭게 노려보긴. 말은 네 남편이 먼저 꺼냈는데?”
에이미로 황자는 와인으로 목을 살짝 축였다.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테러에 대비하는 것뿐이네. 그러려면 경비를 강화하고 사람들을 통제해야 하는데 지금 백성들은 자유에 취했어. 내가 당장에 경비들을 풀어서 시민들의 짐이라도 수색하는 순간 난리가 날 거다.”
에이미로 황자는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자네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자네의 의견을 좀 듣고 싶군.”
“길리온 왕국과의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그건 내가 한 말이니 따라 하지 말고. 내 질문에만 대답하게.”
“역으로 길리온 왕국에게 전쟁을 선포하면 됩니다.”
에이미로 황자는 티그리스의 말에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래! 그런 거였어! 평화를 부르짖던 우리 아버지가 갑자기 변했다고 생각했더니만,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군! 하하하하!”
에이미로 황자는 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티그리스를 보며 실실 웃었다.
“길리온 왕국을 점령한다? 그게 우리 아버지의 계획인가? 모르고트 왕자의 망명을 왜 받았나 했더니만, 길리온 왕국을 점령한 뒤 말 잘 듣는 꼭두각시 왕을 세우려고 한 거였어. 그렇지. 그러면 말이 되지.”
모르고트를 왕으로?
모르고트는 왕좌를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다.
아마 길리온 왕국의 왕으로 세워주겠다고 하면 고디바 왕국으로 날아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
“오라버니 너무 취하신 것 같아요.”
“취하긴. 유배당해 있다곤 하지만, 황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는 다 알고 있다.”
에이미로는 티그리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황국은 티그리스 경 자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 네가 전쟁을 원하니 전쟁을 하는 것이고, 네가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니 트리니티가 탄생한 것이다. 기가 막히군! 세상을 떡 주무르듯 움직이는 기분은 어떤가? 난 경험해 보지 못해서 말이지.”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황자 전하.”
“지나치다니! 나는 언제나 이성적으로 판단하네. 현재 황국의 사령탑은 봄의 궁전이 아니라 19층짜리 노르베르드 타워야. 우리 불쌍한 형님은 그런 것도 모르고 중앙 귀족들과 놀고 있는 거지. 내가 좀 더 일찍 이 사실을 알았다면 레인로버를 밀어내고 그 타워로 들어갔어.”
에이미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직접 와인을 따랐다.
“뭐, 내가 사람 보는 눈이 부족했던 것도 있지. 케일 자작. 그 쓰레기 같은 놈이 황국을 좀먹는 바퀴벌레 새끼였을 줄이야. 난 그것도 모르고 내 정치 스승으로 모셨어. 그때부터 이미 나는 자네와 길이 엇갈린 게야.”
에이미로 황자는 와인을 쭉 마신 후 내려놓았다.
“하지만 난 살고 싶네. 티그리스 경.”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황자 전하.”
“다 알고서 내 수족을 모두 자른 거 아닌가? 케일 자작부터 시작해서 나를 따르던 상단과 귀족들까지 모두 쳐냈잖나? 모두 나를 실각시키고자 했던 일 아니었나? 나 에이미로를 두려워해서!”
티그리스는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티그리스는 죽일 만한 사람을 죽인 것뿐이다.
케일 자작이 에이미로 황자의 정치 스승이었던 것도 몰랐고, 키메라 실험실의 뒤를 봐주었던 상단이나 귀족들을 죽였을 뿐이다.
그런데 에이미로 황자는 모두 자기를 노린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진심입니다. 저는 그저 케일 자작을 잡아 인퀴지터에 건넨 것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내 수족만 골라 자른 거지? 지하 실험실을 지원하던 상단 중엔 형님의 사람도 있었어. 하지만 그놈들은 적당히 손보기만 할 뿐 대가리는 자르지 않았어. 그 결과 미들타운의 주요 상권과 금융권은 해리 황태자의 사람으로 다 채워졌어.”
“전 모르는 일입니다. 황자 전하.”
에이미로는 식탁을 내려쳤다.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하지 말게! 우리 형님은 아둔해서 그런 세밀한 정치 공작은 불가능해! 아버지를 움직여 내 멱살을 단단히 틀어잡은 사람이 자네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에이미로는 딱딱하게 굳은 레인로버를 쳐다봤다.
“……잠시만 설마.”
레인로버는 에이미로 황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너냐? 레인로버?”
레인로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