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171화 (171/251)

#171 루안(1)

티그리스와 톰은 용병단이 머물고 있는 텐트에 둘러앉았다.

인사를 먼저 건넨 쪽은 티그리스였다.

“오랜만이군. 톰.”

톰은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오랜만입니다. 나리. 아, 지금은 기사시니까 티그리스 경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세상에 수많은 톰이 있지만, 티그리스 기억 속 톰은 오직 하나다.

약 1년 전, 젊은 피 토너먼트 예선전에서 만난 재능 있는 용병.

톰을 이리 만나는 것을 보면 세상엔 인연이라는 게 있는 듯했다.

“편히 부르게.”

“이거 참…… 황국에서 제일 유명한 기사를 나리라고 부를 수 있는 영광을 얻다니.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요!”

톰은 토너먼트 때처럼 굉장히 유쾌했다.

“그나저나 고리가 3개가 되었군.”

티그리스가 6성 기사가 되었듯이 톰도 고리 1개를 추가했다.

“티그리스 경이 가르쳐 주신 대로 검술을 훈련하다 보니까 한 반년 전에 파박! 하고 깨달음을 얻었지 뭡니까? 덕분에 그 지옥 같은 오크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기도 했고요.”

“그럼 용병으로선 꼭대기까지 올랐다고 볼 수 있겠군.”

티그리스의 말의 의중을 알아챈 톰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꼭대기라뇨. 하나 더 남았지 않습니까? S급! 죽더라도 S등급 용병단의 단장 정도는 되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기사가 될 생각은 없고?”

톰은 고개를 저었다.

“저 하나만 바라보고 용병이 된 놈들이 무려 132명입니다. 그리고 제가 성질이 워낙 껄렁껄렁한지라 나리처럼 반듯하게 살 수 없습니다.”

거절할 줄 알고 있었기에 더 권하지 않았다.

“아쉽군.”

“그래도 권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리. 이 이야기는 오늘 저녁에 애들 앞에서 자랑 좀 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하하! 감사합니다! 오늘 일은 제가 술 한 잔 비울 때마다 계속 얘기하겠습니다!”

티그리스의 뒤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트리샤는 티그리스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되어 신기했다.

톰 같은 길바닥 출신과 이리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나?

아니면 톰이 특별한 걸까?

트리샤는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톰과 소소한 잡담을 끝내고 티그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톰을 보고자 한 것은 톰을 노르베르드로 데려갈까 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이 시국에 쓸 만한 용병단이 노르베르드에 머물면, 그만큼 노르베르드가 안전해질 테니까.

하지만 톰은 남부에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철도가 완공되면 철도를 지키는 트레인 가드로 활동할 생각이라고 했다.

티그리스는 톰의 신중한 결정을 괜한 말로 흔들고 싶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톰에게 건넸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용병들을 데리고 회식이나 하게.”

“아니, 이런 걸 주실 필요까진 없는데…….”

“그럼 안 받을 건가?”

톰은 황급히 티그리스의 돈주머니를 받았다.

“원래 겸양을 한번 떨어줘야 주는 사람도 흥이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회식하고 남는 돈으로 검이나 새로 하나 맞추게. 손잡이가 많이 헐거워졌더군.”

티그리스는 톰의 검을 가리켰다.

티그리스가 토너먼트에서 준 노르베르드산 검이었다.

애지중지 잘 사용한 것 같긴 하지만, 검을 워낙 험하게 쓰는 통에 이리저리 잔 상처가 많았다.

“요놈은 아직 현역인데…….”

“그럼 고쳐 쓰게.”

“넵! 알겠습니다!”

그때, 천막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다급히 들어왔다.

“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톰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불쑥불쑥 들어오면 어떻게 하냐?! 네가 그러고도 유격대장이야?!”

입구를 지키던 군인들이 뒤따라왔다.

군인들은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티그리스 경 죄송합니다. 이놈이 워낙 날쌘 탓에…….”

티그리스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난 이제 막 가려고 했으니.”

그러면서도 티그리스의 시선은 어린 용병에게 향했다.

나이대는 리니아와 비슷해 보였는데, 용병답지 않게 길고 얇은 레이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용병들의 무기들이야 제각각 다르다곤 하지만, 검을 거칠게 다루는 용병들의 특성상 잘 부러지는 레이피어는 보기 정말 드물었다.

“그것보다 무슨 일이지?”

젊은 용병은 곧바로 보고했다.

“최전방 개척조에서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몬스터 웨이브라고 합니다.”

톰은 눈썹을 찌푸렸다.

“뭐? 몬스터 웨이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하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몬스터 웨이브가 확실하답니다. 놀하고 고블린 놈들이 지들끼리 싸우지 않고 습격해 왔다고 합니다. 그럼 몬스터 웨이브가 확실한 거 아니겠습니까?”

“젠장. 오크 놈들을 조져놓은 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하람 중령은 뭐래?”

“전 용병들에게 소집령을 내렸습니다. 10분 뒤 작전 브리핑하고 전방에 고립된 마법사들을 구출하러 바로 가겠답니다.”

“하긴 그렇겠지. 젠장.”

톰은 티그리스를 보며 말했다.

“아, 이쪽은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아니, 나도 좀 도와주지.”

몬스터 웨이브는 소형 몬스터건 대형 몬스터건 상관없이 하나로 뭉쳐 인간들의 도시를 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죽은 마녀들의 원혼이 부리는 재앙이라는 헛소리가 흘러나왔지만, 티그리스는 이 몬스터 웨이브의 정확한 원인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주술사’ 때문이었다.

몬스터들을 일동 광증에 물들게 만들어 인간만을 살육하도록 조종하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주술사만 찾아내 빠르게 처리하면 몬스터 웨이브는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일은 현장에 있는 인원 중엔 오직 티그리스만이 가능했다.

‘그것보다…….’

티그리스는 레이피어를 든 용병이 자꾸 눈에 밟혔다.

티그리스의 눈이 밟힌다는 뜻은 티그리스가 회귀 전에 만났다는 뜻이다.

다만, 그게 적으로 만난 것인지 아군으로 만난 것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검술을 봐야 알겠군.’

***

티그리스는 소라를 불렀다.

“무슨 일인지 알고 있어요.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다면서요?”

“너와 나 그리고 트리샤 셋만 간다. 네메시스하고 아이린 그리고 황금 기사들은 이곳에 대기해 황녀 전하를 지켜라.”

네메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떠나기 전 손목을 잡았다.

“큰 문제는 없는 거죠?”

“확인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몬스터 웨이브를 깔끔하게 처리하면, 당분간 몬스터 때문에 공사가 지연될 일이 없을 테니 오히려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티그리스는 자기 대원들에게 뭐라고 설명하고 있는 레이피어를 든 용병을 쳐다보며 말했다.

“찜찜한 게 하나 있어서요. 확인 좀 하고 오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돌아와서 다 설명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소라와 트리샤를 데리고 구출대에 합류했다.

검 대신 지휘봉을 든 기사 하나가 티그리스에게 경례했다.

“남부 사령부 1군단 3사단 1연대 1대대 대대장 하람 중령입니다. 혹시 작전 지휘권을…….”

“본 작전 지휘는 하람 경에게 온전히 맡기겠습니다. 저보다 지리에 밝을 테니까요.”

하람 중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티그리스가 지휘권을 달라고 난리를 피우면 굉장히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대신 저희는 붉은 이리 용병단 쪽에서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하람 중령은 곤란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아…… 그……. 붉은 이리 용병단은 최전방 선봉대 역할입니다. 차라리 3중대 쪽에서…….”

“오히려 제가 위험한 곳에 있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람 중령은 입술을 씹었다.

티그리스가 강한 줄은 알고 있긴 하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손님이다.

그것도 황도의 영웅이라 불리는 초특급 손님.

만에 하나 티그리스의 얼굴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는 순간 하람 중령은 그대로 모가지다.

하람 중령이 머뭇거리자, 티그리스는 하람 중령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지금 이런 쓸데없는 일로 언쟁을 나눌 시간은 없을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그럼 선봉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람 중령은 용병단으로 합류하는 티그리스를 보며 기도했다.

제발 저 잘생긴 얼굴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길.

***

이번 작전의 목표는 몬스터 웨이브 처리가 아닌 전방에 고립된 마법사들과 인부들의 구출이었다.

구출 우선순위는 마법사들과 2대대 대대장 도톤 중령이고, 그다음은 인부들과 군인, 마지막은 용병들과 부상자였다.

티그리스가 구출대에 합류한다는 소식에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갔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선봉에서 자신들을 끌어준다는 소식에 붉은 이리 용병들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용병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돈이고, 그다음이 바로 자기 몸이니까.

돈은 모르겠고 일단 티그리스가 있다면 죽을 일이 없을 것이라 확신이 든 것이다.

톰은 훌륭한 검사이기 전에 훌륭한 리더였고,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사기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톰은 자신이 들고 있는 뿔피리를 불었다.

뿌우우우우우-!

귀를 찌르는 뿔피리 소리가 잔뜩 흥분한 용병들을 톰에게 집중시켰다.

톰은 티그리스를 소개하며 말했다.

“오늘 전쟁의 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오늘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날이다! 앞만 보고 달려라! 그리고 검을 휘둘러라! 저 매독 걸린 몬스터 놈들의 후장을 따주는 거다!”

톰의 말에 용병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오우!”

“그럼 돌격!”

티그리스는 선봉에 서겠다는 말을 지켰다.

티그리스는 톰의 바로 옆에 서서 달렸다.

톰은 티그리스가 바로 왼편에 서주니 이리 든든할 수 없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나리와 함께 몬스터 사냥을 하다니.”

“앞으로 더 많이 있을 거다. 톰.”

“그럼 X발! 영광이죠. 하하하!”

톰도 잔뜩 흥분했는지 욕설을 내뱉으며 돌진했다.

티그리스는 시선은 전방을 유지하며 우측 후방에 있는 젊은 용병을 관찰했다.

좀 전에 ‘유격대장’이라고 한 것을 보아 붉은 이리 용병단 산하에 있는 유격대의 대장이라는 뜻이리라.

티그리스는 용병의 생리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한 팀의 대장 자리에 오르려면 웬만한 실력으론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력이 어떨지 궁금하군.’

다친 인부들과 용병, 군인들을 거슬러 올라가니, 피에 취해 추격해 오는 몬스터들을 만났다.

몬스터 웨이브답게 갖가지 종류의 몬스터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망키와 고블린 그리고 놀 등 소형 몬스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톰은 몬스터를 보자마자 바로 뿔피리를 짧게 세 번 불었다.

몬스터들과 충돌 직전이라는 뜻이었다.

톰은 뿔피리를 놓고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돌진 진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첫 충돌이다.

여기에서 밀리거나 뒤처지면 뒤따라오는 용병들이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고립되어 죽는다.

티그리스가 먼저 나설까 했지만, 톰이 제일 먼저 움직였다.

톰은 오러 고리를 가열차게 돌렸다.

티그리스의 기준으로 보면 거칠고 난잡했지만 그만큼 힘이 담겨 있었다.

톰은 티그리스에게 배운 바람잡이 검술 제1식 바람 돌진을 사용했다.

바닥에 코를 부딪힐 정도로 극단적으로 앞으로 치우쳐진 돌진이지만, 그만큼 빠르고 강력하다.

톰은 티그리스를 지나쳐 피처럼 붉은 안광을 비치는 몬스터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검을 난자했다.

-캬아아아아악!

톰은 말 그대로 몬스터를 부수며 전진했다.

톰의 칼날이 지나가는 곳마다 고블린과 놀들의 팔다리가 잘려 나가며 나뒹굴었다.

톰은 피에 미친 광인처럼 몬스터들 한가운데에 파고들어 칼춤을 추었다.

그럴수록 몬스터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숲을 떨게 만들었다.

‘대단하군.’

검술 하나만 놓고 보자면 ‘나쁘지 않다’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톰의 검식은 강력하고 빠른 만큼 거칠고 세밀하지 못했다.

그러니 몬스터들의 목을 바로 치지 못하거나, 상흔이 거친 것이다.

그러나 톰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선봉의 역할은 적을 와해시키고 자신을 따라오는 병력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다.

몬스터들의 비명이 하늘을 찌를 듯이 커지고, 전방이 몬스터들의 피와 살점으로 가득 차자 용병들의 사기가 급격히 오른다.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

톰은 그것을 심어주고 있었다.

‘굳이 내가 갈 필요도 없었군.’

티그리스와 트리샤는 진형을 유지한 채 톰이 남겨둔 몬스터들의 마무리를 했다.

톰이 지금처럼 앞을 난장판으로 만들면, 돌진 진형이 흐트러지지지 않도록 뒤에서 정리하는 역할도 중요하니까.

쉬이익-! 쉬익!

티그리스의 뒤를 따라오는 소라는 10개의 바늘을 사용해 옆을 치고 들어오는 몬스터들을 꿰뚫어 죽였다.

소라의 바늘이 각각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며 몬스터들의 목숨을 앗아가자, 그 현란함과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하는 용병들이 생길 정도였다.

그 현란함과 화려함에 비해 소라는 지루해 보였다.

‘대체 왜 이런 귀찮은 일을 하는 거지?’

소라는 티그리스의 실력을 알고 있다.

티그리스라면 이 주변에 가득 찬 몬스터들을 일격에 모두 죽일 수 있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귀찮고 지루한 길을 택하고 있다.

용병들을 안전하게 지키며 나아가기 위함인가?

일단 명령이니 따르긴 하지만 조금 답답했다.

티그리스는 중간중간 뒤를 쳐다봤다.

용병들이 뒤처지지 않나 쳐다보는 것으로 볼진 모르겠지만, 티그리스가 보는 것은 한 사람이었다.

레이피어를 든 젊은 용병.

젊은 용병의 레이피어엔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검을 쓰지 않아서 묻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쉬익-!

바람처럼 날아간 레이피어가 고블린의 눈알을 정확하게 뚫고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 과정이 마치 한 동작과도 같아서 굉장히 빨랐다.

그 때문에 레이피어에 피나 기름이 묻을 일이 없었다.

이어서 고블린과 망키, 놀, 그레이 울프 등이 달려들었지만, 사내는 정확하게 급소를 찔러 처리했다.

눈알이나 입, 목, 심장 등 뼈가 없는 연약한 부분만을 골라 찌르는 모습이 예술과도 같았다.

레이피어는 관리하기 까다로운 검이다.

얇고 긴 형태의 검이다 보니 뼈처럼 단단한 부분에 부딪히면 검 끝이 망가져 버리기 때문에 유지 보수가 힘들다.

그러나 저렇게 연약한 부위만 골라 찔러서 죽인다면 문제가 없다.

그 무엇보다 티그리스가 주목한 점은 바로 자세였다.

‘군더더기가 없다.’

용병들이 레이피어 검술을 배울 수 있을 리 없다.

애초에 레이피어 검술은 귀족들도 배우지 않아서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기에 어디서 배울 수도 없다.

하지만 사내는 검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본능적으로 아는 듯,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완벽한 찌르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 절묘한 찌르기에서 한 사내가 떠올랐고, 티그리스의 눈이 은은한 살기로 물들었다.

‘누군지 알 것 같군.’

저 어린 용병의 이름은 분명히 ‘루안’일 것이다.

훗날 길리온 왕국의 기사로 활동하며, 거대한 랜스로 황국의 병사들을 무참히 도륙 냈던 놈이었다.

티그리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없었던 이유는 놈의 악명을 알음알음 듣긴 했지만, 전장에서 마주치자마자 목을 잘라 죽였기 때문이었다.

‘죽여야 하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놈의 악명을 티그리스가 기억할 정도라면 훗날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특히 로타와 아르펨은 최근 많이 전력을 잃었다.

추가할 권속을 찾아 나서기 시작할 텐데, 놈들이 루안을 만나면 바로 권속화를 진행할 것이다.

그만큼 놈의 재능은 훌륭했다.

둘째, 루안의 과거를 티그리스가 모른다.

그래서 회귀록에도 루안을 ‘블러디 나이트’라고만 적어두었고, 그 이상 적지 못했다.

놈이 만에 하나 길리온 왕국의 스파이거나, 본성이 악한 놈이라면 다 성장하기 전에 죽이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웬만하면 품고 싶다.

저 아름다운 원석은 트리니티를 만나면 아름답게 세공될 테니까.

그때, 톰이 본대로 복귀했다.

톰은 몬스터들의 피로 샤워한 것처럼 온몸이 붉은색이었다.

회귀 전, 무너진 노르베르드 장벽 위에서 양팔을 잃은 채 울부짖던 톰의 모습이 떠올랐다.

티그리스는 동요하는 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싸울 때마다 피를 뒤집어쓰나?”

“하하! 이 정돈 돼야 몬스터 놈들이 지리고 도망치죠. 이런 모습 때문에 용병들 사이에서 혈귀라고 불립니다.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티그리스는 고블린의 목을 베며 말했다.

“그것보다 전방 800m에 목표가 있다.”

“그게 보이십니까? 전 몬스터들 때문에 안 보이는데요?”

“느껴지는 거다. 그것보다 오크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군. 몬스터 웨이브라면 오크들도 보여야 할 텐데?”

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오크 놈들이 코빼기도 안 보이네요. 통신을 받았을 땐, 오크 놈들도 섞여 있다고 들었는데요?”

티그리스는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 주술사가 어떤 존재인지 알 것 같았다.

“일단 어서 가도록 하지. 저쪽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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